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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슬퍼하는 이상 -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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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 작성자 글보기

번호 37058 추천 0 반대 0 답글 2 조회 67 작성시간 2016-06-25 23: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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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수에게 말하니, 잠시 그쪽에 물어본다고 하더니, 의외로 손쉽게 참가신청을 받아주었다.

……감옥의 마족들은 시작한지 나 같은 애송이가 몇 분 후에 죽을지 동료들과 내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15분이 지나기 전에 죽는다에 걸지.”

“나도 그 전에 죽는다에 걸겠어.”

“그러면 내기가 안 되잖아!”

“하지만 저 녀석이 약해보이는 탓이잖아.”

“저런 멍청한 놈들…….”

나는 옆방에서 들리는 말에 어이가 없어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테렌이 한마디 덧붙이기 시작했다.

“닐런, 나는 10분이 되기 전에 죽는다에 걸게. 넌 어때?”

“…… 당사자가 그런 내기를 해서 어디에 써먹겠냐.”

이런 녀석한테 꼬박꼬박 존대하는 건 멍청한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뭐, 농담이야. 멍청한 소리는 됬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해 둬. 마왕선발이라고는 해도, 형식적인 것에 불과할 테니까.”

“내가 이길 거야. 아니, 못 이기면 끝인 거지만. 그보다 무슨 소리냐?”

“마왕이 될 사람은 이미 정해져있어. 그들이 대회를 여는 건 누가 마왕이 될 재목인지 알아내려는 것뿐이지.”

“야…… 이…… 개…… 그럼 나는 절대 못 이긴다는 거 아니야?”

나는 욕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애초에 승산이 없는 건 알았지만, 이 자식은 내가 나가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서 권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체불명의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니야. 왠지 넌 이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무슨 소리야. 인간이 마왕이 될 수 있겠냐.”

“그냥 내 감이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되는 거야.”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엇이 우연이라는 것일까. 내가 이 곳에 와버린 것? 그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내가 감옥에 오게 된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아니…… 별로.”

“궁금하지 않나?”

“전혀.”

“언제쯤 궁금해질까 닐런?”

“내가 병아리를 길러 성장한 암탉이 낳은 달걀을 매일 감옥 벽에 던져서 벽이 무너질 때 쯤?”

“이제 좀 궁금해졌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끈질기다. 많이 심심했었던 것 같다. 이럴 때는 그냥 원하는 대답을 해주는 편이 낫겠다.

“하아……말해봐.”

“좋아. 그럼 차근차근 알려주도록 하지. 트라이어드（Triad）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나?”

“알겠냐. 난 인간이거든?”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테렌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설명을 시작한다.

“트라이어드는 인간 토벌을 주창하는 마족 연방 최대의 과격파 범죄 조직이다. 트라이어드는 이미 정계 및 각종 사업에 진출하여 이 사회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끼치게 됐지. 트라이어드라는 이름은 고대어 헬샤인으로 삼합회 정도의 뜻을 가지겠군.”

고대어는 말 그대로 오랜 시간 전에 쓰던 언어이다. 그 당시에는 종족의 구분 없이 헬샤인（Helshin）과 렐샤인（Lelshin）이라는 고대어가 마구잡이로 혼용되고 있었다. 그런 언어가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과 같이 변화해 현재의 표준 언어의 형태로 합쳐지게 된 것이다.

“흠…… 인간들은 그런 조직적인 범죄조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당연하겠지. 그들이 날뛸 수 있는 것은 이유가 있으니까. 트라이어드의 3명의 수장 때문이야. 페레그리누스（peregrinus）, 크리새토스（chrysaetos）, 코르부스（Corvus）. 각각 렐샤인（Lelshin）으로 정찰, 염탐, 암살을 담당하는 매, 전투를 담당하는 검독수리, 전술, 사업 등 트라이어드의 두뇌를 담당하는 까마귀를 뜻하는 이 세 명은 개개인의 능력치로도 각 분야에서는 마왕을 제외하고는 최강이고,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반란으로 연방이 붕괴될 수 있어.”

“마왕은 그들을 견제하지 않는 건가?”

“견제하지 않는 게 아니야. 견제할 수 없는 거지. 말했듯이 그들 세 명이 모이면 전면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힘들어. 마왕은 그들을 눈감아주고 협력을 얻어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겠지.”

“근데 그게 네가 감옥에 있는 거랑 상관이 있냐?”

“응. 내 얘기는 지금부터 시작이거든?”

테렌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보다 이 이야기 옆에 다 들릴 텐데, 별 상관은 없나. 뭐, 할 일도 없는데 들어둬서 나쁘진 않겠지.

테렌은 암살자였다. 길드에서 의뢰를 받아 처리해서 돈을 버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직업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일을 하는 뒷 세계의 인간.

그렇지만 돈을 준다고 아무나 죽이고 다닌 건 아니다. 대상 선정에는 그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었다. ‘악의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그것이 그의 기준이었다. 그 기준 덕분에 그는 사람을 죽인다는 죄의식을 애써 버리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다. 하지만, 쌓여오는 죄의식은 더 이상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을 그만두려고 했었다. 죄의식 때문만이 아니라, 이제는 그에게 가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치안유지국의 간부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법적성이 전무해 마검사나 마궁수가 될 수조차 없었지만, 끊임없이 노력해 간부로 까지 승진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그 사이의 딸, 엘리. 아내는 번뜩이는 재능을 가진 딸에게 큰 기대를 안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이루지 못했던 일들을 딸이 대신 이뤄주길 바랐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더러운 일을 하며 살기는 했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가족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가족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은 큰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암살의뢰로 멀리 여행을 떠났을 때에 일어났다. 그 때의 암살 목표는 알레르고, 몽타주에 의하면 중년의 살이 뒤룩뒤룩 찐 탐욕스럽게 생긴 사람이었다. 알레르고는 도시의 어린 소녀를 납치하거나, 빚을 진 가정의 딸을 협박, 또는 오르후스 산 엑스터시（마약）을 흡입시켜 중독 시킨 뒤 그녀들을 이용해 매춘 행위를 일삼는 쓰레기 중에서도 쓰레기였다.

