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번 편엔 이 소설 중 가장 멋진 장면 중 하나가 펼쳐집니다.

두 눈 똥그랗게 뜨고 상상력 게이지 이빠이로 올리고 읽어주세요.

승지는 새엄마랑 사이가 좋아지는가 싶더니

협박장난질의 범인이 새엄마라는 증거를 발견하게 됐고..

기천은 동훈이가 자신을 수상하게 생각한다고 여기게 됐습니다.

결국 양쪽 사건 모두 장난으로 시작한 일인데...

그게 어디까지 나아갈지..

대체로 어설픈 사람이 뭔가를 하면 그 파급이 엄청나게 커질 때가 있지요.

파급효과가 가장 크고 결과물이 가장 끔찍할 만한 어설픈 행동이 과연 뭘까요?

'어설픈 살인'이 아닐까요?'-'）>

한 번......그 과정을 구경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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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어둠의 문（cafe.daum.net/blacknovel） & 리얼판타（www.realfanta.com）

작가 : RoLLo


19







모처럼 묵은 빨래를 해치웠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깨끗한 빨래들을 화창한 하늘아래 옥상에서 말리고 싶어하는 주부의 마음을 외면하는 날씨였다. 하는 수없이 건조대를 놓고 베란다에서 말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배나온 몸으로 낑낑대며며 빨래바구니를 옮기고있자 보다못한 승지가 달려가서 새엄마를 거들어주었다.

" 아이, 괜찮아. 이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어. "

" 안 돼요. 이렇게 무리하면 배속에 동생도 힘들어해요. " 승지는 새엄마의 손을 잡고 밝게 웃며 말했다.

" 아이고, 기특한 것. 그래 알았어. 그럼 빨래 너는 것 좀 도와주겠니? "

" 네. 시켜만 주세요. "

승지는 새엄마와 함께 빨래바구니를 들고 베란다로 향했다.

" 갑자기 날씨가 바뀌다니. 이런 낭패가 있나. "

" 그러니까 일기예보를 보셨어야죠. "

" 임신을 하면 기억력도 떨어지나 보다. 좀 전에 일기예보를 본 거 같은데도 기억이 없으니. 큰일이다. 이러다 나 바보 돼는 거 아니니? 호호..... "

밖에는 비가 제법 쏟아지고 있었다. 이제 오늘만큼은 화창한 하늘아래 옥상에서 빨래 말리는 것은 포기해야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옆에서 열심히 도와 주고있는 딸아이를 보자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승지는 팔까지 걷어 부치고 야무지게 빨래를 팍팍 털고 있었다. 그녀는 승지가 이렇게까지 변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다만 조금이나마 겁을 주려 했을 뿐이었고 그래야만 이 버릇없는 계집애가 세상 무서운 것을 알 것 같아서였다.

사실 사적인 원한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바퀴벌레를 이용한 것도 그때 반찬사건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엄마가 딸아이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택한 방법치고는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다. 사실 그녀도 지금에 와서는 그때 자신이 어떻게 그랬을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신기해 할 정도니까 말이다. 여자가 독을 품으면 이렇게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그때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충격요법이 제대로 먹혔 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녀도 그것이 이렇게 까지 기대이상의 효과를 발휘할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지금 생각하면 그 일들은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겁도 나고 망설여지긴 했지만 막상 하고 나니 홀가분하고 짜릿함마저 감돌았다. 어렸을 때 낮잠을 자고 있는 할머니의 바지주머니에서 몰래 때 뭍은 100원짜리 동전을 꺼냈을 때처럼 아찔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희열 같은 것이었다. 청룡열차를 타고 급하강 할 때처럼 말이다. 사실 자신이 한 짓이 두렵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절대로 걸리지 않을 만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편지 같은 경우만 해도 그랬다. 그들이 범인을 절대로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 편지를 언제나 자신이 제일 먼저 발견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편지를 쓴 사람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아무튼 누구도 새엄마를 의심하거나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일은 결코 없었다. 하루종일 집에만 있는 아줌마에게 있어선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알리바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냥 이것을 편지함에서 발견했다고만 하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었다.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토를 달거나 하지 않았다. 범인은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도 모두들 멀리서만 찾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런 그들을 보며 얼마나 통쾌하고 짜릿했는지 마치 자신이 셜록홈즈를 속여넘기는 괴도 루팡이라도 된 것처럼 느겨질 정도였다. 이제 그녀는 승지에게 편지를 그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보낼 이유도 없었고, 꼬리가 길어지면 밟힐 수 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승지의 그 고약한 성격이 눈을 뜨기라도 한다면 또다시 그 저주의 편지를 보낼 의향도 갖고 있었다.

