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몇 가지 여쭈고 싶은 게 있는데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레이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까 상인들과 대화를 나누던 바로 그 남자였다. 단정히 넘긴 은회색의 머리칼과 단정히 정돈된 수염, 말끔한 옷차림, 고급스러운 금색 안경까지 신뢰감이 느껴지는 차분하고 이지적인 외모였다. 그러나 레이나는 그를 보자마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가슴 속에 파고 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레이나가 약간 경계하듯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는 미소를 머금고 정중하게 말했다.
“아, 갑자기 당황스럽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엑스 브리지 시장 베르트랑입니다. 엑스 브리지를 방문해주시는 분들에게 의견을 청취 중이었습니다.”
“세상에. 정말 베르트랑 시장님이세요?” 토비가 호들갑을 떨며 나섰다. “영광이네요! 엑스 브리지뿐만 아니라 세렌디에르 전체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해주신다고 들었어요.”
베르트랑은 무릎을 살짝 굽히며 토비와 키를 맞추었다. 그리고 토비에게 악수를 청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저의 공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 시민 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주셨기 때문이지요. 혹시 엑스 브리지에는 어떤 목적으로 오셨습니까?”
베르트랑이 수첩을 꺼내어 들며 레이나 일행에게 질문했다.
“저희는 브리즐덴에서 온 마법약 상인입니다.”
레이나가 조금은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베르트랑은 레이나의 딱딱한 말투에 다소 작위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브리즐덴에서 오신 분들이군요. 평화롭고 멋진 곳에서 와주셨네요. 항상 양질의 약초와 마법물약을 공급해주셔서 엑스 브리지를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엑스 브리지에서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나요?”
“아, 저희는 이곳에 처음 오는데 아무래도 도시에서 특정 장소를 찾는 게 어려워요. 상단 사무소를 찾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토비가 이야기하자 시장은 빠른 속도로 수첩에 무언가 휘갈겼다. 그리고는 다시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역시 그렇군요. 현재 엑스 브리지에서는 도시 환경 개선 사업을 시행 중입니다. 그래서 구획 별로 나누고 거래되는 상품의 종류별로 분류를 하여 조금 더 쉽게 거래하실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또 상단 사무소 같은 각종 행정구역도 목적지와 거래 품목별로 통합해서 운영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베르트랑은 막힘 없이 깔끔하게 대답하면서 빠른 속도로 레이나 일행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에 레이나의 뒤에 몸을 반쯤 숨긴 채 바닥을 바라보는 남루한 차림의 새미가 들어왔다. 레이나는 일순간 그의 파란색 눈동자가 차가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었지만 살짝 날카로운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세 분 모두, 이곳은 처음이신가요?”
토비가 세 명이라는 말에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레이나와 새미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레이나와는 일행이고 새미는 이곳에서 만난 안내원이라고 말하려 입을 열었다.
“아, 저희 둘은-”
“맞아요. 저희 세 명 모두 브리즐덴 출신입니다. 걸어서 이곳까지 온 탓에 조금 피곤하네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레이나가 급하게 토비의 말을 막으며 끼어들었다. 토비는 순간적으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레이나의 말에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시군요. 죄송합니다. 피곤하실 텐데 귀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엑스 브리지에서 편안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다른 곳으로 건너갔다. 그리고는 다른 방문객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부지런한 분이야. 한 도시의 시장이 저렇게 직접 나와서 의견을 듣는 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토비가 시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감탄 섞인 말투로 말했다. 레이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장에게서 풍기는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마음에 걸렸다. 한편, 새미는 말없이 앞장서 그들을 인도했다.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는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어 보였다.
“그러고보니 왜 셋 다 일행이라고 했어? 저 꼬마 녀석은 여기서 만났잖아.”
토비가 말하자, 새미의 발걸음이 순간적으로 주춤했다. 레이나는 새미의 마음이 요동쳐 파도처럼 그녀의 살갗에 닿는 것 같았다.
