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브리즐덴은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작은 마을이란 뜻이다. 아침이면 이슬이 맺혀있는 풀잎에서 나는 싱그러운 냄새가 산들바람을 타고 사람들의 코끝에 닿았다.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돌로 만들어진 아치가 서있었다. 아치의 가장 위에는 넬피아들이 장식한 마을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 현판이 매달려있었다. 마을 아이들은 자신의 용기를 보여주고자 기둥을 타고 올라가 현판을 찍고 돌아오는 놀이를 하곤 했다. 물론 이런 짓을 하다가 어른들에게 발각되어 혼나기 일수였다.

레이나는 마을의 오솔길을 따라 걷다 이곳에 다다르자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어릴 적 자주 놀던 장소였다. 정든 곳을 떠나 내딛는 발걸음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레이나는 긴 후드 망토를 다시 여미고 가죽 가방을 고쳐맸다. 윈델렌까지는 꽤나 긴 여정이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완벽히 되진 않았지만 준비가 되었든 아니든 출발해야할 때가 있는 법이라고 레이나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윈델렌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잖아! 할 수 있어!”

레이나는 양 손바닥으로 자기 뺨을 짝짝 때리며 혼잣말했다. 그녀는 심호흡하며 아치를 넘어 발을 디뎠다. 이곳에 남고 싶어 하는 작은 마음이 그녀를 발목을 붙잡는 것 같았다. 몇 발자국 더 걸어가서 레이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마을 광장엔 새벽같이 일어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길거리에 작은 천막을 세우고 상품 진열대를 낑낑거리며 나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축제였지.’

레이나는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녀가 자주 앉아있던 언덕 위의 야생화들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레이나에게 손 인사를 하는 듯했다. 레이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풀 내음과 꽃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빵집 아주머니가 구운 고소한 빵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올해 빵집 아주머니는 대장간 아저씨와 춤을 출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니 레이나는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가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마을의 아이들의 들뜬 웃음소리를 실어 날랐다. 또 누군가 분노에 가득 찬 악다구니를 지르며 뛰어오는 소리도 들려왔다.

“응?”

무언가 위화감이 드는 소리에 레이나는 눈을 떴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조그만 체구에 커다란 배낭을 멘 채 뒤뚱거리며 뛰어오는 형체가 들어왔다. 그 형체는 화가 난듯 마을의 오솔길 끝 편부터 알 수 없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배신자 자식아! 거기 안 서?!”

이제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형체가 가까워오자 레이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얼굴을 알아본 레이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토비?”

악다구니를 쓰던 사람의 정체는 토비였다. 그는 레이나 앞까지 뛰어와 무릎에 손을 짚고 헐떡 거리는 것이었다. 그는 무언가 레이나에게 말하려 했으나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 헉헉.. 어떻게 .. 말도 없이 ... 헉헉”

“여기서 뭐하고 있어, 토비! 어휴, 내가 못 살아.”

레이나는 가방에서 물주머니를 꺼내어 토비에게 건넸다. 토비는 마치 물주머니를 꽉 잡고 벌컥벌컥 마셨다. 중간중간에 숨이 찬지 물을 마셨다가 숨을 골랐다가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레이나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른 토비가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아, 이제 살겠다 고마워.”

토비는 물주머니를 레이나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물주머니는 어느새 홀쭉해져 있었다.

“아니지! 고맙다는 말은 취소! 너 임마! 어떻게 말도 없이 혼자 떠날 생각을 할 수가 있어. 배신자 녀석아.”

“너가 따라올까봐 그랬지. 지금처럼!”

레이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토비는 쉬이 화가 풀리지 않는다는 듯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웃어넘길 아니야! 적어도 나한테는 말했어야지. 내가 아주 친구를 헛사귀었어.”

“미안해.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어.”

“너가 가고 나중에야 너가 떠났다는 걸 알게 되는게 더 걱정되지 않겠니?”

토비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레이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백번 그의 말이 맞았기 때문에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이나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토비. 미안해. 그렇지만 이건 나 혼자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 금방 다시 돌아올게. 조금만 날 기다려줘.”

