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교에서 교양 수업을 받고 있었다. 헤센 연방 왕국의 귀족 청소년들은 10살부터 16살 까지 적성을 가진 자만 학교에서 무료로 검술, 마법, 경영, 회계 등의 수업을 받는다. 물론 평민들은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아마 평민이 똑똑해지면 다루기 힘들어지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올해로 16살이 되어 졸업반이 된 나는 검술 적성자이다. 교탁 앞에 서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져가는 중년의 남자 교사가 까만 칠판에 흰 분필로 필기를 해가며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헤센의 대부분의 교사가 친정부적이긴 했지만,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친정부적 성향이 더욱 강했다. 그는 칠판에 필기를 다 한 뒤에 입을 열었다.

“헤센 연방 왕국에는 3가지의 계층이 있습니다. 왕국에 단 한명만 존재하는 제 1신분 왕, 국가의 관직을 맡거나 정치에 참여하면서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일하는 제 2신분 귀족, 그리고 나머지 농민, 상인, 노동자들이 속하는 제 3신분인 평민이 있습니다.”

물론 헛소리였다. 귀족들이 국민들을 위해 일한다는 이야기는 표면적으로 꾸며낸 이야기다. 실제로는 정권에 붙어먹어 어떻게 하면 자기들의 배를 불릴 수 있을까하는 논의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몇몇 양심적인 귀족은 다른 부패한 귀족들의 압력에 권력을 잡지 못하고 영향력을 끼칠 수가 없었다.

왕족의 자식은 왕족이 되고, 귀족의 자식은 귀족이 된다. 평민의 자식은 평생 동안 평민으로 살며 차별받아야한다. 평민들이 출세하려면 왕족이나 귀족에게 아부를 떨며 남는 자리를 자신들에게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귀족 중에서도 리브애나의 아버지처럼 낮은 등급의 관리는 상류 귀족에게 차별받았다.

나는 이 사회를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뿌리깊이 망가져있는 사회를 바꾸는 건 태생도 알 수 없는 나 자신에게는 무리였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자립할만한 능력이 생기면 베더 공화국으로 떠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대며 수업은 듣지도 않고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들이 지나고, 어느새 점심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학교의 종소리가 울렸다.

점심시간에는 몇몇 학생들이 근처의 가게에서 식사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집에서 음식을 가져와서 식사한다.

나는 점심은 대개 이젠 가족 같은 존재인 리브애나와 같이 먹는다. 나의 어린 시절은 고아원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이전의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원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나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 정신 차리고 보니 고아원에 있었다는 느낌이다.

지금 나의 이름인 닐런도 고아원 원장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다. 처음에 나는 내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아원에서 몇 개월을 지낸 뒤에 나는 유그즈 가에 입양된 것이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운인 일이라면 그 일이라고 생각한다. 리브애나의 부모님도, 리브애나도 나를 진짜 가족처럼 대해주었다. 지금껏 나는 한 번도 리브애나의 집에 입양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

리브애나는 항상 내 몫까지 점심을 준비해왔다. 때문에 그녀에게 항상 고마워하지만, 딱히 나는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없는 까닭에 외식을 권유해도 그녀는 한사코 사양한다. 이젠 나도 어느 정도 돈을 벌 수 있는데 말이지.

나는 리브애나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언제나처럼 교내의 한적한 잔디밭으로 향한다. 가을의 바깥공기는 약간 서늘하지만, 햇빛이 그다지 강하지 않아 그녀와 함께 밖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항상 그녀와 함께였지만 언제나 나에게는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닐런, 어서와”

리브애나가 나를 반긴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녀의 순백의 실크보다도 순결한 은빛 머리카락과 특징적인 붉은 눈동자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앞머리는 한 쪽은 살짝 옆으로 넘겨 검은 나비 모양의 머리핀으로 고정시키고 남은 한 쪽은 내린, 뒷머리는 거의 허리까지 오는 그녀의 머리카락. 특이한 빛깔이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특별했다. 그녀가 입은 엷은 베이지 색의 교복도 매우 잘 어울렸다.