새엄마는 허리를 숙여 빨래를 집다가 문득 빗소리가 점점 요란해지는 것을 듣고는 심란한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 이런..... 벌써 장마가 질려나 보다. 김치 거리도 아직 안 사놨는데. "

순간, 거대한 카메라 플래시라도 터진 것처럼 엄청난 섬광이 스쳐지나갔다. 번개였다. 그리고 곧이어 고막을 찢을 듯한 천둥소리가 뒤따라 울려 퍼졌다.

" 우르릉...... "

상당히 큰 소리였으므로 그녀는 다음 번 번개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칠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곤 마음속으로 초를 재어보았다. 1초 2초 3초...... 그리고 3초에서 4초로 바뀔 때쯤에 다시 한번 번쩍하는 섬광이 비취었다. 그러나 그때 그녀가 창 밖을 보면서 놀랐던 것은 번개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소름끼치게 만들었던 것은 번개가 칠 때 생긴 반사광으로 인해 등뒤에 있던 것이 순간적으로 창에 비쳤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몽둥이처럼 생긴 것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당장이라도 내려칠 것처럼 무섭게 노려보고 한 여자의 형상이었다. 새엄마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 꺄약~~ "

뒤이어 무서운 굉음이 천지에 울려퍼졌다.

" 새엄마 왜 그러세요? "

" 방금...... 번개 쳤을 때 유리창에 뭔가 비쳤는데...... 아무래도 귀신을 본 것 같아. "

" 귀신요? 설마요...... 전 아무 것도 못 봤는데요? "

새엄마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 그래?...... 하지만 난 분명히 봤는 걸. 너무도 선명했어. 넌 진짜 못 본 거야? "

" 전 아무것도 안보이던데요. 이제 그만 진정하세요. 요즘 집안 일 하신다고 너무 피곤하셨나봐요. 제가 마저 할 테니 들어가서 쉬세요. "

" 그.그랬나?...... 아마도 그렇겠지? "

" 예...... " 승지는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였다.

승지의 미소가 맞은 편 유리창에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비 때문에 무섭게 일그러져 보였다. 베란다 문 옆에 쌓아 올려진 상자더미들 밑으로 조립식 간이 탁자 다리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20







기천에게 전화가 걸려왔을 때도 동훈이는 방안에 틀어박혀 헤드셋을 낀 채 컴퓨터로 포르노 시디를 감상하고 있었다. 남자가 특이한 모형의 딜도로 여자를 고문하는 장면에서 동훈은 자신의 아랫도리가 발기하는 것을 느꼈다. 동훈의 방에서 바로 문을 열고 나가면 거실이었고, 게다가 어머니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는데도 동훈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동훈의 헤드셋 사이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동훈은 짜증 섞인 투로 방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 뭐야! 나 지금 공부 중이잖아. "

" 전화왔어. 친구랜다. "

" 아이 씨....... "

거실로 나가 전화를 받은 동훈은 뜻밖에도 기천이라는 것을 알고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기천의 목소리는 상당히 차분해 보였다.

" 어이..... 지금 뭐해! 또 포르노 보지? "

" 미친놈..... 공부하고 있었어. "

기천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아 동훈도 안심 했다.

