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톰의 눈이 무겁게 이그넬을 응시했다. 이그넬은 동요는커녕 차가운 표정으로 톰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그넬이 냉소적인 미소를 띠며 말했다. 톰은 베르트랑의 초상화를 힘주어 가리키며 이그넬을 무겁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뭔지 설명해주겠나?”

“그건 개인적인 일이라서 말이야. 사생활은 존중해줬으면 좋겠군.”

이그넬은 여전히 조소를 머금고 답했다.

“자네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모르겠지만, 이 친구들은 그저 자신의 물건을 되찾고 싶을 뿐이야.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톰이 무게를 실어 말했다.

“말했잖아. 우리는 그저 이해관계가 일치할 뿐이라고. 너희들을 내 계획에 포함시킬 생각은 없어. 너희가 날 도우면, 나도 너희를 돕는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이그넬이 차가운 눈으로 레이나와 토비, 그리고 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톰도 그를 무거운 표정으로 응시하자, 토비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왜 그러세요? 대체 뭘 보셨길래?”

“자네들도 본 기억이 있겠지만, 여기 벽에 붙어있는 자는 엑스 브리지의 시장인 베르트랑이야.”

톰이 베르트랑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최근 도시에서 과격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네. 베르트랑은 도시 환경 개선 사업을 진행하면서 많은 빈민가 사람들을 불법 거주자로 규정하고 도시 밖으로 추방했지. 그 이후에 분노한 빈민가 사람들은 상인 연합회 사무소를 습격하거나, 시민 회관에 불을 지르는 등 과격한 시위를 했다네.”

톰의 얼굴이 흔들리는 등불에 그늘져 일렁거렸다. 그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런 과격한 행동으로 인해 도시의 경비대는 초긴장 상태야.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이면 바로 체포하고 있어.”

“하지만 빈민가 사람들을 추방한 것도 너무한 처사 아닌가요?”

레이나가 톰에게 질문했다.

“나도 그의 정책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이전부터 빈민가 사람들이 하는 구걸이나 범죄 행위들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긴 했었어. 추방에 대한 과격한 보복으로 많은 시민이 휘말려 피해를 보기도 했고. 빈민가 사람들의 편만 들어줄 수는 없는 상황이네.”

톰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마쳤다. 그러자 이그넬이 갑자기 몸을 들썩거리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잠시간 웃어젖힌 그는 차가워진 눈빛으로 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순진하군.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이그넬의 말에 톰은 눈썹을 추어올렸다.

“뭘 모른다는 겐가?”

“당신같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면 베르트랑과 더스크는 성공한 셈이군.”

이그넬은 차가운 표정으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난 더스크 놈이 쥐고 있는 걸 손에 넣기만 하면 돼. 너희는 너희 물건만 되찾으면 되는 거고. 목적을 위해 서로 이용할 뿐 거창한 계획 같은 건 없으니까 안심하라고.”

말을 마친 이그넬은 레이나 일행에게 앉을 것을 권하는 손짓을 했다. 톰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자 레이나와 토비도 따라 앉았다. 이그넬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책상 위에 도면을 펼쳤다. 도면은 낡고 오래되보였지만 곁눈질로 보아도 굉장히 정교한 시설의 설계도로 보였다.

“더스크는 도적단의 부두목이야. 명목상으로는 고르칸이 두목이지만, 이 자가 실질적으로 피주먹단을 움직이는 녀석이고.”

차분히 말하는 이그넬의 눈에 고요한 불꽃이 일었다. 그는 시선을 도면에 고정한 채로 말을 이어갔다.

“고르칸 녀석은 힘밖에 모르는 멍청이기 때문에 뒤를 캐봐야 소용없었지. 대부분의 도적단의 기밀 문서는 더스크 녀석이 쥐고 있었으니까. 결정적으로 고르칸 놈도 더스크한테는 쩔쩔매더군.”

이그넬은 고르칸이 가소로운 듯 그를 언급할 때 코웃음을 쳤다.

“녀석의 아지트에는 온갖 도적단과 관련된 기밀문서와 약탈한 물건들이 있지. 너희들의 물건도 그중 하나일 테고. 오랜 시간 동안 녀석을 관찰했지만, 녀석은 좀처럼 아지트를 비우지 않더군. 그런데 바로 어제 너희들이 물건을 잃어버리자마자 직접 빈민가에 물건을 회수하러 행차하더니, 이번엔 아지트를 비웠다더군. 나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이그넬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녀석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경비가 허술한 건 아니야. 녀석은 직속 병력을 거느리고 있고 놈들은 아지트를 항상 지키고 있지. 그래서 너희들이 필요한 거야.”

