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색깔에 대한 단상（http://huv.kr/moofama36987）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이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름은 참 편리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만일 누군가 이름이란 것을 발명하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서로를 '야', '너' 등의 품위없는 표현으로 지칭해야 했을 것이다.

"야, 너!"

바로 이렇게 말이다. 이로써 나는 내 눈앞에 신호등처럼 나란히 서 있는 녀석들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품위 없음.' 수첩이라도 있었으면 적어뒀을 텐데. 언제 어떤 상황에 처할지 모르니 항상 철저히 준비해두라던 아버지 말씀을 들을 걸 그랬다. 이세계에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수첩 하나정도는 들고 다닐걸.

"정체를 밝혀라!"

맨 앞에서 나에게 기다란 나뭇가지를 겨누고 있는 노랑머리 남자애가 외쳤다. 적의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 누가 보면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줄 알겠다. 나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관전자의 오해를 풀기 위해 재빨리 말을 건넸다.

"저의 이름은 방세불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셀..."

"대답하지마 셀레나!"

노랑머리의 왼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파랑머리 남자애가 소리쳤다. 나는 그나마 말이 통할 것 같은 빨강머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셀레나양, 옆의 노랑머리에게 나뭇가지좀 치워달라고 전해 주겠어요?"

하지만 파랑머리는 빨강머리가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귀까지 막아 버렸다. 그나마 말이 통하던 사람과의 대화마저 단절되자 나는 약간 짜증이 났다.

"이봐요 파랑머리. 댁의 두뇌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정도의 지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보다 뛰어난 지능을 갖춘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예요."

"닥쳐라 마족! 그 더러운 세 치 혀로 인간을 현혹하려 들다니, 부끄러움도 모르느냐!"

마족? 악마라는 뜻인가? 나는 파랑머리의 말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상황이 이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 셋은 나를 마족으로 오해한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이해한다면 대개의 경우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지금같은 경우에는 오해가 있으니 이해하도록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 된다.

"악마라니요. 저는 그저 지옥의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입니다."

중세시대에 사람들이 한 가장 큰 오해는 지옥에는 악마들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21세기 지옥인 헬조센에 거주하는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지옥은 사실 소수의 악마가 통치하고 대다수의 소시민이 착취당하는 곳일 뿐이다.

"지, 지옥에서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냐, 고등 마족!"

어째 설명을 듣고도 이해하기는커녕 오해만 증폭된 것 같다. 하긴, 애초부터 대화를 거부하는 야만인들이니 뭘 기대하겠냐마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중세시대 시골 사람들은 교육수준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교육수준이 좀더 높은 고장으로 이동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나는 빨강머리에게 물었다.

"가장 가까운 도시가 어디죠?"

하지만 이번에도 대답한 것은 파랑머리였다.

"이 더러운 마족! 작은 마을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도시 하나를 통째로 멸망시키려는거냐! 그렇게 놔둘 수 없다. 넌 용사 제르방에게 쓰러지게 될 것이야!"

그 말과 함께 파랑머리는 노랑머리를 앞으로 밀어 버렸다. 얼떨결에 나와 마주하게 된 노랑머리는 당황한 듯 싶었지만, 이내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수비라고 생각했는지 눈을 질끈 감고 달려들었다.

문제는 나였다. 나는 교육을 받을만큼 받은 지성인이기 때문에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 아니라 평화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 최선을 다해 노랑머리의 공격을 수비한 나는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고 가만히 노랑머리의 일격을 허용한 꼴이 되어 버렸고, 정수리를 나뭇가지로 얻어맞은 나는 정신을 잃었다.


우매한 군중이 우매하게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무언가에 묶여 있었다. 느낌상으로는 십자가 같았지만 눈이 가려져 있어서 확신할 수 없었다.

"마족 바알세불이여, 너의 죄를 인정하느냐."

옆에서 깊고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침내 말이 통하는 상대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나는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그쪽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저는 마족이 아니예요. 일단 이 눈가리개 좀 풀어주시겠어요?"

"닥쳐라! 네 검은 눈동자에 불길함이 깃들어 있어 그것을 바라본 이에게 불행이 찾아옴을 모르는 줄 아느냐!"

"아니 피부색이 검다고 차별하는 건 저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눈동자가 검다고 차별하는 건 인종차별이잖아요?"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는 이단의 교리를 반증한다. 생물이 진화한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지. 그것만 봐도 네놈이 얼마나 저주받은 피조물인지 알 수 있지 않느냐?"

"생물이 진화하는게 맞지 않나요?"

"이단의 교리마저 전파하려 하다니! 이 파란머리 소년이 너를 붙잡은 게 천만다행이구나. 너에게 희생되었을지 모르는 수천의 영혼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손이 떨린다."

"그거야 술을 너무 많이 드셔ㅅ... 잠깐, 뭐라고요?"

이상함을 느낀 나는 반문했다.

"너에게 희생..."

"아니 그거 말고요. 저를 잡은 건 노랑머리인데요?"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구나. 노랑머리는 너의 하수인이 아니더냐? 악마도 정이 있어서 하수인은 지키고 싶은게냐?"

대한민국의 치열한 입시환경 속에서 받은 10년간의 교육을 통해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파랑머리가 노랑머리의 공을 가로채려고 노랑머리를 모함한 것이다. 어린놈이 벌써 잔꾀를 부릴 줄 아네. 이래서 조별과제는 대학 가기 전에 시키면 안되는데.

"노랑머리는 어떻게 됐나요?"

"아쉽게도 놓쳤다. 하지만 너의 권능에 의지해 연명하는 놈이니 너를 죽이면 얼마 안가 그놈도 죽겠지."

나는 양성평등주의자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에서 불편을 느끼면 바로바로 지적하는 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음... 저를 죽인다고요?"

"그럼 악마를 죽이려고 묶어놨지 뭐하러 묶어놨겠냐. 아,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 했군. 화형식을 거행하라!"

화... 화형? 겁이 난 나는 열심히 버둥거렸지만, 밧줄을 묶은 사람이 매듭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는지 풀리지 않았다. 어쩌면 밧줄을 묶은 사람이 내가 그토록 찾던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내 고등학교만 해도 성적은 바닥이지만 밧줄로 사람을 묶는 분야로는 빠삭한 애들이 있으니까.

아무튼 눈가리개를 뚫고 들어오는 횃불의 빛에 공포감을 느낀 나는 더욱 힘차게 버둥거렸지만 그럴수록 밧줄이 나를 힘차게 조여올 뿐이었다.

그렇게 횃불은 내 몸을 지졌고 나는 불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