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근본으로 삼는 것은, 최초로 가을걷이를 하던 이래부터 이어져 내린 전통이었다.
가을걷이를 하는 어느 때에 정착을 시작해 자손들의 뿌리를 잇는다.
자손들이 살아오며 땅을 가꾸어놓아 다음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을 한다.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도 한다.
거기에서 파생된 것이 도구였다.
손으로 일일이 뜯는 것보다 낫을 만들어 빠르게 줄기를 베어내는 것이 더 좋았다.
손으로 일일이 껍질을 까는 것보다 탈곡기로 껍질을 까는 것이 더 좋았다.
도구가 발전함에 도구에 일을 전념해도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잉여 곡식이 생겨났다.
물론 처음에는 이 잉여 곡식을 저장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것을 다른 것과 교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곳 물건을 사고 파는 상인이 발전할 수 있는 텃밭이 되었다.
도구를 만들어 팔아 곡식을 얻는 사람들은 당연히 상인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도구만을 만들어서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곡식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수공업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수공업자와 상인들은 서로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의 모임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길드였다.
이 길드는 어느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어린 영주가 다스리는 곳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여기에는 수공업자와 상인의 비율 가운데 상인의 비율이 높은 메이라는 길드와 상대적으로 수공업자의 비율이 높고 상인의 비율이 낮은 카메오란 길드가 이곳에서 가장 대표적인 길드였다.
메이라는 길드와 카메오라는 길드는 서로 친근한 사이었지만, 기술의 발전이 남다른 카메오와 상업의 기술이 남다른 메이는 점차 서로의 방향성이 짙어갈수록 멀어져 갔다.
그리고 메이 길드에 새롭게 수장이 된 모남과 카메오 길드의 수장이 된 바름이었을 때는, 메이 길드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카메오 길드는 한창 주춤거리던 때였다.
본래 어떤 발전이 없어도 계속 지속되는 상업과는 다르게 기술은 어느 때에 제동이 걸리면 그 자리에 꾸준히 멈춰버리는 특성 때문이었다.
결국 카메오 길드에 있던 수공업자들이 메이 길드로 갈아타는 사태가 발생했다.
메이 길드는 이런 것을 환영했다. 그러나 카메오 길드는 그것을 엄중히 차단토록 노력했고, 메이 길드에서 그 사람들을 받아주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모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카메오 길드에서 메이 길드를 통제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수공업자들도 보는 눈이 있다면 어느 길드가 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인지를 판단하고 갈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껏 눈에 띄는 발전이 없던 카메오 길드에 실망해서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십니까? 다섯 손가락에 얼룩을 찍어 여기에 들어오고자 한다는 것은 엄연히 계약에 동의한다는 약속입니다. 그것을 어길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그만 가십시오.”
그러면서 자신들의 발전을 위해서 수공업자들이 더 들어오는 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상인들 특유의 자본력을 이용해서 대우조차 각별히 신경을 쓰는 바람에 굳이 카메오 길드가 아니더라도, 이름이 있는 수공업자들은 모두 카메오 길드보다 메이 길드로만 향하는 것이었다. 이에 바름은,
“이렇게 되어버렸다가는 우리 카메오 길드는 산산조각이 될 것입니다.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수공업자들의 수가 나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바람에 오히려 상인들의 숫자가 많아지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었다가는 다시 이 땅에서 카메오라는 이름으로 도구를 떠올리는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카메오 길드의 존속이 아니라, 메이 길드라는 거대한 길드가 작은 길드들을 헤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일입니다!”
라고 길드에 남은 사람에게 말하며 직접 메이 길드에 찾아갔다.
그러나 모남은 헛소리 하지 말라고 된통 핀잔을 주었던 것이다.
바름은 자신의 양 어깨에 카메오 길드의 존망이 달렸다는 생각과 다른 길드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에 불철주야로 노력했으나,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한 것임을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이에 어떻게 회유라도 하려는 속셈으로 모남을 불렀다.
“전날부터 여러 번 신세진 일이 있으니 오늘 저녁은 저희 집에 찾아와서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오로지 그것이 목적인 글이었으나, 모남은 자기가 뭘 한 것이 있나 곰곰이 생각해봐도 영 잘 한 일이 없었기에,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그곳에 찾아갔다. 바름은 술을 권했고 모남은 마셨다. 모남은 술을 못한다고 하면서 사양하려 했지만, 바름은 그런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술을 권했다. 마침내 모남은 술에 떡이 되었다.
바름은 모남이 깊게 취한 것을 확인한 다음, 미리 적어둔 종이를 꺼냈다.
길드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재분배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미리 준비해둔 얼룩을 모남의 손가락에 묻히려는 순간.
모남은 정신을 벌떡 차리며 말했다.
“이런 간악한 흉계를 짜고 있을 줄이야!”
“아니, 이것은........”
“변명 집어 치우시오! 자신의 노력으론 해결 되지 않아 이런 식으로 이용할 속셈이셨소?”