“피곤한데 일일이 설명하면 귀찮잖아. 뭔가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어.”
레이나가 대충 얼버무리자 토비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저런 유명인사와 대화하는 게 흔한 기회는 아닌데. 그러고 보니 너는 오늘따라 좀 차갑게 말하던데 무슨 일 있어?”
토비가 투덜거리다가 레이나에게 물었다. 레이나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피곤해서 그렇다고 답했다. 토비는 그녀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새미는 그들을 한 상단 사무소 앞으로 안내했다. 안내를 마친 그는 꾸벅 인사를 하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레이나와 토비는 상단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 윈델렌으로 향하는 상단을 찾았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상단 사무소 직원은 고개를 저으며, 동쪽으로 향하는 대부분의 상단은 이미 출발을 했노라고 말했다. 레이나와 토비는 허탈한 표정으로 상단 사무소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내일도 다시 한번 와보자. 동쪽으로 가는 상단 하나쯤은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마.”
토비가 걱정이 가득한 레이나의 표정을 보고 그녀를 위로했다. 레이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토비의 말에 동의했다. 날은 거의 저물었고 빡빡한 일정에 지친 레이나와 토비는 숙식을 해결할 곳부터 찾기로 했다. 그들이 선택한 곳은 상단 사무소에서 그리 멀지않은 ‘불타는 모루’라는 여관이었다.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무거운 돌문이 덜컹하고 열렸다. 키가 큰 모그림 직원이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레이나와 토비는 여관의 내부를 둘러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곳은 투박하지만 정겨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여관이었다. 커다란 모루 모양의 탁자와 견고해 보이는 돌의자가 배치되어있었고 손님들은 달궈진 돌판 위에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와 함께 술을 즐기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여관의 중앙에는 커다란 화로가 불을 날름거리며, 지친 사람들의 몸을 녹여주고 있었다.
레이나와 토비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메뉴판을 살펴보던 둘은 각기 다른 요리를 주문했다. 레이나는 모그림 전통 요리인 용광로 스튜를, 토비는 쇠막대 꼬치구이를 선택했다.
“모그림 전통 음식은 처음이야.”
레이나가 기대에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비는 이미 다른 손님들이 먹고 있는 음식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이윽고, 건장한 모그림 직원이 돌냄비와 커다란 돌판을 들고 다가왔다. 돌냄비에는 매콤해 보이는 빨간색 국물 속에 각종 구운 채소와 고기가 잠겨있었다. 커다란 돌판 위에도 토비가 주문한 꼬치구이가 투박하게 올려져 있었다. 레이나는 숟가락을 들어 스튜를 한 입 맛보았다. 채소와 고기의 향이 진하게 베인 국물이 지친 그녀의 몸을 따듯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우와, 이거 진짜 대박이야.”
레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토비에게 말했다. 그러나 토비는 이미 두 번째 꼬치로 손을 가져가느라 레이나의 말을 들을 여유가 없어 보였다. 반나절만의 달콤한 휴식이었다. 레이나는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운명에 대한 걱정도, 앞날에 대한 근심도 모두 내려놓고 몸의 긴장을 풀었다.
그들이 음식을 반쯤 먹었을 때, 레이나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묘하게 그녀가 멘 가죽 주머니 쪽이 허전했다. 손을 뻗어 주머니를 확인해본 레이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설마...’
레이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가죽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가죽 주머니의 옆면이 누군가 도려낸 듯 반듯하게 잘려있었다. 주머니의 안도 텅 비어있었다. 소지품이 모두 없어진 것이었다. 레이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머니를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그녀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그래?”
그녀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토비가 한 손에 빈 쇠막대를 들고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레이나에게 물었다.
“어... 없어...”
레이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한 토비는 뭐가 없는지 재차 물었다.
