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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학교 서쪽에 위치한 광장은 여느 날과는 달랐다.

우선 평소에는 광장 중앙에만 높게 걸어둔 레인스터 제국의 깃발이 일정 간격으로 광장을 둘러싸듯이 설치되었다. 떠오르는 태양 문양이 새겨진 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그 밑으로 정복을 갖춰 입고, 열중셧 자세로 선 채 정면을 응시하는 수백 명의 예비 기사들이 열을 맞춰 서있었다. 그들의 맨 앞에는 각자 자신의 말에 올라탄 검술학교 교장과 각 학부의 학부장이 자리 잡았다.
교장의 연설이 시작될 때까지 로베르트는 묵묵히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머릿속에 침입한 아침의 기억, 이한영의 마지막이 신기루처럼 맴돌고 있을 뿐이다. 소녀, 다급함, 전력질주, 그리고 충돌.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와 죽음의 고통이 실제로 느낀 것처럼 머릿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우렁차게 울리는 검술학교 교장의 연설 소리가 로베르트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한영의 기억을 떨쳐내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연설이 막바지에 무르익었을 때였다. 기사로서 가져야 할 긍지를 강조하던 교장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제군들, 검을 들어라.”
광장 내에 검을 뽑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영광과 번영을.”
“영광과 번영을.”
붉은 오러가 교장의 검신을 타고 불타오르자 이에 호응하듯 저마다의 검이 영롱한 빛을 내었다. 아무 변화 없는 검 또한 존재했다. 오러의 재능이 없는 자들이었다.
무광의 검을 든 채 로베르트의 졸업식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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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이 끝나고 다른 학생들이 각자의 배정지로 떠나는 마차에 올라탈 무렵, 로베르트는 검술학교의 건물 내부를 거닐고 있었다. 오른손에 가볍게 쥔 편지에는 졸업 비용과 복무지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며 자신을 찾아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편지 겉면에 새겨진 이름은 검술학부 학장의 것이었다. 처음 검술훈련 때부터 자신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던 분이었다.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걸까?
고민을 하던 끝에 목적지에 다다른 로베르트는 가벼운 노크 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로베르트가 들어온 곳은 학장의 방이라기 보단 전시관에 가까웠다. 벽면 한쪽을 가득 메운 훈장, 칸마다 빼곡하게 고서적을 채운 책장, 적게 잡아도 10만 크로네는 할법한 무기들이 넘치는 진열장까지. 당장이라도 문패를 빼다 유명 귀족의 이름으로 바꿔놔도 될 법했다.
학장은 문 반대편의 창문가에 팔짱을 낀 채 기대어있었다. 누가 올지 알고 있던 것 같았다.
“앉게.” 학장이 입을 열었다. 로베르트가 착석하자 학장도 자리에 앉았다.
“졸업을 축하하네.” 학장이 입을 열었다.
“오러는 역시 안 되는 건가?”
“그렇습니다.” 로베르트는 무의식적으로 검을 만지작거렸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학장은 책상 서랍을 열어 문서더미를 꺼내 뒤적거렸다. 왕가의 문장이나 로베르트도 알아볼 수 있는 여러 귀족들의 인장이 문서 곳곳에 찍혀있었다. 학장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몇 장 정도를 더 넘기다 붉은 인장이 새겨진 문서에서 손을 멈췄다.
“시 고아원 출신이면 귀족과의 연은 없겠군?” 학장의 질문에 로베르트는 기억의 편린인 초록 빛 눈의 소녀가 떠올랐다. 마을이 불바다가 된 그 날, 주민들 대부분을 통제할 정도인 수의 사병들을 거느린 걸 보면 소녀도 귀족이었음이 분명할 것이다.
“……. 없습니다.”
“소문 같은걸 믿는 편인가?” 대답이 늦었지만 학장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아닙니다.”
질문을 끝낸 학장은 문서 밑 부분에 깃펜으로 자신의 이름과 로베르트의 이름을 적어 내밀었다.
로베르트가 받아든 것은 학장의 추천사가 적힌 황궁 기사단의 호위 업무 관련입단 신청서였다.
“그럼 아리엘 공주 호위 담당으로 해서 황궁 기사단에 입단하는 걸로 하면 되겠군. 거긴 귀족들이 꺼리는 곳이니 자네정도 실력이라면 충분히 합격할걸세.”
로베르트는 아리엘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왕국의 저주받은 공주라 불리는 제2황녀, 아리엘 레인스터에 대한 소문은 기사학교 내에서도 자자한 이야기였다.
“저, 질문이 있습니다.”
“세간의 소문은 신경 쓸 거 없네. 나쁘진 않으신 분이야.”
로베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러의 재능도 없는 저에게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지 궁급합니다.”
학장은 지그시 로베르트를 응시하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상하다고도 할 수 있고, 갖고 싶은걸 얻은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얼굴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자네의 재능이 아까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넨 최전방이나 변방 쪽에서 평생 말굽이나 닦게 되겠지. 그런 취급을 받게 만들고 싶진 않아서 말이야.”
학장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선 뒤 방 안을 거닐었다. 걸려있던 훈장들을 하나하나 만지작거리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쓰다듬기도 하고 전시된 무기를 손에 쥐어보기도 했다.
“난 말일세. 귀중한 걸 전시해서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네.” 학장이 나긋이 속삭였다.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찾아오게나. 만나서 반가웠네.”
학장은 로베르트가 들어올 때 처럼 창문가에 기댄 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로베르트는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어떻게 이어가실지는 （군머가서） 모르겠지만
여튼 다음 차례는 [문법존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