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로운 역사와 진정한 자유가 이루어졌습니다!"
지나가던 늙은 아버지 또래 사람이 광장 한 비탈에 틀린 TV를 보며 소리쳤다.
그것은 내게 아연함이었다. 군인이 결국 경찰 대신에 찾아온다는 얘기였다. 적과 맞서 싸워야 할 사람들이 총을 겨눈다는 소리였다.
"이제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국가를 전복하려는 몹쓸 분자들을 색출할 것입니다!"
다리가 후들후들. 자칫했다간 맨 앞에서 촛불을 들고 있던 내가 잡혀갈 것이다. 아버지가 부마항쟁 때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우습게도 박정희와 똑같은 한자였고,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흠칫했었다는 얘기가 한번씩 꺼내는 농담이었다. 어쩌다가는, 우리나라 역사에 독재 없이 민주정권이 유지된 것보다 독재로 정권이 유지된 역사가 더 길다는 말도 했었다. 그때 내게 알게 모르게 그 시절 이야길 해준 적 있었다. 또 직장을 잡았을 적에는 휴지에다가 대학생들 용돈으로 쓰라고 지폐를 휴지에 껴서 창밖으로 던진 적도 있었다고 했었다.
물론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돌아가셨지만,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화면에서 대통령의 말이 흘러나오고, 그 말이 다 끝나는 순간부터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옆에 있는 친구 손을 붙잡았다. 친구는 나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하냐?"
"모르겠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자. 경찰은 몰라도 군인은 싫어."
녀석은 내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한 번 숨을 내쉬고 곧장 지하철로 달렸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지하철로 달렸다. 들고 있던 촛불이란 촛불은 죄다 어떻게 꺼버리고, 곧바로 집으로 빠져나가려는 기색이었다. 지하철로 내려가는 이 길이 친구랑 왔을 때는 넓었는데, 지금은 지옥철이라고 부르는 말마따나 미어터지고 짓밟길 듯이 서로를 삼켰다.
"악, 내 발!"
실수로 발을 밟힌 친구 때문에 나는 더 속상했다. 이곳에 오자고 한 건 나였지만, 이 애가 가장 먼저 선두에 서는 바람에, 내가 그 앞에 서기로 마음먹었던 탓에,
"빨리 내려가자, 지하철 타고 고속철도역에 내려서 열차 타고 가면 돼."
하고 말했다. 말하다가 순간 휴대폰으로 미리 좌석을 구입해야 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뇌리에 스치는 바람에 짜증이 났다. 당황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발자국 하나 남길 곳조차 없는 곳에서, 그것도 부대껴서 내 지갑과 휴대폰에 마음 쓰지 않아도 될 텐데. 차라리 올 적에 미리 내려갈 표도 일찍 구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도무지 떠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때 한 번 사람들이 우르르 쏠렸다.
계단에서 아래에 평평한 석회암 바닥까지 우르르 파도처럼 밀려갔다. 파도 하얀 거품처럼 나와 친구가 위에서 밀렸다.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사람들 무릎이나 허벅지, 또는 배에 닿는 발 느낌이 안절부절 못하게 했다.
이대로 가다가 혹시 지하철 전기선에 부딪치거나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이러다가 압사하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두 팔을 쭉 뻗고, 한 손은 팔꿈치를 움켜잡고, 나머지 팔은 접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순간 멈추는 바람에 나와 친구는 무사히 바닥에 발을 댈 수 있었다. 매우 불안했지만.
"승차권 필요하신 분은 저쪽으로 일렬로 서시고, 카드 있으신 분은 얼른 빠져나가세요!"
신뢰와 믿음의 상징인, 아마도 꽤 오래되었을 법한 형광조끼를 입은 공무원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일순간 멈춰 섰다.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방금까지 성난 파도 같이 몰아쳤던 사람들이 고요한 바다가 되었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고, 생각보다도 고요하고 천천히 움직였다.
"누구 50원 있습니까?"
그런 한가한 소리가 나올 정도여서, 나는 별안간 맥이 탁 풀렸다. 친구는 불안한 탓인지 자꾸 뒤를 돌아봤다. 그러면서 아직도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불안한 듯이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가 계속 이어진다면 모두 안전히 집으로 가거나 사상자 없이 끝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친구도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입법권자들이 국회로 갈 것이고, 그들이 생각이 있다면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곧바로 바뀌리란 어떤 믿음이 생겼다.
