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보낼 수 없다는 답장을 받은 집사는 얼른 자신이 잘못 읽었는지 뒤로 돌려도 보고 앞으로 다시 바라보기도 했다.

“편지의 인장은 분명 아스트리가 맞아, 하지만 이런 식으로 거절을 하다니........”

집사는 입술을 살짝 씹었다.
또 한 번 돌려 봤지만, 거절한다는 글귀는 뚜렷하기만 했다.
집사는 곧 다시 팬대를 놀려 다른 곳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밀랍을 다시 녹여 인장을 갖추는 동안에, 팬 끝에 힘이 들어가 잉크 얼룩이 물방울처럼 옷소매자락에 튄 것을 미처 보지 못할 정도였다.

“부관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보십니까?”

집사가 아스트리에 보낸 편지를 들고 부관에게 공손히 물었다. 부관은 편지를 살폈다.

“명백한 거절로 보입니다.”
“일단 급한 김에 다른 쪽으로 보내봤습니다만, 소식이 찾아오겠습니까?”

부관은 턱 끝에 손을 비스듬히 받치며 시간을 보냈으나, 명백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혹시 우리들 쪽에 보낸 편지에 어떤 책 잡힐만한 구실이 있었던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건 없습니다. 속기로 쓰기는 했으나 형식에 맞추어 보냈습니다. 글씨가 뭉개지거나 못 알아볼 정도로 일그러진 것도 아닙니다. 미사여구도 적당히 보태었습니다. 뭐가 모자라서 그런 것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집사는 글씨체가 워낙에 세련되어 지나가는 눈으로 보아도 호감이 듭니다. 편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혹시 집안에 어떤 일이 발생한 것은 아닐까 싶은데...........”

부관은 다시금 턱을 받쳤다. 집사는 그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번에 분명 아스트리 가문에 누구를 꼭 보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까지 전했는데,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자 부관은 눈빛이 살짝 째졌다.

“혹시 다른 가문에게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 것은 아니겠지요?”

집사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고, 부관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기에 문제 있었습니다. 본래 기사들은 서로를 동료로 여기면서 경쟁자로 여깁니다. 명예를 귀이 여기는 가문의 기사이니만큼 여러 곳에 침을 발라 놓으면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집사의 얼굴은 부관보다 더 일그러져서는,

“그러면 방법이 정말 없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부관은 어떻게 할 방법도 찾지 못하고, 약간 체념하는 투로,

“또 모르는 일입니다. 집사의 글에 반해서 훌쩍 찾아올지.”

하고 애써 웃어넘기려는 말로 했다. 그러나 집사가 전날 웃었던 미소는 온데 간데도 없었다.
하인은 정원에 있던 낙엽을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해놓은 채로 있었다가, 지나가는 집사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낙엽을 더 깔끔하게 한다고 빗자루를 여러 번 더 놀렸다.
집사는 그만큼 우울해 있었다.
정원을 오른다리로 내밀었다가 왼다리로 내밀었다가를 반복하는 걸음에 하나하나가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그 걸음은 평소처럼 돌아왔다.
거닐던 정원에서 빠져나와 얼굴을 찬 물로 세수하고 영주가 있을 방으로 걸어갔다.
영주는 한곳에 둔 책들 사이에서 종이를 매만지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종이를 또 아래로 감추었다. 집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쉽게도 아스트리에서는 기사를 보내지 않겠다고 서면을 보내왔습니다. 다음에는 꼭 기사를 영입해 보겠습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 주십시오.”

집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영주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집사는 잠시 멈칫하며 몸을 일으키고 방 밖에 있는 복도로 나갔다.

영주는 또 사라지는 집사를 보며, 다시 종이를 꺼내들어 글을 천천히 쓰고 있었다. 새끼손가락만한 작은 글씨로 적는 글씨는 알아보기도 힘겨웠다. 그러나 글자 하나하나는 똑똑했다. 영주는 그런 식으로 펜대를 좀 더 놀리다가, 멈추었다. 슬쩍 창문 밖 정원을 바라보았다.

