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년, 갈리아의 외딴 마을. 회색빛 겨울 하늘이 낮게 드리웠고, 들판은 얼어붙은 채 숨을 죽였다. 광장 한가운데 솟은 석조 성당의 종이 울릴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고개를 떨궜다. 천년의 끝자락. 묵시록이 예고한 심판의 날이 가까웠다.

에드먼드는 마을에서 가장 풍족한 농부였다. 그의 창고는 곡식으로 가득 찼고, 헛간엔 가축 울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엔 요즘 두려움이 어렸다. 성당의 사제 도미니쿠스는 매일같이 외쳤다. “천년이 바뀌면 하늘이 갈라지고, 주의 심판이 시작된다! 재물을 쌓는 자여, 불구덩이를 조심하라!” 이 말에 에드먼드는 밤마다 잠을 설쳤다. 아내 마리와 어린 딸 아녜스는 그의 손을 꼭 잡고 기도했지만, 불안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마리, 가진 걸 전부 성당에 바치자.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종말이 와도 구원받을 수 있을 거야.”

마리는 눈을 붉히며 머리를 저었다. “그럼 아녜스는? 굶주릴 수도 있어. 너무 극단적이야.”

“극단?” 에드먼드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세상이 무너질 때, 곡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난 우리 가족을 지키고 싶어.”

며칠 후, 그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전 재산을 성당에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곡식, 가축, 심지어 가보인 은화까지. 사람들은 충격에 말을 잃었고, 누군가는 그의 신앙심을 칭송했지만, 누군가는 고개를 저었다. 도미니쿠스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주께서 그 희생을 기뻐하실 거야.”

999년 마지막 날, 성당 안은 촛불로 가득했다. 벽엔 그림자가 일렁이고, 에드먼드는 가족을 품에 안은 채 기도에 잠겼다. 하늘이 열릴까? 천사들이 내려올까? 아니면 이대로 끝일까? 그의 가슴은 쿵쾅였다.

그러다 새벽. 1000년 1월 1일. 성당 밖은 조용했고,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닭 울음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마을 사람들은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아무 일도 없었다.

에드먼드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속삭였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릴 버리지 않으셨군요.” 마리와 아녜스는 그 곁에서 미소를 지었다. 광장엔 이내 웃음과 노랫소리가 퍼졌다. 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로를 안았다.

그날 오후, 에드먼드는 성당을 다시 찾았다. 그의 손엔 남은 마지막 은화 몇 닢이 들려 있었다. “신부님, 이것도 주께 드리고 싶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로.”

도미니쿠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믿음은 하늘에 닿았단다, 에드먼드.”

몇 달 뒤, 성당은 눈부시게 변했다. 에드먼드와 마을 사람들의 기부 덕에 색유리가 끼워지고, 제단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순례자들은 경외심에 무릎을 꿇었고, 도미니쿠스는 더는 해진 로브를 입지 않았다. 그의 손엔 반지가 반짝였다.

이제 가난해진 에드먼드는 오히려 평온한 눈빛을 지녔다. 어느 저녁, 아녜스가 물었다. “아빠, 우리가 다 바쳤는데 왜 성당만 더 빛나는 거야?”

에드먼드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녜스야, 우리는 주께 바쳤지. 성당은 그 빛을 비추는 거란다.”

하지만 마리는 멀리 솟은 종탑을 바라보다, 문득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고, 그녀 마음엔 작지만 무거운 의문이 피어올랐다. 세상은 끝나지 않았지만, 뭔가는 분명 끝난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