“응, 리브. 수업은 어땠어?”

“늘 똑같지 뭐. 나를 너무 특별취급 한다니까.”

그녀가 진절머리 난다는 듯 말했다.

“그건 확실히 네가 특별하긴 하지만.”

확실히 그녀는 마법 적성자 중에서도 탑 클래스의 적성을 지녔다. 어린나이부터 장래가 촉망받아온 아이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그녀는 싸여있던 작은 보자기를 풀어서 샌드위치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샌드위치지만, 그녀가 만든 것이어서인지 확실히 맛있어보였다.

“그건 그렇고 닐런, 근래 들어 우리 왕국이 전쟁을 준비하는 것 같다는 소문 들었어?”

리브애나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대답했다. 익숙한 맛이지만 구운 햄과 치즈의 조합은 언제나 맛있다.

“얼마 전부터 군대의 야외훈련이 잦아진 게 그것 때문인 건가?”

그렇다면 상대국은 하나 밖에 없다. 베더 공화국일 것이다. 상황이 최악이다. 헤센이 베더를 집어삼킨다면 간신히 독립을 얻어낸 베더는 다시금 헤센의 압제아래 짓밟힐 것이다. 양국의 국민들도 전쟁에 희생될 것이 뻔하다.

“그 때문에 어린 소년을 패트리어트라는 중보병단에 모집하는 것 같던데, 아무래도 그곳에 들어간 사람이 다시는 보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 같아. 닐런도 조금 조심하려고 말해두는 거야.”

“흐음, 그래? 고마워."

나는 속으로 전쟁에 대해 생각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도대체 몇 명의 사람들이 죽을 것인가…… 나는 그 끔찍한 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워졌다.

“리브.”

“응? 왜?”

그녀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려다가 내가 말을 건네자 눈을 크게 뜬 채 내 쪽을 보며 대답했다.

“사람들은 왜 전쟁 같은 걸 할까?”

리브애나가 난처한 듯 생각하다가 말했다.

“흠…… 역시 잘 모르겠어. 베더와 전쟁을 할 이유 같은 건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선 없는 걸?”

“그러냐…….”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로, 우리는 여느 때처럼 잡담을 하며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4교시는 대련수업이네. 점심식사 후에 바로 대련을 집어넣다니 시간표를 짠 사람은 제정신인건가?”

나는 투덜투덜 대며 대련시합장으로 향했다. 점심을 평소보다 약간 덜 먹었지만 그래도 몸이 무거워지는 건 막을 수는 없다.

대련장소에 도착한 나는 목검을 지급받고 대기했다. 룰은 언제나 그랬듯이 먼저 목검으로 유효타를 먹인 쪽이 승리한다는 쪽이다.

운이 나쁘게도 오늘은 내가 첫 차례였다. 보통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대련을 붙어보지 않았던 두 사람씩 대련을 하고 나머지는 관전을 하는데, 저번 대련수업 때 내 앞에서 끝났으니 오늘은 내 차례인 것이다.

오늘 내 상대는 유서이다. 그의 집안 대대로 귀족으로, 아버지가 헤센 군의 간부로 꽤 지체 높은 귀족이지만 그 때문인지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것은 찾아볼 수가 없이 성격이 더럽기로 정평이 나있다.

나는 나름대로 선심 쓰는 듯이 용기 내어 먼저 악수를 건넸지만 가볍게 무시한 그는 벌레 보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딱히 대련이 시작되려 해도 학생들의 반응은 별거 없었다. 나는 애초에 친구가 없는 데다, 유서는 평판이 좋은 편이 결코 아니다. 다른 학생들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시합이 개시되자 나는 목검을 고쳐 잡았다. 서로 간단한 보호구를 착용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맞으면 멍이 들 정도로 아프다.

나와 그의 거리는 3M 정도. 누군가 거리를 좁혀오면 순식간이다.

…… 라고 생각하는 동안 유서가 공격해온다.

정직한 내려 베기. 그 뻔한 동작을 목검을 머리위로 올려 가드 했다. 목검끼리 탁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그 충격이 손바닥까지 전해져 나는 살짝 저린 듯한 통증을 느꼈다.

