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트력 1010년 4월 20일

헤야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밖으로 나왔다. 무도회장에서 들이쉰 답답한 공기는 어느새 다 하늘로 날아가버린 듯 했다. 딱딱한 바닥 대신 평소처럼 보드라운 흙 바닥을 걸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사람들과 대면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들이 싫다거나 대화를 하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하며 걸으며 도착한 곳은 어느 연못이었다. 성 안의 조경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물은 맑았지만 안쪽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 같았다. 연못 위로 빛나는 달과 별이 작은 하늘을 연못 위로 담아내고 있었다.
헤야는 연못을 이루고 있는 적당한 돌 위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때 그의 눈 앞에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노란 머리카락의 소녀가 보였다.

“공주님?”
“응? 헤야 님 어디 계세요?”

헤야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자신을 찾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녀는 조금 전 까지 무도회장에 있었으니까.
헤야는 손을 흔들어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렸다. 약간 불안한 듯한 그녀의 표정이 곧 밝아지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헤야는 앉았던 돌을 짚고 일어났다. 왕국에 온 뒤로 배인 예절 때문인가 하고 생각했다.

“파티가 안 맞으시나 봐요.”
“네.”

그는 짧게 대답했다.

“높은 사람들의 흔한 겉치레죠. 저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요.”
“공주님은 파티를 좋아하지 않나요?”

미르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가끔씩은 괜찮지만……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 것 같네요.”

둘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헤야는 좀 더 주변을 걸어 다니고 싶었지만 미르에게 실례가 될까 그저 가만히 서있었다.

“공주님!”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아보니 아까 미르가 온 방향에서 시녀가 한 명 오고 있었다.

“아, 헬린.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공주님.”

시녀는 헤야를 슥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공주님을 찾으셔서 왔습니다.”
“아, 아버지께서?”

미르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헤야를 바라봤다. 헤야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라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피하고 내심 실례되는 행동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간에 느껴진 것은 시녀가 공주가 있는 곳을 몰라서 엄청 혼난 듯 했다.

“예, 공주님. 어서 가보셔야 할 것……”

갑자기 미르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 미안한데 방금 헤야 님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드래곤 뼈를 보여주신다고 하셔서 말이지. 아버지께는 그렇게 말씀해주실 수 있겠어?”

헤야는 일차적으로 드래곤 검이라는 것은 처음 들어서 놀랬고 이차적으로 공주가 그런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서 놀랬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시녀에게 그 놀란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어느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네? 공주님? 그게 무슨……”

이번에도 미르는 그 시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평소의 그녀와는 많이 다른 어딘가 많이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헤야의 손을 잡고 그를 잡아당겼다.

“헤야 님! 어서 가요. 저 어릴 때부터 드래곤의 뼈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어요!”
“아, 네네!”

헤야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공주의 발걸음은 그가 봐왔던 어떤 사람의 발걸음보다 빨랐기 때문에 따라가려면 거의 뛰다시피 해야 했다. 사실 그녀도 거의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나는 드래곤 검 같은 거는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헤야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사실 달리면서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어느새 원래 그들이 있던 연못에서 멀어져 펠릭스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헤야는 그녀가 왜 이렇게 그의 손목을 단단히 잡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공주이기 때문에 손을 놓으라고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누군가에게 이렇게 잡아당겨지듯이 하는 것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공주가 발걸음을 멈췄다. 달릴 때는 알 지 못했던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 흡. 하…… 5살 이후로 이렇게 달려본 건 처음이에요.”

그제서야 그녀는 그의 손을 놓았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거칠게 몰아 쉬고 있었다. 헤야는 그렇게 숨이 차지는 않았지만 달리던 도중 발이 꼬여 자신도 모르게 헛디딘 왼쪽 발목이 아파왔다.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저 멀리서 달려왔다. 아마 그들도 공주가 달리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리라.

“공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하, 괜찮아요. 오랜만에 달려보고 싶어서. 하.”

경비병들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 한 것 같았지만 헤야를 힐끗 보고 별다른 일은 없는 것 같다 판단 한 것 같았다. 그들은 경례를 한 뒤 다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고 숨을 고른 미르는 헤야를 올려다보았다.
헤야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재미있어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공주의 얼굴이 새빨개 지더니 순식간에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헤야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나 싶어 바로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미르는 단지 가자고 할 뿐이었다.

그들은 성문을 통과해 펠릭스 성의 현관으로 들어섰다. 헤야의 방은 3층이었고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헤야는 왜 자신의 방으로 가야 하는지 그 동행 내내 물어보고 싶었으나 미르는 대답은커녕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펠릭스 왕궁의 구조는 매우 잘 짜여 있어 엄청 넓은 성임에도 헤야가 두 번 밖에 가보지 않은 방을 기억하고 있었다. 왕궁의 파티 때문인지 가는 동안 시녀나 시종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위화감이 느껴졌다.

“공주님?”

헤야는 자신의 방 앞을 도착했음을 알리기 위해 그녀를 불렀다.

“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그녀는 놀랜 표정을 지었다.
헤야는 반드시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거짓말을 하신 거죠?”

헤야의 물음에 그녀는 조금 당황한 듯 오른쪽 벽을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강경한 그의 태도에 조금 놀란 듯 했다. 헤야는 약간은 무례한가 싶어 걱정 되더라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궁금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 할 거에요.”

그녀는 아직도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