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어수선했던 연말, 여의도의 고요한 밤을 내쫓는 소리는 내가 있던 전방으로 퍼져나갔다.

하필 전투준비태세가 끝난 날이었다, 그날은. 사지방 겸 쉼터에서 30분 남짓의 짧은 독서 연등을 마치고 들어가 자려던 참이었다. 화장실에 갔다가 책을 챙기러 쉼터로 다시 돌아와보니 평소와 분위기가 사뭇 달라 순간 주위를 둘러봤다. 나의 동기 열 명 중 유일한 조기 진급자였던 그는 나를 불러 컴퓨터 모니터를 가리키며 큰일이 났다고 말했다.

"종북 반국가 세력 일거 척결, 자유 대한민국 수호."
-비상 계엄 선포-

한편 다른 모니터의 화면엔 2024년의 것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화질이 낮고 정신 없는 라이브 방송이 송출되고 있었다. 시청자 수는 어림 잡아 10만명. 도망치는 건지, 아니면 사력을 다해 어디론가 뛰어가는 건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 틀림없구나. 생활관에 돌아가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 밤은 잠들 수 없는 날이 될 것이라는 강력한 확신이 들었다.

- 행정반에서 알립니다. 막사 내 전 인원 기상하고 단독 군장 상태로 생활관 내에서 대기하기 바랍니다. 각 생활관 분대장 또는 최고 선임병 행정반으로. -

확신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 분대장과 같이 유이하게 생활관 내에서 깨어있던 나는 후임들을 깨워 알아 듣게끔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이해는 되지만 결코 납득은 안되는 이 시대착오적인 사안을 어떻게 설명해낸단 말인가?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유산을 받고 자란 우리는 이 상황 속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합리적일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시킨 대로 방탄 조끼와 헬멧을 관물대에서 내리고 총기함을 열어 개인화기를 꺼내는 편이 나아 보였다.

- 행정반에서 행정보급관이 전파합니다. 경계작전명령서 최신화 되었으니 전 인원 모두 지금 즉시 서명하기 바랍니다. 이상 -

내 근무 시간은 04:00~06:00. 초겨울 새벽 위병소라.
이윽고 켜진 8개 생활관의 TV에선 모두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TV를 보며 다들 비슷한 이야기들을 나눴을게다. 그 중에 기억 나는 한 마디.

"○○○ 상병님 지금 사실 너무 무섭습니다. 아무래도 재작년에 투표를 잘못한 것 같습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내 맞후임은 내게 이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탄약고로 올라갔다. 대선 당시 수험생이었던 나는 투표권이 없다는 핑계로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엔 일말의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암.
그래, 그 결과가 과연 이것이란 말인가.

근무에 투입된 생활관 인원들이 하나 둘 복귀할 때 즈음, 사태는 최악의 국면만은 피한 듯 보였다. 파란 지붕 아래 이례적인 만장일치가 나왔고, 머지 않아 상황이 공식적으로 해제되며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6시간의 강제 연등 끝에 모든 생활관의 불이 다시 꺼졌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인원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생활관을 나와 조끼에 방탄 플레이트를 삽입하고 부사수와 위병소로 향했다. 공기는 차가웠고 싸라기눈은 야멸찼다. 그리고 시작되는 시간과 정신의 방. 쓸데 없는 공상 속 당위적인 의문이 피어오른다.

어떤 연유로 국회의장과 제1야당 대표는 월담이란 기행을 벌이게 된 것인가?
대통령을 비롯한 그 자들은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40여년만에 국민들에게 다시금 총을 겨누려 했는가?
이 부대가, 이 전선이, 이 나라가 목적을 잃어버린다면
그 곳을 지키기 위해 끌려온 우리들의 사명감과 정체성은 누가 보장하고 보상해주는가?


기상 나팔과 점호는 없었고, 나는 전투복 차림으로 1시간 반의 짧은 잠을 자다 배식조가 출발하는 소리에 일어나 아침을 먹으러 갔다.

핵전쟁이 나도 하루 세 끼는 주는 이곳은 군대다.
아침밥을 꾸역꾸역 넘기고 나서야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내가 지키는, 또 나를 지키는 이 나라가 다시금 잘못된 길을 걸어 영원한 몰락의 길로 가지 않았음에, 사태가 확대되어 우리의 총구가 잘못된 곳으로 향하지 않게 되었음에, 이 더럽게 맛없는 밥을 먹고 동기들과 정치적 중립은 개나 줘버린 채 욕지거리를 하며 연등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음에, 진심으로 감사를 느낀다.


전역한 지 5개월이 넘어서야 글로 이 날의 추억을 풀어본다. 때 늦은 주접이 우습지만 창피함을 무릅쓰고 감히 몇 자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