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이그넬은 레이나 일행이 있는 테이블로 망설임 없이 걸어왔다. 톰은 팔짱을 낀 채 다가오는 이그넬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 묘한 익숙한 느낌에 톰은 기억 속을 더듬었지만, 별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톰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이그넬에게 말했다.

“아무도 들어온 기억이 없는데,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톰의 목소리는 묵직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충분히 오래.”

이그넬이 무표정으로 짧게 답했다. 그는 레이나 일행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으로 천천히 레이나 일행을 한명 한명 훑어본 이그넬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물건을 되찾을 방법을 알고 있다. 내게 협력한다면 도와주지.”

이그넬의 확신에 찬 목소리는 또렷했다. 토비는 이그넬의 말에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지?”

토비가 경계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그넬에게 말했다. 이그넬은 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들의 물건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

이그넬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며, 레이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질문이 너무 많군. 물건을 찾을 생각은 있는 건가?”

이그넬의 붉은 눈이 레이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마치 그 눈빛은 레이나에게 대답을 종용하는 듯했다. 레이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당신을 믿을 수는 없어요.”

레이나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이그넬에게 답했다.

“믿고 말고는 네 자유지만.” 이그넬은 눈을 가늘게 뜨며 레이나에게 냉소적으로 말했다.

“날 믿는 것 말고 달리 방법이 있나?”

이그넬과 레이나의 시선이 부딪히며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둘이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순간적으로 이그넬의 붉은 눈 깊은 곳에 숨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레이나의 마음에 닿았다.

“자, 진정들 하게.”

그때, 톰이 커다란 손을 흔들며 둘 사이에 불쑥 중재에 나섰다. 톰은 레이나와 이그넬을 번갈아 보다 레이나에게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일단 이 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야기는 들어보자고. 그리고 자네.”

톰은 이그넬에게 홱 고개를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자네도 뭔가 목적이 있어서 이 친구들에게 접근한 거 아닌가? 협력을 원한다면 신뢰는 기본이야. 적어도 자네가 누구인지는 밝히는 게 순서일세.”

이그넬은 톰의 말에 잠시 이글거리는 눈빛을 거두었다. 그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차분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그넬이라고 한다. 피주먹단의 일원이지.”

이그넬이 정체를 밝히자 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으며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그넬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너희들의 물건은 도적단의 간부인 더스크라는 자가 가져갔다. 항상 가면을 쓰고 다니고,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녀석이지.”

이그넬은 더스크를 언급하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데 어젯밤 빈민가에 직접 행차하셨더군. 그리고 빈민가의 모든 장물을 직접 회수했어. 원래 그런 일은 보통 잔챙이들이나 하는 일이지. 아무래도 너희들의 물건에 큰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야. 의심되면 저 꼬맹이한테 물어보라고.”

이그넬은 팔짱을 낀 채 턱 끝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새미를 가리켰다. 레이나 일행은 새미에게 고개를 돌리자, 새미는 몸을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녀석의 아지트 위치를 알고 있어. 내게 협력한다면 너희들 물건을 되찾아 줄 수 있다.”

이그넬이 말을 마치자 잠시의 침묵이 찾아왔다. 잠깐의 조용함을 깨고 토비가 의구심이 든 듯, 이그넬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왜 우리를 도우려는 거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해두지.”

이그넬은 차가운 표정으로 토비를 바라보며 답했다.

“나는 그 녀석의 다른 물건에 관심이 있거든. 이 정도 설명이면 충분한가?”

토비는 이그넬에 질문에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그럼 어떤 협력을 원하는 거지?”

“간단해. 너희가 소란을 일으켜 병력들의 관심을 돌리면 내가 녀석의 방에서 물건을 가져온다.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얻고, 너희들은 너희 물건을 되찾는다. 어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건 우리 쪽이 훨씬 위험하잖아. 그리고 당신 말을 어떻게 믿고!”

토비는 당치도 않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이그넬은 시니컬하게 조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미 말했잖아. 날 믿든 말든 그건 너희들 자유라고.”

토비는 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다물었다. 레이나는 냉소적인 미소를 짓는 이그넬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또다시 그의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 속에 감춰진 알 수 없는 슬픔이 그녀에게 닿았다. 레이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차분히 생각을 고르듯 고개를 숙여 눈을 감았다. 이윽고 눈을 뜬 그녀는 결심이 선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믿어볼게요.”

레이나의 말에 톰과 토비가 놀란 표정으로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그넬도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레이나는 재차 말했다.

“당신을 믿어본다고요. 계획을 말해주세요.”

“레이나, 절박한 마음은 알겠지만 신중해야 해. 저 녀석도 도적단이라고.”

토비가 조심스럽게 끼어들며 레이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레이나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말이 통하는 여자로군. 자리를 옮기지.”