그는 이번 일을 끝으로 암살업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일을 잘 처리한 후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

그는 알레르고를 미행하며 기회를 노렸다. 그는 평소에는 거리에서 이용가치가 있어 보이는 소녀를 물색하며, 손님이 될 것 같은 남성에게는 광고용 종이조각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알레르고가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함께 행동하던 덩치 좋고 인상이 험악한 남성 두 명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허리에 짧은 검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거리에 있던 한 소녀에게 다가가서 앞뒤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했다. 그 다음, 소녀가 당황한 틈을 타서 뒤 쪽의 남자가 소녀의 뒷목을 손날로 쳐 기절시켰다. 그 후 재빠르게 앞 쪽의 남자가 들고 있던 커다란 자루에 그 소녀를 집어넣었다.

그들의 솜씨는 한두 번 해본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이 재빠르게 범행을 하는 사이, 지나가던 행인들은 잠시 눈에 띄는 덩치에 힐끗 바라 볼 뿐 눈치 채지 못한 듯하다.

그 모습을 알레르고는 역겨운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방관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인파에 섞여있던 그는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쓸 만한 년이야. 이히히…….”

그가 중얼거리는 틈을 타 그의 바로 뒤까지 붙은 테렌은, 허리에 찬 소리가 나지 않게 제작된 칼집에서 붉은 단도를 뽑았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그 배불뚝이 녀석의 더러운 입을 장갑 낀 손으로 막고 신속하게 알레르고의 목을 칼날로 그어 경동맥과 기도를 잘라냈다.

알레르고는 목에서 엄청난 양의 피를 뿜어대며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길바닥에 쓰러졌다. 이 것으로 세상의 쓰레기는 하나가 줄었다. 그는 잘못되지 않았다. 이렇게 자기 암시를 해대도 그의 마음속의 죄악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다음은 납치당하는 소녀를 구해야한다. 험악한 남성 두 명이 자루를 들쳐 메고 알레르고가 있던 쪽으로 돌아오려다가 갑자기 살해당한 알레르고와 붉은 단도를 들고 있는 테렌을 발견하고는 당황한 듯하다.

“암살이다! 암살자가 나타났다! 경비대!”

그들은 피 묻은 단도를 들고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마스크까지 쓰고 있는 테렌의 모습, 암살자를 보고는 소녀가 들어있는 자루를 내려놓고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그 녀석들은 덩치만 크고 약자에게만 강한 평범한 쓰레기였다.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경비대가 올 것이다. 소녀는 …… 아마 괜찮겠지. 일단은 이 자리를 피해야한다. 그는 후드와 마스크를 착용했기 때문에 얼굴이 알려질 일은 없으니 제대로만 도망치면 문제없다.

그는 빠르게 달려 뒷골목을 이용해 도망쳤다. 그는 프로다. 경비대에게 잡히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풀렸다. 이제 이 의뢰를 끝으로, 더 이상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기쁘다. 그 동안에 모아놓은 재산이 있으니 아내의 월급 정도면 돈이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도시의 역참에서 말을 빌려 집으로 향했다. 역참은 보증금과 대여료를 낸 뒤에 말을 빌릴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보증금이라는 게 말 한 마리 가격에 맞먹다보니 보통 서민들은 이용하기 힘들었다.

그는 그렇게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그는 현관문 앞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주워 찬찬히 살펴보았다.

“락픽……?”

락픽은 자물쇠를 따기 위한 귀이개를 닮은 작은 도구이다. 원래는 돌림통을 돌리는 도구와 함께 사용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하나 밖에 떨어져있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불안해지기만 하는 마음으로 현관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뒤, 문고리를 천천히 돌렸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덜컥하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문이 열렸다.

현관에서 본 광경은 처참했다. 집안에는 싸늘한 죽음의 냄새가 가득했다. 바닥의 말라붙은 핏자국, 군데군데 박혀있는 화살과 비수, 그리고 …… 가슴에 비수가 박혀 피를 흘린 채 처참히 죽어있는 아내의 시체가 거실 벽에 기대있었다.

그는 불행하게도 딱 들어맞은 그의 예감에 좌절했다. 정상적인 판단은 불가능했다. 모든 게 허무해졌다. 더는 아무것도 못할 것처럼 무기력해졌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다시 한 번 그녀의 시체를 바라봤다.

‘죽었어…….’

혹시나 해서 그녀의 맥박을 짚었지만, 느껴진 것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녀의 체온뿐이었다. 살며시 잡아본 그녀의 왼손은 온기하나 없이 차가웠다. 약지에 낀 결혼반지만이 은은히 빛나며 그의 가슴을 찢어지게 할 뿐이었다.

그 때 그는 그녀의 오른손이 등 뒤를 향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음……?’

그는 그녀의 오른손을 끌어당겨 확인했다. 그녀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에는 혈액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녀의 상처는 흉부에 나있었다. 그런데 손가락에 피가 묻어있는 이유는 왜지?

그 이유는 다음 순간에 바로 깨달았다. 그녀의 등 뒤의 바닥에는 붉은 글씨로 적힌 고대어 한 단어가 있었다.

TRIAD

“트라이어드…….”

그것은 아마 다잉 메세지였을 것이다. 트라이어드…… 그 녀석들이 죽인 걸까? 왜일까? 하지만 이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젠 다시 아내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엘리…… 엘리는 어디 있지?”

그래. 생각났다. 분명히 학교에서 합숙 일정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후이다. 그녀는 오늘 아침에는 돌아올 예정이었다.

“설마……?”

그는 미친 듯이 엘리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와 아내의 침실, 엘리의 침실, 서재, 화장실, 주방, 그 어느 곳에도 딸의 자취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거실을 찾아보려했다. 그 순간에, 그는 다시금 아내의 시체를 보고 그녀의 죽음을 재인식했다.

때늦은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아아…….”

정말로 죽었구나. 더 이상은 만날 수 없구나.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아프게 저려왔다.

그는 애써 떨쳐내려고 애쓰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거실을 찾아봐도 딸의 행방에 관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그만 기운이 빠져버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테이블의 아랫면에 무언가 붙어있었다. 그것은 편지봉투였다.

그는 그 편지봉투를 떼어내어 봉투를 열고 편지를 확인했다.

Dear 나의 아버지, 테렌

저는 지금 엄청나게 무섭습니다.

합숙에서 돌아와 집 문을 여니,

엄마를 죽인 살인자와 눈이 마주쳐버렸습니다.

제가 활을 꺼내자 그는 바로 창문을 통해 도망갔습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범행을 목격한 이상 가만히 두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당분간 이 도시를 떠나겠습니다.

이 편지가 읽어질 거라고 믿습니다.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건강하세요.