레이나는 대답 대신 잘린 가죽 주머니를 토비에게 보여주었다. 믿을 수 없는 장면에 토비는 들고 있던 쇠막대를 그만 떨어뜨렸다. 쇠막대가 석재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롭고 쨍한 소리를 내자 술을 나르고 있던 직원이 고개를 돌려 그들 쪽을 바라보았다. 토비는 당황한 마음에 토끼눈이 되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레이나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고 속삭였다.
‘돈이 없어진거야?’
레이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나쁜 소식을 토비에게 전했다. 그것은 바로 돈도, 베로스가 준 추천서도, 그 상자도 모두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으악!”
토비가 레이나의 말에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로 된 의자가 석재 바닥에 긁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다. 토비는 뒤늦게 입을 막아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여관의 손님들은 레이나와 토비 쪽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고, 뭔 이상함을 느낀 직원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직원이 상황을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의 눈에는 레이나의 손에 들린 찣겨진 주머니와 아연실색한 표정의 토비가 들어왔다. 뭐라도 얼버무리기엔 최악의 상황이었다. 레이나는 입술을 깨물고 직원에게 솔지히 말하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저기, 정말 죄송한데. 저희 돈이 없어져서-”
그 순간, 직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그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거칠게 레이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뭐? 돈이 없어?!”
토비가 황급히 설명하려고 했으나, 직원은 그들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기가 차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으며 얼굴을 토비에게 불쑥 들이밀었다.
“또 무전취식범이야? 이번엔 그냥 넘어갈 생각하지 마라. 돈을 당장 내지 않으면 경비대를 부르겠어.”
직원이 주먹을 불끈 쥐고 그들의 테이블을 쾅하고 내리쳤다.
“아니지, 내가 직접 끌고 가야겠어. 발뺌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이젠 여관 내의 모든 손님의 이목이 쏠렸다. 레이나는 쿵쿵 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애처롭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돈이-”
그때였다. 주방에서 쾅하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나왔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큰 모그림들보다 더욱 덩치가 커 보였다. 흉터투성이인 얼굴에 험상궂게 인상을 쓰고 어떤 상황인지 확인하던 그는 거친 목소리로 직원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소란이야?”
으르렁대는 듯한 낮은 음성에 레이나와 토비는 오금이 저리는 듯했다. 직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톰에게 말했다.
“이 맹랑한 녀석들이 돈도 없이 음식을 먹었어요, 톰. 아주 혼쭐을 내줄 참이었습니다.”
직원의 말을 들은 톰은 험악한 표정으로 레이나와 토비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그의 두꺼운 팔뚝만큼이나 커다란 요리용 식칼이 들려있었다. 레이나와 토비는 다가오는 재앙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그는 무서운 얼굴로 레이나와 토비를 번갈아 노려보더니, 직원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먹던 건 다 먹게 해.”
“하지만 사장님. 이 녀석들은 돈이 없다고요!”
직원이 물러서지 않고 항의하자, 톰은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음성으로 그의 말을 일축했다.
“배고픈 사람은 굶기지 말랬지. 돈이 없는건 그다음 문제야.”
직원은 그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톰은 여전히 함악한 표정으로 레이나를 바라보며 거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너!”
레이나는 화들짝 놀라 숨이 멎을 정도로 긴장했다. 그러나 톰은 전혀 의외의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심하게 한 손에 들려있던 모그림 전통빵을 레이나 앞에 내려놓았다.
“스튜는 빵에 적셔 먹도록. 그게 모그림의 방식이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저벅저벅 주방으로 되돌아갔다. 레이나와 토비는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눈만 껌뻑 거렸다. 직원은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네 녀석들이 먹은 건, 직접 치워!’라고 거칠게 말하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레이나는 여전히 자신의 더 주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여정의 시작부터 이런 시련을 맞이할 줄 몰랐다. 베로스의 신뢰까지 저버린 것 같아 마음이 복잡했다. 토비는 격앙된 표정으로 새미 녀석이 범인이 틀림없다며 분개했지만, 레이나의 좌절감 가득한 표정을 보고 잠잠해졌다.
