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간이 몇 시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럼 중요한 건 뭡니까?”

“나한테 묻는다고 답이 나와요?”


소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들린 건 누군가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였다.
사실 내용으로 봤을 땐 그것은 대화라기보다 만담에 가까웠다.
하지만 소녀는 몽롱한 정신 탓인지 대화는커녕 어느 것에도 신경을 두지 않은 채로 그저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막 일어난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 나른한 상태로 침대의 기분 좋은 촉감을 즐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고 덮고 있는 이불의 부드러움도 질려갈 무렵 아까부터 계속 들려오던 대화의
내용이 그녀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낯선 곳에 떨어진 두려움에 떨고 있을까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문을 열어볼지도 모르죠.”

“하지만 문을 열어 선 안 돼요. 아직.”

“그녀가 그걸 알고 있을까요?”

“알길 바래야죠.”


마치 기름을 두르고 무언가를 굽는 것 같은 거슬리는 전파음과 주변에 인기척이 없다는 사실이 그들의 대화가 TV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대화 내용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맥락이 없었다.
처음부터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갑작스럽게 그녀는 눈을 번쩍 치켜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보았던 풍경이 무언가 이상했던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질적인 이불의 촉감, 냄새.
이곳은 어디지?
소녀는 이 모든 걸 이제 서야 알아 챈 자신의 무심함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당혹감에 숨을 몰아쉬며 끊임없이 소리가 나고 있는 TV로 눈길을 돌렸다.
90년대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탁하고 지저분한 화면 속에서 두 개의 손이 보였다.
거칠고 주름진 중년의 손이었다.
손톱에는 촌스러운 원색으로 깔끔하게 매니큐어가 발려져있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왼손과 오른손의 색깔이 달랐다.
빨간색과 노란색.
오로지 반들거리는 손만 잡고 있는 기괴한 화면은 옛날 공포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들리는 목소리와 가끔씩 꿈틀거리는 손가락만이 화면이 정지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어있었다.
소녀는 손의 주인이 각각 다른 사람인 것일까, 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소녀는 뭘 하고 있을까요?”

“필사적으로 상황을 이해하려 하겠죠.”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가 언제 가능하다고 말했습니까?”


여전히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람은 분명 한 명이었다.
중년 여자처럼 보이는 목소리는 위화감이 없었지만, 남자를 흉내 내는 목소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일부로 목을 긁어서 내는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소리였다.
소녀는 이 상황에 점점 공포를 느꼈다.


“장난 그만해.”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에 그녀는 약간 실망한 듯 했다.
그녀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어두운 방 안을 밝혀줄 스위치를 찾았다.
문 근처에 스위치로 보이는 것을 눌렀으나 불빛은 켜지지 않았다.
그녀는 곧 포기하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유혹을 잘 참아야 할 텐데요.”

“그렇죠. 밖에는 모기가 돌아다니니까요.”

“누구라도 그녀에게 물을 가져다주면 안 될까요? 그녀가 너무 불쌍합니다.”

“그럼 당신이 갖다 주지 그래요?”


소녀는 어느새 자신이 문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뜨거운 것을 집은 듯 서둘러 손을 뺀 그녀는 불길함에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TV속에서 말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겁을 먹은 것이 아니었다.
문 가운데에 조그맣게 있는 불투명한 유리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비쳤다.
방 안은 적막했다.
TV도 지금은 자신이 말 할 때가 아니라는 듯 희미한 빛만 뿜어내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숨소리가 들려온다.
평범한 숨소리가 아닌, 빠르게 심호흡을 하는 것처럼 거친 숨소리였다.
실루엣은 분명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걸까?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몇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났다.
의문의 존재는 불투명한 유리에 점점 더 밀착하여 조금씩 선명해졌다.
실루엣의 눈이 보였다.
커다랗게 핏발 선 눈.
소녀는 그가 당장에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당장에라도 뒤돌아 무기가 될 무언가를 집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한 번도 깜빡이지 않는 저 눈이 소녀를 붙잡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불투명한 유리에 홀로 선명한 그것은 마치 눈알이 혼자 떠다니는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혼자 허공에 떠다니는 마법의 눈알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 정도로 소녀는 두려웠다.
다행히 눈알은 그녀를 풀어주듯 천천히 유리에서 멀어져갔고, 그때가 돼서야 소녀는
전기에 감전된 사람이 필사적으로 움직이듯 조금이나마 발끝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1시가 되면 그녀는 밖으로 나가야 될 텐데요.”