" 야! 오늘 우리 집으로 집합이다. 준비물 챙겨서 지금 바로 와라. "

" 뭐야.... 다 모이기로 한 거야? "

" 음. 딴 놈들한텐 이미 다 연락했어. "

" 알았어, 그럼 30분까지 갈게. "

" 재미있는 걸로 가져와야 돼. 알지? "

" 내가 언제 실망시킨 적 있었냐. 쫌만 기다려. "

전화를 끊고 나서 동훈은 잠시 망설였다. 물론 자신의 장난이 좀 지나쳤던 것은 인정 하지만 그렇다고 기천이 그렇게까지 과민반응을 보이며 대드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동훈 자신도 화가 났었고 솔직히 자신과 '같은 과' 라고 믿었던 기천이 이제 와서 준혁 같은 놈의 편을 드는 것도 못마땅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기천을 못살게 군것에 대해 동훈도 마음이 편치 만은 안았다. 남자의 질투는 가장 추잡스럽다 하지 않던가.
지금 동훈은 기천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자신에게 우정을 손길을 내민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동훈이 기천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다른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기천의 집은 조금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라 집안 분위기가 대체로 어두운 편이었다. 고풍스럽긴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에겐 조금 이질적으로 보이는 집이었다.
집안을 둘러보던 준혁이 기천에게 말했다.

" 웬일이냐? 너네 집에 사람이 없다니..... "

기천은 냉장고에서 오랜지 쥬스를 꺼내며 말했다.

" 응..... 새엄마가 잠깐 병원에 갔거든. "

" 왜? 어디 아프시냐? " 동훈은 부엌 식탁에 앉아 기천이 따라주는 쥬스를 받아 마셨다.

" 임신하셨댄다. 놀랍지 않냐? 큭큭..... "

" 이야~~~ 좋겠다. 그럼 너 동생 생기는 거잖아. 축하해야겠네. "

기천이 컵에서 입을 때며 피식 웃어 보였다.

" 동생은 무슨.......난 그딴 거 필요 없어. "

" 그런데 아직 아무도 안 온 거야? 전화한 게 내가 맨 마지막 아니었냐? "

" 금방 오겠지. 네가 제일 한가했던 거 아냐? 큭큭 "

" 아냐. 나 공부하는 중이었어. "

" 하하..... 차라리 수학선생님 머리에 새싹이 돋아나는 걸 믿으라고 해라. "

" 진짜라니깐.... 우씨. "

기천이 빈 컵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 잠깐만 있어. 옥상 가서 빨래 좀 걷어 올게. "

" 이야~~~ 네가 웬일로 집안 일을 다 하냐. "

" 새엄마가 임신 중이잖아. 이런 거라도 도와 줘야지. "

" 큭큭.... 짜식 말은 그렇게 해도 역시 동생이 기대되나 보구만? 그치? "

" 아니라니깐!!! 얌전히 앉아있어. 금방 갔다 올테니까. "

" 알았어. " 동훈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천이 옥상에서 내려 온 것은 그로부터 10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하지만 그의 손에 빨래더미들은 보이지 않았다. 기천은 집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잠깐 동안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서서 무슨 소리라도 듣는 듯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후 기천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 한 후 천천히 부엌으로 걸어갔다. 부엌 식탁엔 동훈이 엎드린 채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오랜지 쥬스가 담겨졌던 유리컵이 깨끗이 비워진 채 놓여 있었다. 기천은 다가가 컵을 들고는 밑바닥을 올려다보았다. 컵의 바닥에 흰색 침전물들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기천이 오른 손으로 동훈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 이미 과다한 수면제를 섭취한 상태라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취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대로 죽어버린 것일 지도 몰랐다. 기천이 동훈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자 '텅' 소리를 내면서 머리가 식탁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 흠...... 좋은 소리군. "