무식하게 공격해와서 그렇지만 이 녀석은 상당히 근력이 강하다. 하마터면 받아내지 못하고 맞아버릴 뻔했다.

유서는 내가 그 충격으로 잠시 경직되어있을 때 검을 고쳐들고는 내 왼편으로부터 빠르게 베어온다.

나는 막아낼 틈도 없이 몸을 숙여 피한다. 머리 위로 휘익 하고 목검이 공기를 가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헛스윙으로 틈이 생긴 상대의 복부에 왼손으로 깊이 주먹을 날려 때린다. 나의 손목에 묵직하게 전해져오는 타격감과 함께 그의 옆구리에 주먹이 먹혀들어간다. 그 충격으로 뒤로 물러난 그의 표정에는 고통이 역력하다.

나는 연이어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목검을 양손으로 고쳐들고 대각선 방향으로 내려친다.

하지만 그는 고통의 와중에서도 놓치지 않고 힘겹게 목검으로 그것을 막아낸다. 목검끼리 서로 부딪혀 그 반작용이 나의 손에 남는다. 나와 그의 목검은 힘의 균형이 팽팽하여 서로 밀려나지 않았다.

그가 반동을 주어 나의 목검을 밀쳐낸다. 그리고 그의 목검이 그대로 내리쳐온다 ― 이 때는 센스가 필요하다. 나는 그의 쪽이라기보다는 왼쪽을 향해 손목을 교차하며 목검을 휘둘렀다.

그의 목검이 휘감겨 바닥에 쳐 박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허리를 목검으로 베었다. 결국 나는 승리했다. 지켜보던 학생들 사이에서 작게 ‘오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열한 베더 인종…….”

사실 목검이 아니라 다른 신체부위를 이용하는 것은 전혀 룰 위반이 아니다. 그의 말은 단지 나의 신분이 귀족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낮음, 그리고 베더 인종이라는 것과 그의 열등감 때문이겠지.

어쨌건 나는 유서의 말을 무시하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4교시가 끝이다. 리브애나는 오늘 아직 수업이 남아있으니 혼자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간단히 나갈 채비를 했다. 나는 학교의 교복을 벗고 편한 활동복으로 갈아입었다.

나는 검술적성자이긴 하지만 사냥할 때는 쇠뇌가 훨씬 편하기에 쇠뇌를 쓰고 있다.

내가 쓰고 있는 이 쇠뇌는 용돈을 한푼 두푼 모아, 그것도 모자라서 결국 무기상 주인에게 사정사정해서 나머지는 외상으로 해서 산 것이다. 그 빚을 갚은 것도 비교적 최근이다. 나도 형식적으로는 귀족 가의 사람이긴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부티가 철철나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니 티가 날 리도 없고, 그런 걸로 횡포부리고 싶지도 않다.

전쟁용의 본격적인 쇠뇌에 비하면 딱히 위력이 강하진 않지만 작은 사슴이나 여우 정도 잡는 데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 외에도 외투 안의 나이프 홀더에 나이프를 몇 개 비상용으로 챙겨 두었다. 사실 이 근처 숲에는 매가 최상위 포식자일 정도로 곰이라든가 사자 같이 위험한 동물들은 살지 않으니 이렇게 까지 챙길 필요는 없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나는 그대로 도시 근교의 숲으로 향했다. 오늘은 수업이 일찍 끝났으니 늦어도 리브애나가 돌아오기 전에는 돌아올 수 있겠지.

숲속을 거닐면서 나는 사냥감을 물색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가을이 되어 붉게 물든 낙엽이 바닥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가 주로 노리는 것은 여우나 사슴 같은 것들이다. 여우 가죽은 목도리를 만들거나 해서 비싸게 팔리는 경우가 많고, 사슴뿔은 값비싼 약재로 쓰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걷다보니, 저 멀리에서 여우가 보인다. 샘물에서 물을 마시는 듯하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허벅지의 짧은 볼트를 수납하는 파우치에서 사냥용으로 촉이 넓적한 볼트를 꺼내서 쇠뇌에 볼트（쇠뇌용 화살）를 장전했다. 천천히 다가가 근처의 수풀 뒤에서 여우의 몸통을 조준한다.