이그넬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더스크 녀석은 너희 물건에 꽤나 관심이 있어 보이더군. 너희가 물건을 되찾겠다고 아지트에 나타나면 온 병력이 거기에 집중되겠지.”

이그넬은 펼쳐놓은 도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녀석의 아지트는 과거 하수 처리 시설이었던 곳이야. 덕분에 미로처럼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고 알려지지 않은 통로도 많지. 너희는 정면에서 병력을 유인해. 나는 배수관을 타고 시설을 가로질러 더스크의 방으로 가서 물건을 획득하고.”

이그넬은 하수 처리 시설의 도면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곳에서 다시 만난다. 뒤쪽에 놈들도 모르는 비밀 통로가 있어. 내가 이곳을 열어주면 더스크를 엿먹이고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어.”

이그넬이 말을 마치자마자, 토비는 그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네가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럼 너희들은 붙잡혀 고문당하다 죽겠지.”

이그넬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더스크 인지 머스켓인지 하는 녀석한테 물건을 훔치고 나면, 네가 우릴 구해줄 필요는 없어 지는거 아니야? 우리가 뭘 믿고 이런 위험한 일을 해야 하지?”

토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하지? 날 믿건 안 믿건 그건 -”

“우리들의 자유죠. 믿어볼게요, 이그넬.”

이그넬이 짜증 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순간, 레이나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녀는 깊은 갈색 눈으로 가만히 이그넬의 붉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당신이 나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믿어볼게요.”

레이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그넬은 잠시 흠칫하더니 이내 레이나의 눈을 피했다. 이그넬은 그를 꿰뚫어 보는 듯한 레이나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달갑지 않았다.

“나에 대해서 모르면서 다 아는 듯 지껄이지 마.”

이그넬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고는 거칠게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홱 돌려 방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이동하지. 좀 걸어야 할 거야.”

“재수 없는 자식.”

토비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이그넬의 등에 손가락 욕을 했다. 레이나 일행은 조용히 이그넬의 뒤를 따라 배수로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

이그넬과 레이나 일행은 긴 배수로를 지나 마침내 더스크의 아지트에 도착했다. 과거 하수 처리 시설로 쓰였던 장소답게 차갑고 눅눅한 기운이 그들을 에워쌌다. 어두운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벽 곳곳에 녹슨 파이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메아리치며 복도를 채웠다.

레이나는 깊이 들어갈수록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짙어졌다. 그녀는 명확히는 알 수 없지만, 공기 자체가 무거워지고 묵직해지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토비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여기 벽이 조금 다른데?”

토비는 복도가 점점 좁아지면서 벽의 재질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감지했다. 토비는 매끈하게 잘린 벽면에 손을 대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덜컹-!

갑자기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낮은 소리가 그들의 등뒤에서 들려왔다. 곧이어 금속이 긁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무거운 무언가가 바닥을 향해 쿵쿵거리며 떨어졌다. 자욱한 먼지가 일어나 그들의 시야를 가렸고, 레이나와 토비, 그리고 톰은 재빨리 코와 입을 가린채 한참 콜록거렸다. 먼지가 조금 가라앉자, 그들은 천장에서 두꺼운 철창이 내려와 그들의 퇴로를 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두에 섰던 이그넬은 어느새 그들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철창 너머에서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거 당장 열어, 이 비열한 자식!”

토비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이그넬에게 소리쳤다.

“보험을 들어두는 거로 생각해줬으면 좋겠군. 너희가 충분히 미끼 역할을 하기 전에 도망쳐버리면 곤란하니까.”

이그넬은 냉정하게 고개를 돌리며 한쪽 벽을 손으로 밀었다. 그러자 벽이 천천히 돌아가며 새로운 통로가 열렸다.

“그럼 붙잡히지 말고 잘 살아남아 보라고. 만나기로 한 곳은 잊지 말고.”

차갑게 내뱉은 마지막 말과 함께 이그넬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어둠이 드리워진 긴 복도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젠장! 꼼짝도 안 해.”