기천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컵을 들고 싱크대로 갔다. 그리고는 물을 틀어 유리컵 바닥에 남은 침전물을 말끔히 닦아 냈다. 그는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정말이야. 난 동생 따위는 필요 없다니까. "

기천은 동훈을 끌고 지하실로 향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새엄마가 올 시간이었기 때문에 어서 서둘러야했다, 부엌 오른쪽에 있는 쪽문을 열고 나가면 음식물 등을 쌓아놓은 창고가 나오고, 거기서 정면으로 보이는 문이 바로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었다. 기천은 지하실 문을 잡아당겼지만 녹이 슬어서인지 잘 열리지가 않았다.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기분 나쁜 마찰음이 생겼다. 두 세번 있는 힘을 다해 흔들어 대서야 간신히 문을 열 수가 있었다. 기천은 다음 번엔 이 문에 기름을 좀 발라둬야겠다고 생각했다.

" 쳇. 알리바바에 나오는 문도 아니고...... 열려라 참기름이라도 해야하나. 큭큭... " 이런 상황에서도 혼자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났다.

동훈을 끌고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던 기천은 계단의 폭이 너무 좁고, 게다가 동훈의 무게 때문에 끌고 내려가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계단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경사가 상당히 올라와 있었다. 한 계단 한 계단 뒤로 밟을 때마다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천은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 계단이 갖고 있는 치명적인 위험을, 너무 오래 동안 방치해둔 탓에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계단의 중간쯤에 높이가 맞지 않는 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밟게 되면 불쑥 땅이 꺼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어두운 상태에서 뒤로 걸어 내려가는 사람에겐 무서운 덫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것을 까맣게 잊은 채 위태롭게 내려가고 있던 기천의 오른 발이 드디어 그 계단을 밟게 되었고, 순간 기천은 땅이 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몸의 중심이 급격히 뒤로 밀리면서 눈 깜짝할 사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동훈과 기천은 서로 뒤엉켜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나마 계단이 얼마 없는 게 다행이었다.

기천은 동훈의 큼직한 몸에 깔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간신히 동훈을 밀쳐낸 기천이 일어서려 하자 왼쪽 발목에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 통증은 발을 제대로 못 디딜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부러지지 않은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전에 중급자 코스에서 스키를 타다가 왼쪽 정강이가 골절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통증에 비하면 새 발에 피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당히 심하게 삔 것만은 사실이었다. 발목을 돌리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 젠장........ 이 빌어먹을 녀석 때문에..... 그냥 밑으로 던져버렸어도 됐잖아. 어차피 깨어나지도 못 하는데. "

기천은 주먹으로 동훈의 배를 세차게 후려갈겼다. 그럴 때마다 동훈의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나와 기천은 큰 소리로 웃어댔다. 지하실 안에선 기천의 잔인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지하실 바닥은 절반이상이 콘크리트가 벗겨져 있어 그대로 흙바닥이 드러나 보였다. 전에 보수 공사를 한다고 해놓고 아직도 이 모양으로 방치해 둔 것이 벌써 1년이 다 되었다. 사실 이 지하실은 보일러말고는 쓰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습기와 곰팡이 때문에 안 쓰는 물건은 모두 다락방에 놓아둔다.） 아무도 여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올해 안에 바닥 공사를 한다고 하니 동훈이를 여기에 묻어두기엔 딱 안성맞춤이었다. 나중에 그 위로 콘크리트를 깔기만 하면 이 집을 허물어 바닥을 들어내지 않는 이상 아무도 동훈이를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천은 왼쪽 다리를 절면서 보일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보일러 뒤쪽엔 작은 공구세트가방이 놓여있었고 거기서 기천은 큼지막한 헤머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다리를 절면서 천천히 동훈의 곁으로 돌아왔다. 옆에 쌓아놓은 신문지를 한 뭉치 집어든 기천은 동훈의 머리 밑으로 그것을 아주 여러 겹으로 깔기 시작했다. 그리고 팬티만 남겨두고 옷을 모두 벗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옷에 피가 튀기라도 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준비가 다 끝나자 기천은 헤머를 든 채 동훈의 머리를 보며 크게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 한방에 끝내야 돼. 피가 너무 튀면 곤란하니까. "

기천은 헤머를 머리위로 크게 한번 들어 올리더니 곧바로 동훈의 이마를 향해 세차게 내리쳤다.