그리고 나는 신중하게 방아쇠를 당겨 발사했다. 시위가 원래대로 되돌아오며 그 탄성력으로 쏘아내진 볼트가 휘익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를 휘저으며 여우에게로 날아갔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그 순간 여우는 몸을 돌려 그 장소를 떠나며 간단히 피해버렸다.

“쳇.”

여우가 도망가기 시작했다. 저런 작은 동물을 쫓아갈 자신은 없으니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됐으니 나는 또 다시 사냥감을 찾아야 한다. 나는 숲속을 다시 정처 없이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 하지만 도저히 쓸 만한 사냥감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왜 이리 운수가 안 좋은지. 한참을 찾았지만 도중에 토끼라든가 이름 모를 새 몇 마리가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별 가치가 없다.

이왕 나온 이상 빈손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괜한 오기인 것 같지만 나는 계속해서 사냥감을 찾아다녔다. 내가 발을 내딛으려는 때에 ―

나는 순간 알 수 없는 위협을 느꼈다. 내딛으려는 발을 도로 돌려놓고 나는 발밑을 살펴봤다.

찰코가 있었다. 찰코는 바닥에 놓아두었다가 동물이 밟으면 즉시 날카로운 이빨처럼 생긴 장치가 발목을 물어 사냥을 하는 덧이다. 사람이 숲속을 지나가다가 다칠 우려가 많아 법으로 금지되어있다. 그런데 누가 이런 곳에…….

“하아…… 흐…….”

놀란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주변의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를 덫 중앙의 둥그런 발판에 던져 덫을 작동시켰다. 덫은 착하는 소리와 함께 철이 맞물리는 소리가 나며 접혔다.

나는 계속해서 숲속을 걸으며 잡을 만한 동물들이 있나 살펴봤다.

그 때, 반대편에서 한 명의 사람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외투 안쪽에서 나이프를 꺼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이, 진정해. 널 공격할 생각은 없으니까.”

등에 배낭을 메고 있는 그가 이 쪽을 발견하고 양손을 머리위로 올리면서 말했다. 그는 왜 숲속에 있는 걸까. 혹시? 나는 그에게 냉정하게 물었다.

“이런 숲속에 무슨 일이죠?”

“너 같은 꼬맹이가 알 바는 아니지. 사냥 놀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그는 나에게 볼 일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 확인해 볼 시간이다. 나는 그에게 위협하듯이 물었다.

“그 배낭 안에는 무엇이 들었습니까?”

“네가 알아서 뭐하게?”

이렇게 나올 줄은 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붙어서 배낭의 잠금 장치를 풀었다.

“뭐하는 거야!”

그 속에는 아직 설치되지 않은 찰코가 몇 개나 들어있었다. ― 이 녀석이다. 이 녀석이 불법적인 덫을 설치했던 것이다.

“범죄자 새끼.”

나는 그를 증오하며 말했다.

“이 자식이!”

그가 그렇게 말하며 뒤로 돌며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나는 왼쪽 뺨을 얻어맞은 채로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쓰라린 입안에서는 피 맛이 배어나왔다.

부스럭거리는 낙엽소리가 나며 덫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도망쳐버렸다. 황급히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지만 덫이 하나 떨어져있는 것을 빼면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후…….”

놓친 그 녀석이 깔아놓은 덫을 나는 운 좋게 피했지만 누군가는 밟고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이기심에 속이 역겨워졌다.

*

“칫, 꼬맹이 자식이…….”

아까의 소년에게 그의 불법 행위가 들켜버렸다. 신고 당하기 전에 또다시 마을을 떠나야 할 것 같다. 찰코하나를 잃어버린 것 또한 큰 손실이다.

한 번 더 그 소년을 마주한다면 그가 들고 있던 쇠뇌에 맞아 뼈도 못 추릴 가능성이 있다. 그는 오늘은 접어두고 숲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르르르…….”