토비는 분한 목소리로 욕지기를 뱉으며 철창을 흔들었다. 톰도 가세해 팔뚝에 핏줄이 선명하게 올라올 만큼 힘을 줘봤지만, 두꺼운 철창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앞에 펼쳐진 어두운 복도의 끝을 바라보던 레이나는 무언가 음습한 기운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빨리 움직여야 해요.”

레이나는 다급하게 외친 그 순간, 어두운 복도 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과 함께 거칠게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철장을 이리저리 흔들며 벌려보려 애쓰던 톰과 토비는 불가능하다는 깨닫고 서둘러 일어났다.

“숨을 곳부터 찾아야 하네!”

톰이 갈라지는 목소리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외쳤다. 그 덕분에 허둥대던 토비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돌바닥을 구르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어두운 복도의 끝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이제는 좋으나 싫으나 아지트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저 쪽에 문이 있어!”

토비는 길게 이어지는 복도의 한쪽 벽에 철문을 발견하자마자 레이나와 톰에게 알렸다. 그들은 즉시 그 문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문 앞에 도착한 토비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은 시끄러운 철컹거리는 소리를 낼 뿐 열리지 않았다. 토비는 철문의 걸쇠에 달린 큰 자물쇠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말했다.

“이런 제기랄. 잠겨있어!”

토비가 절박한 표정으로 자물쇠의 열쇠 구멍 안쪽을 한쪽 눈을 감은 채 들여다보았다. 그는 자물쇠를 따볼 심산이었다. 그 순간, 도착한 톰이 그의 어깨를 잡고 옆으로 비키게 하며 말했다.

“그럴 시간 없네. 옆으로 비켜서게.”

발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이제는 다가오는 자들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저쪽에서 소리가 들렸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톰은 눈을 부릅뜨고 오른쪽 팔에 힘을 모아 철문에 몸을 부딪쳤다. 묵직한 충돌음이 나며 두꺼운 걸쇠가 눈에 띄게 벌어졌다.

“저쪽이다!”

복도 끝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큰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톰이 한 번 더 온 힘을 다해 철문에 몸을 부딪치자 걸쇠가 엿가락처럼 휘며 철문에서 떨어져 나갔다. 철문이 열리자 톰은 토비를 거의 던지듯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레이나는 떨어진 걸쇠와 자물쇠를 서둘러 챙겼다.

“레이나! 어서 들어가!”

레이나까지 안으로 들어오자 톰은 철문을 닫고 도끼로 철문을 걸어 잠갔다. 문 안은 빛이 한줄기도 새어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이었다. 그들은 철문에 몸을 기댄채 앉아 숨을 죽였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적어도 다섯 명은 넘어 보이는 묵직한 발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그 중 한명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계 철창이 내려왔어. 침입자인가?”

“저번처럼 고장인가?”

“일단 상부에 보고해.”

도적단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문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레이나와 토비는 입을 손으로 막은 채 숨을 참았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마저도 어마어마하게 큰 것처럼 느껴졌다.

몇 차례 서성거리는 발소리와 금속이 바닥을 긁는듯한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한참 거의 숨도 쉬지 못하고 있던 레이나, 토비는 그제야 간신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순간 지독한 악취가 그들의 코를 찔렀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토비가 어둠속에서 코를 감싸쥐며, 오만상을 찌뿌렸다.

“이건. 흡사... 시체의?”

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토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침침한 눈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토비가 한 걸음을 떼려는 순간, 레이나는 어두운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토비. 움직이지마.”

레이나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자 토비는 소스라치며 그대로 얼음처럼 멈춰 우뚝 섰다. 레이나는 눈을 감았다. 검은 기운이 방 가운데로부터 파도처럼 퍼져서 그녀에게 닿았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방 가운데에서 불길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검은 물결이 조금씩 조금씩 더 크게 요동치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니, 이미 충분히 가까웠다. 레이나는 눈을 번쩍 떴다.

“세루아 루미나라（Seru'a Luminara）!”

레이나는 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날카롭게 외쳤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짝 공중으로 떠오르며 너울거렸고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났다. 그녀의 손을 타고 눈부신 빛줄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스멀스멀 다가왔던 어두운 그림자는 빛이 몸에 닿자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물러섰다. 빛줄기가 어둠을 밀어내자, 숨죽이고 있던 검은 그림자의 형체가 드러났다. 방 중앙에 떠오른 괴이한 형체는 불길한 아우라를 발산하며 공간 자체를 뒤트는 듯했다. 그 중심엔 피처럼 검붉은 색의 구체가 불안하게 회전하고 있었고, 구체를 둘러싸는 연기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여러 갈래로 퍼져나갔다.

