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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았다. 더이상 살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저 발걸음을 옮겨 허공에 몸을 맡겼다. 12월, 한겨울의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볼에 생채기를 남기며 스쳐지나간다.
늘상 모든건 아래로 떨어지지만, 머리부터 지면을 향해 상승한다. 점차 가속하면서. 바람만이 마지막을 배웅한다. 귀를 매섭게 흝으며 지나간다. 그러면서 내게 자그맣게 속삭인다.
후회하지 않니, 두렵진 않니. 왜 그랬어, 좀 더 잘 할수 있지 않았어? 넌 도망가는거야. 발악조차 해보지 않고 그저 도망가는거야.
귀를 막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다고 바람 소리가 멎을 일은 없겠지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한숨이 흩어질 정도나 되었을까, 감은 눈의 검은 시야 속에, 문득 희미한 빛이 아른거린다. 별처럼 반짝이는 자그마한 빛이 순식간에 거대한 빛의 줄기가 되어 나를 관통한다.
"으아아아앙"
"여보, 여보! 고마워.. 정말 고마워.. 수고했어.. 정말.."
"건강한 아드님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흐으으윽.. 흑.. 아가, 내 아가. 흐으윽.."
온 몸이 붉은 갓난아기. 아기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젊은 여성. 옆에서 손을 꼭 잡고 축축한 눈가를 쓸어내리는 남성.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의사. 아기를 안고있는 여성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아기를 받는 간호사.
막 아이를 출산한 여성과 그 옆의 남성의 모습이 눈에 희미하게 익다. 그래, 분명 젊을 적의 부모님이다. 그렇다면 저 아기가 나일까. 병실에 있는 사람들은 내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잠시 망설이곤 간호사에게 안겨있는 아기에게 다가간다. 그러자 아기가 내 눈을 똑바로 본다. 섬뜩할 정도의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다시 한번 시야가 바뀐다. 부모님의 얼굴에 미세한 주름이 생겼다. 세월의 흐름이 엿보인다. 나는 어느새 자라서 아장아장 잘도 걸어다닌다.
여섯살 쯤 된 모양이다. 집 앞으로 마중나온 노란 승용차로 달려간다. 주변 모습들이 낯익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과거의 편린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러자 유치원 가방을 메고 달려가는 어릴적의 내가 발걸음을 멈췄다.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여전히 표정은 없다.
계속해서 시야가 변한다. 점점 커가는 내 모습을 삼자가 되어 바라본다.
지금 보이는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복을 입고있다. 거울을 보는 내 모습을 내가 보고있다. 기분이 묘하다. 지금 중학생인 내가 있는 곳은 A교복점이다. 중학교 때의 일이니 아까처럼 희미한 기억에 골머리 썩을 일은 없다. 중학교 교복을 입고있는 내가 비치는 거울 속, 두 눈이 나를 응시한다. 나는 눈을 피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시야가 환한 빛에 휩싸인다.
어느새 고등학교 교복을 입어보고 있는 내가 있다. 중학교 때만 해도 작던 키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꽤 컸다. 머리도 제법 길어졌다. 지금의 내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장소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A교복점이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교복점 내에 사람들이 많다는 것. 좀 더 디테일해 진 것 같다. 그만큼 최신의 기억이란 뜻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점이 한가지 있다면, 교복을 입고있는 내 옆에 한 여자아이가 있다는 것. 내 어깨에 팔을 올리고 있다. 둘은 서로를 보고 이야기한다.
그녀가 먼저 웃으며 말한다.
"...봐봐. 꽤 어울리지 않아? 역시 여기 고등학교가 제일 교복이 이쁘다니깐?"
"결국 네가 여기 지망을 쓴 두번째 이유는 교복 때문이지? 그러면서 걔 앞에선 내신이네 뭐네..."
"아니거든. 그리고 그건 네가 괜히 수혁이 앞에서 말을 꺼내니깐 그런거잖아. 하지좀 말라니까."
김수혁. 내 중학교 동창이자 같은 고등학교 재학중인 녀석이다. 만난 시간이 있기에 친하긴 하지만, 터놓고 있는 사이는 아니다.
다재다능한 면모에 시원한 성격이라 학급위원을 도맡아하고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었다.