그 때 뒤쪽에서 무언가의 그르렁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보나마나 어딘가의 들개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며 뒤돌아봤다.

그 곳에 있는 것은 결코 들개가 아니었다. 그의 상상보다 훨씬 거대한, 보기만 해도 무릎의 힘이 풀려버릴 듯한, 지나친 공포에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압도적인 자태의 곰이었다.

“뭐야…….”

이런 곳에 곰이 살 리가 없잖아. 그는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꿈이면 빨리 깨라고.”

그는 자신의 뺨을 찰싹하고 손바닥으로 때렸다. 꿈이 아니다. 손바닥에 달라붙는 볼의 감촉과, 피부의 따가움이 느껴진다.

‘그래…… 이것은 나의 죄에 대한 벌이구나. 다른 사람의 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만을 위해 살아온 자에 대한 죄 값.’

이제 와서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 그는 몰려드는 두려움에 몸을 맡긴 채로, 서서히 다가오는 곰에 맞서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숲속에 울려 퍼진 것은 후회와 회한이 뒤섞인 처절한 비명소리였다.

*

나는 잠시 동안 멍하니 앉아 쉬고 있었다. 입안에 나던 피는 시간이 흐르자 멎었지만 뺨의 얼얼함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돌아 갈까하고 생각하며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사슴 한 마리가 보였다.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다. 나는 숨을 죽인 채로 쇠뇌 끝의 고리에 발을 걸고 쇠뇌를 다시 장전한다.

몸을 숙인 채로 조준하고 있는데, 사슴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 주위를 풀을 뜯다 말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기웃거렸다. 나는 사슴의 심장을 노리고 쇠뇌를 발사했다.

이번에는 맞았다. 빠르게 날아간 볼트는 사슴의 몸통을 꿰뚫고 깊숙이 박혔다. 사슴이 피를 흘리며 잠시 울음소리를 내고는 도망가기 시작했다.

“실수인가…….”

나는 쇠뇌를 등에 매며 나이프를 빼어들고 사슴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은 맞추지 못했지만 확실히 깊은 상처를 남겼다. 시간을 끌면 알아서 쓰러질 것이다.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무작정 따라갔다.

사슴은 생각했던 것 보다는 빨랐다. 거리가 좁혀질 것 같으면서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구전으로 가면 내가 유리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자멸할 것이다.

“허억…… 하아…….”

나는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에 무거워지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달렸다. 심장은 몸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일했다. 나는 흘러내리는 땀이 서늘한 가을바람에 식혀지는 것을 느끼며 계속해서 뛰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어이없게도 지면에서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걸려버렸다. 순간 발끝에 걸린 나무뿌리에 나는 대책 없이 앞으로 넘어졌다. 나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바닥에 턱을 찧었다.

“아야야…….”

아프다. 아니, 낙엽이 깔려있어 크게 아프지는 않다. 단지 사슴을 놓친 것이 조금 짜증날 따름이다. 간신히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을 둘러본다. 들고 있던 나이프는 떨어뜨렸는지 보이질 않는다. 그늘이 아니었다면 햇빛이 반사되어 잘 보였을 텐데. 나는 일어나서 나이프를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 ―

옆쪽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소리.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 위험을 경고한다. 나는 가까스로 뒤돌아본다.

…… 곰이다. 길이가 3M는 될 것처럼 육중하다. 입가와 발톱은 무언가의 피투성이였다. 곰의 근처에는 아까 마주쳤던 사냥꾼의 의복을 입고 있는 무언가가 갈기갈기 찢겨져 나뒹굴고 있었다. 심심할 때 집에 있던 동물도감에서 봤던 삽화의 곰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중압감이다.

‘이 근처에는 곰이 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곰이 산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숲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영역에는 위험한 야수가 살지 않는다. 그것들은 북쪽의 황무지와 대산맥의 깊은 산 속을 제외하고는 오래전 3종족의 협력으로 모두 퇴치되었다.

나는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이제는 내가 죽으면 슬퍼할 가족들이 있으니까. 친구는 없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해본다. 곰은 기분이 몹시 안 좋은 모양이다. 원래 곰은 사람같이 큰 동물들의 고기보다는 생선이나 작은 동물을 더 좋아한다.

