너른 평원 부족은 조상들의 불꽃을 섬긴다.
성스러운 기름잔에 담겨 영원히 불타는 푸른 불.
태초의 사람 움키니가 추락한 벼락을 잔에 담아 부족들의 어둔 밤을 비추고 추위를 물렸다 전해지는 불이다.
이에 대대로 너른 평원 부족의 족장은 불지킴이를 겸한다.
불꽃은 신비한 힘에 대한 타 부족들의 경외와 평원 부족이 고수하는 전통 그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족장 지수비소는 근심이 가득했다. 너무 길게 이어지는 건기에 지쳐 죽어나가는 가축들 탓만은 아니었다. 근래 들어 서쪽 들판으로 나간 사람들이 자꾸 사라지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지 서른일이 지났다. 맹수들의 습격이라 여겨 보낸 젊은 사냥꾼들마저 사라지자 지수비소는 불의 힘을 빌어 부족의 미래를 점치기로 했다. 몇가지 약초와 짐승의 피를 태우자 악취와 함께 불꽃의 색이 검붉게 변했고 지수비소는 깊어지는 근심을 감출 수 없었다. 그건 피보라가 일 것이라는 징조였다.

사람이 사라지기 시작한지 서른 네번째 되던 날,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바람에 피비린내가 실려 불어왔다.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고 직감한 지수비소는 아들 이콰에를 시켜 노약자와 함께 마을에서 먼 동굴로 미리 피해 있으라 일렀고 자신은 마을 전사 몇과 함께 마을에 남아 평원의 동태를 살피기로 했다. 깊어가는 밤, 모닥불 타는 소리에 끼어드는 발굽 소리들에 일어나 소리의 근원지를 찾던 지수비소와 전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첫째는 끔찍한 괴물들이 마을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짐승에 인간을 접붙인 모양새의 괴물들 사이에 이웃들의 얼굴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제일 용맹하다고 자부하는 전사들도 이웃들을 몸에 감고 나타난 괴물들을 상대로 하기엔 턱없이 모자랐고 지수비소 홀로 남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수비소는 선택해야 했다. 괴물들을 마을에서 물리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 조상들의 땅을 지킬지, 불과 함께 도망쳐 새 땅을 찾아야 할지. 지수비소는 결심을 굳혔다.

지수비소는 혹여 살아남은 자신을 부족민들과 아들이 알아볼까 가면을 쓰고 불꽃이 담긴 잔 앞에 섰다. 결심을 굳힌듯 지수비소는 창끝을 잔에 담갔다.
불꽃의 의지가 창을 타고 지수비소의 안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불붙은 창을 들고 있던 손과 팔은 격통이 덮쳤고 창을 놓을 수도, 정신을 잃을 수도 없는 지수비소는 무릎꿇은 채 신음할 뿐이었다.
그런 지수비소의 뒤로 가젤의 목에 사람의 팔이 돋고 등에는 사냥꾼의 얼굴을 얹은 괴물이 섰다. 괴물은 광란하며 고통받는 지수비소를 덮쳤고 괴물은 지수비소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 채 조각났다. 이제 그 자리에는 아들과 부족민을 아끼던 자애로운 족장 지수비소는 없었다. 조상의 땅을 지킨다는 의지만이 남은 불꽃의 화신만이 남았다.

먼동이 튼다. 어린 족장 이콰에는 이제 아버지가 화신이 되었음을 들키지 않고 쉬게 해 드려야 하는 과업을 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