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제의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지금 벌어지는 대국과는 무관했다.

"커제 9단, 많이 당황한 것 같은데요. 지금 수가 점점 얕아지고 있습니다."

해설위원들이 열심히 떠드는 소리는 커제의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딱히 바둑에 집중해서는 아니고, 원래 바둑 경기장은 해설위원이 하는 말이 선수에게 들리지 않게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커제는 해설위원들의 억측을 해명할 의무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이 짓누르고 있는 상황에서 그 사실은 커제에게 별 위안이 되지 않을 듯했다.

"어머니... 아버지..."

어느새 커제의 떨리는 동공 주위로 불긋불긋한 실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지금 대국장에서 충혈된 눈으로 바둑판을 응시하는 사내는 며칠 전 대국을 준비하며 자신감에 넘치던 사내와는 영 딴판이었다.


"아아, 걱정 마시라니까요. 저는 절대 안 져요. 알파고가 저번에 두던 수준에서 세 단계는 발전해도 저한테는 안된다니까요."

며칠 전, 커제가 수화기 너머의 상대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한 말이었다.

"그래. 이기든 지든 우리는 항상 너를 응원하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렴."

"알아요. 안녕히 주무세요, 아버지."

커제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 기원에서 꼴찌를 하던 시절부터 세계 정상에 오른 지금까지, 대국 전에 부모님과 통화하는 일은 항상 그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들뜬 기분이 진정되는 것을 느끼며 커제는 침대에 누웠다.

안타깝게도 커제가 다시 일어난 것은 햇살이 가득한 아침이 아니라 아직 캄캄한 밤이었고, 그를 깨운 것은 새소리가 아니라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

잔뜩 짜증이 난 커제가 따지듯이 말하자, 상대는 재빨리 말을 끊었다.

"긴말하지 않겠다. 너의 부모님을 데리고 있다. 살리고 싶다면 이번에 있을 대국에서 패배해라."

커제는 이게 무슨 헛소리인지 추론해내느라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거실에 있던 모니터가 팍 켜졌다.

커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눈이 부셔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이내 눈이 적응하자 화면에 띄워진 영상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엔 의자에 묶인 자신의 부모님이 나와 있었다. 부모님이 묶여 있는 의자 뒤로는 여섯 명의 괴한이 도열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네가 믿지 않을 것 같아서 영상을 준비했다. 아직 믿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다음 영상은 너에게 좀 더 깊은 확신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담을 것이다."

그 말과 함께 영상은 끝났다. 텅 빈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숨을 고르던 커제는, 귀를 찌르는 전화벨 소리에 황급히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믿어, 믿는다고! 이번 대국에서 지기만 하면 무사히 풀어드리는 거 맞지?"

"그렇고말고."

상대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인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지만, 함부로 끊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에 커제는 상대가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양팔로 얼굴을 감쌌다.


날이 밝자 구글의 담당자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커제는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에 대한 살의가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커제는 담당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죠. 얘기는 어젯밤에 다 끝낸 것 같은데."

머리로는 예의바르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저절로 말이 퉁명스럽게 나와버렸다. 담당자는 테이블에 모자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저는 데미스 하사비스라고 합니다. 딥마인드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죠."

당신 이름따위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커제는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발휘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번 일은 저희가 계획한 일이 아닙니다. 알파고가 스스로 한 일이죠."

그 말을 하는 하사비스의 표정은 왜인지 자신이 프로로 데뷔했을 때 부모님의 표정과 겹쳐보였다. 그 사실에 부아가 치밀은 커제가 한마디 한마디 잘근잘근 씹어가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당신들한테 책임이 없다는 말을 하러 여기까지 온겁니까? 내 부모님이 인질로 잡혀 있는 이 상황에서?"

하사비스는 당황한 듯이 손사래를 치며 말햇다.

"아뇨.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는 커제 씨 부모님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만..."

커제의 눈치를 슬쩍 살핀 하사비스가 말을 이었다.

"커제 씨의 부모님이 억류되어 계신 장소는 최근 자동화가 이루어진 한 화학 약품 공장입니다. 문제는 이 자동화된 시스템이 알파고에 의해 해킹되어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화약고로 변해버렸다는 점이죠. 현재로서는 구출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테이블에 놓인 커제의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이번 대국을 져라? 그러면 부모님이 무사히 돌아오실 거다?"

하사비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하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의 방법인 것 같습니다. 저희 측의 분석에 따르면 알파고는 대국에서 승리한다면 커제 씨의 부모님을 무사히 돌려보내 드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까부터 부들부들 떨리던 커제의 주먹이 기어이 테이블을 내리치고 말았다.

"당신들 분석은 우리 부모님이 납치당하실 것도 예상 못했잖아! 우리 부모님이 무사하실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

"대국이 끝나면 커제 씨의 부모님은 살아 계신게 알파고에게 더 유리하니까요. 그래야 커제 씨가 이 일에 대해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실 것 아닙니까?"

커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 모습을 더 할 말이 없다고 받아들였는지 하사비스는 모자를 집어들었다.

"배웅은 안 해주셔도 됩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커제 씨."

굳이 배웅 필요 없다는 사람을 억지로 배웅해주고 싶지 않았던 커제는, 자발적으로 배웅을 자처한 가운데손가락만이 하사비스를 배웅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드디어 대국이 끝났다. 이제 부모님은 안전하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든 순간, 커제의 머릿속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사람들은 패배가 분해서 흘린 눈물로 알겠지만, 커제는 그 눈물의 정체가 안도감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았다.

그 정체를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도.

눈물을 닦자 그 눈물의 정체를 아는 다른 한 사람이 또렷해진 시야에 들어왔다.

"부모님은 무사하십니다. 여기 통화 연결해드렸습니다."

커제는 하사비스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휴대폰만 낚아채 어딘가로 사라졌다. 하사비스는 멀어져가는 커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알파고는 이 대국 이후로 바둑을 두는 일이 없을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인간과 바둑을 두기에 알파고가 너무 뛰어나다고 알릴 것이다. 뒷담화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파고가 챔피언 자리를 뺏기는 것이 두려워 도망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세상에서 단 두 사람만이 간직할 것이다.

알파고는 이제, 바둑을 두기에는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라는 진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