Sincerly yours,

엘리

휘갈겨 쓴 글씨에는 당시의 공포와 급박함이 생생히 드러나 있었다. 어찌되었건 딸이 살아있다니 살짝은 안심이었다. 단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누군가가 이 편지를 찾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후로 그는 암살업을 그만두게 되었다. 아내의 장례식을 소소하게 치르고 난 뒤, 그는 삶의 목적을 잃고 술과 도박에 절어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흘려보냈다. 아내를 죽인 암살자도, 딸아이의 소식도 찾아오는 일을 없었다.

그렇게 모아두었던 재산을 펑펑 써대며 열흘쯤이 지났을 무렵, 그는 여느 때 같이 술에 취해 거실 바닥에 늘어져있었다.

쾅 쾅 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취해서 탁한 정신으로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문으로 향했다.

“으으…… 우리 집에…… 올 사람이…… 없을 텐데…….”

그는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었다.

“편지입니다. 테렌 피렌스 씨 맞으시죠?”

키가 작은 우편 배달부가 그에게 편지봉투를 건넸다. 그 봉투에는 발신자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채였다.

그는 테이블 의자에 비틀거리며 앉아 술에 취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이용해 봉투를 뜯고 안에 들어있는 편지지를 꺼내들었다.

Dear 테렌 피렌스

선생님이 트라이어드 수장 중 하나인 코르부스를 처리해 주시길 원합니다. 사례금은 100만 이비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Sincerely,

당신을 지지하는 누군가

사례금은 그에게는 관계없었다. 애초에 받을 수 있는지 조차도 불분명한 의뢰였다. 하지만, 텅 비어있던 그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복수심이 불타기 시작했다. 그를 이렇게 만든 놈들, 트라이어드를 향해. 흐렸던 정신은 어느새 맑아지기 시작했다.

“트라이어드…….”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어나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그간에 녹슬어 삐걱거리던 몸은 복수심을 매개로 다시 생기가 흘러넘친다.

그는 예전에 입던 후드가 달린 검은 로브를 입고 후드를 눌러썼다. 그리고 검은 가죽 장갑을 손에 끼고는, 내가 애용하던 나이프를 꺼내 살펴보았다. 심플한 디자인에 피처럼 새빨간 외날의 검신이 특징인 그 나이프는 그간의 휴식에도 전혀 녹슬지 않고 예리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나이프를 전용 홀더에 넣고 투척용 비수를 찾아봤다. 하지만 서랍에 놓여있던 양산품 비수는 나이프와 달리 시간을 이겨내지 못하고 붉은 녹이 슬어있었다.

“못 쓰겠네 이건.”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중에 대장간에라도 가져다 팔까. 비수는 새로 사야할 것 같다. 그는 집을 나서 무기상으로 향했다.

낮 시간의 거리는 눈부시게 활기찼다. 도시의 상점가는 행인들과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로 가득했다. 그는 쓰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평소에 이용하던 무기상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익숙한 얼굴이 그를 반겼다.

에일러, 그녀는 이곳의 여주인이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미망인으로서, 남편이 하던 무기상을 이어받아 일하고 있다.

“흐음~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네?”

그녀가 접대용의 밝은 미소를 띤 채 나에게 말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저기…… 혹시…….”

그는 뒷말이 이어지기 전에 애써서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괜찮아.”

그녀는 아마 그가 아직도 아내의 죽음에 대한 충격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은 그렇다. 그는 아직도 과거에 머무른 채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럼……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손님?”

그녀는 다시 미소를 되찾으며 말했다. 나는 언제쯤 다시 저 같은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요새, 나는 도저히 웃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수.”

어쨌든 그는 그녀에게 용건을 말했다. 그녀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반에서 비수 묶음이 들어있는 상자를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한 묶음에 2000이비.”

“너무 비싸지 않냐……? 아는 사이인데 좀 깎아주지 그래?”

“흐음…… 알았어. 간만이니까 1600이비에 줄게.”

에일러가 선심 쓰는 듯이 나에게 말했다.

“콜.”

나는 무심코 그렇게 내뱉었다. 혹시 그녀가 레이즈를 하려나? 하고 터무니없는 생각을 해버렸다.

…… 아무래도 요즘 도박을 너무 많이 한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도 꽤 중증이다.

“다이.”

그 때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아니, 거기서 다이를 하면 안 되지…… 가 아니라 뭐야?”

“어맛, 실수.”

그녀가 손가락으로 살짝 입을 가리고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신을 차리니 그는 어느새 웃고 있었다. 별 것 아닌 일인데, 지금까지의 침울한 기분이 장난이었던 것처럼 왠지 즐거웠다.

“농담이야. 네가 너무 우울해보였으니까.”

그녀가 왠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과연, 그녀가 도박을 즐길 것 같지는 않으니까.

“고마워.”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놀란 듯이 말했다.

“헤에? 테렌이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아이였던가?”

“평소에 날 뭘로 보는 거야…… 그보다 왜 갑자기 아이 취급이야?”

이어서 그녀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것도 농담.”

“그런가.”

순간, 그녀의 얼굴이 살짝 흐려지면서 그녀는 말했다.

“네가 안보여서 걱정됐어. 그래도 건강해보여서 다행이네. 사실 조금 보고 싶었거든.”

“그것도 농담?”

“아니…… 이건 진심이야.”

그녀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그래.”

그는 아직 이런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얼마 전 모든 가족을 잃어버리고 그는 아직도 사람을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그는 비수 한 묶음을 집고 카운터에 1000이비짜리 은전 두개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400이비는 팁이야. 즐거웠어.”

그러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원래 2000이비잖아, 바보야.”

그는 그 말을 뒤로 한 채 바지의 허벅지 부분에 달린 작은 가죽제 파우치에 비수의 묶음을 풀어 수납했다. 그리고 비수를 묶던 끈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가게를 나섰다.

“몸조심해. 무리하지 말고.”

그녀가 나지막이 나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그는 그 길로 바로 역에서 말을 빌려 트라이어드의 코르부스가 거주한다는 대저택으로 향했다.

트라이어드는 정권과도 결탁한 조직이어서 공식적으로는 불법 조직이 아니다. 이따금 트라이어드의 조직원이 법의 처벌을 받는 경우는 있지만, 수장 세 명은 마왕과의 정치적 결탁으로 법의 적용을 벗어난 실정이다.

따라서 트라이어드의 아지트의 위치도 대부분 공개되어있다. 코르부스의 거처가 오르후스 시의 대저택이라는 것은 암암리에 널리 퍼져있었다.

