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관이 보낸 편지]공공（公共）의 적

나는 운전 중 늘 엠비씨 라디오만 듣는다. 아침 출근길에는 김현주의 에프엠 모닝쑈가 들리고, 저녁 퇴근길에는 오미희의 가요산책이 들린다. 김현주 방송은 아침에 듣기에 적절하지만 오미희는 부적절하다. 목소리와 말투가 느끼하고 공주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왠지 익숙하고 그립게 된 옛날노래들（내 이십대 초반에는 최신곡이었던...）이 나오기에 다른 채널로 달아나지는 않는다.

오늘 방송에 반가운 손님이 출연했다.

김민우

내가 예과시절 `사랑일뿐야`로 눈부시게 떠오르더니 `입영열차 안에서`를 남기고는 홀연히 군대가고 잊혀져 버렸던 내 동갑내기 가수. 제대하고 다시 몇번 얼굴이 나오는 듯 하더니 영원히 잊혀져 버리는 줄 알았다. 세인들이 말하듯 `군대가서 X된 케이스`이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던 이십대 초반의 시절, 꽤나 노래를 잘 불렀던 또래 가수의 쇠락을 목격하고는 이후 병역문제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빠져나가는 가수들을 보며 문득 문득 김민우를 생각했었다.

`너도 군대 빠졌으면 지금 좀 나았을까?`

그런데, 김민우를 생각하며 늘 떠오르는 감정은 `고마움`이었다. 비록 방위였지만 그냥, 말없이 남들처럼 군대를 가버린 그를 생각하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오미희는 네시부터 방송을 시작하지만, 내 퇴근시간인 다섯시 이후에 방송을 듣기 시작해서 그가 왜 나왔는지, 요새 뭘 하는지는 다 잘라 먹혀 내용을 알 수 없었지만 무척이나 반가왔다. 동시에 한 남자가 떠오른다.

`스티브 유`

눈빛으로 떠올라 거액을 벌어버린（소문엔 30억이란다...） 행운남. 현역생활도 못할 정도로 심각한 허리디스크가 있으나 춤은 허리가 성한 나보다도 30배는 잘 춘다. 2년전 "난 2년뒤 군대 가겠어요!"라며 전 국민의 심금을 울리고 국군장병의 사기를 진작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그는 지금, 전 장병들에게 통렬한 똥침을 찌르고 있다. 지금은 외국인이 되어서 더 이상 뭐라고 하기가 민망하지만...

나도 군대에 왔기에 군을 면제받은 동기들보다 의학적, 사회적으로 계속 처지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있다. 그나마, 운이 좋아서 시설도 괜찮고 공부하며 환자도 볼 만한 수도병원에 와 있기에 그게 덜하다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동기나 후배들은 최전방이나 후방의 부대 의무실에서 청진기 하나로 장병들을 돌보고 있고, 산간 벽지의 보건지소에서 지역 주민들을 보살피고 있다. 3년 동안이다. 내가 군에 와있는 동안 내 여자동기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어엿한 병원의 내과과장이나 개인의원의 원장님으로 지내고 있지만, 군에 온 동지들은 여전히 `군의관`이나 `공보의`라는 어정쩡한 신분으로 버티고 있다.

`억울해?`

많은 이들이 묻는다. 대답도 크게는 두 부류이다.

"억울하고 분해서 못살겄어..." 라거나

"그나마 군대시절마저 없으면 내 인생에 언제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 보겠니..." 가 대부분이고,

가끔

"크아앗! 군대는 내 체질이야! 이제서야 내 고향을 찾아 부렀써!" 라는 엽기남들도 있지만 대체로 병역의 의무에 대한 회한을 가지고 있음에는 대과가 없다.

그나마, 편하고 대접받는 군의관으로서 지내는 것도 이러하거늘 온갖 고생과 수모마저도 묵묵히 감내해야 하는 일반 병사들이야 오죽할까.

요즈음에 군대오는 사람들 중에는 참 잘난 사람들도 많다. 알만한 대학 다니다가 온 학생들도 많고 사회에서 일하다가 온 사람들 중에도 꽤 똘똘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확실히 군생활 하는 것을 봐도 규모가 있고 재치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한달 먼저 온 상급자가 시키면 찍소리 못하고 해야하고 중대장이 시키면 연병장에 50cm넘게 쌓인 눈도 한나절 안에 치워야 한다. 내무반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한 병사가 감기에 걸리면 삼일 안에 걸린 놈과 안걸릴 놈이 판별이 나고 옴이라도 돌면 담요 털고 말리고 전투복 빨고 난리도 아니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식판에 밥 받아 먹고 설겆이하고 가끔은 찬물로 목욕도 해야 한다. 여자친구는 일찌감치 정리하고 들어오는 아이들이 많고, 집에 전화 한 번 해보기도 만만치 않다. 무슨 죄를 지어서? 아무 죄도 없다. 그저 나라를 지킬 나이가 되어서 나라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런 고생에는 배운 것의 차이도, 가진 것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군에 오면 고생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일반 병사의 경우 이게 2년이다.


외래 진료를 하다보면 대도시 지역의 부대에서 오는 병사들인데도 행색이 말이 아니다. 청진이라도 할라치면 겹겹이 쌓인 복장을 해체해야 하고 정체 모를 먼지가 풀썩풀썩 날리며 재채기가 나온다. 그나마 따뜻한 대도시의 병사들의 그 서글픈 코스튬을 보면서, 요즈음 뉴스에서도 늘 추위로 챔피언을 먹는 재작년 백골부대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겹겹이 둘러 입고 콧구멍에 고드름 매달고서 경계근무를 서던 약관의 청년들. 그 한없이 어리게만 보이던 아이들이 우리나라를 지키고 있다는 현실이 문득 비장했다.