그런데 그런 믿음은 어쩐지 불안했다. 역사책에서 말하는 계엄령은 엄격하고 강요 같아서 사람을 쉽게 묶어버리거나 한데 어울려서 교육대 같은 곳에 보내버렸다는 얘기를 아버지에게서 들었다. 지금 모습은 사람이 너무 많아 통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나도 모르게 무사히 집에 갈 수 있을 거라는 설렘과 이러한 시간이, 잠깐 맛보는 꿀맛이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한데 어우러져서 입맛을 다셨다.
"군인이다!"
"경찰도 있다!"
슬픈 예감은 본래 잘 틀리지 않는 것인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갑자기 사람들이 너도나도 검열대를 뛰어넘어 지나갔다. 조끼를 입은 공무원은 어찌어찌 통제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 모습이 설령 규정된 매뉴얼대로 집행한 것이라 한들, 지금 상황을 떠올리면 그저 군인들과 협력한 앞잡이 같을 뿐이다.
"너, 발 이제 괜찮아?"
친구에게 그렇게 묻고, 곧바로 차표 검열대를 월담했다. 야간 자습 시간에 몰래 PC방 놀러가던 때 실력이 아직 살아있음이 고마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얼른 지하철이 다가올 곳으로, 1호선으로 가느냐, 2호선으로 가느냐, 3호선으로 가야 알맞은 것인지를 두고 발을 옮겨야 한다.
잠깐이라도 발을 잘못 놀리면 우리는 전부 죽음 목숨인 셈이다. 저 경찰과 군인이 가지고 있는 강철 군화에 짓밟히면 총살을 할지도 모른다. 내게는 정치나 대학과 관련한 뒷배가 없어서 즉결심판을 받는다 한들 제지를 걸 사람이 없다. 입법부, 사법부에 대한 권한을 모두 행정부가 담당한다는 것쯤은 법과 정치 수업 때 많이 배웠었다. 그리고 6.25 전쟁 이후에 일어난 계엄령은 대개가 권력을 유지하고자 가상의 적을 만들어 우리를 위협하는 조치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도피였다.
뒤를 돌아봤다가는 어쩜 보는 즉시 몽둥이찜질을 받을지 모른다. 백골단인가, 그런 종류처럼 말이다. 그러니 뒤를 돌아보지 말고 달려야 했다.
그렇지만 스크린도어 앞에 서면, 무력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는 벌떼 같은 무리가 다가올 판국인데 열차가 온다는 안내 방송은 나오지 않았다. 뒤에서 외마디 비명 따위가 들리고 사람들이 스크린도어에 찰싹 달라붙어 깨질 듯, 안 깨질 듯이 팽창하고 수축하기를 반복할 때, 비로소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이번 역은 광화문, 광화문역입니다…."
곧이어 남자 목소리가 나온다.
"이 역은 열차와 승강장 사이의 간격이 넓습니다…."
그 목소리는 마치 구원 같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친구와 같이 지하철을 타고 대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 되새김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소리에 발작하듯이 더 스크린도어를 밀어붙였고, 나와 친구는 그 강렬함에 스크린도어로 몸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우우웅-위이잉 거리는 열차 소리가 떠들썩하자, 친구가 내뱉었다.
"살았다!"
나도 그때만큼은 그 말이 나오리라 여겼었다. 그러나 빨리 지하철에 타는 게 급선무라선지, 얼른 지하철이 멈추길 바랐다. 그리고 문이 열려 내 몸과 친구 몸이 스크린도어를 무사히 빠져나가 열차 안에 탑승하길 바랐다. 일단 지하철 안에 타기만 하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테니까.
치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친구가 잽싸게 내 손을 잡아다가 안쪽으로 달려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사람을 끌어다가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최대한 많은 다수를 잡아넣으려는 듯했다.
거기다 기장은 중간에 말했다.
"위에서는 영구 정지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손님들을 안전히 모시기 위해 지나가는 역마다 서겠습니다."
잠깐 뜸을 들이는 듯하더니, 다시 말했다.
"오늘도 저희 지하철을 이용해주시는 승객 분들께 감사합니다."
그 말을 하면서, 가는 길마다 문을 열어주고 닫아주고 했다. 그러나 타는 수요가 더 많았다. 내리는 수요는 드문드문 있을 뿐이었다. 포기였는지 아니면 영합인지는 알 수 없었다. 승객들은 각자 지하철 안에서 전화기를 들고 친구나 가족들에게 연락하는 투의 사람도 제법 있었다.