오르후스 시는 그가 사는 랑제 시에서 말을 타고 2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한 도시이다. 오르후스 시는 도시의 토지와 공방의 대부분을 트라이어드가 소유하고 있고, 지방 관청의 관료도 트라이어드 계가 많다. 사실상 트라이어드의 자치시 같은 형태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보니 주민들은 각종 범죄에 쉽게 노출된다. 언제든지 뒷골목에 가면 마약을 거래할 수 있으며, 도박장에서는 사기도박이 판을 쳤다. 거리에는 소매치기가 넘쳐나서 정신을 차려보면 지갑이 없어졌다고 하는 상황도 자주 발생한다.

이 곳의 주요 산업은 마약제조, 카지노 등이다. 마약 제조소는 표면적으로는 의약품 제조 공방이지만, 내부에서는 가루 형태의 마약을 조제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만들어진 마약은 비밀리에 곳곳의 도시로 유통된다.

엑스터시라는 이름의 그 마약은 흡입하면 기분이 황홀해지고 자신이 보고 싶은 환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즐거운 이야기처럼 들릴 지도 모르지만, 그 이면에는 정신이 황폐화되고 장기의 기능이 손상되며, 무시무시한 중독성을 가진다는 부작용이 있다.

때문에 그 중심지인 이 곳에는 길거리에 마약 중독자들이 넘쳐난다. 게다가 그들이 엑스터시를 살 돈을 구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결국 아까 말했던 각종 범죄들과 더불어 이 때문에 오르후스 시는 치안 시스템이 붕괴되다시피 했다. 경비대는 이젠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트라이어드의 충견으로 전락했다.

마왕에게도 이 도시는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그는 마약 유통을 차단하고 싶어 했지만, 마약 제조소는 코르부스의 소유라 정치적 계약에 의해 건드리지 못했고, 유통 경로를 알아내기가 힘들어 유통도 차단하기 힘들었다.

이런 정보는 내가 한창 암살 길드에서 일할 때 얻어낸 것이다. 실제로 가본 적도 있었기에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는 늦은 오후에서야 오르후스에 도착한 뒤, 역에 말을 반납하고 보증금을 돌려받은 뒤에 코르부스의 대저택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거적떼기를 입은 거지가 그의 옷을 부여잡고 돈을 구걸했다. 거렁뱅이의 몸에서는 한참동안 씻지 않은 듯 시궁창 냄새가 났다.

“10이비만 주십쇼. 나으리…….”

평소 같으면 밀쳐냈겠지만, 왠지 오늘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시원스럽게 10이비짜리 동전을 하나 꺼내서 건넸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감사합니다.”

걸인은 연거푸 굽실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무엇이 그를 길바닥으로 내몰았을까? 그는 잠시 그런 생각에 빠졌지만 이내 그만뒀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아니니까.

도착해서 정문을 통해 본 코르부스의 대저택은 정말 호화로웠다. 겉에서 보기에도 3층짜리 석조 건물은 주인의 막대한 부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넓은 정원에는 고급스러운 정원수와 잔디밭, 그리고 관리가 잘 되어있는 연못이 있었다.

그는 저택의 트라이어드 경계병에게 의심을 사지 않게 조심하면서 저택의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저택 주위를 돌며 나는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저택 주위는 그의 키를 살짝 웃도는 담장이 둘러싸고 있고, 거기에는 긴 둘레에도 불구하고 정문을 제외하고는 출입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특이한 점은, 저택의 3층에는 창문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도 3층이 코르부스의 활동 영역일 것이다.

하지만 담장에는 별다른 장치가 없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그는 담장을 넘어 침입하는 게 더 용이할 것으로 판단했다. 정문에는 상시 경비가 서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침입, 암살의 과정을 상상하며 어둠이 이 곳에 내려앉을 때까지 정문 근처에 숨어서 대기했다. 몸이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목표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과정을 시뮬레이션한다.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까지 미래를 예측 가능하다. 실패할 계획이라면 다른 걸로 바꿔치기해서 성공할 때까지 뇌를 혹사시킨다. 그게 그가 암살자가 된 이유이자 능력이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에 빛이 사라지고 밤이 찾아왔을 때, 그는 행동을 개시했다. 마침 얇은 초승달은 흐릿한 빛만을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어둠에 익숙한 그와 같은 족속에게는 딱 알맞은 환경이다.

그는 시간에 맞춰 정문 기준으로 오른쪽 둘레의 담장을 넘었다. 그리고 잽싸게 뛰어서 근처의 정원수 뒤에 몸을 숨겼다. 이 곳은 정문과 약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그에게는 최적의 위치였다.

그 때, 정문을 지키던 병사 두 명과 새롭게 오는 병사 두 명이 근무 교대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순찰을 도는 병사들이 보였다. 아마 이 쪽까지 올 때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있다. 그 때까지 처리하자.

그 병사들은 하나같이 왼손에 랜턴을 들고 다녔다. 그 덕분에 이 쪽에서 발견하는 쉬웠다.

트라이어드의 경비병들은 삼각형의 로고가 박힌 짙은 청색의 두꺼운 제복을 입고 있었을 뿐 별다른 방어구는 갖추고 있지 않았다. 아마 말단의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죽음으로 적의 침입을 알리는 것’ 정도일 테다. 그들의 왼쪽 허리춤에 달려있는 짧은 한손검도 그다지 위협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 관찰한 교대 간격에 가까스로 맞췄다. 사실 좀 더 일찍 들어오려 했지만, 감각만으로 잰 시각은 살짝 어긋났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행히 결국 문제는 없다. 그는 교대하는 병사들이 근처에 왔을 때에 거리에서 주워온 빈 유리병을 약간 떨어진 구석의 정원수에 던졌다. 그리고 그는 나무 뒤에 숨어 상황을 지켜봤다.

빈 병은 빙그르르 회전하며 포물선 궤도로 날아가 목표로 하던 나무줄기에 부딪혀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났다.

이 고요한 밤에 그 요란한 소리는 교대하고 건물로 돌아가는 병사들에게 틀림없이 들렸을 것이다. 게다가 이 거리에서라면 정문을 지키는 병사에게는 미미한 소리만이 들릴 테다.

실제로 정문의 병사들은 이 쪽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반면에 교대를 하고 돌아가던 두 명의 병사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분명히 반응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차가운 밤공기를 타고 테렌에게 들려왔다.

“야, 저기서 뭔가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그 병사는 내가 빈 병을 던졌던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의 병사가 대답했다.

“흠, 그러냐? 네가 가서 확인해보고 오지 그래?” “귀찮거든. 그럼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진 사람이 갔다 오기로 하자.”