“불쌍하고 겁 많은 소녀가 잘 해내길 바랄뿐입니다.”


그녀는 갑자기 튀어나온 TV의 목소리에 놀라 속사포처럼 욕을 뱉었다.
태어나 몇 번 한 적도 없는 상스러운 욕이었다.
신경질적으로 전원버튼을 눌렀지만, 화면은 그대로 요지부동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살펴보던 와중 화면 상단에 표시되어 있는 시간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12시를 훌쩍 넘은 시간.
TV에서 말 한대로라면 이제 소녀는 밖으로 나가야 될 터였다.
그러나 얼굴도 모르는 이 사람이 말 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는 것에 소녀는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분노를 담아 문이 있는 방향을 노려봤지만,
이내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하며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대로 수긍하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웃기는 매니큐어를 칠한 짝짝이 손톱에 패배한 것 같은 굴욕감에 그녀는 TV를 향해 한껏 중지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화면 속에서 비웃음과도 같은, 짤막한 웃음소리가 한순간 들렸다가 사라졌다.
소녀는 눈을 크게 뜨고 TV를 바라보았다.
돌이켜보면 TV는 마치 소녀를 지켜보기라도 하듯 그녀의 상황에 맞춰 목소리를 내보냈었다.
소녀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다.
왜인지 농락당하는 것만 같았다.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선 그녀는 미약한 TV불빛에 의지하여 방 안을 둘러봤다.
어딘가 익숙한 철제침대, 발을 두는 곳에서는 간이 식탁이 숨어져있었다.
부분적으로 봤을 때, 이곳은 병원이었다.
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
침대 옆에 서랍장이 보였다.
위로는 옷장이 길게 이어 붙어 있었다.
열어보았지만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뛰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숨을
주기적으로 길게 내쉬었다.
안 그래도 거지같은 상황에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장소인 병원에 갇혀있다고 생각하니
말 그대로 참담한 심정이었다.
소녀는 공포감을 조금이라도 지우기 위해 자신이 본 곳부터 보지 않은 곳 까지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뒤지기 시작했다.
십 분정도가 지났을 때 그녀가 찾아낸 건
만든 사람의 이름이 고급스러운 필체로 각인되어 있는 은제 가위부터,
반 정도 남아있는 성냥, 오래 된 액체가 바닥에 남아있는 찻잔 정도였다.
소녀는 은제 가위를 허리춤에 정성스럽게 찔러 넣었다.


“아, 이제 곧 나가야 할 시간이에요.”

“불쌍하기도 하지.”

“명심해야 할 겁니다. 그녀는 항상 목말라 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찻잔 속 액체의 냄새를 맡던 소녀는 잠잠하다 또 다시 튀어나온 짝짝이 손톱의 목소리에
여지없이 놀라고 말았다.
바닥에는 부서진 찻잔의 파편들이 널브러져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한 TV를 바라보던 소녀의 머릿속에 짝짝이 손톱의
알록달록한 손가락을 가위로 잘라버리는 상상이 스쳐지나갔다.
그러고는 자신이 하고도 섬뜩한 상상인지 물에 젖은 강아지처럼 몸서리쳤다.


“제길.”


그녀는 중얼거리며 몸을 굽혀 자신의 발을 살폈다.
부서진 파편에 베인 것인지 소녀의 하얀 발에 난 상처에서는 빨간 열매처럼 핏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치료할 것이 있는지를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에 바로 앞의 침대가 보였다.
아까까지 자신이 뉘었던 침대였다.
왜 여길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 했는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불을 대충 뒤적이던 소녀는 이내 낑낑거리며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올렸다.
매트리스 아래에는 한 장의 종이가 있었다.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그녀의 얼굴에 잠깐이지만 기쁨의 감정이 드러났다.


“뭐야 이게?”


종이의 정체는 건물의 도면 같았다.
하지만 이런 것에 문외한인 그녀가 보기에도 이 종이는 도면이라기에 부족한 점이 많았다.
검은색 점이 그려져 있는 방과 붉은 점이 그려져 있는 방을 합해 6개 정도의 방이 도면의 전부였다.
이 방에는 창문도 없었기에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여기가 병원이라면 방 6개가 전부일리 없었다.
간소하게나마 방의 구조가 그려져 있었으나 그렇다 해도 이건 도면이라기보다 약도에 가까웠다.
성급하게 판단하긴 일렀다. 건물의 일부만 그려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소녀는 답답한 마음에 분명 어딘가에 있을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여기 붉은 점까지 가라는 거야? 아니면 검은 점?”