그들은 남은 음식은 억지로 입에 쑤셔 넣으며 식기와 그릇을 들고 주방 문을 두들겼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토비는 주방의 철문을 열려고 했으나 무거운 탓에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가 낑낑거리는 사이 문이 쾅하고 열렸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고 있던 토비는 종잇장처럼 문에 딸려가 힘없이 바닥에 철퍽 엎어졌다. 반댓편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던 톰은 험악한 표정으로 토비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위압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뭐지?”
그는 쉰 목소리로 거칠게 말했다. 레이나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톰에게 말했다.
“아, 아까 저희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해요. 저희가 먹은 건 저희가 정리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레이나의 말에 톰의 눈썹이 조금 움찔했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거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공짜로 음식을 준 거로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음식을 먹었으니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지.”
그는 주방에 놓인 시퍼런 식칼을 양손에 집어 들었다. 그리고 레이나와 토비 쪽으로 서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토비는 적지 않게 당황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며 말을 더듬거렸다.
“자... 잠깐만요. 저희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그러나 톰은 멈추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식칼을 들어 올렸다. 토비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의 정적 후에, 한쪽 눈을 살짝 뜬 토비의 앞에 보이는 것은 식칼의 손잡이 부분을 내밀고 있는 톰의 모습이었다.
“고기 손질은 할 줄 아나, 애송이들?”
톰의 흉터 투성이인 얼굴에 얇은 미소가 지어진 듯했다. 토비는 이대로 죽는 줄 알았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레이나도 잠시나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레이나와 토비가 식칼을 받아들자 톰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늘 마침 윈델렌에서 돌아온 큰 상단이 저녁 만찬을 예약했거든. 공짜 밥을 먹은 너희들이 오늘 나를 도와야겠다. 안 그래도 손이 부족했거든.”
“방금 윈델렌이라고 하셨나요?”
레이나가 눈을 크게 뜨며 톰의 말에 끼어들었다. 톰은 레이나가 갑작스럽게 큰 목소리를 내자 흠칫 했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윈델렌을 주기적으로 왕복하는 상단이야. 엑스 브리지에 올 때면 자주 이곳을 들리곤 하지.”
“그럼 혹시 그 상단은 이곳에서 윈델렌으로 다시 가는 건가요?”
레이나는 화색이 돌며 질문을 던졌다. 톰은 멋들어지게 묶인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그렇지. 엑스 브리지에서 일주일 안쪽으로 머물다가 다시 떠나곤 해. 그런데 그런 건 갑자기 왜 묻나?”
톰의 말은 레이나에겐 너무나 좋은 소식이었다. 상단에 합류하면 비교적 쉽게 윈델렌에 도달할 수 있었다. 캄캄한 앞에 마치 등불이 켜진 기분이 든 레이나는 생각했다.
‘지금 가진 마법 물약들이 있으니 상인 자격으로 합류하거나, 돈을 내고서라도 합류를...’
기쁜 마음으로 생각하던 레이나는 문득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던 돈과 소지품을 도둑맞은 사실이 기억났다. 레이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희는 윈델렌으로 향할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윈델렌으로 가는 상단을 찾았는데 한 곳도 없었어요. 그래서 혹시나 기회가 있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레이나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소지품을 모두 도둑맞아서... 이제는 소용이 없네요.”
레이나의 표정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톰은 잠시 수염을 매만지다 자초지종을 물어왔다. 레이나와 토비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했다. 엑스 브리지에서 공식 안내원을 만난 사실, 시장과의 대화, 그리고 상단에서 허탕을 친 일까지 모두 이야기하자 돌바닥을 응시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짚이는 것이 있군.”
그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나와 토비는 그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들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자네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톰의 말에 레이나와 토비는 한줄기 희망이 비치는 듯했다.
“하지만...”
톰이 거대한 손으로 식칼을 툭툭 두드렸다. 그의 얼굴에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더욱 무시무시해 보였다. 그는 무겁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공짜밥을 먹은 대가를 제대로 치룬다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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