그러고는 두 명의 병사는 가위바위보를 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먼저 제안한 쪽의 승리. 주먹을 내서 가위를 이겼다. 패배한 병사가 투덜거렸다.

“쳇.”

“낄낄…… 그럼 먼저 갈 테니 천천히 오라고.”

그 말을 남긴 채 승리한 병사는 가던 길로 저택을 향했다. 홀로 남겨진 병사는 한숨을 내쉰 뒤, 아까 테렌이 병을 던진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최상의 시나리오다. 두 명 전부 온다고 해도 괜찮긴 하지만, 한 명만 유인된다면 일은 훨씬 수월해진다. 그 나무쪽으로 천천히 걸어온 병사는 깨진 유리병 조각을 발견하고 그 쪽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아 그것을 살펴보았다.

“음…… 뭐지? 이게 왜 여기에 있을까.”

그는 다른 사람들한테는 잘 안 보이는 사각에 있었다. 테렌은 눈치채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발소리를 죽이고 신속하게 그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그 병사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이 멍청하게 앉아있었다. 테렌은 그 틈을 타서 양손으로 그의 목을 뒤에서 세게 졸랐다. 병사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내 손을 떼어내려고 저항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의 입에서는 비명소리 대신에 맥없이 새는 바람소리만 날 뿐이었다.

“끄…… 어…….”

그는 끊임없이 발버둥 쳤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테렌은 그 후에도 얼마간 목을 조른 상태를 유지해, 그의 맥박이 멈추길 기다리고 그 뒤에 그를 나무에 기대놓았다.

테렌은 랜턴을 꺼버린 후 그 병사의 제복을 벗겼다. 그리고 검은 암살자 로브를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내 단도를 허리춤에 차고, 허벅지 부분에 비수가 들어있는 파우치를 달았다. 제복의 사이즈가 살짝 크긴 했지만, 활동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의 양 어깨에 붙어있는 줄 하나짜리 계급장은 아마 최하위 계급이겠지. 트라이어드는 군과 비슷하지만 독자적인 계급체계를 지니고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그 병사에게 그가 입던 로브를 입혔다. 죄악감이 더욱 그를 압박했지만, 그는 멈출 수는 없었다. 그 녀석도 아내를 살해한 범죄조직의 일당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오래도록 이런 일을 해온 그는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이 일에.

어느 새 반대편에서 순찰 중이던 병사 두 명이 정문 부근까지 왔다. 빨리 행동을 개시해야겠다. 그는 나이프에 묻은 피를 로브에 대충 닦고는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는 조용히 저택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벽을 타고 올라가 2층의 창문으로 침입했다.

언뜻 본 주변에는 등불이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법사들 중에서는 마력을 이용한 마력 램프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마력이 아깝다고 그냥 재래식 등불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긴, 이 커다란 저택을 전부 밝히려면 마력이 무시 못 할 만큼 소모될 테니까.

드넓은 2층은 병사와 간부들의 숙소로 보였다. 호텔의 객실처럼 복도를 따라 늘어서 있는 방들에는 각자의 이름들이 적혀있었다.

중앙계단의 오른쪽에서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그는 무슨 일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천천히 그 쪽 방으로 걸어갔다.

그는 닫힌 나무문에 귀를 대고 안 쪽의 소리를 엿들었다. 안에서는 소란스러운 외침이 들렸다.

“J 트리플.”

“내가 이겼어! 나는 7 스트레이트다!”

“안 됐네. 나는 스페이드 플러시다.”

“제기랄! 가진 돈을 전부 걸었는데! 다시 해! 내 시계를 건다!”

왠지 저들에게서 익숙한 느낌이 든다.

‘나도 요즘에는 저런 식으로 살았지…….‘

어쨌든 저런 병사들이라면 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는 문에서 귀를 떼고 복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복도 끝까지 걸어가니, 그 곳에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하지만 계단에는 불빛이 전혀 없어서 음침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도록 하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멀리에서 아득하게 떠드는 소리와 함께 나무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 음습한 기분을 심화시켰다.

계단을 올라간 끝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그는 시험 삼아 문고리를 잡고 돌려봤다.

덜컥 덜컥

하지만 잠겨있던 문고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준비해왔던 락픽을 꺼냈다. 쇠로 만들어진 귀이개 같은 생김새의 락픽과, ㄱ자 모양으로 생긴 보조도구다.

그는 열쇠구멍 하단에 ㄱ자 모양의 보조도구의 끝부분을 집어넣고 힘을 살짝 주어 돌리면서 기다란 락픽을 집어넣고 밀어 올리면서 몇 번을 왔다갔다 왕복한 다음에 락픽을 빼고 열쇠구멍을 돌렸다. 그러자 찰칵하면서 잠금이 해제되었다.

나는 락픽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고 문고리를 살며시 돌리고 문을 당겨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

바닥 근처의 와이어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쳤다. 함정이었다.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보통 사람이었다면 무심코 들어가다가 함정을 작동시켰겠지.

그는 주의해서 주변을 살펴보면서 와이어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눈앞에는 문 쪽을 겨냥하여 몸통 높이를 조준하고 있는 쇠뇌가 있었다. 건드렸었다면 저 쇠뇌의 볼트가 나의 심장을 꿰뚫었겠지.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른쪽의 긴 복도 끝에 커다란 문이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굳게 닫힌 문틈에서는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에 와이어가 너무 많았다. 그것들 각각이 어디에 연결 되어있는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건드릴 수는 없었다.

두꺼운 트라이어드의 청색 제복은 움직이기에 너무 거치적거렸다. 그는 옷을 벗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버려두고 나이프와 파우치를 챙겨 얇은 내의만 입은 채로 복도를 나아갔다.

“흐읍…….”

어두침침한 복도에서 나는 몸을 뒤로 젖히거나 두 줄 사이를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통과하는 등의 갖가지 곡예적인 자세를 취해가며 복도 끝의 커다란 문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와이어의 배치를 통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코르부스 자신도 이 길을 이용하기 때문일까?

그는 커다란 문 앞에 엉거주춤 서서 문고리를 살짝 돌려보았다. 문고리는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돌아갔다. 이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그대로 손으로 문을 천천히 밀어 열었다. 어둠에 익숙해져있던 눈에 갑작스럽게 빛이 쏟아져 눈이 부셨다. 문 옆의 벽에는 기름 등불이 걸려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눈이 어느 정도 빛에 익숙해지자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이 곳은 넓은 서재였다. 책 냄새가 가득한 큰 공간 안에는 책장이 빽빽이 들어차있었다.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책만 읽는다고 해도 다 읽을 수 있을 지가 의심되는 양이었다.