레이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토비에게 기대고 싶은 욕심에 그를 알 수 없는 위험으로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미안한 건 됐고 빨리 출발하자. 갈 길이 멀어.”

토비는 레이나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태연하게 지도를 펼쳐들었다. 그녀의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했다.

“토비! 내 말 듣고 있긴 해? 이건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야. 내 여정이라고! 어서 돌아가!”

레이나는 의도치 않게 언성을 높아졌다. 눈물샘이 차오르 것을 느끼자 그녀는 훽 뒤로 돌아서 빠르게 걸어갔다. 토비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않았다.

“레이나...”

토비가 레이나를 불렀다. 레이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레이나! 멈춰!”

토비가 더 크게 레이나를 부르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말아줘! 난 이미 마음을 정했어.”

“이 멍청아. 너 반대 방향으로 가고있어.”

“아...”

그랬다. 레이나는 길치였다. 그것도 아주 심한. 레이나가 화끈거리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토비는 어느새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레이나가 그만 웃으라며 소리를 질러봐도 소용없었다.

“놔를 흔��쥐 말아줴~~”

레이나의 마지막 말을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얄밉게 따라하는 토비의 모습에 레이나도 결국 웃음이 터져거렸다. 둘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다가 한참만에 진정했다. 토비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입을 열었다.

“베로스 아저씨가 오셔서 너가 떠났다는 걸 알려줬어. 그리고 따라가고 싶다면 지금 뛰어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그랬구나... 아저씨...”

“그러니까 혼자 가겠다는 이상한 소리하지마. 길치 주제에.”

“아, 아니거든!”

레이나는 일단 반박했지만 자신의 말을 뒷받침한 근거가 떠오르지 않았다. 토비는 어이없다는 듯이 가소로운 표정으로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거의 여정의 시작과 동시에 길을 잘못 들어버린 레이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토비도 그런 그녀를 마주보며 씩 웃었다.

“고마워. 토비.”

“고마우면 돈으로 줘.”

감동적인 말에 알러지가 있는 듯, 토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겉으로는 툴툴대지만 레이나는 분명히 토비의 따듯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잘 부탁해.”

“물론이지.”

레이나와 토비는 숲으로 이어진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서 나란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

엑스 브리지는 대륙의 북서쪽 지역인 세렌디에르의 중심지이자, 엘리온의 가장 번성한 무역도시였다. 동쪽으로는 왕국의 수도까지 이어지는 긴 무역로가 뻗어있고, 서쪽으로는 숲 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남쪽으로는 설산 지대와 화산지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의 하류가 여러 갈래로 뻗어 도시를 둘러싸고 북쪽으로는 암석 지대와 고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처럼 이곳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나오는 풍부한 자원들이 오고 가는 중심지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러 민족이 오가는 상업 허브가 될 수 있었다.

레이나와 토비는 브리즐덴을 떠나 숲 지대를 가로지르는 오솔길을 따라 엑스 브리지로 향하고 있었다. 벌써 반나절 가까이 이동했지만, 토비는 가는 길 내내, 쉬지도 않고 레이나에게 엑스 브리지의 역사를 떠들어댔다.

"설화에 따르면 암석 지대의 모그림들이 최초로 이 도시를 건설했대. 그들의 도끼로 나무를 베어 도시를 둘러싼 강에 다리를 건설하고, 상인들이 쉬어가는 조그만 역참을 만든게 이 도시의 시작인 거야! 그래서 이름이 엑스 브리지라는 이름인 거지. 중의적이잖아. 도끼로 건설한 도시, 엑스자 모양으로 교차하는 다리가 있는 도시. 진짜 재밌지 않니?"

토비는 실컷 떠들면서 혼자 웃었다. 레이나는 조금은 지친 표정으로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하.. 정말 재밌다.”

그녀가 혼잣말로 한 '엑스 브리지는 어떤 곳일까?'에 토비의 입이 터져버린 것이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엑스 브리지에서 해야 할 것들이 떠올랐다.

