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날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가느다란 미련의 끈을 붙잡은 채 매달리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당신의 잔재들을 태워버릴 수 있었습니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몇달동안 나를 옥죄었던 당신의 잔재들을 날려 버리면서 끝내 울고 말았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했었는데---.


당신은 내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 희망이었으며, 꿈이었고, 미래였습니다. 당신과 함께했던 지난 몇달간은 내게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 날! 난 천 년만에 만나는 사람 마냥 그렇게 마음이 설레였고, 그 설레임은 나를 변하게 해주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다가와서 또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네가 싫다.’ 는 당신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피눈물을 흘렸고,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는 당신의 말을 들었을 때는 너무 서글퍼서 아예 목이 메어 말도 나오질 않았습니다.


전생까지도 너무나 같았던 우리의 만남은 아름다운 숙명적인 만남이 되질 못한 채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러함이 가슴 아프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토록 굳게 믿었던 우리의 사랑이 이렇게 속절없이 허무한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게 될줄은 미처 알지 못했음에 막상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실감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떠난지 두 달동안 밤을 꼬박 새워가며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바람결에 털컹이는 창문 소리에도 혹시? 당신일까 뛰어 나갔고,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에도 행여 당신일까 맨발로 뛰어 나갔답니다. 그러나 한 번 떠난 당신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었건만, 미련한 마음은 그 사실조차 애써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렇게 숱한 밤을 지새웠습니다.


버려야 했습니다. 당신을 잊기 위해선 내 가슴 속에서 떠날줄 모르고 혼신을 다해 매달리는 미련의 찌꺼기들을 털어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쉽사리 털어낼 수 있는 하찮은 사랑이었다면 내 마음이 이리도 서글프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미련없이 떠났어도 그렇게 난 당신을 털어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 안개를 휘집고 사라져 가는 당신의 잔재들을 지켜보면서 문득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떠올렸습니다. 오늘따라 당신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은 채 희뿌연 안개 속에 가려져 애간장만 태워 주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아름다웠고, 당신은 언제나 내 곁에 있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그림자였고,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던 당신의 자리가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당신이 떠나간 것은 현실이었습니다. 이미 누군가를 버린 경험이 있었던 당신이기에 언젠가는 나 또한 버리고 갈 사람임을 이미 당신을 처음 만나는 순간 느낄 수 있었지만, 당신이 내 곁에 있는동안 당신만을 사랑하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빨리 당신이 떠날줄을 알지 못했음에 당신이 떠나고 난 후의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미리 생각해 두질 못했습니다.


당신이 힘들어 할때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가슴은 더욱 아팠습니다. 흡사 피가 마르고 뼈 마디 마디가 조각 조각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내가 겪은 고통은 육제적 고통보다는 정신적 고통이 심했던 까닭이지만 차마 당신에겐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눈사람이었습니다. 눈을 뭉쳐 만든 눈사람처럼 그렇게 당신은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없이 사라져 버린 눈사람이었습니다. 차라리 이 것이 긴 꿈이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꿈이 될 수 없도록 너무도 많은 추억을 내게 남겨 주었습니다. 눈사람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는 당신은 어느 여인들과 다를바 없는 속물이었습니다. 진실한 사랑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허수아비였습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사랑은 한낱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에 불과했음을 깨달았을 때 나 또한 속물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속물을 속물로 보질 못하고 아름다움으로 본 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갔습니다. 당신에 대한 미련의 잔재들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붙잡고 매달리던 더러운 정마저 이젠 한 줌 연기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동생들을 위해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이 진실하지 못함에 동생들에게 진실하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동생들이 정직하고 착한 어른으로 성장해 주길 기원합니다.


당신의 잔재들은 털어버렸지만 진실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여길만큼 내게 있어 당신은 전부였습니다. 그랬기에 당신을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사랑했고 죽을 때까지도 사랑하길 원했던 사람이기에 불행보다는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랄 수 있는 것입니다. 행여나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상대방의 마음부터 헤아릴줄 아는 현명한 여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는 결코 행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지켜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젠 영원한 작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가 가야할 길은 멀고먼 길이며 고난의 길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결코 갈 수 없는 가시밭길 처럼 험하고 힘든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가고자 합니다. 어리석음에 눈이 멀었던 내 자신을 저주하면서 죽는 그 날까지 고행의 길을 갈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 오히려 마음이 시원한 것 같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받았던 사랑의 기쁨도, 당신으로 인해 받았던 아픔의 고통도 모두 털어 버린 지금에 와서야.. 이젠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습니다. 더이상 내가 있음으로해서 당신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 것임에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 마저 당신이 원하심에 당신의 뜻대로 모두 드립니다.


내가 살아오는동안 가장 힘들었던 기간중 짧은 시간이나마 그 고통을 나와 함께 해주었던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여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