그 중앙의 테이블에는 한 마족 여성이 앉아있었다. 뒷모습뿐이었지만 테이블 위에는 책 한권이 아무렇게나 펼쳐져있고, 두 팔은 의자의 팔걸이에 축 늘어져있으며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 잠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확실히 복도의 와이어 트랩은 모르고 있다면 걸리기 쉽기는 하지만 이렇게 무방비라면 목숨은 보장받지 못한다.

그는 여기서 머릿속으로 다음에 행할 일련의 행위들을 시뮬레이션한다. 접근, 살해, 도주, 괜찮다.

그는 잠을 깨우지 않게 조심하면서 슬그머니 그녀의 뒤쪽으로 다가가며 허리에 차고 있던 붉은 날의 나이프를 소리 없이 꺼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바로 뒤까지 왔을 때 ― 그는 망설임 없이 왼손으로 그 녀석의 입을 틀어막고 오른손의 나이프를 목에 그었다. 그러자 스윽하고 천 조각이 잘리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뿜어져 나온 피는 수많은 방울의 형태로 땅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딸랑 따라랑

그 때, 그는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땅바닥에 떨어진 것은 피가 아니었다. 지금 보니 그것은 수많은 작은 붉은색 방울이었다. 그리고 그가 죽였다고 생각한 녀석은, 생명이 없는 봉제 인형이었다. 그는 어째서 이런 것에 속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내가 봤을 때는 분명히 마족이었어.“

그 때, 무거운 물체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출입구 왼쪽에 있던 책장이 열리면서 그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피렌스 씨, 아직 더 준비된 함정이 있는데, 이 정도에 걸리시다니 실력이 많이 녹슨 것 같군요.”

아직 진 것은 아니다. 적은 마법사, 기습이라면 주문을 영창하기 전에 죽일 수 있다. 그는 왼손으로 허벅지의 파우치에서 신속하게 비수를 꺼내들었다.

코르부스와의 거리는 약 10미터 정도. 이 정도면 맞출 수 있다. 그는 오른손에는 아직도 나이프를 든 채 호흡을 멈추고 전신을 이용해 팔을 내려치듯이 비수를 던졌다.

회전을 거의 주지 않는 무회전 투검. 비수는 회전 없이 빠르게 코르부스의 머리를 향해갔다. 코르부스는 아직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날아간 비수가 그녀의 두개골을 꿰뚫고 머리에 박히려던 순간 ―

그녀는 머리를 오른쪽으로 숙여 피했다. 그 결과 그가 던진 비수는 그녀가 나타났던 책장 사이의 통로로 들어가 바닥에 떨어져 날카로운 금속음을 낼 뿐이었다.

“제가 마법사라고 해서 둔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저는 대화를 하고 싶은 것뿐이니까 진정하시죠.”

코르부스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매우 민첩했다. 기습의 이점이 사라진 이상 더 이상의 비수 투척은 소용없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벌써 아래층에는 소집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얌전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녀가 큭큭 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저 녀석이 원하는 대화에 어울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흥분된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는 오른손의 나이프를 꽉 쥐고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그녀가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피렌스 씨답네요. 그럼 대화를 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까지 한 번 어울려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틈을 노려 그녀에게로 뛰어들며 왼손을 뒤로 뻗어 균형을 잡고 오른손의 나이프를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수평으로 휘둘렀다.

잡았다 ―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영창을 끝낸 코르부스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숙이면서 왼손을 올려쳤다. 그녀의 손바닥에 맞은 그의 나이프는 궤도를 이탈해 그녀의 머리 위를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지나갔다.

그녀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아니, 마법사지만 전투 스타일은 전혀 마법사가 아니다. 그녀는 ‘격투가’다. 아까의 날렵한 움직임도 그녀가 격투가라면 설명이 된다.

그녀는 연이어서 허리춤에 대고 있던 오른손의 주먹을 그의 명치로 올려쳤다. 나이프를 헛 휘둘러 대응할 틈이 없었다. 팍하는 듣기만 해도 위험해 보이는 소리와 함께 그에게로 주먹이 먹혀들었다.

“커헉…….”

그는 그 충격으로 살짝 뒤로 날아가 바닥에 털썩하며 쓰러졌다. 격렬한 통증이 느껴지며 눈앞이 흐려졌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흉골이 부서졌을 수도 있다. 단 일격만으로 이렇게까지 목숨을 위협하는 그녀의 실력은 역시 트라이어드의 악명에 걸맞았다.

“어때요? 이제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생기셨을라나?”

그녀가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그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누운 채였다.

“켁…… 컥…….”

말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큰 충격을 받은 심장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자 코르부스가 시시하다는 듯이 말했다.

“흐음…… 한 방에 이렇게 뻗어버리시다니, ‘수확자’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약해빠지셨습니다?”

그 때, 방울소리가 연거푸 울리고는 살짝 열려있던 출입구가 활짝 열리며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그 중 리더 격으로 보이는 자가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자네들은 문이나 지키고 있게.”

코르부스가 그들을 바라보며 한마디 하고는 다시 테렌의 쪽을 돌아봤다.

“그럼 이제 우리 둘만의 대화를 해볼까요? 안되셨군요. 저는 당신 같은 암살자들의 천적과 같은 존재입니다. 격투기술을 익힘과 더불어서, 마력으로 반사 신경, 동체시력, 손의 피부, 뼈의 강도, 근력까지 모든 걸 강화시켜서 싸우는 특이한 녀석이니까요.”

“닥……쳐…….”

그녀는 쓰러져있는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 무언가 중얼중얼 주문을 영창 했다. 그녀의 손에서 마력의 푸른빛이 맴돌았다. 저항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마시죠, 아직 몸이 불편할 텐데.”

그녀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피렌스님한테 간 그 의뢰, 누가 보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보나마나 뻔하지. 그는 가까스로 돌아온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도 말하는 것이 자유롭진 않았다.

“너겠지…….”

“정답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 나는 왜 당신에게 그런 지령을 보냈을까요?”

“나를…… 이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그렇지만 어째서…… 나를 유인하려 한 거지?”

“어떤 멍청이가 암살 임무를 수행하다가 가져오라고했던 중요한 문서를 흘리고 목격자까지 남기고 왔었죠. 그래서, 당신이 집을 비운 틈을 타서 뒤져보라고 명령했지만 몇 번을 뒤져봐도 못 찾은 겁니다. 결국 그 녀석은 해고당했습니다.”