곰과의 거리는 10M쯤. 이 정도 거리는 순식간에 따라잡힌다. 곰과 인간이 달리기로 승부가 될 리는 없다.

갑자기 옛 이야기 중 두 명의 사내가 곰을 만나 한명은 죽은척해서 살고 한명은 도망가다 죽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장난 하냐. 그딴 걸로 살 리가 없잖아.’

내 무장을 생각해본다. 나이프 네 개와 등에 맨 쇠뇌하나가 있다. 쇠뇌는 재장전이 필요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럴 여유는 없을 것이다. 지금 장비로 곰을 이기는 건 무리다.

아드레날린 분비로 사고가 가속되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중, 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곰이 포효하며 달려온다. 중압감이 사고를 마비시킨다.

하지만 나는 이내 나이프를 꺼내 곰의 눈을 겨냥해 던진다. 평소에 심심풀이로 나이프를 던지는 것을 연습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다행이다. 운이 좋다. 한 바퀴를 회전하며 날아간 나이프는 곰의 눈에 정확히 꽂혀 곰은 눈에서 붉은 피를 철철 흘린다. 곰은 괴로워하며 울부짖는다.

“크어어어!”

이 틈에 도망간다. 제발 도망칠 시간만이라도 벌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상당히 화가 난 모양이다. 곰은 전혀 멈추려는 기색이 보이지는 않는다.

“젠장, 제길, 어째서?”

뒤를 돌아볼 틈도 없다. 최대한 빠르게 달려 도망친다. 아직 진정되지 않은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점점소리가 가까워진다.

내 삶이 여기까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

리브애나가 자신이 하프엘프임을 알게 된 건 최근이다. 하프엘프는 200년 전 종족 간 전쟁이후 후환을 막기 위해 인간의 손에 멸종했다고 알려져 있다. 먼 옛날 그녀의 가계에 섞인 엘프의 피는 점점 옅어져 인간의 외모와 구분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녀의 아버지 헤겔에 이르러서는 엘프 특유의 마법적성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특이했다. 외모에는 엘프의 특징이 전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마법적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니, 정확히는 어린 시절에 마법적성이 발현했다. 아버지가 말하길 엘프만이 쓸 수 있는 마법도 쓸 수 있다고 들었다. 그걸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녀는 오늘도 왕국의 사무관으로 근무하시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여러 책들을 읽고 있었다. 책이 그리 많지 않긴 하지만, 하급 귀족의 집에 무슨 서재가 있냐고 한다면, 아버지가 책을 좋아하시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녀도 책에 흥미를 보이기 때문이었다.

평민들보다는 많은 돈을 왕국에서 봉급으로 받기는 하지만, 그 봉급을 대부분 책을 사는 데에 쓰다 보니 남들은 다 있는 가정부도 고용하지 못하고, 성 안에서 거주할 수도 없어서 어머니가 힘들어지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꽤 집안일을 도와드리고는 있다.

그녀 지금 읽는 책은 천체에 관한 내용이었다. 일식이 일어나는 날에는 마나가 작용하지 않는다나 뭐라나. 그렇지만, 아직까지의 기술로는 일식을 정확히 예측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리 큰 쓸모는 없는 지식이려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녀는 닐런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에 돌아오던 시각보다 한참 늦다. 오늘은 그가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어서 벌써 돌아와 있어야 할 텐데.

그녀에게 순간 안 좋은 예감이 스쳤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아래층으로 내려가 어머니께 닐런이 돌아오지 않았냐고 여쭤보았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같다.

지체할 시간은 없다. 그녀는 자신의 스승인 루나 브리커스를 찾아 달려갔다. 제발 늦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

살아남아야 한다. 곰은 가까워져 온다. 더 이상 도망쳐봤자 소용없다. 곧장 따라 잡힌다. 공포가 이성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싸늘하게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그렇다면 결국은 싸울 수밖에는 없다. 도망쳐봐야 희망이 없다면, 하다못해 발버둥이라도 쳐야한다. 인류의 역사는 발악의 역사가 아닌가.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타지도 못하고, 말처럼 풀만 먹고 살 수 있으며 달리기가 빠르지도 않고, 곰처럼 강한 힘과 발톱도 없고, 호랑이처럼 날렵한 몸과 강력한 이빨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은 불을 이용하면서 맹수들에 대항할 힘을 갖출 때까지 끊임없이 발악했을 것이다.