"아! 이 와중에 내 엉덩이를 왜 만져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이런, 마냥 소소하지만은 않은 일도 있었다.
"내 휴대폰!"
하고 남자가 무척이나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딪쳐버리곤, 발로 찍어버린 덕에 휴대폰이 망가졌으리라 보고 매우 실망한 듯했다.
"죄송합니다. 액정은 안 깨졌을 거예요."
하면서 그 휴대폰을 밟은 청년은 신발에 억지로 끼워서 종아리 사이로 비비면서 슬슬 올려서는 손으로 집어 건네주었다. 사람들이 많아서 한 궁여지책이긴 했지만, 그걸 받은 사람은 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더욱 많아져서 억지로, 억지로 공간을 만들어가는 형극이었다. 처음에는 의자에 앉지 않고 서는 데에서 그쳤지만, 거듭 역을 거치면 거칠수록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만 지하철이 꽉 차버렸다.
결국, 어찌저찌 친구와 나는 지하철 짐칸에 끼어가고야 말았다. 그러다 문득 스친 것이, 고속철도 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이 상황에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고속철도역이 되자, 승객들이 하나 같이 우르르 빠져서, 짐칸에 있던 나와 녀석이 빠져나가기에 매우 수월해졌다.
"다들 지방에서 온 것 같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여기까지도 군인이나 경찰들이 쫙 깔려 있으면, 큰일이야. 저들도 사람이니 당장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진 않겠지만."
그러던 찰나에 탕탕 무언가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소리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리는 먼저 집으로 하루빨리 가고픈 마음이 더 앞서서 얼른 지하철 바깥으로 나서려 했을 뿐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에 나는 혀를 내밀고 말았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플라스틱 곤봉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가 떨어지는 모습. 누구나 그 곤봉에 피할 수는 없는, 누구나 마구 맞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가방을 밀어서 방패를 물리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미묘한 틈새로 사람들은 모두 빠져나가려고 아우내장터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총소리가 한 번 들리고 나니 모두가 삽시간에 수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k2란 이름의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귀마개 없이 들은 최초의 음성이 이런 소리였던가 싶은 내 과거를 순간적으로 반추하게 했었다.
나와 친구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거기에는 진정한 자유가 이루어졌다고 말한 노인이 보였다. 그는 모자에 달린 금빛별을 자랑스러운 듯이, 모자를 몇 번 새로 고쳐가며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유로운 민주공화국이란 이름 아래 보호해왔다. 그런데 이게 뭐냐? 이 빨갱이들…. 애초에 세금을 올려야 하면 세금을 올려야 한다고 올바른 얘기를 지껄였으면 이런 일 따윈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러면서 걸걸한 웃음소리를 내곤,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피웠다. 지하철이 금연구역이란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나라를 망쳐도 유분수지 어떻게 자기네 대통령을 내려오라고 시위를 해? 자기네 나라를 욕하는 국민이 어떻게 그 나라 국민이라고 할 수 있어? 다들 군대도 갔다 왔으면서.”
그는 스스로가 굉장한 선지자인 것처럼 말했고, 우리는 그 말을 경청했다. 그러나 그건 그가 든 총이 무서워서, 또 이렇게 있는 편이 차라리 알 수 없는 앞날에 비해 ‘불완전한 안전’이 더 안정된 탓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면 몹쓸 분자들은 우리를 대상으로 한 말이었나. 친구는 옆에서 확 달려들 품으로 내게 말했다.
"미칠 것 같아. 난 먼저 떠나는 게 맞을 것 같아."
"무슨 소리야!"
나는 그 녀석 손을 확 그냥 잡았다가, 그 녀석이 놓으려고 하는 통에 꽉 잡아 팔짱을 껴버리고 말았다. 녀석은 징그럽다는 듯이 굴며 내게 말했다.
"난 인맥이 좀 통하는 구석이 있어. 난 괜찮아."
그 녀석이 믿는 거라곤 오로지 대학 간판일 뿐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길가에 채이는 사람 중에 1만명은 서울대생이거나 서울대를 졸업했을 것이다. 또 그것도 10명 남짓한 인원이 된 것에 불과하다는 걸 더 잘 알고 있어서, 녀석을 말렸다.
"너도, 나도 옥살이는 싫잖아."