“나는 그런 건 몰라…… 나에게 원하는 게 뭐야?”

“흐음, 그런 것 같네요. 당신의 기억 어디에도 그 문서에 대한 것이나 딸의 위치 같은 건 없네요. 참고로 이 곳으로 당신을 부른 이유는 별 거 없어요. 그냥 찾아가기가 귀찮았을 뿐. 제 부하 중에는 당신을 이길만한 녀석은 없거든요.”

그녀가 그의 머리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기억을 뒤지는 마법이라니, 들어본 적은 없다. 아마 코르부스 만이 독자적으로 쓸 수 있는 마법이겠지.

“내 딸은 건드리지 마라.”

그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목소리는 꽤 돌아와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몸은 아직까지도 살짝살짝 경련할 뿐 움직일 생각을 안했다.

“하지만 당신의 딸이 이번 마족제의 토너먼트 예선전에 출전한다는 정보를 손에 넣었어요. 이제 당신의 딸이 발견되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요?”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나를 죽이기 전엔 절대로 내 딸은 건드릴 수 없어…….”

“네에? 제가 왜 당신을 죽입니까? 제가 하는 일은 세계의 비밀을 밝히는 것뿐입니다. 그 중 하나를 알려드리자면, 이 세계에서는 노력한 만큼 능력이 향상된다는 게 있죠. 사람마다 향상 속도와 한계가 다르지만 말입니다. 예를 들어, 근력의 향상은 근육 량의 증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런 건 관심 없어. 네가 사람을 한 명도 죽이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그녀가 불쌍한 동물을 보는 듯이 그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제 손으로 단 한명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어떻죠? ‘수확자’로서 도대체 몇 명을 죽였는지 기억도 못하죠?”

그녀의 말이 그의 가슴에 싸늘한 가시가 되어 박힌다. 잊었던 죄악감이 스멀스멀 그의 몸을 타고 기어오른다. 그는 애써서 반박한다.

“네 손으로 죽이지 않았을 뿐이지. 너는 간접적으로 수많은 살인행위를 저질렀어.”

“음, 그렇게 따지면 피렌스 씨는 자신의 의지로 죽이지 않았으니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게 되나요?”

“아니…….”

“사실 저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나 돈을 버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사람을 죽이건 말건. 단지 세계의 비밀을 탐구하는 것 외에는 더럽게 귀찮을 뿐이죠.”

딸이 위험하다. 어떻게든 지켜야 할 텐데……. 몸의 감각도 어느 정도 돌아왔다. 그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들고 빠르게 일어나 입구로 향했다. 아마도 내가 들어왔던 곳 빼고는 출입구가 없을 것이지만, 입구에는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어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는 허벅지의 파우치에서 비수를 두 개 꺼내서 달려가면서 짧은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빠르게 연속으로 던졌다. 빠르게 날아간 비수는 입구를 지키고 있던 트라이어드의 병사 두 명의 심장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으흐윽…….”

그렇게 신음소리를 내며 그들은 바닥에 많은 양의 혈액을 쏟으며 쓰러졌다. 그들이 앞으로 쓰러지자 가슴에 박힌 비수가 심장을 더욱 헤집었다. 그들은 그렇게 죽었다. 테렌에게는 또다시 씻을 수 없는 악행의 업보가 쌓여갔다.

동료의 죽음으로 진형이 혼란해졌다. 그는 계속해서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그 때, 한 녀석이 그 곳을 이탈해 테렌에게로 맞서서 칼을 빼들고 달려왔다.

“이 개자식아아아아! 내 패는 A 포카드였다고!”

저 녀석은 아마도 아까 돈을 잃어 소리를 지르던 놈 이였을 것이다. 상당히 도박에 미친놈인 것이 틀림없겠지. 테렌은 흥분해서 달려오는 그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가볍게 피하고 붉은 나이프를 휘둘러 복부를 깊게 갈랐다. 배를 움켜잡으며 쓰러진 그의 복부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아마 내장까지 다쳤겠지.

한 명이 대열을 이탈하자 진형이 붕괴되며 다른 병사들도 그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중 양 어깨에 다이아몬드 하나가 그려져 있는 한 병사가 검을 휘두르며 그에게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수직으로 내려 베어오는 그의 검격을 나이프를 올려쳐 튕겨내었다. 챙하고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검의 무게에 의한 충격이 장갑 낀 손 너머로 전해져왔다.

그는 빈틈을 노려 병사의 목을 나이프로 잘라냈다. 잘린 혈관에서 피가 튀어 내 얼굴에 흩뿌려졌다. 그는 그대로 무너져 바닥에 쓰러졌다. 죄악감이 또 다시 그를 덮친다. 그 동안 저지른 살인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그 때, 그의 등 뒤에서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그가 뒤를 돌아보자, 코르부스가 오른쪽 발뒤꿈치를 들어 약간 숙여있는 그의 척추를 찍어 내리려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나이프를 휘둘러 그녀의 발을 튕겨냈다. 간신히 튕겨냈지만, 그 충격이 그대로 그의 손에 전해져 나이프를 놓칠 듯이 손이 떨린다. 그녀의 부츠 또한 마법으로 강화된 듯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호오…….”

그녀가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아직 튕겨내진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이내 입을 열었다.

“뒤쪽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그는 그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 그를 노리고 베어오는 오른쪽 횡베기. 그는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왼손을 바닥에 짚고 그것을 회전축으로 해서 오른쪽다리로 바닥을 후렸다.

그의 다리에 맞아 기우뚱하며 무게 중심을 잃은 병사는 그대로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 다시 뒤쪽이 위험하다. 그는 다시 일어서며 뒤를 돌아봤다.

그 때, 그가 본 것은 번개와 같은 빠르기로 나에게로 차 들어오는 돌려차기였다. 그는 반응할 틈도 없이 옆구리에 몇 백 킬로그램 급의 충격이 닥쳐오는 걸 느끼며, 말 그대로 날아갔다.

그렇게 날아가 책장의 벽에 부딪힌 그는 무너져 내린 책의 더미에 깔리는 걸 느끼면서 의식을 잃어버렸다.

몸이 나른하다. 몽롱한 의식 상태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이 들린다. 쌓여있던 피로가 단번에 몰려와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끌려오면서 적당히는 치료받았지만 그 때 다친 갈비뼈는 지금까지 말썽이지. 겉보기에는 별로 티가 안 나지만 말이야. 야, 닐런! 내 말 듣고 있어?”