'먼저 상단을 찾고.. 여관을 찾아 하룻밤을 묵고.. 아침 일찍 바로 이동해야겠지.'

복잡한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는 문득 토비가 엑스 브리지의 유래에 대해 벌써 한 시간 째 이어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필요한 게 있다면 엑스 브리지에 가라. 라는 말도 있잖아. 괜히 그런 말이 나온 게 아니라 모든 상인 연합회가 엑스 브리지에서-”

토비의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연설이 오솔길이 끝나고 큰 대로가 등장하자 멈췄다. 토비는 말하던 입 모양 그대로 멈추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도시로 들어가는 대로는 마치 강물처럼 이어진 상단의 행렬로 붐비고 있었다. 바퀴가 구르는 소리, 말발굽 소리, 그리고 상인들이 검문을 기다리며 수다를 떠는 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길가를 따라 늘어선 노점상엔 각종 특산품과 다채로운 음식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상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상품을 자랑하느라 바빴다.

행렬의 끝에는 거대한 두 개의 손이 도끼를 교차로 들고 있는 석상이 성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검은 강철로 만들어진 도끼날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고, 손 석상은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가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은회색 빛의 성벽은 모그림들의 작품답게 매끄럽게 다듬어져 도시를 두르고 있었다. 성벽의 중앙엔 엘리온 공용어로 '엑스 브리지'라고 멋들어지게 새겨져 있었다. 토비와 레이나는 눈 앞에 펼쳐진 대도시의 경관에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토비와 레이나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도시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쫓아 걸어갔다. 성문 앞에 설치된 검문소에서는 경비대들이 엄중한 표정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한 명씩 검사하고 있었다. 레이나와 토비의 차례가 되자 그들은 쭈뼛쭈뼛 경비대원 앞에 섰다.

“통행증!”

경비대원이 퉁명스럽게 외쳤다. 레이나와 토비가 통행증을 내밀자 경비대원은 곁눈질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소지품은?”

경비대원이 통행증을 돌려주며 외쳤다. 레이나가 가방을 열어 보여주자 경비대원은 들고 있던 나무 막대기 끝으로 가방 안을 대충 이리저리 들췄다. 마법 약병 몇 개가 보이자 그는 이내 막대기를 내리고 더 보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 목적은 어떻게 되십니까?”

경비대원이 물었다. 왠지 모르게 그의 태도가 공손해진 것 같았다. 레이나가 여전히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는 마법약을 팔고 약초를 사러-”

레이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경비대원은 검문소 안에 있는 동료 대원에게 '마법약 상인! 꼬맹이 한 명에 어른 한 명'이라고 외쳤다. 검문소 안의 대원이 무언가 조작하자 레이나와 토비 앞을 막고 있던 돌이 회전하면서 길이 열렸다. 경비대원은 그들을 들여보내며 건성으로 말했다.

“통과! 엑스 브리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또 다시 뒤에서 '통행증!'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사히 통과한 둘이었지만 토비는 씩씩대고 있었다.

“경비대원 태도가 맘에 안 들어. 꼬맹이라니, 누구한테 꼬맹이라는 거야?”

토비가 입을 비죽대며 말했다.

“그러게. 그래도 경비대원은 하루에도 수백 명을 상대할 텐데 친절하길 기대할 순 없겠지. 우리가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자.”

레이나는 미소를 지으며 토비를 달랬다.

“정작 제대로 검사하지도 않더구먼.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일도 대충 하면서.”

토비는 여전히 씩씩대며 말했다. 토비는 화가 나서 트집을 잡기 위한 말이었겠지만, 레이나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마법약은 그 종류와 용도에 따라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철저히 검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레이나는 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성문을 통과한 후, 레이나와 토비는 매끄럽게 가공된 석재 대로를 따라 걸어갔다. 대로는 엑스 브리지의 중앙 광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있었고, 양옆으로 다양한 상점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상인들이 호객하는 소리가 길거리 공연 소리와 어지러이 뒤섞여있었다. 수많은 민족들이 모인 활기찬 상업 도시의 풍경에 압도되어, 레이나와 토비는 멍하니 생각이 잠겼다.