스티브 유. 뭐... 군대 안 갈 `능력`이 있어서 안가는 것, 뭐라 말하기도 좀 그렇다. 사람이 잘나서, 눈빛이 잘나서 수많의 빠x이들의 우상이 되어 즐거운 청춘을 보내고 있다. 아빠, 엄마가 자동차 만들어 팔고 환자진료하고 애들 가르치고, 가끔은 사기치거나 도둑질해서 번돈으로 그의 판을 사주고 그가 나오는 광고를 봐주고 콘서트를 가준다. 이제 그는 그렇게 번돈으로 미국에 세금을 낼 것이다. 미국에서 전쟁이 벌어질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미국이 원하면 그 나라의 병역임무도 수행해야 한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겠지`라 생각해도 괘씸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눈먼 빠x이들은 다른 오빠들이 지키고 있는 이 나라에서 여전히 그 미국인을 향해 `옵빠`를 외치고 있다.

작년에 수도병원에 유승준이 신체검사를 받으러 왔었다. 수도병원의 자랑거리인 자기공명촬영장치（MRI）에 누워있는 모습이 연예가 중계를 비롯한 방송화면에 넘실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실제로 추간판 탈출증（디스크...）이 관찰되었고 등급판정 규정에 의해 당당히도 공익근무요원으로 판정을 받아버렸다. （*근데... 그 추간판 탈출증이라는 것이 아무 증상이 없는 사람도 MRI 찍으면 간혹 나온다. 돈 있으면 찍어보시라. 혹시 `재수 좋게` 있을지 아는가?） 그러나, 공익판정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나보다도 30배 춤을 잘 추었고 돈도 여전히 잘 벌었다.

생각을 해보자.

국민학교 도덕시간부터 배우고 들은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발뻗고 자는 것은 저 북쪽에서 콧구멍에 고드름 매달고 지뢰밭 사이를 누비며 휴전선을 지키는 `군x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뭐... 잠수함은 가끔은 꽁치그물에 걸리거나 택시 운전사가 잡기도 하고 괴선박은 일본해군이 알아서 침몰시켜주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런 건 아직까지 기술과 돈이 안되어서 그렇다 쳐도 이산 저 골짜기 사이사이를 지키고 있는 것은 미군도 아니고 포토캐논이나 미사일 터렛도 아닌 바로 우리의 `땅개`들이다. 당신의 오빠, 동생, 아들, 가끔은 남편이나 아빠란 말이다. 어릴 때부터 군인아저씨 덕분에 잘 자라왔고, 늙어서도 군인총각들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게 될 가능성이 많은 이 나라이다. 그러나, 덕을 보기만 하고 빠지겠다는 것은 엄연한 도둑놈이다. 나라를 지켜주는 사람들의 덕을 본 사람들은 분명 자기 몫만큼은 나라를 지켜야 한다. 이 당연한 사실이 당연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나라가 지금 어떤가. 군대 뺀 것을 자랑하는 인간들이 엄연히 밥을 먹고 있는 나라이다. `능력 있고` `요령 있는` 부모 만나서 군대 안 간 것을 낙으로 아는 썩어빠진 인간들이 활개치는 나라이다. 수많은 청춘들이 몸의 이상을 갈구하며 빠질 구멍을 찾아 헤매고, 군대 빼려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돌아와서는 `요령 없는` 동생들이 지켜주는 나라에서 거들먹거리며 살 것이다. 그 꼴을 엄연히 많은 동포들은 지켜봐야 할 것이고 다른 수많은 스티브 유들이 생겨난다면, 현역 복무가 영광이 아닌 추레한 의무일 뿐인 나라에서 맘 편히 살아갈 자신이 있는가. 군 장병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복무기피를 부추기는 분위기의 단초라도 던졌다면 스티브 유는 반역행위에 이적행위를 자행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희재, 남희석이 다녀왔고 이훈이 가있는 군대를 스티브 유가 안간다고?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가 사회적인 주목을 받는 것은 나무랄 수 없다. 그들은 사회적 광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날과 달리 지금의 광대는 부와 명성을 소유하기에 사회적 우상으로서도 나무람이 없다. 따라서, `2년 간의 공백이 끼칠 손해... 어쩌구...`가 국방의 공백보다 무거울 리는 없거니와 미국서 달리 할 것도 없어 보이는 스티브가 여전히 내 조국의 단물을 쪽쪽 빨겠다는 의지가 굽힘이 없어 보이기에 더욱 심기가 상하는 것이다.

나 지금 화났냐구? 응. 무척 화났다.

얌체들이 득실거리고 행세하는 이 조국에 무척이나 화가 나있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들이 묵묵히 나라를 지키고 있다. "남자라면 군대를 가야죠!"라는 청년들이 아직도 많다. 천식으로 콜록거리면서도 전역을 권하는 내게 오히려 "그냥, 마치고 싶습니다."라며 오히려 민망하게 만드는 남자들이 이 나라를 지키고 있다.

김민우가 새 판을 낸다면 당연히 사 줄 것이고（워낙에 노래를 잘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행여 군대 뺀 것을 자랑하는 인간들이 있다면 그 사람과는 깊은 일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다.

군복무가 영광이고 복무기피가 수치인 당연한 사실이 왜 지금은 낯설기만 할까?

당연한 것이 당연한 나라. 나는 그런 조국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