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내게 처음 가르쳐준 것은 살인이었다. 나는 여태껏 사람을 죽여본 적은 없다. 그러니 아버지 입장에서 보건대 나는 불효자지만, 내 입장을 고려하자면 아버지란 내게 쓰잘데기 없는 것만 가르쳐준 사람이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거라곤, 사람을 죽이는 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번엔 얼만데."

"사, 삼백 쯤..."

나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좁고 칙칙한 갈색으로 장식된 방에서, 무릎을 꿇은 한 남자를 내려다봤다. 어쩌면 효자가 될 수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얼굴은 퀭하니 썩어있고 눈은 옴폭 들어갔다. 깡마른 몸은 덜덜 떨고 있지만 그건 그의 품행에 배인 것일 뿐이다.

"이걸로 처리하든지."

성의없게, 그를 벌레처럼 경멸하면서 손톱밑에 때 대신 낀 금을 긁어냈다. 후, 하고 털어내자 그는 동냥하는 거지처럼 지면으로 향하는 금 한 톨을 주으며 감격어린 눈으로 그것을 소중히, 때묻은 손가락으로 감싸쥐며 도망치듯 방을 떠났다. 금 한 톨에 삼백. 여기서 문제 하나 내 볼까? 금값이 비싼걸까, 돈이 똥값인걸까?

"그까짓 마약이 뭐라고."

여기까지 들었으면 대충 감이 왔겠지만 둘 다, 어느정도 맞는 얘기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금이라는 귀금속은 대재앙의 세상에선 얼핏 별 가치도 없는 짐덩어리라 보일수도 있지만 물가가 가장 크게 반영된 물건이다.

사치품의 의미로써, 물론 금은 가치있는 재화이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듣는 금속이 있고, 듣질 않는 금속이 있으니까. 햇지（Hedge）라고 불리는, 위험성에 비해 지나치게 흔한 생물은 이 근방에서 특히 많다. 햇지에게는 순도가 높은 금일수록 치명적이다. 그게 내가 이 도시에 있는 이유다. 가장 빛나는 무대에 서려면 제발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 배우의 숙명이듯.

"골드."

"어."

금（Gold）이라 불리는 나는 이 도시에서 몸값이 제일 비싼 남자. 손톱밑에 낀 금은 때 대신이고, 물론 다른 것들도 이래저래 변하긴 하지만, 이따금 실종되곤 하는 현실의 금은 미지의 통로를 거쳐 아마도 나에게로 오는 듯하다. 내 손톱 밑에 낀 금으로. 내 이름을 부른 두 번째 사내 역시 금의 관계로 나를 찾아와있다.

"금이 더 필요해."

"얼마나?"

"다수의 햇지가 미드나잇 웨이브에 포함됐다. 얼마 전 정견들이 쓸고 지나간 거리에 하필이면 대규모의 햇지 군락이 있었더군."

그는 나의 눈치를 여실히 본다. 신장이 2미터를 10센치 이상 넘기는 거구의 사내가 열일곱이 어울리는 가냘픈ㅡ상대적으로ㅡ체구의 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나는 심드렁하게, 금으로 마약을 사려던 남자에게 보낸 시선과 별다를 것 없이, 이 도시를 짊어진 남자를 깔보며 팔을 내밀었다.

"그래. 가져가.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

"고맙군."

그는 체질 탓으로 하얗게 샌 백발을 향유로 단정히 목덜미까지 넘기며, 경건하게 발치로 다가와 성은이라도 입은 듯 얇디 얇은 팔을 잡고, 쥐어 짠다.

퍽!

아니 정확히는 비틀어 뽑아낸다. 팔꿈치 아래로 사라진 부분이 허전하다. 고통도 있다. 물론, 내가 동화속 보석왕자처럼 아낌없이 주는 희생정신으로 미화될 성자나 의인은 아니지만, 단순히 참을 만 해서 그에게 이를 허락한 것이다. 단지, 그를 내리깔고 보는 내 시선에는 이 고통이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끔찍하지 않다고는 변명 못하겠으니.

"고맙다. 이 은혜는 꼭 보상하도록 하지."

"채무가 얼마지."

"이조, 오천삼백팔십사억이다. 그 밑으로는 부르지 말라고 했었지."

그는 그 사실을 말하고도 덤덤하다. 갚을 생각이 없는 것도, 그렇게 염치가 없는 인간도 아니면서. 진심으로 갚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조 단위의 액수에 동요하지 않는다. 그 배경엔 몇 가지 그에게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 첫째로 나는 그에게 독촉하지 않는다. 둘째로는 이자가 단리라는 점이. 그에게는 위안거리가 될 것이다.