“상단을 어디서 찾아야 하지?”

레이나는 엑스 브리지에서 출발해 윈델렌으로 향하는 상단에 합류할 생가이었지만, 막상 이 거대한 도시에서 상단 사무소를 찾으려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토비 역시 어디선가 구해온 엑스 브리지 안내 책자를 들여다보았지만, 유용한 정보가 없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때, 헤매고 있는 그들 옆으로 13살 남짓 되어 보이는 남루한 차림새의 소년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저기... 엑스 브리지는 처음이신가요?”

레이나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소년은 자신을 새미라고 소개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곳의 공식 안내원 새미에요. 단돈 5아르스만 주시면 제가 이곳을 속속들이 안내해줄게요.”

레이나와 토비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새미의 복장은 공식 안내원이라고 하기엔 믿음이 가지 않았다. 토비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공식 안내원 같지는 않은걸? 그리고 우린 이곳 전체를 볼 필요는 없어. 갈 곳이 따로 있거든.”

“이래 봬도 엑스 브리지에서는 제가 모르는 곳은 없다구요. 전체를 안 둘러보신다면 할인도 해드릴 수 있어요.”

토비는 뒤를 돌아 레이나를 바라보며 어떻게 생각하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해가 저물기전에 일처리를 마치고 싶었던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할인해서 얼마인데?”

“음... 3아르스에 해드릴게요.”

새미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우린 마법약과 관련된 상단만 찾으면 돼. 1아르스로 하자.”

토비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새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협상을 이어갔다.

“한 곳만 가도 거리가 좀 있어요. 2아르스로 하시죠.”

“1아르스.”

“미치겠네. 1아르스 5페로스로 하시죠. 이게 마지막이에요.”

“1아르스.”

토비는 흔들림이 없었다. 새미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구두쇠 같은 넬피아’라고 투덜대며 결국 조건을 받아들였다.

“좋아요. 1아르스에 해드리죠, 뭐.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에요.”

토비는 흡족한 표정으로 레이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봤지? 흥정은 이렇게 하는 거야.”

“대단한데? 역시 토비야.”

레이나는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그러나 토비는 한동안 멀뚱멀뚱 레이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레이나가 계속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토비가 당연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뭐해? 돈 안꺼내고.”

“뭐야! 내 돈이었어?”

“응. 나 급하게 나오느라고 돈을 못 챙겼거든. 그리고 흥정은 내가 했으니 돈은 너가 내야지.”

뻔번한 토비의 말에 레이나는 할 수 없이 은화를 꺼내 새미에게 주었다. 소년은 기분이 좋아진 듯 활짝 웃으며 앞장섰다.

“상단 사무소는 마을 중앙 광장 옆에 있어요. 저만 따라오세요!”

새미가 신나게 길을 안내하자 토비는 투덜대며 말했다.

“뭐야. 그럼 그냥 대로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잖아. 사기 아니야?”

“상단 사무소가 수십 개는 되는데 한번 직접 찾아보실래요?”

새미의 일침을 놓자 토비는 더 이상 말은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레이나는 ‘새미도 보통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며 레이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때, 유독 인파가 모인 곳에서 한 남자의 모습이 레이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세련되고 정갈한 옷차림을 하고 머리를 말끔하게 뒤로 넘긴 채, 상인들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며 수첩에 무언가를 받아적고 있었다. 상인들은 그 남자에게 무언가 열심히 불만 사항을 털어놓고 있었고, 그는 상냥한 표정으로 정중하게 응대하고 있었다.

“새미, 저분은 누구셔?”

앞장서서 휘파람을 불며 걸어가든 새미는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낯빛이 어두워진 새미는 말을 얼버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레이나는 의아해하며 잰걸음으로 새매를 따라 갔다. 그 순간, 레이나 일행의 뒤에서 낮고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엑스 브리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몇 가지 여쭈고 싶은게 있는데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레이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