바름은 종이를 들지 않은 왼쪽 손을 움켜쥐며 말했다.
“나는 우리 길드를 위해 노력을 했소. 그러나 내 개인으로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소. 다른 사람들에게 내 의견을 피력해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마저도 외면했소. 내게 남은 것은 이것 뿐이오.”
“그렇다면 오히려 정진을 해서 공정한 방법으로 얻으면 되지 않소?”
그 말을 들은 바름은 크게 소리쳤다.
“상인들의 돈으로 기술을 빼앗아 간 것을 옳다고 한단 말이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에 움직이는 것이 사람의 생각임을 모른단 말씀이오?”
그러자 바름은 술을 따르던 병을 거꾸로 짚어들며 말했다.
“세상에는 돈으로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소. 개인을 조종하는 것은 상인의 돈으로 잘 해결했을지 몰라도, 지금 나를 해결 하는 것은 못할 게외다.”
그 모습을 본 모남은 의자에 완전히 얼어붙어 말을 꺼내기조차 힘들어보였다. 거꾸로 든 병에서부터 온 몸에 풍겨내는 그 살기가 모남을 압도한 것이었다.
“내가 이러는 것은 작은 길드들의 미래를 위함이고, 작게는 내 길드를 위함이오.”
“그건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힘겹게 말하는 모남에게 내려친 병은, 여러 번 같은 곳을 향해 떨어졌다. 바름은 곧 자신이 손에 들었던 병이 산산조각 나고, 핏물이 바닥에 새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바름은 자신이 죽인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듯, 태연스럽게 삽을 들고 북쪽 냇가로 걸어가 땅을 파고, 거기에 모남을 묻었다.
그것을 우연히 목격한 사내가 한 사람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바름이었다.
목격한 사내는 곧 길드로 달려가 그것을 말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메이 길드에 찾아가 이 일을 밝히는 날에는, 카메오 길드의 수장인 바름이 잡혀가는 것은 어떻게 된다고 해도 카메오 길드의 사람들은 자신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카메오 길드가 이 일을 모두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내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머리를 어떻게 굴려야 했다. 사내는 밖에 나가 그것을 보았던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묻히는 사람이 모남인 것을 몰랐더라면, 묻는 사람이 바름인 것을 몰랐더라면 이런 고민은 하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어둑한 밤을 서성이다 집에 온 그는 뒤척이는 잠자리 때문에 아내에게 핀잔을 받아야했다.
일찍 아침에 일어난 그는 과자를 보따리채로 사들고 나와 길가에 떠도는 아이들에게 과자를 하나 주며 노래를 가르쳤다.
“북쪽 냇가에 모남을 잠들게 한 것은 바름이 한 짓이래요.”
“잘한다. 다른 애들에게도 알리겠다고 약속하면 과자를 하나 더 주마.”
“진짜죠?"
보따리에 남은 과자는 하나도 없었고, 아이들의 노래는 거리에 가득해졌다.
모남이 오늘 아침에 나타나지 않은 것에 당황한 메이 길드 사람들은 그 노래를 듣자마자 곧장 북쪽 냇가로 달려갔다. 샅샅이 뒤져보니 부자연스럽게 흙이 솟아난 곳이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달려들어 손으로 쓸어내린 곳에는, 싸늘한 시신이 된 모남이 있었던 것이다.
메이 길드 사람들은 곧장 그 시체를 등에 업고 바름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메이 길드 사람들은 곧장 흩어져 카메오 길드부터 뒤지고 각각의 건물들은 물론 성문까지 뒤졌다.
아침 늦게 문을 열어두는 성문에서 앞으로 가기위해 품속에 돈을 내뱉은 사람은 보기 드문 것은 아니었으나, 뒤에 누군가 자신을 쫒아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의 사람이 보였다. 메이 길드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 당장에 목덜미를 잡아챘다.
그것은 바름이었다. 메이 길드 사람은 곧장 바름을 보자마자 끌어내어 거리 한 가운데서 서로 칼을 꺼내들어 찢어발긴 종잇조각으로 만들었다.
벌건 대낮에 사람이 죽인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인데다가, 죽이는 수법이 잔인하기까지 했다. 당황한 사람들은 곧 성을 찾아왔다.
늦은 아침에 달려온 사람들에게 걸어간 것은, 헐레벌떡 뛰어나온 집사였다.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들이닥친 것입니까?”
"오늘 점심 나절에......"
그 말을 들은 집사는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부관과 영주에게 급히 이 사실을 알렸다. 영주도 그렇고 부관도 어리둥절하고 맹했다.
한낮에 사람이 죽은 것은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 어떻게 종잇조각처럼 찢어발기는 여러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멘 정신으로 떠올리기에는 좀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집사가 혹시 실없는 농담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심리가 두 사람에게서 스쳤다. 그러나 집사의 눈은 진실성이 있었고 정문에는 들이닥친 사람들이 있었다. 영주와 부관의 모습을 보고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부관과 영주는 정문 앞의 모습과 소리를 느끼고 나서야 집사의 말이 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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