이그넬은 피식 웃으며 레이나와 토비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그때, 톰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성큼성큼 여관의 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더니, 장식처럼 걸려있던 커다란 도끼를 손에 움켜쥐었다. 도끼는 오래되고 낡아 보였지만, 아직도 날이 살아있었다. 톰은 잠시 도끼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같이 가겠네.”

톰이 차분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레이나와 토비는 톰의 말에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레이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톰, 저희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 없어요.”

“내가 같이 가는 것에 불만 있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며 같이 가겠네.”

톰이 레이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뒤이어 톰은 커다란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 이그넬을 바라보았다.

“자네도 불만 없겠지?”

이그넬은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다가 비꼬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좋을 대로 해. 미끼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톰은 대답 대신 코웃음을 치며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레이나는 잠시 이그넬과 톰의 모습을 바라보다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토비도 불안한 눈빛을 지우며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지. 날 따라와.”

이그넬은 그들의 모습을 보곤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묵묵히 뒤를 돌아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

엑스브리지는 역사가 깊은 도시였다. 아주 오래전, 강으로 둘러싸인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뎠던 것은 모그림이었다. 그들은 수준 높은 석조 기술을 바탕으로 약한 지반에 단단한 기초를 올리고 성벽을 쌓았다. 그 위에 지은 그들의 웅장한 도시는 많은 시간이 지나도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그림들이 만들었던 것은 겉으로 보이는 거대한 성벽과 멋들어진 조형물들뿐만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구석구석 그들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엑스 브리지의 구（舊） 하수도였다. 그들은 엑스브리지 아래 다층 구조의 복잡한 하수도를 건설했다. 그들은 물의 흐름을 제어하기 위해서 지하에 미로처럼 얽힌 배수로를 건설하였고, 이것은 오랜 시간 동안 엑스 브리지 주민들의 쾌적한 환경을 책임졌다. 긴 시간이 흐른 후, 마법 공학이 도입되면서 하수도는 간결하고 효율적인 형태로 점차 변모했고, 구 하수도는 점차 사람들에게 잊혔지만, 여전히 도시의 지하에서는 모그림들이 건설한 거미줄 같은 하수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그넬은 레이나 일행을 사람들의 발걸음이 좀처럼 닿지 않는 곳으로 인도했다. 엑스 브리지의 중앙 광장을 지나 깊은 골목으로 들어가자 어두운 좁은 길이 나왔다. 그가 발길을 멈춘 곳에는 작은 이끼들이 돌바닥에 들러붙어 있었고, 공기가 불길할 정도로 축축했다.

이그넬은 바닥을 몇 번 발로 구르더니, 자세를 낮춰 바닥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그넬이 유독 벽돌 하나를 누르자 돌바닥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천천히 갈라졌다. 그리고 까마득하게 어두운 구 하수도로 통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계단에서 흘러나온 축축하고 퀴퀴한 냄새가 그들의 코를 찔렀다. 톰은 눈썹을 치켜뜨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그는 움직임을 멈춘 돌바닥을 손으로 쓸어보며 경외의 눈빛을 보였다.

“옛 선조들의 작품이로군.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있다니.”

톰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이그넬은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 익숙한 듯 어둠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톰은 잔뜩 흥분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시작부터 영 내키지 않는데...”

토비는 어둠이 스멀스멀 밖으로 기어나오는 듯한 계단의 입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두운 계단 아래로 이어진 곳에서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레이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후, 단단한 결심을 다지듯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자, 잠깐 기다려. 같이 가!”

토비는 다급히 외치며, 총총걸음으로 레이나의 뒤를 쫓아 들어갔다.

지하로 이어지는 나선형의 계단은 깊이 들어갈수록 어두워졌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선두에 선 이그넬 앞으로 손을 뻗어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잠시 후, 작은 파열음과 함께 그의 손바닥 위에 선명한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일렁이는 불꽃이 주변을 비추자 하수도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수도의 통로는 생각보다 넓고 고요했다. 물이 고여있는 바닥은 이곳이 과거에 배수로였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천장에는 거미줄이 드문드문 엉켜있었고, 벽에는 물자국과 얼룩을 따라 이끼가 기분나쁘게 얽혀있었다.

이그넬과 레이나 일행은 까마득한 어둠으로 이어지는 배수로를 따라 숨을 죽이며 걸어갔다. 이따금 들려오는 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고인 물을 밟아 찰박거리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대열의 가장 뒤에 있던 토비는 발밑에 느껴지는 낯선 감촉에 멈춰섰다. 미끈하고 물컹거리는 느낌에 당황한 토비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서서히 발밑을 바라보았다. 그가 밟은 물 웅덩이가 기괴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기... 여기 뭔가 물컹거리는데 느낌이-”

토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순간, 물웅덩이가 손처럼 뻗어나와 그의 발목을 휘감았다. 그를 반응할 새도 없이 토비는 휘청거리며 넘어졌고, 미끈한 형체가 그를 순식간에 감아올렸다.

“으아악!”

