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재인 책을 돌려보다 보면, 간혹 모서리 부분에 하얀 흉터를 남긴 쪽이 있다. 누군가 읽던 도중에 자신이 본 쪽을 기억하기 위해 접어놓은 것이다. 혹자는 이런 걸 보면 인상을 찌푸리며 책갈피 사용을 권장할 지도 모르지만, 난 책의 보존 상태에 관해서는 꽤나 관대한 편이라 딱히 신경쓰진 않는다. 코딱지나 스포일러성 낙서만 빼고 말이다.

여하튼 현재 복무 중인 부대에선 작은 도서관 둘에 큰 도서관 하나가 있어서, 독서를 위한 환경적 요건으로선 퍽 괜찮다. 개천절이 포함된 3일간의 휴무라 시간도 많았고. 그런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며.. 아 물론 망할 분열은 하긴 했다만. 쨌든, 남는 시간동안 제법 많은 책을 읽었다. 카산드라의 거울, 설득의 논리학,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한 뼘으로 읽는 인문학, 그리고 드래곤 라자.

물론 드래곤 라자야 한 서너 번 정독한 책이지만, 문득 반가워서 다시 한번 읽었다. 그 책이 바로 앞서 말한 모서리가 접혀있던 책이다.
수십 페이지 혹은 그저 몇 장 단위로 접혀진 쪽.. 이 책을 먼저 읽은 사람이 남긴 흔적을 보며 그 사람을 상상했다. 이 부분은 재밌었나 보다. 여기선 급한 일이 있었나, 여기서 그만두면 흐름이 끊기는데.. 등등.

모서리가 두 번 접힌 것도 있었다. 처음 접어둔 사람 다음 본 사람이 접어둔 것 같았다. 조금 루즈한 부분이었다. 두 사람 다 여기서 흐름이 끊겼나 보다. 한번 접은 모서리에 다시 한번 접은 그 심정은 어떠할까. 실소를 살짝 머금었을 지도 모른다. 잔잔한 파동이 일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처럼 미미한 웃음을 지었을까. 물론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 지도 모르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 두번 접힌 모서리를 다시 한번 접어 세번 접어놓았다. 그리고 나서 책을 덮었다. 세번의 흔적에 몇년의 역사가 새겨졌는지, 이어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중에 볼 이는 나보단 조금 더 큰 감정을 느끼리라. 어쩌면 살포시 웃으며 모서리를 한번 더 접을 지도 모른다.

책의 보존 상태에 대해 관대하다고 하였지만, 물론 손상시키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독서 후에는 그에 대한 소통이 중요하다 누가 그랬던가. 과연 사실이다. 옳은 말이다. 책에 관한 이해 같은 건 둘째치고, 이렇게 재밌는 걸. 과연 나는 이걸 알고 있었나? 아니, 이야기를 해도 이렇게 즐겁진 않았던 것 같은데. 소소한 것이기에, 소소한 것에 기뻐하는 자신을 보는 게 그 모든게

하염없이 즐겁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다시 원래의 장소에 꽂아두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서 뿜어나오는 책내음, 책내음. 사라지지 않고 맴돌고 맴돌아 잔향이 되어 기억의 저편으로 아스라이 날아간다. 그리고 스며든다. 피가 돌 때마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쌓여가는 다양한 향기를 머금고 내 정신은 점차 또렷해진다. 정체된 시간 속에서의 발버둥일지도 모른다. 겉멋일지도 모른다. 덧없을지도 모른다. 바보같을지도 모른다. 구차할지도 모른다. 치졸할지도 모른다. 진흙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글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것은 내 옅어지는 정신을 애써 붙잡게 해준다. 그렇게 믿는다. 부디 그렇기를 바란다.

햇빛에 부서지는 물살이 거짓되다고 느끼게 해준다. 늦은 밤, 차가운 추위에 얼려진 기억을 마주보게 해준다. '냉동 생각'을 꺼낸다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 느끼게 해준다. 또한 이에 반발하는 형식의 의견이지만, '토픽'의 귀중함을 그리고 논리적 글쓰기에 관한 중요성을 일깨우게 해준다. 상식이라는 개념이 사회적 공감으로부터 비롯한 당시의 잣대라는 걸 알게 해준다. 그리고..

나는 단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