"난 괜찮아. 정말이야. 저번에 시위했을 때 자유발언했거든. 그때 국회의원 명함도 받아서 이메일도 보내고 그랬어."
난 그 말을 들을수록, 더더욱 마음이 상했다.
"그건 꼼수야. 너를 이용하려고 그런 거야. 어느 시대나 청년들은 다 순수하니까. 그걸 노리는 거야. 나서면 안 돼."
그때 총을 든 노인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거기 팔짱을 낀 두 젊은이는 무슨 이유에서 그러고 있나! 소위 너희들은 동성애를 지향하기라도 하는 게야? 왜? 성별을 특정할 수 없다고 지랄해보지?"
그 말에 가차 없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내가 팔짱을 껴두지 않으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순수함을 지닌 녀석이니까. 더더욱 굳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도 팔짱을 낀다고 해서, 저희도 한 번 껴봤을 뿐입니다."
"그럼 당장 풀어!"
그러나 풀 수는 없었다. 적당한 변명거리를 하나 더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친구는 팔짱을 낀 반대쪽 손으로, 꽉 쥐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그 힘에는 차마 당해내지 못했다.
녀석은 군인을 보며 말했다.
지난 여름, 자유발언이랍시고 말했던 내용과 같았다. 그러나 중간에 끊겼다.
녀석은, 군인의 심기를 거스른 죄로 몇몇 의경에게 끌려갔다. 군인들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어쩌다 생활관 내에서 갑자기 펑펑 울던 일병을 본 적 있었다. 그 일병은, 이등병일 때 궤양에 걸리는 바람에, 애매하게 아픈 나머지 전역조차 할 수 없이, 그렇다고 훈련을 뛸 수도 없이, 한가하게 있어야 했다. 그러다 그가 일병 3호봉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나는 그가 우는 것을 보았었다. 눈물도 몇 방울 흘렸었다. 나는 그 모습을 기억해두었다가,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방금 온 사람처럼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그러자 깜짝 놀라서 뒤로 넘어졌다. 훈련에서도 늘 열외가 되었기 때문에 소외를 느꼈다고 내게 말했었다.
“지금은 어때?”
내 물음에 그 일병은, 전쟁에서 죽거나 말도 안 되는 부조리 때문에 죽거나 해서 보훈처에서 인정이나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걸 이룰 순 없지 않겠느냐며 울었다. 스스로 죽기에는 용기가 없으니, 차라리 남이 자신을 죽여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나는 차마 그에게 정면으로 한심하다고 할 수 없었다. 절박한 나머지 그런 생각을 품을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좀 들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뭐라도 하지 않으면.”
그 말에 무언가를 얻었는지, 한번 열심히 살아보고 싶어졌다고 갑자기 내게 말했다. 나는 의아했다. 내가 유능한 사람도 아니고, 그런 말을 이렇게 손쉽게 말한다는 게 의아했다.
그러나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 친구가 한 말이 가슴에 잘 닿는 줄 알고서, 눈물을 감추려는 듯했다. 어디까지나 과장을 보태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군인은 얼굴이 벌게져선 나를 불렀다.
"너도 저 새끼처럼 말투가 삐었어! 아까부터 저항할 때 다 알아 봤어야 해!"
군인은 그 말을 하면서 또 의경을 시켜 나를 끌어오게 했다. 난 어떻게든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친구처럼 어딘가로 끌려가기가 두려웠다. 결국에 나는 부끄럽게도, 군인을 옹호하고, 이 상황이 매우 잘 되는 통인데도 녀석이 아니라고 말하는 바람에 그런 변명을 했다고, 구차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향해 보내는 시선은 경멸, 동정, 동경, 성공, 출세, 몰락, 패배였다. 나는 그 모든 걸 온몸으로 느끼면서 두 손을 꽉 주먹으로 움켜잡을 수밖에 없었다. 군인은 그런 내가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말인 줄 알았는지, 퍽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
"나라에 이런 젊은이가 꼭 필요한 법이지."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내 친구에게 해줘야지 내게 해주어선 안 된다는 마음뿐이었다. 또 친구가 말했던 낯익은 이름들이 귀에 선명했다.
"김주열 열사! 김상진 열사! 장준하 열사! 전태일 열사! 김경숙 열사! 박영진 열사! 김태훈 열사! 김의기 열사! 김종태 열사! 박영두 열사! 우종원 열사! 박태원 열사! 박종철 열사! 이한열 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