맞다. 나는 테렌의 이야기를 듣다가 벽에 기대앉아 졸았구나. 어디까지 들었더라? 테렌이 플래그가 꽂혀있는 무기상의 여주인이랑 노닥거리던 이야기였나. 딸이 사라진 것 까지는 기억난다. 음, 마족들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구나.

그래도 그의 불행한 과거 이야기는 잘 들었다. 트라이어드가 썩을 놈의 집단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어쨌든 나는 입을 열었다.

“아니, 너 너무 말이 길어. 자고 있었어.”

그러자 테렌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너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니냐? 흠, 그래도 감옥에 들어오고 나서 애써서 밝아지려 했더니 조금 이상했나.”

“너한테 신경 쓰느라 낭비할 에너지는 없으니까. 아, 신경 안 써주면 암살당하는 건 아니지?”

“뭐, 어쨌든. 너는 예전의 나와 닮아있어. 무언가 소중한 걸 잃어버린 녀석 같은 느낌이 드니까.”

소중한 것이라…… 나는 문득 리브애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를 구하고 싶어서 뭐라도 하기로 했다. 마왕이 된다면 루나에게서 그녀를 되찾을 수 있을 만한 힘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왕이 되면 하기 싫다고 마음대로 때려 칠 수 있을 리도 없다. 다시는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가 없겠지.

그렇지만 그 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일단 내가 이 곳으로 들어왔던 차원의 균열을 찾을 방법이 없다. 마력이 새어나오지도 않는 그 균열을 모든 나무줄기를 일일이 뒤져서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만일 찾는다고 해도, 아직까지 열려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냐.”

“배고프지? 비스킷이라도 좀 먹을래?”

그렇게 말하며 테렌은 그의 품안에서 종이봉지를 하나 꺼냈다. 그가 열어 보인 봉지 안에는 평범하지만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비스킷이 들어있었다.

그 때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생각해보니까 음식을 먹지 않은 지가 꽤 되었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봉지 안으로 손을 넣으려 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 테렌이 봉지를 뒤로 뺐다.

“뭐야?”

“사실은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 이 편지를 내 딸, 엘리에게 전해줘. 코르부스가 말하길, 내 딸도 대회에 참가한다고 했어. 마족들의 생김새는 인간이 보기에는 그게 그거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닮은 네 또래의 여성 마궁수야. 부탁을 들어준다고 약속하면 이 봉지에 들어있는 비스킷은 전부 너에게 줄게.”

그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 감춰뒀던 편지봉투를 나에게 건넸다. 나는 순간 망설였으나, 정신이 이상해서 불쌍한 자는 도와줘야 맞는 거겠지…… 아마도? 배가 고픈 것도 있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어 내 옷 속에 넣었다. 그 때 테렌이 나에게 말했다.

“음, 받아들여 주는구나. 내용은 봐도 상관없지만, 가능하면 뜯지 말아줘.”

“안보거든…… 그리고 설마 나한테 그걸 시키려고 출전시킨 거야?”

그러자 그가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 내 생각엔 너에겐 충분히 승산이 있어. 그리고 내가 너에게 강제할 수는 없지만…… 제발 내 딸을 도와줘. 내 생각에는 딸이 위험해질 것 같아. 언젠가, 내가 죽어서 유령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은혜는 갚을 거야.”

“내가 왜 그래야 해……?”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진지한 테렌의 태도에 조금은 연민을 느꼈다. 그러고 있을 때에 테렌은 뒤이어 말했다.

“부탁이야! 제바아아아알!”

그리고는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이 더럽게 생긴 아저씨가!”

“안 도와주면 나 자살할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눈물을 질질 짰다. 더러워!

“내가 무슨 상관이야! 이상한 일에 끌어들이지 마!”

“너무해에에에에! 우리 사이에 그럴 수가 있어?”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흐윽…… 죽어버릴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벽에 머리를 찧어댔다. 듣기만 해도 위험해 보이는 쿵쿵 소리가 감옥에 울려 퍼졌다. 그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시끄러워 미친놈들아!”

옆쪽에서 거의 울부짖다 싶은 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쟤셩합늬댜.”

테렌이 머리를 박아대는 것을 멈추고 언어 중추에 장애가 생긴 것처럼 말했다. 원래도 이상했는데 더 이상해진 것 같다.

“제발 도와주세요.”

그리 말하고 그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볼게. 근데 안 도와줄 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그럼 괜찮을 거야. 내 딸은 나를 닮아서 무척이나 사랑스럽거든.”

그는 힘차게 일어나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이건 팔불출 부모잖아…….

“동문서답 하지 마.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음, 닐런, 남자아이한테는 그게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필요 없거든…….”

“좋아하는 여자애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 거야! 이게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명언이잖아!”

“아니, 그건 어느 나라 명언이야? 그보다 말투가 개 같아. 니들 나라에서는 그런 게 유행이냐?”

그리고 나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테렌은 나에게 종이쪽지를 하나 건네며 말했다.

“그리고 시간 남으면 책 좀 사다줄래?”

“뭔데.”

나는 그가 건넨 종이쪽지에 적힌 책 제목들을 읽어봤다.

“뭐냐…… 이 유치찬란한 제목들은…… 뭐, 미궁에서 하렘을 추구하긴 뭘 추구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쓸데없는 종이쪽지를 찢어버렸다.

“뭐 이 자식아! 경소설을 모독하지 마! 그리고 감옥에서 종이가 얼마나 귀한 건 줄은 알아?”

이 녀석 원래 이런 캐릭터였냐…… 암살자라고 하기에 깊고 어두운 캐릭터인줄 알았다만……. 사실은 14세 병에 걸려서 깊고 어두운 암살자가 되고 싶어졌다 이런 걸까. 나도 경소설을 읽기는 한다는 건 비밀이지만.

“그보다 주기로 한 비스킷이나 내놔.”

“알았어. 여기.”

나는 그가 건넨 비스킷 봉지를 받아들어 비스킷을 하나 꺼내 입 안에 넣었다. 바삭하고 부서지는 식감과 함께 고소한 통밀의 맛이 느껴졌다. 약간 퍽퍽한 걸 빼면 꽤 괜찮았다. 배가 고파서 그러려나.

그 때 옆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워 미친놈들아! 몇 시간 동안 떠드는 거야? 잠 좀 자자!”

앞으로는 자제합시다, 테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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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갤러

뭔가 뒤로가니까 오따꾸같아서 싫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