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것 까지는 좋았지만, 대체 어디로 도망쳐야하지? 그리고 어떻게 리브애나를 구한다는 말인가? 패기 있게 선언은 했지만 결국 꼴사납기 그지없게 되어버렸다.

젠장, 설상가상으로 배도 고파지기 시작했다. 배낭에 보존식이 들어있긴 하지만, 한 치 앞을 모르는 상황에서 비상식을 낭비할 수는 없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간 것 같은데, 숲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길을 잃어버렸다. 그냥 길을 따라가는 게 좋았을라나.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정처 없이 걸었다. 그녀는 무사할까? 나 혼자만 도망치다니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분홍색 토끼가 나타났다.

‘분홍색?’

분홍색 토끼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데. 뭐, 딱히 지금 색깔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토끼라도 사냥을 해볼까. 나는 허리를 숙인 채로 볼트를 하나 꺼내 쇠뇌에 장전하고 토끼를 조준했다.

그리고 발사한 볼트는 살짝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하지만, 그 토끼는 한 번 깡충 뛴 것만으로 피해버리고는 움직이지 않고 이 쪽을 보기 시작했다.

“도망치지 않는 거야?”

토끼는 두 번 더 깡충깡충 뛰고는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뒤돌아봤다. 뭐랄까, 행동이 특이하다.

왠지 내 머릿속에서 저 토끼를 따라가야 한다고, 토끼가 길을 안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뛰어서 토끼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토끼도 그 만큼 깡충깡충 뛰어서 나아갔다.

그렇게 추격전은 계속됐다. 이 토끼, 생각보다 엄청 빠르다. 열심히 뛰어도 도무지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헉, 헉. 서늘한 날씨에도 조금씩 땀이 나고 숨이 가빠온다. 그에 반해 토끼는 따라잡혀줄 것 같지도 않다.

앞에 커다란 나무가 있다. 토끼는 그대로 직진하고 있다. 오래 뛰다보니 돌아버린 건가, 저 토끼…… 이대로는 부딪힐 텐데.

토끼가 곧장 거목의 줄기에 뛰어든다. 부딪혀야만 했다. 그런데―

사라졌다. 마치 빨려든 것처럼.

공간전이 마법인가?

하지만 이동진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마력이 새어나온다. 그런데 저 거목의 줄기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거목에 다가서서 손을 가져댄다. 그러자― 손이 그대로 줄기를 지나 빨려든다. 나는 알 수 없는 호기심을 느끼며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전신을 그 안으로 밀어 넣는다.

*

리브애나는 정신을 차리니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 쇠사슬로 묶여있었다. 양손에 채워져 있는 구속구는 벽에 묶여 바닥에 무릎이 꿇려져 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픈 걸 뺀다면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다.

“닐런…… 닐런…….”

그녀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벽에 박힌 수정이 희미하게 푸른빛이 새어나온다. 주변이 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니, 그 수정으로, 방안의 마나가 흡수되는 것이 느껴진다.

마나밀도가 낮아진 상태로는 마법조차 쓸 수 없다. 몸에 마력이 있어도 마력과 반응시킬 마나가 부족하다면 소용없다. 소환술 조차 그때 처음 우연히 사용했던 것이기에 희망을 걸 수는 없다. 애초에 정령들도 마나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니까 똑같겠지만. 저항조차 못하게 하겠다는 것일까.

그 때, 문이 열려 빛이 새어 들어온다.

“벌써 깨어난 건가? 과연 우리 리브다워.”

루나였다. 그녀는 리브애나에게 다가와, 차가운 금속제 주사바늘을 팔에 찔러 넣는다. 상냥하지 못한 손놀림이 아프다.

“뭐하는 거지?”

리브애나는 물었다.

“엘프의 인공생명체를 만들 거란다.”

“어째서 그런 짓을……?”

“멍청한 엘프들은 정령을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몰랐지. 그래서 절멸된 것이겠지, 리브? 후훗. 나는 인간의 몸에 정령을 결합할 계획이야. 그러면 더 이상 정령핵을 파괴할 수도 없겠지.

물론 보통 인간이라면 결합 순간 붕괴하겠지만, 패트리어트라면 어떨 것 같아? 이제 우리는 건방진 베더 공화국을 공격해 다시금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어.”

200 여 년 전 마족과 엘프족이 절멸된 이후, 인간은 190 여 년간 통일국가를 유지하다가 절대왕정의 헤센 연방왕국과 공화정의 베더 공화국으로 나뉘어 냉전을 지속하며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균형을 깨려 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들은 평민이 주인인 국가를 만들려 한다는 군요. 하! 하찮은 평민 따위가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것이죠? 그런 멍청한 사상에 헤센 연방의 국민들이 물들기 전에 멈추려는 것입니다.”

“…….”