대답이 없자 그녀는 TV앞으로 다가가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허나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소녀는 가서 TV를 엎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과 함께 아직 TV밑을 살펴본 적이 없다는 점이 떠올랐고, 그것이 그녀의 충동을 더욱 부채질했다.
어차피 이곳을 나가면 이 고물기계 따위는 더 이상 볼일이 없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TV에 손을 대기로 결정했다.
처음 계획과 다른 점은 무자비하게 바닥에 패대기치는 것이 아닌 옆의 빈 공간으로
눕히듯이 돌려놓는다는 부분이었다.
소녀는 의도적으로 큰 소리를 내는 걸 꺼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 짜증과 두려움이 솟구치면서도 그녀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아마 전의 그 핏발선 눈알 때문일 것이다.
TV는 다행히 양 쪽을 붙잡을 수 있을 만큼 크기가 작았다.
들어 올리는 건 무리지만 옆으로 눕히는 것은 그녀의 힘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맙소사. 그녀는 기쁨과 놀라움이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피어오르는 먼지 속에는 또 다른 종이 한 장이 고이 접혀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마음에 꿈틀거리는 기묘한 충족감에 패배의 굴욕감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소녀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종이를 집었다.
한숨을 쉬고 펴본 종이의 상단에는 커다랗게 적힌 ‘설명서’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모기여자

「그녀는 새빨간 립스틱을 칠하고 다니는 이 저택의 하녀였는데,
립스틱이 묻는 걸 막기 위해 항상 물이나 음료에 빨대를 꽂아 마셨습니다.
하지만 괴물로 변한 입술은 메말라 갈라져 있고,
그녀는 마실 것을 갈구하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빨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그녀의 눈에 당신은 걸어 다니는 음료수로 보일 것이고, 쇠로 된 커다란 빨대를 당신의 몸에 꽂을 것입니다.
또한 그녀는 빨대를 꽂기 용이한 부드러운 배를 선호합니다.
그러니 그녀를 만나면 부디 배를 감싸기 바랍니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저택?"


설명서대로라면 이곳은 병원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불행중에 희소식이었다.
그것보다 이 기분나쁜 설명서에 적힌 내용은 짝짝이 손톱이 말해온 항상 목이 마르다던 그 여자와 설명이 맞아떨어졌다.
이 무슨 악취미적인 장난이란 말인가.
소녀는 종이를 박박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존심 때문일까, 그녀는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신경질적으로 찢은 종이를 힘껏 공중에 뿌렸지만 정체모를 불길함은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소녀의 머릿속에 방금 전 그녀를 공포로 몰아넣은 살벌한 눈알이 다시 떠올랐다.
찢어버린 설명서를 마냥 장난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누군가의 장난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평범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어느새 없어진지 오래였다.
특유의 겁 많은 성격탓인지 그녀는 본인도 모르게 현실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들을 점점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 자신이 한참 전부터 했어야 할 근본적인 생각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그 의문으로 시작해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러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대부분의 질문들이 해결되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 해봐도 여기오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가 않았다.
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이제 소녀의 숨이 점점 가빠져갔다.
그 다음 소녀는 누군가 뇌 속을 헤집어 놓는 것 같은 격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소녀는 구석에 있는 싱크대로 쓰러지다시피 다가가 헛구역질을 했다.
기억을 잃었다는 자각조차 없었던 그녀는 심한 충격과 두려움을 받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죽을 것 같이 두렵지 않았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곤, 자신의 기억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 종이 한 장의 차이는 폐부 깊숙이 이 암울한 현실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방금 전이 어두운 밤 골목길을 걷는 정도의 불안함이라면,
지금은 흉악범들이 가득한 교도소 안을 알몸으로 걸어 다니고 있는 기분이었다.
소녀가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아까 전부터 뇌리를 맴도는 유일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고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이불이 주는 편안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 재생되는 끔찍한 기억을 상기했다.
그것은 피 칠갑을 한 어떤 남성이 여성의 시체를 앞에 두고 아직 어린아이였던 소녀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때의 소녀는 지금과 달리 겁이 많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그저 뒤에 피 묻은 칼을 숨기고 썩은 내 나는 입을 움직이는 그녀의 아버지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너를 구하기 위해서였단다.”


그녀는 그 장면을 상기하며 홀린 듯 중얼거렸다.


“정말로 너를 위해서 한 일이야. 믿어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