나이프를 한 개 더 꺼낸다. 기회는 한번 뿐이다.

나는 뒤로 돌면서 그 회전력을 이용해 직감만으로 곰의 멀쩡한 쪽 눈을 향해 던졌다. 이 한번으로 곰의 움직임을 저지하지 못하면 그걸로 승산은 없다. 나이프를 던진 반동으로 도망칠 수도 없다.

하지만 나이프는 정확히 나의 거의 근처까지 와있던 곰의 왼발에 맞았다.

‘실수를…….’

곰은 고통에 신음하면서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 곰은 다시 다가온다. 눈과 왼발에 나이프가 꽂힌 채로. 그것은 나에게는 경악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성이 마비된다.

죽고 싶지 않다.

나는 다시 나이프를 꺼낸다.

이제 얼마 있지도 않던 도망칠 가능성조차도 없다. 죽기 전의 최후의 발악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까지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본능이 울부짖는다. 그러나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곰이 오른발을 들어 좌상단에서 내려친다. 커다란 발바닥이 나를 덮친다. 덮친다. 그 발바닥이. 나를.

이 세상의 시간이 느려진 기분이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 커다란 발바닥은 인간에게는 스치는 것조차도 위험한 재앙에 가까웠다.

최대한의 힘으로 뒤쪽으로 뛰어 피한다. 그러나 ―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였다. 발톱이 스쳐 내 옷과 그 안의 살갗을 갈기갈기 찢어발긴다. 격렬한 통증이 몸을 휘감는다. 상처에서 다량의 출혈이 발생해 옷을 적신다.

“크으……..”

고통이 내달린다. 가까스로 다시 자세를 잡고 곰을 바라본다.

곧바로 후속타가 온다. 뒤로 도망칠 걸 감안하고 왼발로 좀 더 뒤를 후린다. 아직도 나이프가 박힌 왼발에선 검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그러나, 곰의 덩치는 나와 차이가 있다. 게다가 곰은 한쪽 눈을 잃어 거리 감각이 좋지 못하다. 좀 더 뒤쪽을 노리고 공격한다면 ― 앞쪽으로 파고들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순간적으로 몸을 확 숙이며 안쪽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팔을 뻗어, 나이프를 곰의 목에 찔러 넣는다.

그렇게 나는 이겼어야했다.

그러나, 자그마한 투척용 나이프의 위력은 충분하지 않았다. 목의 가죽이 두꺼워 뚫지 못한 것 같다. 목에 박힌 나이프 날은 힘없이 부러져버렸다. 나이프의 손잡이를 쥔 내 손은 반작용으로 인한 얼얼함이 남았을 뿐이다.

조금 허무한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내가 할 일이 남아있겠지. 그대로 곰의 이빨이 나에게로 덮쳐온다. 그 시간은 영겁과도 같이 길게 느껴졌다. 지나친 공포에 미쳐버린 뇌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물려죽기 직전, 바로 그 순간, 곰의 뒤편에서 칠흑의 쇠사슬이 곰의 사지와 목을 속박했다. 그 쇠사슬은 공간의 균열에서 뻗어 나온 것이었다. 한명의 마도사가 만들어낸. 루나 브리커스. 리브의 스승이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를 부른 것은 리브인가? 이런, 갚지 못할 빚을 또 다시 져버렸다.

그녀가 나를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본다. ……다 보고 있었던 건가. 빨리 좀 도와줄 것이지. 아직 살아있다는 현실감이 부족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리브애나에게 하지 그래? 일단 치료부터 하는 편이 낫겠네.”

