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

황녀가 뭐라고 대답했지만, 로베르트는 귀에 울리는 경적소리 때문에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요?”

이젠 자기 고함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로베르트는 입모양이라도 읽으려고 황녀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덕분에 황녀의 입이 다시 열렸을 때는 로베르트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빠아아앙-

한없이 높아져만 가는 경적소리와 함께, 화분에서 터져나온 빛이 로베르트를 감쌌다.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빛 속에서 로베르트는 황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고민했다.

“저한테 필요한 건 로베르트가 아니라 이한영씨라서요.”

로베르트의 손에서 떨어진 화분이 산산조각났다.


-19-
로베르트는 눈을 깜빡였다. 눈이 멀 것 같은 빛은 그대로였지만 경적소리가 그치자 좀 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자주 겪은 상황이었다. 경적소리와 밝은 빛, 그리고 커다란 트럭이 자신을 덮치는 꿈. 앞의 두 가지가 나왔으니 이제 트럭만 나오면 끝난다.

“빨리 해라.”

로베르트가 빛, 그러니까 트럭의 헤드라이트를 향해 말했다. 잠들기 전에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빨리 깨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말을 들었는지 갑자기 트럭의 불빛이 꺼졌다. 갑작스런 어둠에 적응하려고 눈을 있는 대로 찌푸린 로베르트의 시야에 트럭의 문이 열리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안녕.”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목소리였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로베르트는 이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이한영.”

이한영이 빙그레 웃었지만, 그 미소는 어둠에 가려서 로베르트에게 보이지 않았다. 로베르트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꿈속에서는 자신이 이한영이었다. 게다가 여기에는 이한영이 된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소녀도 없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로베르트에게 한가지 충격적인 가설이 떠올랐다.

‘내가... 소녀라니?’

황급히 바지춤을 점검한 로베르트는 자신의 가설이 틀렸음에 안심하며 다시 이한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한영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바지를 더듬는 로베르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 뭘 봐?”

이한영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기억으로만 봤을 때보다 많이 실망스러운걸. 역시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 가지고 판단하면 안 돼.”

로베르트는 그 말에 발끈했지만, 이한영이 재빨리 말을 끊었다.

“여기 서 있기도 뭐하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길가의 허름한 백숙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로베르트에게 익숙한 풍경이 나왔다.

“여긴......”

“그래.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지.”

이한영이 웃으며 말했다. 로베르트는 인상을 쓰며 창가로 걸어갔다.

“시커먼 사내자식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데. 그냥 기사학교 시절에 쓰던 방이잖아.”

밖은 한밤중이었는데 방에 들어오자 창으로 햇살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옆에 있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침대 머리맡에 있는 탁자를 바라봤다. 텅 빈 탁자는 로베르트에게 왠지 모를 공허감을 느끼게 했다. 마치 원래 그곳에 있어야 할 무언가가 빠진 것처럼.

“틀린 말은 아니잖아. 이 방에서 너와 내가 한 몸이 된 거라고.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덕분에 말이야.”

“희생이라고?”

앞의 말은 무시하기로 한 로베르트가 물었다.

“너도 봤잖아. 그 화분에 얼마나 많은 피를 줘야 했는지. 그저 네 정신을 지우고 나를 표층으로 꺼내는 데에만 열 명이 넘는 목숨이 필요했어. 그럼 멀고 먼 지구에서 내 정신을 추출해 너한테 주입하는 데는 훨씬 많은 목숨이 희생됐을까?”

로베르트는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오자 멍해졌다.

“화분... 지운다고?”

“그래. 그 화분에 걸린 마법은 심층에 잠들어 있는 다른 정신을 깨우고 기존의 정신을 삭제하는 거야.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비싸 보인다고 아무거나 덥석덥석 받지 말라고.”

그 말을 듣자 로베르트는 자신이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릴 수 있었다. 결국 그 처형식은 자신을 위한 것이 맞았던 셈이다.