토비의 비명이 통로 전체에 메아리쳤다. 레이나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점액 덩어리가 토비의 한쪽 발을 완전히 감싸 들어 올렸고, 토비는 거꾸로 매달려 시계추처럼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끈적한 생명체는 점점 더 토비의 몸 전체를 휘감으려 했다.

“토비!”

레이나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고, 톰은 서둘러 등에 멘 도끼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검이 뽑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불꽃이 폭발하듯 순간적으로 주변이 환해졌고, 이그넬이 레이나와 톰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축축한 절삭음과 함께 생명체는 움직임을 멈췄다. 미끈한 덩어리는 서서히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고, 검에 베인 단면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다 철퍽 소리를 내며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발목이 붙잡혔던 토비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그넬은 불꽃이 일렁이는 검으로 끈적거리는 웅덩이가 되어버린 생명체를 겨누며 끝까지 주시했다.

“토비! 괜찮아?”

레이나와 톰이 뛰어와 토비를 살폈다. 토비는 바닥에 무릎 꿇고 손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이내 괜찮다는 신호를 했다. 레이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꿈틀거리는 웅덩이의 움직임이 완전히 없어지자 이그넬은 천천히 검을 거두었고 검 끝에서 일렁이던 검붉은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대, 대체 뭐였어, 저건?”

토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그넬을 향해 물었다.

“평범한 점액 괴물.”

이그넬은 검을 검집에 넣으면 태연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토비가 머리를 감싸 쥐면서 비명 같은 말을 내뱉었다.

“평범한? 저렇게 큰 녀석이?”

“여기선 저 정도면, 작은 놈이야.”

이그넬은 태연한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는 어깨를 툭툭 털고 뒤를 돌아 으스스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여기서부터는 방심하지 않는 게 좋아. 저런 게 종종 튀어나오니까.”

“그런 건 미리미리 말해달라고, 죽을 뻔했잖아!”

토비가 버럭 화를 내며 이그넬에게 꽥 소리 질렀다.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로 받아들이지.”

이그넬이 비아냥거리자, 토비는 씩씩거리며 일어나 그에게 항의하려 했다. 그러자 이그넬은 큭큭 거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참,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 주변 크리처들이 다 모여들 텐데. 그게 좋다면 계속 떠들지 그래.”

이그넬의 말에 토비는 지진이 난 듯 동공이 흔들렸고, 그 즉시 입을 다물었다. 이그넬은 낄낄거리며 다시 앞장섰다. 토비는 그저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뒤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를 따라 걷던 이그넬은 한 장소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그넬은 배수로의 벽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멀쩡한 벽돌을 하나씩 빼기 시작했다.

“뭐하는 겐가?”

이그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이그넬은 대답 없이 묵묵히 작업을 계속할 뿐이었다. 그 순간, 벽에서 무언가 맞춰지는 무거운 소리가 나며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벽돌들이 하나하나 의지를 가진 듯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맞춰지며 벽 뒤에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레이나와 일행들이 이그넬을 따라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자, 비좁고 어둑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흩날리는 먼지와 벽면을 가득 메운, 덕지덕지 붙어있는 종이들이었다.

“이, 이게 다 무슨...?”

토비는 말을 잇기 어려운 듯 입술을 달싹였다. 벽면에는 피주먹단의 주요 인물들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가 못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그 아래 이 인물들이 저지른 범죄, 조직 내의 역할, 계급, 담당 구역 등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톰은 무거운 표정으로 턱을 감싸 쥐며 벽면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각 초상화는 거미줄처럼 얽힌 빨간 선으로 복잡하게 연결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이그넬이 휘갈겨 쓴 듯한 쪽지들에는 각 인물 간의 관계가 치밀하게 적혀 있었다.

‘이그넬... 이 자는 대체 뭐지?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지?’

톰은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질문을 속으로 삼키며 그가 기록한 정보들을 계속 살펴보았다. 빨간 선들은 어지러이 불규칙하게 엉켜있었지만, 결국 모두 벽면의 중심을 향하고 있었다. 벽면의 중앙에는 세 인물이 삼각형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다른 초상화와 다르게 못이 아닌 단검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톰의 눈이 삼각형의 가장 위 꼭짓점에서 멈췄다.

‘이 자가 피주먹단의 두목인 고르칸이로군.’

흉악한 얼굴엔 오른쪽 눈부터 턱까지 이르는 큰 흉터가 있었고, 흉터의 주변 피부는 얼룩덜룩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한 번 보면 좀처럼 잊히지 않을 인상이었다. 톰의 눈은 다음 꼭짓점을 향했다.

‘이 자가 더스크인가?’

초상화 속의 인물은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은 얼굴의 형상이었지만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형태였다. 톰의 눈은 마지막 꼭짓점으로 이어졌다. 그 순간, 톰의 표정이 미세하게 떨렸다가 굳어졌다. 초상화 속의 얼굴은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친절한 미소와 단정히 다듬어진 수염. 바로 베르트랑이었다.

“자네. 무슨 꿍꿍이인가?”

톰이 이그넬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