그녀가 짧은 주문영창을 외자,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상처가 아물고 새로운 피부조직이 생기는 과정은 신기함을 넘어서 경외스럽기까지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찢어진 천 조각 까지도 깨끗하게 고쳐진 상태로 돌아왔다.

“그건 그렇고 상당히 잘 싸웠지 않아? 넌 꽤 쓸 만하구나. 후훗. 그나저나 곰이 갑자기 출몰할 이유를 조사할 필요가 있겠어.”

슬쩍 곰을 쳐다보자, 곰은 목이 졸려 죽어있었다.

“순간이동은 너무 귀찮단 말이지.”

그런 식의 말을 한 후에, 그녀는 순간이동 영창을 시작했다. 그 짧은 영창이 끝나자, 기묘한 감각과 함께 나는 순식간에 도시로 이동했다. 물론 그 커다란 곰과 함께. 원래 순간이동이 다른 사람까지 이동시킬 수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루나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존재였다.

집으로 돌아오자 리브와 그녀의 부모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바보야! 네가 죽는 줄 알았잖아!”

리브애나가 울먹인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다. 그녀를 걱정시켰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미안…….”

“정말…… 앞으로는 사냥 절대 금지야!”

걱정이나 시키고 말야 라고 리브애나가 투덜거린다.

“저녁차려 놨으니 어서 가자꾸나.”

리브애나의 어머니가 다 괜찮다는 듯 온화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 정말 즐겁게 저녁식사를 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대체 왜일까?

*

지금은 이른 저녁, 해가 저물려면 아직 조금 시간이 남은 때이다. 사람들이 저녁거리를 사러 거리에 나오는 시간대이기도 하다.

그 시각, 광장에서는 힘차게 연설하는 한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지금 대 헤센 왕국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있다. 나라에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고 난동을 부리는 폭도들이 즐비하고, 옆 나라 베더 공화국은 호시탐탐 헤센을 집어삼킬 기회만 노리고 있다.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헤센에서는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이 들끓고 있다!

그렇다. 헤센에는 국민들의 결속과 단결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애국해야한다!

더러운 베더 공화국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다함께 힘을 합치자! 모두들 군에 입대하여 조국을 위해 싸워야한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우렁차게 외치는 그 연설가의 모습은 무지한 대중들을 선동하기에는 딱 알맞았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몇몇의 사람들이 외쳤다. 그들은 미리 매수된 정권의 앞잡이였다.

“헤센을 위하여! 헤센을 위하여!”

몇 명의 남자가 그렇게 외치자, 주변에 모여 있던 주민들도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헤센을 위하여!”

집단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광기는 전염되기 쉬운 병적인 것이었다. 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뿐만 아니라, 가게를 보고 있던 사람들, 집에 있던 사람들까지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와서 그 광경을 보고 분위기에 동참했다. 젊은 남자들은 군에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이도 허다했다.

그것을 본 연설가는 이렇게 생각했다.

‘무지한 대중을 선동하는 것은 갓 태어난 아기 고양이를 죽이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 이런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다니, 얼마나 쉬운 인생이야?’

하루하루 코앞의 일만을 걱정하게 만들면 사람들은 무지해진다. 무지한 사람들은 결국 가난해져 코앞의 일만을 걱정하게 된다. 사람들이 빈궁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없어지고 입맛대로 움직이기 편해진다. ― 이것이 헤센이 선택된 몇몇에게만 교육을 제공하는 이유이다.

*

루나는 서재에 앉아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런 종의 곰은 이 근처는커녕, 이 대륙에 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멸종된 종이었다. 이는 어쩌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그 곰과 맞섰던 소년에게 흥미가 생겼다. 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닐런이라는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직 발휘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잠재력이 보인다.

패트리어트의 재목으로는 최고다. 헤센에서는 최근에 소년들을 데려다 약물을 주입하고 필요하면 수술을 거듭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패트리어트라는 강력한 인간병기를 키워내었다. 패트리어트는 이번 전쟁의 히든카드로 사용될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추진한 것은 그녀이다.

그녀는 내일 아침에는 그를 데리러 갈 것이다. 리브애나와 같은 집에 사니까 주소도 이미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