" 퍼억! " 두꺼운 박이 깨는 듯한 둔탁한 파열음이 지하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동시에 고막을 찢는 듯한 비명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 끼야아악!! "

아깝게도 기천의 한방은 실패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그 충격이 동훈을 수면제로부터 깨어나게까지 하고 말았다. 동훈은 벌떡 일어나 미친 듯 지하실 안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해머에 맞아 움푹 들어간 두개골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지하실 바닥은 온통 피범벅이 되었고 신문지 따위는 아예 쓸모 없게되고 말았다.

기천은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사방을 뛰어다니는 동훈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도저히 겁이 나서 동훈을 말릴 수가 없었다. 이건 정말 기천에겐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사실 한번도 사람을 죽여 본적이 없는 기천에겐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온 바닥에 피를 쏟아 부으며（피를 흘린다고 말하기엔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뛰어다니는 동훈은 막 지옥에서 뛰쳐나온 괴물 같은 모습이었다. 한쪽 이마가 움푹 들어가는 바람에 반대로 그쪽 눈알이 툭 튀어나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얼굴은 피로 세수를 한 것처럼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누가 이 모습을 보고 괴물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금새 지하실 바닥은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기천은 그처럼 무섭게 울부짖는 동훈을 다시 한번 헤머로 내려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죽은 듯 누워있던 동훈은 결코 사람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는데, 이젠 살려고 발악을 하는 녀석을 보니 바로 10분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 식탁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농담을 주고받았던 친구였고, 한 어머니의 아들이며, 야한 것을 좋아하는 철없는 사춘기 소년이었다는 것이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천은 비명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좁은 지하실에서 울리는 비명소리는 귀를 막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뛰어다니며 울부짖던 동훈이 갑자기 기천의 앞에서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뒤로 돌아 웅크리고 있는 기천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에선 쉴새없이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동훈이 말을 하기 사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우 느릿느릿하게 이어졌다. 마치 모음과 자음을 따로 분리해서 발음 한 후 그것을 다시 동시에 들려주면 이런 소리가 날것만 같았다. 기천은 그것이 동훈의 머리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수면제 때문인지 아니면 헤머로 맞아서 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 ㄴ ㅏ.......... ㅇ ㅏ ..... ㅍ ㅏ ....... ㄴ ㅏ 집 ㅇ ㅔ 갈 ㄹ ㅐ ㄴ ㅏ 집 ㅇ ㅔ 갈 ㄱ ㅓ ㅇㅑ "

" 그만!! 그만해! 젠장 빌어먹을! 아가리 닥쳐!!!! " 기천은 귀를 틀어막은 채 소리질렀다.