영주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종이를 여러 번 접었다. 그리고 찢었다. 직접 그 쓰레기를 들고 나온 영주는 복도를 천천히 걸어 정원까지 나섰다. 낙엽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기에 쓰레기를 다시 한 번 갈가리 찢어 낙엽들 속에 뒤섞어놓았다.
주위를 살피며 안으로 들어오면서, 부관이 있는 2층 까지 걸어가 태연스럽게 말했다.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부관은 서랍 속에 있던, 한 묶음으로 철해진 책을 주었다.

“어제 있었던 일입니다. 아래에는 어떻게 해결했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영주는 철해진 책을 들고 나섰고, 부관은 가벼운 차림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외날인 칼과 긴 창을 하나 들어 뒤뜰로 걸어갔다.
뒤뜰에는 너른 공터가 있었다. 앞뜰에 난 정원에 비해 허전한 모습이지만, 이 성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도 꽉 찰 것 같지 않은 곳이었다. 부관은 그곳에서 창을 들어 앞으로 찌르기를 하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기도 했다. 수평으로 허공을 갈랐다.

시간이 좀 지나 땀이 서리면 곧 검으로 바꿔 찔렀다. 옆으로 베고 위에서 아래로 갈랐다. 곧 다시 왼쪽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올려치고,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쳤다.

“후.......”

부관은 곧 돌아갔다. 부관은 이미 기사가 올 것이라는 데에 마음을 거둔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그 시간 새에 자기가 직접 영주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막중하게 와 닿았다.

그 불안의 작용으로 저지른 것이 이런 칼부림이었다. 또한 자기가 지금껏 했던 일에 대해서 다시금 돌아보는 감정도 느꼈다.
앳된 영주가 있기 전에도 성에서 부관으로 불렸었다.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이유만이 아니었다.
당당한 사람이 못 되어도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말자는 소박한 믿음으로 이곳에 살았었다.

부관이 가장 존경하던 사람. 절제를 하되 궁색하지는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 그에게서 하나둘 배워가며 어느 때에는 반 정도 업무를 볼 무렵이 되었을 도중에 고이 잠들어 자신의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한 사람. 그가 지금 영주의 아버지였다.


“시원하군.”

물로 자신의 몸을 씻어버리고, 탕에 들어가 고요히 잠긴 부관은 또 집사를 떠올렸다.
어떻게 보면 집사는 참으로 애달픈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정실로 얻은 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것이 저 어린 영주였고, 후실이 된 부인 사이에서 낳은 것이 집사였다. 나이는 먹을 대로 먹어 앳된 영주보다 10년 가까이 많은 나이임에도 참아 넘겼다.
그러나 퇴역이라는 이름으로 나간 기사들은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않은 앳된 소년에게서 눈을 돌렸다. 나이라는 것을 핑계로 나간 것이었다.

그때에도 집사는 꾹 참고 어린 영주를 도왔다.
글을 쓰게 하고 책을 읽게 해주었다. 그때 부관은 가끔 시간이 나면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 했는지에 대한 글을 정리해서 어린 영주에게 보내주었다.
가끔은 엉뚱한 일을 벌이는 이런 어린 영주에게도, 타일러주며 정답게 하기도 했다.
어떨 때는 화를 내며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그 행동에는 어떤 따뜻함이 기초가 되어 있었다.
부관은 그래서 집사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모르긴 몰라도 집사도 아마 부관을 비슷한 마음으로 여길 것이라.

부관은 옷을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갔다. 막상 이렇듯 떠올리고 보면, 이 모든 것이 움직이는 그림처럼 넘어갔다. 다음에 이것을 떠올린다면 오늘 일도 기억에 남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잠시 하고서, 내일은 오늘보다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라며 잠에 들었다.


일찍부터 성이 소란스럽게 되었다. 거리에 일어난 사건이 소란의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