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있어 삶은 어긋난 천칭이었다. 아무리 기울이려 애써봐도 꿈쩍도 않는 저울이었다. 부모의 돈, 부모의 권력, 부모의 인맥. 자라면서 그는 깨달았다. 그가 얻었다고 생각했던 모든것들은 단지 부모에게서 나왔을뿐이라는 것을.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았다. 부모의 것이면 어떤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신은 수혜자라는 것이며, 아무 대가없이 그 달콤함에 취해 남들을 내려다보며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점차로 무기력해졌다. 수렁은 안락의자처럼 편안하게 몸을 감쌌고, 하여 그는 벗어나오기보다는 그 수렁이 그를 질식시키길 기다렸다.

'나도 뭔가 하고 싶다. 무언가가 되고 싶다.'

학교생활의 막바지에 들어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개화하기 시작한 자아는 기형아나 다름없었다. 황당할 정도로 비대한 에고를 받치기엔 그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무능력했다. 공부, 체육, 음악, 요리. 그 어디를 살펴봐도 절망스러웠다. 용의 머리가 되기는커녕 지렁이 꼬리가 되기에도 벅찼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말뿐인 생각을 하며 그는 자조했다.

그는 방에 틀어박히게 됐다. 세상과 단절하게 됐다. 원하는 모든것은 방에 있었고, 그는 남들과 겨루기보단 그들을 깔아뭉개는 것으로 에고를 충족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열등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때였다. 그가 처음으로 글을 쓰게 된 건. 수십, 수백권의 라노벨, 수천 편의 애니를 보며 구축했던 추잡한 망상을 토해내듯 노트에 써갈겼다. 나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 나라면 그 여주를 놓치지 않았을 텐데. 타인에게 못다 푼 우월감을 이제는 가상의 캐릭터들을 상대로 풀기 시작했다.

-오옷 ○○상 잘 썼다는...
-모에에에엣-!

자기와 비슷한 부류들이 모이는 곳에 올리니 반응도 제법 좋았다. 비록 읽어주는 사람은 적었지만 그의 자신감은 날이 다르게 커져만 갔다. 이제 이걸론 모자랐다. 그는 날고 싶었다.

'무판게라... 뭐, 이쯤이야.'

그는 글을 하나 올렸다. 최대한 겸손하게. 하지만 내심 기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정도면야. 자기는 이미 고정 독자도 있는 몸이란 말이다. 이런 촌구석쯤이야.

-좆병신 새끼 이걸 글이라고 썼나.
-혹시 정자 부캐?

하지만 돌아온 건 냉혹하기 짝이 없는 비난이었다. 옛날의 공포, 그 무기력함. 열등감이 금방이라도 자신을 어두컴컴한 방으로 채갈 것만 같았다. 등짝은 금세 식은땀으로 축축해지고 파랗게 질린 입술에선 핏줄기가 흘렀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 포기할 수도 없었다. 글은 그에게 있어 모든것이었다. 이제 이게 아니면 없다. 이것만이 내가 가진 유일한 재능이다. 그는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가 공모전에 출품하겠노라 허풍을 떨었을 때, 작품은 쓰지도 않고 허랑방탕하게 롤만 했을 때, 출품작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무서워 겁을 먹었을 때.

분명 글재주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재주였지만 그것이 결코 타인보다 뛰어나진 않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