“넌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로베르트가 알기로 이한영의 기억 속에는 마법이 없었다. 하지만 로베르트에게 주입된 후에 들은 것이라면 자신도 알고 있어야 했다.

“요즘 들어 부쩍 정신을 자주 잃지 않았어?”

이한영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언제부터인가 하면... 화분의 마법이 발동된 순간부터였다. 그 후로는 깨기만 하면 곧바로 기절했는데, 워낙 정신이 없어서 그냥 마법의 부작용이겠거니 하고 넘어갔었다. 이제 보니 부작용이 아니라 의도된 효과였던 모양이다.

“네가 기절해 있는 동안은 내가 깨 있었거든. 아리엘 황녀 쪽에서 나한테 이것저것 설명해 주더라고. 네가 자꾸 깨는 바람에 제대로 못 들은 것도 있지만 중요한 건 다 들었어.”

로베르트는 문득 자신의 감방에 찾아왔던 수염 덥수룩한 남자가 생각났다. 이한영에게 진짜 계획을 알려주는 것도 그 남자가 맡았었을까? 온갖 거짓 계획으로 자신을 안심시키는 동안 이한영에게는 자신을 죽일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을까?

“황녀가 왜 그런 일을 했냐 하면... 마나는 정신에 반응하는 거라서 내 정신을 주입하면 네 몸으로도 오러를 쓸 수 있대. 황녀의 목적은 그런 기사들을 모아서 세력을 키우는 거고. 그 다음에도 무슨 계획이 있다고 했는데 그때 네가 깨는 바람에 제대로 못 들었어.”

“왜 하필 나야?”

로베르트가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사실 이유는 로베르트도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은 고아였고, 별다른 연줄도 없었다. 자기가 사라진다고 해도 찾을 사람은... 엘리야는 찾아 주려나? 엘리야를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게... 무슨 거부반응? 그런 게 있어서 마나에 친화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의 몸은 쓸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 로베르트 네가 제국 전체에서도 찾기 힘든 특이 체질이라나 봐.”

로베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토록 희귀한 마나를 아예 다루지 못하는 체질의 주인공이 자신이란다. 그 덕에 기사학교에서는 쓸모없는 놈 취급을 받았는데, 기껏 발견한 쓸모가 죽어야만 발휘되는 거라니. 아무튼 이놈의 체질은 도움이 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데려왔더니 넌 그대로인거지. 그래서 극단적인 방법으로 선택한 게 그 화분의 마법이야. 아까 내가 트럭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너를 들이받았다면 화분의 마법이 완성돼서 네가 소멸됐겠지.”

말을 마친 이한영이 창가로 걸어왔다. 별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밖에는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한영은 갑자기 어디서 났는지 모를 꽃병을 꺼내더니 탁자에 올려놓았다. 꽃병에는 파란 제비꽃이 한 송이 꽂혀 있었다.

그 순간 로베르트의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졸업하던 날, 탁자에 처음 보는 파란 제비꽃이 놓여 있었다. 그때는 누가 가져다 놨겠거니 했는데 이제 보니 그 꽃병이 처음에 이한영의 정신을 불러오는 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예언은 아리엘 황녀를 벼랑 끝으로 몰았어. 황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힘을 키워야 했지. 결국 예언대로 가는 곳마다 파멸을 부르는 황녀가 된 거야.”

로베르트의 눈에 자신의 마을이 불타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 마을사람들도 모두 아리엘 황녀의 기사를 만들어내기 위한 제물로 희생된 걸까?

갑자기 커다란 경적소리가 울리며 창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뭐야? 아까 네가 트럭을 멈춰서 괜찮다며?”

로베르트가 경적소리 너머로 소리쳤다.

“아냐, 이건... 내가 마법의 규칙대로 널 죽이지 않아서 반대로 마법이 날 소멸시키려는 거야. 그러니까 너한테는 아무 피해 없어.”

이한영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경적소리 너머로 또렷하게 들려왔다.