동훈이 고개를 들어 열려진 문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쪽을 향해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천은 깜짝 놀라 옆에 던져놓았던 헤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젠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저 악마가 지하실 문을 열고 이 세상으로 나가는 날엔 세계는 종말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꼭 그렇진 않는다 해도 적어도 기천의 세상만큼은 확실히 종말을 맞게 될 것이었다. 기천은 헤머를 들고 동훈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동훈이 마지막 계단을 넘어서려는 순간 기천은 들고 있던 헤머로 다시 한번 악마를 향해 내려쳤다. 또 한번의 둔탁한 파열음이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갈 때쯤 악마는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기천은 우선 동훈을 보일러 뒤쪽에 눕혀 놓고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흙바닥에 눕혀 놓았다） 신문지로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문지만으론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시계를 보니 새엄마가 진료를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었다. 누나는 학원에서 늦게 끝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별로 걱정이 안됐지만 이 빌어먹을 아줌마만큼은 그렇지가 못했다. 아무리 늦어도 10분 안엔 올 것이 확실했다. 아니 어쩌면 벌써 들어 와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천은 다급해 졌다. 이번 여름동안은 보일러를 쓸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보일러 청소를 할 필요도 또 기름을 넣을 필요도 없었고, 그러므로 당연히 아무도 이 지하실에 내려올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몸엔 피가 묻어 있었고, 벗어놓은 옷가지에도 약간의 피가 묻어있었다. 이것이 제일 시급한 문제였다. 일단은 위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시체가 어디로 달아나는 것도 아니었고 뒤처리는 나중에 해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부엌으로 올라간 기천은 다행히 새엄마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세탁기 안에 들어있는 옷가지들을 몽땅 들어내놓고 자신의 옷과 팬티만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세제를 듬뿍 넣어서 시간을 2시간에 맞춰 놓았다. 이 정도면 핏물이 완전히 빠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기천은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비누칠을 쉴새없이 해댔다. 다 씻고 난 후 자기 방으로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은 기천은 이제 어떠한 빌미도 남겨 놓지 않게 되었다. 다만 한가지만은 빼놓고 말이다. 그것은 점점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기천의 왼쪽 복숭아 뼈였다. 이것만 잘 둘러댄다면 아무 문제는 없을 거라고 기천은 생각했다.


잠시 후, 꼭 15분만에 새엄마가 벨을 눌렀다. 안으로 들어오는 새엄마의 두 손엔 시장에서 사온 식료품들이 한가득 들려있었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10분을 써버리게 한 것이었고, 기천으로 하여금 10분의 시간을 벌게 만든 것이었다. 기천은 새엄마의 짐을 받아들고는 반갑게 맞이했다.

" 이제 오세요. 많이 힘드셨죠. "

" 응..... 너 좋아하는 참외도 사왔으니까 이따 깎아 줄게. "

" 네...... "

새엄마는 기천의 모습이 왠지 예전과는 다른 것 같았다. 물론 태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딘가 모르게 다른 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딱 잡아 말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 너 금방 샤워했니? 머리도 아직 안 말랐네? "

" 아.....지?!..... 집안이 너무 더워서요. " 기천은 순간 당황해서 지하실이라는 말을 꺼낼 뻔했다.

" 더우면 에어컨 켜고 있지 그랬어. "

" 전기세가 많이 나가잖아요..... 샤워만으로도 충분해요. "

" 충분하긴. 엄마도 지금 들어오면서 숨이 탁 막히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집안이 밖에 보다 더 덥니? 어서 에어컨 좀 켜렴. "

" 네 알았어요. "

기천은 짐을 부엌 식탁에 올려놓고는 서둘러 거실에 있는 에어컨을 켰다.
새엄마는 비닐 봉지 안에 든 음식거리들을 식탁에 쏟아 놓았다. 그리고 냉장고에 넣을 것들은 따로 골라내고 나머지는 창고에 보관해 두기로 했다. 그녀는 쪽문으로 열고 들어가 거기다 음식물들을 내려놓았다. 배가 나와 허리를 숙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대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 비스듬히 열려있는 것을 보았다. 전에도 저 문이 잘 닫혀지지 않아서 한번 닫을 때 세게 쾅하고 닫았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그때 이후론 지금까지 한번도 열린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열려있는 것이었다. 누군가 저 문을 열지 않았다면 자기 스스로 열렸다는 얘긴데, 저 문은 한번에 닫기는 힘들지만 일단 제대로 닫혔다하면 웬만해서는 손으로 열기도 힘든 문이었다.

