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구. 어쩌다가 여기 오게 되었나 기억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고,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늦은 밤 퇴근길, 스마트폰에 코를 쳐박고 걷다가 맨홀에 빠졌다. 그런데 이 상황은 굉장히 이색적이다. 내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 걸까?

하수구, 이곳의 기운은 그냥 내가 살던 세계 같다. 그 세계 속에서 좀 구역질나고 무서운 공간일 뿐이다. 그런데 어쩜 바퀴벌레와 곱등이가 사람만하고, 시궁쥐는 사람보다 더 큰 것일까? 맨홀 안의 세계는 내가 살던 세계와 크기가 같다. 내가 작아진 것이 아니고, 세상이 커진 것도 아니다. 그저, 여기 살던 생물들이 커진 것이다.

공기가 축축하다 못해, 습기를 바탕으로 공기를 살짝 푼 것 같은 지독한 악취는 내가 상상하던 시궁창보다 더한 정도를 넘어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 예컨대 실험이라든지 아니면 화학물질의 유출 같은 문제가 생겼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을 하필이면 내가,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알아버렸단 말인가? 왜 하필이면 내가 최초발견자가 되어버린 것인가. 나는 그것이 매우 억울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소심한 직장인의 심경을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찍찍, 찍찍. 하는 소리가 들려줬으면 좋겠으나 쥐가 우는 소리가 아니라 불곰이 내는 것처럼 큰 소리가 동굴을 매운다. 아무리 시궁쥐라도 체급이 저정도면 동굴을 울리는듯한 저음이 날 수밖에 없다. 장담컨대 지구 역사상 저렇게 거대한 설치류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이 터진 이후 발생한 돌연변이 중에는 거대화한 사례가 심심찮게 있었다는데, 저것들도 그런 것일까? 하지만 이 근처에 원전 같은 건 없다.

방사능 유출이라. 방사능 폐기물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하수구에 떨어졌고 저러한 돌연변이들이 생겨났으며, 생태계에 저런 대형 돌연변이들만 남았을 만큼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잠정적으로 그런 결론을 내려 본다. '왜 하필이면 내가?' 감정적으론 그 생각만 하고 싶지만 나는 엄연히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한 현대인이다.

나는 모험을 원하지 않고, 모험의 주인공이 될 생각도 없다. 그저 조용히 구석에 웅크려서 119와 112를 되는대로 부를 뿐. 지금 나에게 생존이란 투쟁이기보단 침묵이다. 침묵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다. 우리 사회와는 다르게 말이다. 촛불집회에 단 한번도 가지 않았을만큼 사회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나는 겁도 많다.

그렇게 살아온 삶을 후회하지 않고, 대견하다고 칭찬하게 된 순간은 그렇게 침묵 속에 지나갔다. 아주 의미 없이. 구조된 다음에도 나는 침묵을 지켰다. 하수구에서 괴물을 봤다는 얘기를 직설적으로 하면 정신병원 행이요, 하수구에서 시체를 봤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돌려 말해서 괴물들을 노출시키는 방법을 써도 나는 귀찮아 질 것이다.

나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다. 그렇게, 나만 아는 그날의 비밀스런 기억을 가지고 하루하루 직장인의 삶을 누렸다. 그날의 생존이 역동적이지 않았던 만큼 공포도 크지 않았고, 따라서 내 정상적인 삶에 대해서 감사하지도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뺏긴 기분이나 뺏길 것 같은 위기의식이라도 있었어야, 돌려받은 느낌이 들지.

나는 굉장히 침착한 사람으로서 이 일이 조용히 파묻히길 바랬고, 3년의 시간이 조용히 지나갔다. 그렇게 주임에서 대리로 진급했고, 왜 사는지 대체 모를 인생 속에서 그날의 추억을 서서히 잊어갈 즈음.

황당하게도 형광물질이 도포된, 아니, 드럼통째로 부어진듯한 침대에서, 그 침대와 공평하게 형광물질로 물든 몸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고, 내 몸에 무슨 이상이 생겼는지보다 이러면 출근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게 감탄하며 일단은 방바닥을 더럽혀서라도 욕실로 들어가야만 했고, 샤워를 한 후에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와... 반짝반짝한데?"

내 몸은 마치 흑요석같이 매끈한 흑색에 보석같은 질감을 뽐내고 있었다. 입술이고 흰자위, 홍채까지 예외를 둘 것 없이 말이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흑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있었다. 형광물질이 왜 나왔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출근 문제도 말끔히 잊어버렸다.

그야 당연하기도 할 것이다. 나는 더이상 현대인이라기보단, 초인에 가깝다 아니 초인임에 틀림없다는 별 근거없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거울을 보며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체 어떤 초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