“헛소리 그만하고 일단 여기서 나가자!”

로베르트는 이한영을 잡아끌고 문가로 갔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소용없어. 이미 마법이 주변의 공간을 제한해 놨을 거야. 그것보다, 내가 너 대신 죽는 거니까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로베르트가 발로 문을 걷어찼다. 나무문은 생각보다 약한지 발길질 몇 번에 부서졌다.

“소용없기는 무슨! 널 이대로 죽게 놔둘 리가......”

부서진 문틈을 본 로베르트가 말을 멈췄다. 문 너머는 밋밋한 콘크리트로 가득 차 있었다.

로베르트는 망연히 이한영을 돌아보았다.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이한영은 검은 실루엣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그가 헤드라이트보다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이한영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아리엘이 파멸로 치닫는 걸 막아 줘. 그게 내 부탁이야.”


-20-
레이나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레이나 님, 새로......”

문이 열림과 동시에 생겨난 사람 몸통만 한 주먹이 보고하던 남자를 강타했다.

“커헉!”

남자는 바닥에 엎드려 숨을 쉬려고 애썼다. 하지만 주먹은 남자가 편하게 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지 수십 개의 작은 주먹으로 쪼개져서 남자의 몸을 골고루 다지기 시작했다.

“파테... 으억!”

남자는 방어 주문을 외려고 했지만 주먹에 맞을 때마다 끊겨서 완성할 수가 없었다.

“내가 노크하고 들어오라고 했지, 이 새끼야.”

레이나가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걸어갔다. 잠시 차가운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던 레이나가 손을 내젓자 남자를 구타하던 주먹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래, 무슨 일이야?”

남자가 급하게 숨을 고르고 말했다.

“새로운 자의 파편이 사라졌습니다.”

“뭐? 그런 건 들어오자마자 말했어야지!”

레이나가 벌컥 성을 내더니 남자를 한 대 걷어차고는 나가버렸다. 손으로 배를 감싸며 몸을 웅크리는 남자의 등 뒤로 문이 꽝 소리를 내며 닫혔다.


-21-
툭.

뭔가가 로베르트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로베르트는 가만히 있었다. 주변 환경을 파악하기 전에는 정신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꾸욱.

로베르트의 옆구리에 더 강한 압력이 가해졌다. 이번에는 그게 상대의 발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로베르트는 여전히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지금처럼 바닥에 누워 있는 상태에서는 선제공격을 가하기 어려웠다. 다만 덮고 있는 모포는 이점이 될 수 있다.

“일어나, 임마. 야간 순찰 돌 시간이다. 황궁 기사단이라는 놈이 하루종일 자빠져서 잠만 처자고 말이야.”

로베르트는 목소리를 통해 상대의 거리를 가늠했다. 저 말에 따르면 여긴 황궁 기사단의 숙소 쯤 될 것이다. 즉, 황궁 안이다. 자신에게는 이보다 유리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일어나, 이한영!”

상대가 발을 뒤로 빼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발을 내지르는 타이밍에 맞춰 로베르트도 몸을 뒤집으며 상대의 다리를 잡아챘다. 상대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지자 로베르트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상대의 얼굴을 모포로 덮었다. 상대는 거세게 몸부림쳤지만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로베르트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지도 못했다. 로베르트가 허우적대는 상대의 팔을 피해 허리춤에 걸려 있는 칼을 뽑아 목에 겨누자 상대도 잠잠해졌다.

“이름이 뭐지?”

로베르트가 속삭였다.

“이봐,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우린 같은 편이야. 이럴 필요 없... 끄아악!”

로베르트가 한쪽 팔에 칼집을 내자 상대는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이름.”

“와... 왕웨이.”

“뭐야. 너도 지구에서 온 거야?”

로베르트가 낯선 이름을 듣고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같은 편이라고 했잖아. 아오, 겁나 아프네.”

로베르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리엘 황녀에게 안내해.”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이 자식아.”