소수에 의해 다수가 무시당하는 사회가 어디가 정당하다는 거냐.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군. 그렇게 리브애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루나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방안은 다시 어두워졌다. 끝없는 절망이 그녀의 몸을 감싼다.

그녀는 문득 처음 닐런을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것은 그녀가 아직 학교에 가기도 전의 일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한 남자아이를 집에 데려왔다. 그녀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붉은 머리카락과 녹색의 눈동자를 지닌 소년이었다.

그녀는 그 당시에는 낯을 가리는 아이였다. 그녀는 어머니 뒤에 숨어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그 소년을 바라봤다. 어머니는 이 일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소년은 무감정해보였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텅 비어있어 아무런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이 곳에 온 것에도 별 감흥이 없는 것 같다.

아버지가 말했다.

“리브, 오늘부터 너와 같이 지낼 닐런이야. 나이는 너랑 같은 7살이란다. 어서 인사하렴.”

그녀는 그제야 머뭇머뭇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놓고 앞으로 나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나는 리브애나라고 해. 잘 부탁해.”

그러자 닐런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잘 부탁해…… 나도…….”

그 때부터였을지 모른다. 그녀가 그를 웃게 만들고 싶어진 것은.

그녀는 그런 추억을 떠올리며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자세가 엄청나게 불편하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약간이나마 체력을 보충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

들어오니 아직도 숲속이었다. 그런데, 무엇인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나무의 생김새도 뭔가 달라진 것 같다. 뒤를 돌아봤지만, 아까의 그 나무는 없었다.

그리고, 앞쪽에 익숙한 분홍 토끼가 있었다.

‘아까 그 토끼인가?’

나는 계속해서 그 토끼를 쫓기로 했다. 잡으려는 목적은 사라졌다. 그저, 토끼가 어디론가 나를 안내한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빽빽한 숲이 나타났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정말 안내하는 건 아니었나…… 그럴 리가 없지. 멍청한 녀석.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토끼를 따라 숲을 헤매었다. 그러자, 동굴이 나타났다. 반대편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나온다. 어디론가 연결되어 있는 걸까?

토끼는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별달리 길이 없다는 느낌에 나는 동굴 속으로 걸어갔다.

동굴 속은 습하고 서늘했다. 등가에 오한이 인다. 종유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위를 올려다보니 ― 수십 개의 안광이 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명을 지르려다 간신히 참았다. 자세히 보니 박쥐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있다. 낮이라 자고 있는 건가. 비명을 질렀다면 날뛰었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다.

나는 그대로 빠른 걸음으로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자 ― 거대한 성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의 문지기가 외친다.

“누구냐! 왜 인간이 여기에 있는 거지?”

그들은 언뜻 보기에도 인간이 아니었다. 피부는 황달에 걸린 사람처럼 누렇고, 게다가 결정적으로, 머리색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색깔, 검은색이었다.

뭘까. 이 상황은. 빌어먹을 토끼. 내가 멋대로 쫓았을 뿐이지만 어딘가 속은 느낌이 든다.

“…….”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두 팔을 든다.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된 듯하다.

“감옥으로 이송해!”

문지기들이 내게로 와서 몸을 뒤져 나이프를 가져가고 배낭을 빼앗는다. 내 소중한 쇠뇌까지…… 그리고 내손을 등 뒤로 돌려 밧줄로 묶었다.

나는 그대로 도시 안으로 이송되었다. 그 안에는, 문지기와 같이 특이하게 생긴 인간이 아닌 것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과 생긴 자들을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증오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비열한 인간이라고 욕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감옥은 지하에 있었다. 나는 긴 복도를 따라 나의 옥실까지 이송되었다. 신참이다 ― 하며 환호성을 지르는 자들이 있었다. 나는 그대로 쇠창살의 방에 내던져졌다. 안쪽에 작은 크기의 창문이 있고, 딱딱한 돌바닥 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는 것 아닌가? 사람을 막 집어던지다니.

옆에 다른 자가 있었다. 아마 감옥 동료인 듯하다. 나는 그에게 급히 물었다.

“여긴 어디죠? 그보다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죠?”

“진정해 친구. 우선 손에 묶인 밧줄부터 풀고 말하지. 요새 병사들은 너무 불친절해서 말이야.”

그리고 그가 내 뒤로 와서 밧줄을 풀면서 말했다. 지금 안 거지만, 이들은 인간과는 살짝 말의 억양이나 말투가 다른 느낌이 든다. 당연한가.

“그보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어. 인간이 여기에 어떻게 찾아온 거지? 그리고 널 뭐라고 부를지 말해줘.”