"정확히는 부르지 말라고 한게 아니라 쌓지 말라고 했었지, 필립. 소심하게 왜 이래? 나도 나의 선함에 조금쯤 대접받아도 되는 거잖아, 대놓고. 티나게."

"그랬었지."

하지만 나에게는 위안거리가 없다. 이 건조하고, 고장난 자동차 라이트처럼 막막한 사내에게는 그런 걸 기대할 수가 없다. 몸으로 갚으란 말에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그럴 수 없다고 하며, 돈을 준비하겠단 말만 거듭하는 남자다. 물론 여지껏 상환은 한번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변태적인 몸을 원하는 것도 아닌데, 그는 독촉 받지 않는 것 이상으로 너무 꼿꼿했고, 그러고 있고, 앞으로도 똑같을 것으로 보인다.

"길드는 여전히 생각 없겠지?"

"레기온을 해체할 순 없다."

"네가 나온다고 해체되는 건 아니잖아."

"적어도 내가 떠난 순간부터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두려워하고 있지."

"그래서 필립이 떠나면 레기온의 난쟁이들은 원망을 할 테고? 마치 콩나무 타고 멋대로 가택침입한 얼빠진 미성년자 절도범처럼 말야."

"무슨 얘기지?"

"아냐. 그냥 내가 거위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였어."

말솜씨가 최악인데, 그럼에도 그와는 유독 말을 깃게 있는 걸 보면 나도 사람이긴 한 모양이다. 단지 그의 지위, 그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 하나에, 그의 말솜씨나, 전혀 내 취향히 아닌 커다란 사내라든가, 하는 조건은 접대시간에 별달리 영향력을 끼치질 못하고 있으니까.

"그럼, 가 봐도 좋아."

"고맙군."

그는 여전히 듣는 사람이 어떤 의도로 오해를 하고 기분이 상하든지 말든지 신경쓰지 않는 자세로, 갈색튀튀한 방을 거꾸로 걸어가 기분나쁜 소릴 내는 경첩을 찍소리도 못내도록 정중하게 문을 여닫았다. 그걸로 끝. 내 팔을 뜯어간 것이나, 그게 384억쯤 한다는 것이나, 그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듯했다.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익숙해진 한 손으로 과자 포장지 뜯기라는, 필수불가결적인 행위를 하면서, 입 안에 감자칩을 구겨넣고 TV를 보는 행위. 이거면 충분히 뜯겨나간 팔이 도로 돋아난다. 이 얼마나 편안한 삶이란 말인가?

"...제임스!"

"제임스, 말고, 골드는 여기 있는데."

"아무래도 직접 와 줘야겠다."

"아 왜 또."

가끔 이럴 때만 제외하면 말이다. 진짜 가기 싫은 티를 내며 필립 말고 그의 부관 노리에게 질질 끌려가는 나는 마치 송아지처럼 느껴진다. 아마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얼룩인데 날때부터 얼룩은 아닌 황소 송아지. 그런데 백반증으로, 어, 부분적 알비노 말이지. 그걸로 털이 군대군대 희어진 송아지 말이야.

"오늘은 어제보다 세 배는 많아."

"세 배?"

노리는 고개를 과도하게 끄덕였다. 아, 맙소사. 눈을 쓸어내렸다. 오늘 같은 날은 정말 싫다, 아니 정말 정말 싫다. 고, 말하고 싶은데. 오늘 같은 날이 없었다. 왜냐면 너무 많으니까. 왜냐면 노리는, 뇌에 이상이 생겨서, 그가 세 배라고 말하면 그의 뇌내에서 나름대로 규칙적으로 정립된 법칙에 의거해.

"노리 가라사대. 그의 삼은 이백사십삼이라던데. 기적의 수학자 등판하셨죠, 오늘 이 도시 끝장 아닌가요?"

"제임스, 제임스가 없으면 그렇지."

"그러니까 제임스 여기 없고 골드는 여기 있다는대도."

"제임스, 제임스?"

"그렇게 부르지 마. 나 한국인이라니까? 수학도 못하고 슈퍼마캣도 안하는데 코리안 맞단 말이야."

"으응, 제임스."

'다수의' 햇지라는 것이 어떻게 평소의 이백사십삼배가 될 수 있는지 필립에게 꼭 따져묻고 말 거야.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건물 사이 차량으로 골자를 세우고 시멘트를 들어붓고 그래도 모자라서 쓰레기까지 쌓아 완성된 우리의 자랑스런 성벽 '캐싱턴'에 오른 날.

"햇지는 일도 아니잖아, 아니, 야, 많은게 문제가 아니잖아!"

필립이 사라졌다.

"야아아아아!"

타타타타, 자정의 구름낀 밤하늘을 수놓으며 점점 멀어져가는 헬기에서 반쯤 몸을 빼내고, 필립은 내게서 뽑은 팔을 흔들어보이며 윙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