로베르트는 왕웨이를 일으켜 세웠다. 왕웨이는 앞장서서 걸으면서 말했다.

“근데... 꼭 그렇게 칼을 들이대고 있어야겠어? 우린 같은 편이라니까.”

로베르트는 말없이 왕웨이의 등에 칼을 더 바싹 가져다 댔다. 왕웨이는 투덜거리면서도 걸음을 옮겼다.

숙소의 문을 나서자 횃불로 밝혀진 복도가 나왔다. 왕웨이는 미로처럼 얽힌 복도를 익숙하게 지나갔다. 아직 황궁 내부를 잘 모르는 로베르트로서는 왕웨이가 맞게 가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저 왕웨이가 자기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칼렌 님! 괜찮으십니까?”

운이 나쁜 건지 왕웨이가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순찰을 돌던 기사 두 명과 마주치고 말았다. 가벼운 차림의 왕웨이와는 달리 전신을 갑옷으로 감싸고 있었다. 이놈들은 상대하기가 좀 까다로울 것 같았다. 왕웨이는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별거 아니야. 훈련 중이니까 모르는 척 해.”

황궁기사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왕웨이의 오른팔에 난 상처로 향했다. 왕웨이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급하게 팔을 내렸다.

“이건 그러니까... 훈련하다가 좀 긁힌 거야. 정말 괜찮으니까 그냥 가. 모르는 척 하는 게 도와주는 거야.”

왕웨이의 팔에 난 상처는 누가 봐도 검상이었다. 로베르트는 성급하게 상처를 낸 것을 후회했다. 더 신중하게 행동했어야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훈련 조심히 하십시오.”

황궁기사는 연신 왕웨이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더니 이내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전투를 예상하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로베르트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저렇게 꿍꿍이가 있다고 광고하면서 인질을 무방비상태로 놔두고 떠나다니......

“쟤네 뭐하냐?”

“쟤네는 지구에서 온 게 아니라 원래 이쪽 세상에 살던 놈들이야. 한마디로 제국기사단장이 한번 거르고, 1황녀가 또 한 번 걸렀는데도 남은 떨거지들이라는 뜻이지. 그러니 우리 같은 진짜 전력에 비해 뒤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 않겠어?”

정작 그 진짜 전력은 적을 자기 주인의 침소로 안내하고 있었다. 왕웨이는 모퉁이를 한 번 더 돌더니 귀빈실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생각 없이 따라가던 로베르트는 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 갑자기 왕웨이의 왼팔도 그어버렸다.

“끄으브븝!”

로베르트가 소리를 지르려는 왕웨이의 입을 재빨리 틀어막았다.

“이 새끼가 살살 해주니까 누구를 등쳐먹으려고. 황녀 방은 귀빈실 위층에 있는 것도 모를 줄 알았냐?”

“으브븝!”

왕웨이가 뭐라고 항변하려고 하는 통에 그의 입을 틀어막은 손에 침이 잔뜩 묻었다. 로베르트는 왕웨이를 질질 끌면서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여기부터는 길을 아니까 이놈은 인질 역할만 해 주면 된다.

“멈춰라!”

황녀의 방에 도착하자 문 양쪽에 서 있던 기사 둘이 동시에 로베르트에게 창을 겨눴다.

“안 비키면 그어버린다.”

“읍! 읍!”

칼렌이 빨리 비키라는 듯이 소리쳤다.

“걱정 마십시오, 칼렌 님! 무슨 일이 있어도 비키지 않겠습니다. 명령하신 대로 끝까지 황녀님을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겠습니다!”

“읍! 으브븝!”

로베르트는 그들이 비키지 않자 약속대로 왕웨이의 목을 그어버렸다. 절대 칼렌이 자꾸 말을 하려고 애쓰면서 혀로 자기 손바닥을 핥아서가 아니었다.