나는 내 이름을 밝힌 뒤 본 적이 없는 생김새의 거대한 곰을 만난 이야기, 도시를 떠나 도망친 이야기, 분홍색 토끼를 쫓다가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간 이야기, 그리고 동굴을 지나 도시를 찾은 이야기 등을 하였다. 물론 나의 다른 사정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흠…… 그런가. 간헐적으로 차원의 균열이 생겨서 저 쪽 차원과의 단 방향 이동통로가 생긴다는 말은 들었지만, 만일 그 곰이 이 쪽 차원에서 건너간 거라고 한다면, 흠…….”

그가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내 이름은 테렌. 보다시피 마족이지. 지금은 범죄자 신세지만 말이야.”

마족? 200년 전 전쟁에서 절멸되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일이 없다.

“200년 전에 사라진 것이 아니었나요?”

“인간은 그렇게 믿고 있나 보군. 200년 전 인간의 학살은 최악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인간은 역사조차도 가르치지 않는 거냐?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군. 내가 말해주지. 200년 전, 인간족에서 루나 리프니체라는 대마법사가 나타나, 권력을 장악했다.”

‘루나?’

“그 여자는 지독한 인간 우월 주의자였다. 그녀는 사람들을 선동해 인간이 마족과 엘프족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수천 년 간 암묵적으로 지켜져왔던 평화를 산산히 깨뜨렸지.”

“마왕이 밖에 나와 있던 틈을 타 그 여자는 마왕을 기습해 상당히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마법으로 유유히 도망쳤지. 글쎄, 순간이동을 그렇게 짧은 간격으로 쓰는 녀석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되지만.

그리고, 엘프는 마족과 연합해 루나에게 대항했지만 루나 리프니체가 창시한 정력핵 파괴술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붕괴, 멸망했다.

마족은 그로부터 수년간 항쟁을 계속했지만, 전쟁 초기 마왕이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열세 때문에 점점 궁지에 몰렸다. 결국에는 수도 하나만 남게 됐지.”

“당시 마왕이셨던 하브스님께서는 그 상황에서 국민들을 살릴 결단을 하셨다. ― 다른 차원으로 국민들은 피신시킨다. 당시 아무도 그런 마법을 쓰는 자는 없었어. 엄청난 도박이지.

그는 시간을 벌기위해 그의 정예병 1000명의 결사대를 모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적의 군세를 막게 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차원문을 소환하는데 성공. 국민들을 대피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차원문은 시전자가 살아있는 한 닫히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간신히 대피시킨 국민까지 몰살당한다.’ 라고 생각하셨겠지.

하브스님께서는 그대로 도시와 함께 자폭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발생한 마력에너지는 차원문을 타고 전해졌을 정도라고 해.”

“그로부터 수년 후 이쪽 차원에서도 마왕의 재목이 태어나게 되었다. 그것이 현재의 마왕. 데커르님이다.”

…… 전혀 몰랐다. 그런 일이 있을 줄은.

“그렇다면 당신은 왜 저를 싫어하지 않는 거죠? 도시의 사람들은 저를 경멸하던데요.”

“나도 인간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감옥에 같이 있는 이상은 모두가 동료다.”

…… 오글거리는 말을 잘도 하네. 뭐하는 놈이야.

“그런데…… 전 어떻게 해야 이곳에서 나갈 수 있죠?”

나는 깊은 의문이 들었다.

“인간이 이곳에 온 이상 보통은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뭐 며칠 지나면 감옥에서는 내보내 주겠지만, 지금까지 이곳에 흘러들어온 인간은 모조리 마족의 범죄조직 손에 죽었다.”

“…….”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데커르님께서는 늙고 쇠약해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후계자를 가지지 않으셨다. 그래서 마족연방에서 가장 강한 자를 후계자로 삼는다고 하신다. 고로 이번 마족제에서 토너먼트를 열어 우승한 사람이 후계자. 인간도 참여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지만. 마왕이 되면 나갈 수 있지 않겠어?”

…… 내가 이길 수 있는지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

엘프 연성의 준비는 완료되었다. 그렇지만 연성이라곤 해도 기본 골자는 선대 ‘루나’ 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왔으니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방 전체에 값 비싼 마법용액으로 복잡한 술식의 마법진을 그렸다.

나는 연이어 주문을 영창 한다. 기나긴 주문 중 한 글자라도 틀리면 실패하고 만다. 고도의 정신집중이 필요하다. 상당한 훈련을 받은 마법사가 아닌 보통 사람이라면 주문만 따라하라고 해도 금새 혀가 꼬일 것이다. 하지만 ‘루나’는 특별했다.

그리고, 마침내 주문의 마지막 한 마디를 끝내자 중앙에서 눈부신 빛이 발했다.

“하하! 드디어 성공했구나. 베더 공화국의 멸망이 머지않았다!”

빛이 걷히자, 하얀 피부, 파란머리의 어린 엘프가 나타났다. 9,10 살 쯤 되어 보인다. 이는 앞으로 중요한 전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