"진짜 한번만 더 쓸데없는 짓 하기만 해봐. 아휴, 내가 왜 너 같은 애한테 들켜가지곤.."
내 한쪽 어깨에 팔꿈치를 올리고 한숨을 쉬고있는 그녀. 나와 동갑인 그녀는 수혁이와 마찬가지로 중학교 동창이다. 나는 주먹을 꽉쥐고 이야기를 나누는 둘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가 거울을 통해서 나를 아무런 표정없이 쳐다본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왼손 주먹을 높게 쳐들었다. 그리곤 그녀의 얼굴을 향해 매섭게 꽂아넣는다. 하지만 맞는 감촉이 없다. 허공을 덧없이 휭 통과한다. 대신 공간 자체가 사라진다. 다시 그저 공허한, 눈을 감고 있을 뿐인 상태로 되돌아왔다.
주마등이었을까. 사람이 죽기 직전에 본다는 온갖 과거의 허상들.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 그리고 그것이 끝났다는건,
퍽.
아프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내게 엄습했다. 감고있던 눈이 번뜩 떠졌다. 세상이 흐릿하다. 달이 붉고 별도 붉다. 캄캄한 밤하늘마저 해질녘보다 빨갛다. 그리고 어둡다. 비릿한 냄새. 몸 전체가 축축하고 이상한 붉은 파편같은게 눈에 아른거린다. 춥다. 물론 지금이 한겨울 밤이라지만, 영혼까지 얼어붙는 것만 같다. 눈이 자연스럽게 감겨간다. 두렵고 무섭지만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마음만은 편하다. 이걸로 된거야.
'그런데말야, 네가 그러면 안되지.'
"정신차려."
날 부르는 목소리. 하지만 이상하다. 분명 난 죽었을 텐데. 내 목숨이 끊어졌다는 것 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데. 붉은 세계는 온데간데 없고 다시 적막한 어둠만이 감돈다. 문득 나는 내 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의식만이 둥둥 떠있는 상태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의식 있는 거 아니깐 뭐라고 말좀 해보시지?"
"누구세요?"
아, 말이 나왔다. 내 목소리. 중저음의 지금은 약간 갈라진, 메마른 목소리가. 몸이 없으니 당연히 입도 없는데, 입을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말이 나왔다. 생각이 그대로 내뱉어 지는 건 아니다. 말을 한다 라는 개념이 전제인듯 하다.
내게 말을 건낸 상대에 대해서는.. 조금 어린 것 같다.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소년같은 목소리에 고함때문에 날카로운 어조가 섞여있다. 상대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현 상황의 실태에까지 의식이 미쳤다. 이윽고 나는 가장 본연적으로 품고있던 의문을 내뱉었다.
"망할.. 이딴 게 quredis라니.."
말에 빈정이 섞여있다.
"굳이 설명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네 마지막 소원이나 들어줄테니 잘 해보라고.
부디 중간에 포기하지 않길 진심으로 부탁하지."
"그게 무슨.."
내 마지막 소원. 그건 내가 가장 잘 안다. 당연히 안식이다. 그걸 위한 자살이다. 한데 이상하게도 주변이 시끄럽다. 짜증날 정도의 소음이다. 일단 눈을 뜨는게 좋겠다. 언제까지고 눈을 감고 있을 수도 없겠지. 하나 둘을 세고 셋에 눈을 뜨자.
하나..
둘...
셋!
"으아아아아앙"
"여보, 여보! 고마워.. 정말 고마워.. 수고했어.. 정말.."
"건강한 아드님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흐으으윽.. 흑.. 아가, 내 아가. 흐으윽.."
눈이 아플 정도로 환한 빛이 나를 반겼다. 나를 안고있는 미모의 여성,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남성. 전생한 나의 부모인듯 싶다. 난 아기가 되었다.
뭐야 이거. 전생이잖아. 게다가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인데?
내가 전생을 원했던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죽어야 할 지는 조금 고려해봐야 할 것 같다. 생의 빛을 직면한 순간, 겪었던 죽음의 공포가 문신처럼 새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그 고통과 두려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울음 소리가 배는 커진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확실히 두번 겪을 일은 못된다.
그제야 나는 직감했다. 이 죄를 계속해서 짊어지고 가야 하리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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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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