목을 움켜쥐고 쓰러진 왕웨이가 입을 벌렸지만 흘러나오는 것은 꿀럭거리며 피가 역류하는 소리뿐이었다. 로베르트는 그를 무시하고 앞에 있는 기사들에게 집중했다. 어차피 아까 마주친 놈들이 동료를 잔뜩 이끌고 오면 살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자신에게 시간도 좀 벌어줄 수 있을 테니 이거야말로 윈윈 전략 아니겠는가?

“이 자식! 감히 칼렌 님을!”

잔뜩 화난 것처럼 말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기사들은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생각보다 침착한 놈들이거나 왕웨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경험상 로베르트는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이유야 어쨌든, 이놈들이 먼저 덤벼들지 않는다면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창처럼 긴 무기는 좁은 복도에서 휘두르기 어렵지만 반대로 뚫고 들어가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정석적인 대응방식은 대치상황을 끌면서 빈틈을 노리는 것이겠지만, 황궁기사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가롭게 대치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로베르트는 차선책으로 바닥에 바짝 붙어서 기는 듯이 달려들었다. 기사들은 로베르트의 예상대로 창을 아래로 향하고 찔러 들어왔다. 로베르트는 살짝 뛰어서 창을 피한 다음, 왼쪽 기사의 창을 발로 살짝 돌려 창날의 옆면을 밟았다. 갑자기 늘어난 창의 무게에 당황한 기사가 창을 잡아당기는 사이, 로베르트의 오른발이 창대를 밟았다. 지레의 원리에 따르면 기사가 유리해야 했지만, 로베르트의 체중 전부를 들어 올릴 힘이 없었던 기사는 결국 창을 놓치고 말았다.

“물러나!”

오른쪽 기사가 엄호하려는 듯이 창을 휘둘렀지만 이미 창의 간격 안으로 들어온 로베르트는 검을 왼손으로 옮겨잡고 오른손으로 창대를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창을 당기려던 기사는 로베르트가 창을 놓아 버리자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로베르트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허리를 베었다.

“아악!”

갑옷 틈으로 날붙이가 훑고 지나가자 오른쪽 기사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왼쪽 기사는 그 틈에 달려들려고 했지만 재빨리 돌아선 로베르트가 먼저 목에 칼을 박아 넣었다. 왼쪽 기사는 목에 칼이 꽂힌 상태에서도 핏발 선 눈으로 로베르트를 노려보았다.

“뭘 꼬라봐.”

로베르트가 발로 시체를 밀어내며 칼을 뽑았다.

“으아아아!”

오른쪽 기사가 동료의 죽음에 분노해 고통도 잊었는지 비틀거리면서도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로베르트는 그의 전우애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단칼에 동료가 있는 곳으로 보내주었다.

“진짜 왕웨이만도 못하잖아?”

제국기사단장과 1황녀가 자신을 이런 놈들과 똑같이 취급했다는 생각이 들자 로베르트는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그나저나 왕웨이가 말한 ‘진짜 전력’이라는 놈들은 아리엘 황녀의 방문 앞까지 왔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왕웨이를 생각한다면 어디 숨어서 벌벌 떨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그런 놈들이라면 수십 명의 목숨을 바쳐 가며 소환했을 리 없다는 생각에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찜찜한 건 찜찜한 거고, 어차피 지금 와서 돌이키기는 늦었다. 로베르트는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짧은 순간까지도 로베르트는 아리엘 황녀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바로 죽여야 할까? 대화를 시도해 봐야 할까? 대화를 시도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하지만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도 방 안에 서 있는 사람은 아리엘 황녀가 아니라 로베르트의 감방을 찾아왔던 수염 난 사내였다.

“어서 오게. 이한영이었나?”

수염 난 사내는 로베르트가 차라도 마시러 온 것처럼 태연하게 인사했다.

“차 마시지 않겠나?”

로베르트는 대답 대신 칼을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릴소는 역시 막장스토리죠. 다음 타자인 데스터치맞아볼래 님께서 어떻게든 잘 이어나가 주실 거라고 믿고 전 여기서 무책임하게 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