“저게, 대체 뭐죠?”

토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허 포식자야! 아무래도 우리가 식사를 방해한 모양이군.”

톰이 심각한 표정으로 녀석의 뒤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괴한 형체의 뒤로는 희생자로 보이는 몸둥아리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희생된지 오래되어 보이는 시체는 이미 부패해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공허 포식자의 중심에 있는 검은 구체는 마치 눈처럼 레이나의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내 그 주위를 감싸던 검은 안개가 마치 기괴한 손처럼 그들을 향해 뻗어나오기 시작했다. 레이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루미나 발라（Lumin’a Valar）!”

레이나가 외치자, 주변을 부드러운 빛의 오라가 감쌌다. 여러갈래로 뻗어나왔던 검은 안개가 레이나가 만든 빛의 파장에 부딪혀 흩어졌다. 그러나 이내 다시 형태를 갖추고 레이나를 향해 손아귀를 뻗어왔다.

“녀석의 중심을 노려야 해! 안개는 의미없어!”

톰이 다가오는 검은 손을 도끼로 힘겹게 쳐내며 외쳤다. 레이나는 스멀스멀 다가오는 구체를 향해 빛줄기를 집중적으로 쏘았지만, 녀석의 속도가 조금 늦춰질 뿐이었다. 그 순간, 토비가 손에 무언가 쥐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불꽃 폭죽 물약이나 먹어라!”

토비는 구체를 향해 물약을 힘껏 던졌다. 정확한 궤적으로 날아간 물약은 공허 포식자의 중심부에 명중했고, 연쇄적으로 터지며 검은 안개 속에 귀여운 곰돌이 모양 불꽃을 수놓았다. 정통으로 얻어맞은 공허 포식자는 발작하듯 몸체를 떨었다. 검은 안개가 들끓으며 괴상한 모양으로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톰은 철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레이나와 토비를 향해 소리쳤다.

“지금이야! 도망쳐!”

톰의 외침을 들은 레이나와 토비는 지체하지 않고 문을 향해 뛰었다. 레이나가 몸을 돌리며 빛이 옅어지자, 정신을 차린 공허 포식자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아슬아슬하게 레이나와 토비가 철문을 통과하자마자 톰은 빠르게 철문을 당겨 닫았다. 뒤이어 놈의 몸이 철문에 부딪히며 쾅 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려퍼졌다. 사냥에 실패한 공허 포식자는 약이 바짝 오른 듯 여러번 철문에 몸을 부딪혀댔다. 녀석이 부딪힐 때마다 철문이 구체 모양으로 불룩 불룩 튀어나왔지만, 다행히 부서지지는 않았다. 이내 녀석이 포기한 듯 잠잠해지자 토비와 레이나는 다리의 힘이 풀린 그대로 주저앉았다. 톰도 적지 않게 놀란 듯 허리를 접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톰. 저런 녀석을 전에도 본 적 있어요?”

레이나가 힘겹게 숨을 고르며 톰에게 물었다.

“전쟁 당시에 봤었지. 저 검은 안개에 삼켜지면 영혼이 빠진 껍데기가 되어 버리네. 떠올리기도 싫은 저 악몽같은 녀석을 다시 보게될 줄이야.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군.”

톰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토비가 한곳을 응시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요. 상황이 좋지 않네요.”

그들이 공허포식자와 사투를 버리는 소리가 너무 컸던 모양이었다. 토비가 응시하는 시선의 끝에 도적단원 여럿이 그들을 향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웬 놈들이냐?”

도망칠 새도 없이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도적들 중 한명이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그러니까... 저희는 말이죠... 이 멋진 하수도에 견학 온... 학생들입니다.”

토비가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그순간, 토비의 눈에 톰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학생이라기엔 너무 삭아있었다. 도적단은 토비의 말의 일제히 검을 뽑아들며 그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 학생을 별로 안좋아하시나? 하하... 하하하...”

토비는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톰은 한숨을 쉬며 도끼를 고쳐잡았다.

“산넘어 산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