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트력 1011년 9월 10일

그날 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아직 시간은 어두워지기 이른 낮이었지만 햇빛을 가로막은 먹구름 때문인지 밤처럼 보였다. 바닥은 오랫동안 내린 비로 질척거렸고 강한 바람이 우산을 잡고 있는 사람들의 옷까지 젖게 만들었다. 그 때문인지 한동안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엘스스트림의 거리에는 돌 바닥위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과 그 사이를 지나다니는 음산한 느낌의 경비병들 만 있을 뿐이었다.

복잡한 도심의 거리는 성안의 경비병들만이 지리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복잡했다. 계단을 올라갔다가, 모퉁이를 돌았다가, 곧 막다른 길에 다다르고 다시 돌아서 보이지 않던 샛길로 나아가야 했다. 그 길을 걷는 두꺼운 후드를 쓴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 사람의 성별은 알 수 없었지만 음산한 느낌의 기운이 퍼져 나오는 것 만은 주변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으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는데 분명 온 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는 한 대저택에 도착했다. 문을 두드렸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가 문 손잡이를 잡고 안쪽으로 밀자 그대로 문이 열렸다.

“아, 오셨습니까?”

그가 후드를 벗으며 안쪽에서 반겨주는 이를 바라봤다. 초록빛의 긴 머리칼이 후드 밖으로 내려왔다. 후드에 방수 기능이 있었던 것인지 그녀의 머리칼은 그렇게 많이 젖지는 않았다. 안 쪽에서 그녀를 반겨준 사람은 노년의 하인이었다. 안경을 쓴 채 집안을 청소하고 있었던 듯 청소도구를 쥐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테스’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네.”

그녀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대답한 뒤 입구 바로 앞에 있는 계단을 올라섰다. 한 걸음 움직일 때 마다 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네피벨님은 위층 응접실에 계십니다.”

그녀는 테스를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대로 천천히 계단을 올라섰다. 어째서인지 계단을 한 칸 올라갈 때 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언제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올라섰던 곳인데 오늘은 마치 무언가가 짓누르는 듯이 몸이 무거웠다.
2층에 다 오른 뒤 그녀는 잠시 멈춰 섰다.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이 아파왔다. 이렇게 생각에 잠긴 것이 언제만인가. 네피벨을 처음 만나고 자신의 힘을 깨닫고 그녀를 위해 일을 할 때에도 이런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단지 네피벨이 원하는 대로, 그녀의 손발과 같이 움직였다. 머리는 쓸 필요가 없었다. 단 한치의 의심도 그녀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의심이 된다.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 작게 여러 번 기침을 내뱉었다.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입을 가리는 순간 앞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주었니.”
“……”

네피벨이었다.

“어서 들어오렴. 춥겠구나.”

그녀는 네피벨의 말대로 그녀가 있던 응접실로 향했다. 난로의 따뜻한 온도로 가득 찬 방에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네피벨은 그녀가 입고 있던 후드를 벗어서 난로 옆에 널어서 마르게 해 두었고 따뜻한 차가 놓여져 있는 테이블 앞의 소파에 그녀를 앉혔다. 그녀는 언제나 봐왔듯이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이번에도 잘 하고 왔니?”
“……”

네피벨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 언제나처럼.

“……유리?”
“아, 그게.”

그녀의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해야 된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몇 번이나 다짐했던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란 걸 그녀 자신도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네피벨의 붉은 눈동자를 보면 말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애써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고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지만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언제나 유리를 따뜻한 눈길로 맞아주는 그 눈빛을.

“아니에요.”
“유리.”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유리는 고개를 들며 말했지만 이미 네피벨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듯 했다.

“유리. 나는 언제나 말했지만 네가 숨기는 것이 없었으면 해.”

유리는 그렇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네가 어떤 말을 하던지 다 받아줄 수 있으니까, 응?”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유리”
“네피벨.”

두 명이 동시에 숨을 들이키는 것이 느껴졌다.

“저는……누구죠?”

네피벨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너는 유리야. 내가……”
“아니, 전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과 처음 만났던 날. 제가 제 자신을 몰랐던 날. 당신은 제 이름을 지어주셨고 모든 것을 주셨죠. 제 ‘힘’ 또한. 그런데 뭐죠? 그 이전의 저는 뭐였죠?”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전에는 없던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요동쳤다.

“저는 왜 그곳에 있었죠? 저는 왜 당신을 따라갔었죠? 제게 이런 힘은 왜 있는 거고, 그 힘을 당신을 위해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왜 이런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죠? 당신은 알고 있나요?”

그녀의 말은 작은 소용돌이처럼 몰아쳤다. 목소리가 높아진 것도 아니지만 네피벨을 그녀의 목소리에서 위압감을 느꼈다. 분명히 무언가 다른 일이 생겼던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누군가가.

네피벨이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 말해줄게.”

“……네?”

“전부, 네 궁금증을 풀어주겠단 말이야.”

그녀의 표정은 어느 때와 같았다. 편안하고, 마치 어느 봄날에 따스한 바람처럼. 유리는 자신이 약간 무례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네피벨이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는 유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다음 네 생일날이야.”

“무슨……”

“이건 약속할게. 그때까지만 참아줘.”

네피벨이 그녀의 검지손가락을 잡아 자신의 검지손가락에 걸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살아왔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마치 네가 나에게 해왔었던 것처럼.”

“네피벨……?”

유리는 자신의 의문을 다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에 당황했지만 네피벨의 표정을 보니 거절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지금처럼 이야기 한적이 없었다. 단지 부탁 같은 명령만 할 뿐이었다. 유리는 당연한 듯이 그것을 받아들였고, 그것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생일 날짜를 떠올렸다. 12월 17일.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제서야 네피벨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컵에 차를 천천히 따랐다.

“네피벨.”

“……”

그 둘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유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보살펴 주는 사람에게 덤벼들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여태껏 하던 것처럼 하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고 네피벨의 그러한 표정을 볼 일도 없었을 거라 생각하니 더욱 미안해졌다. 네피벨을 차를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괜찮아. 가서 쉬어.”

유리는 그대로 네피벨에서 고개를 돌린 후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나서고 잠시 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