새엄마는 기천이가 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사실 그 애말고 딴사람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 기천아! "

" 예, 왜 그러세요? "

" 너 혹시 여기 문 열었던 적 있니? "

또다시 당황하게 된 기천은 아주 잠깐 동안만에 궁색한 변명하나를 생각해 냈다. 나중에 그렇게 말한 자신을 원망하게 됐지만 그때는 그것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 라면이요. 라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혹시 거기에 놔 둔지 알았죠. "

" 라면? 엄마가 항상 두 번째 꼭대기 서랍에다 넣어두잖니. "

" 아뇨. 제가 찾는 라면이 없어서요. "

" 그래?....... 그럼 여기 지하실 문도 네가 열었겠구나. "

'지하실문' 이라는 단어를 듣자 기천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냥 쪽문이라면 둘러대겠지만 지하실 문이란 건....... 지하실에 볼 일이 없는 이상 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금 기천에겐 그 이유를 댈 만한 것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때 가장 적당한 대답은 전혀 모르겠다 라고 말하는 것밖엔 없었다.

" 예? 거길 왜 들어가요? "

" 너 아니니? "

" 예, 전 그런 적 없어요. "

" 알았다. 나중에 아빠보고 말해서 문 좀 고치라고 해야겠다. "

기천은 서둘러 자기 방으로 돌아가 눕고 싶었다. 일부로 멀쩡하게 보이려고 똑바로 걸어다녔더니 슬슬 왼쪽발목이 그 보복을 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제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어져 버렸다. 기천은 장 본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는 새엄마를 뒤로 한 채 자기 방으로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그때 등뒤에서 새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들렸다.

" 기천아 "

" 옛?! " 기천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 왜 그렇게 놀라니? 뭐 죄진 거 있어? "

" 아녀. 설마 그럴 리가....... 왜 그러시죠? "

" 참외 말야. 이거 깎아줄 테니까 갔고 올라가렴. "

" 아....... 괜찮아요. 지금은 별로 생각이 없어요. 나중에 먹을 게요 "

기천은 통증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서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아까는 먹는다고 해 놓고선....... 그럼 이따 먹고 싶어지면 내려와. 알았지? "

" 네, 그렇게 할 게요 .. "

기천은 이번에야말로 서둘러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더 이상 얼쩡거렸다간 또 어떤 의심을 사게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엄마는 다시 한번 기천을 불러 세웠다. 기천은 이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 아이 참, 참외는 나중에 먹는다니 까요. "

새엄마는 불룩해진 배 때문에 일부러 허리를 꼿꼿이 곧추세우며 약간 거만한 눈빛으로 기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거만함은 바로 저 배속에 나오는 것일 거라고 기천은 생각했다.

" 너 그 발목은 어쩌다 그랬니? 혹시 어디서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 거야? "

기천은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지만 겉으로 들어 나게 하지 않으려고 애써 태연한 척 행동했다.

" 구르다니요. 제가요? 아...... 이 건 오늘 체육시간에 축구하다가 다친 거 에요. "

" 그래? 그렇구나. 많이 다친 거니? "

" 아뇨. 그냥 살짝 삐었을 뿐이에요. "

" 그럼 다행이 다만...... 난 또 네가 지하실에 내려가다 실수로 넘어져서 다친 게 아닌가 했지. 나도 전에 한번 그런 적이 있었거든. "

기천은 목 밑으로 감각이 마비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머리만 빼놓고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남은 머리에선 지끈거리는 두통이 생겨, 사지가 없는 머리로서는 도저히 손쓸 방법이 없게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 제가 왜 지하실에 가겠어요. 거기 무슨 볼일이 있다고...... "

" 그렇지?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냥 지하실 문이 열린 거 하고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해서 해본 말이었어. 아무튼 아빠가 오면 지하실 문 좀 손봐놓으라고 해야겠다. "

" 그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어요. 제가 내일 손봐놓을게요. "

" 그래줄래? "

" 네. 그럼요. "

돌아서서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기천의 얼굴엔 하얀 미소가 서려있었다. 그가 손봐놓아야 할 것은 비단 지하실 문뿐만이 아니었다. 기천은 어쩌면 저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 밑바닥에 동훈이 혼자만 묻히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녀석에게도 새로운 동지가 생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