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마법사 아저씨의 잡화방의 문은 해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닫혀있었다. 축제 준비를 위해 잡화방을 찾은 손님들은 문 앞에 붙은 '휴무' 팻말을 보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잡화방은 매년 축제가 대목이었지만 지금 베로스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레이나와 함께 서둘러 가게를 정리하고 상자를 좀 더 조사해보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베로스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레이나에게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재로 들어갔다. 레이나는 기꺼이 그를 위해 시간을 양보했다. 베로스는 두꺼운 책들을 이리저리 넘기며 서재에서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날이 어둑어둑해져서야 그는 조금 지친 표정으로 서재 밖으로 나와 레이나를 불렀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하구나. 잠깐 이리와 앉아보렴.”

베로스가 근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나가 베로스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자 그는 운을 뗐다.

“상자를 조사해봤단다.”

베로스는 레이나의 옆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차라리 아니길 바랐지만...”

베로스는 나지막이 이야기하며 파이프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일렁이는 벽난로의 불빛에 베로스의 얼굴의 그림자가 함께 흔들려 유난히 그의 주름이 깊어 보였다.

“틀림없는 엘데린 가문의 함이더구나.”

그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리며 조용한 방을 채웠다. 그는 말을 맘치고 한숨같은 담배 연기를 뿜었다.

“레이나, 오늘 네게 그간 내가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야기가 끝난 후에 네가 날 용서할지 모르겠지만. 이전에 네가 물었을 때, 내가 말한 적이 있었지. 전쟁 후에 고아원에 있던 너를 데리고 왔다고. 그래서 친부모님이 누구신지는 잘 모른다고.”

레이나의 고요한 갈색 눈동자에 벽난로 불빛이 반사되어 흔들렸다. 레이나의 눈을 바라본 베로스의 마음도 불빛을 따라 흔들렸다. 베로스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었다.

“사실은 나는 네 부모님을 모두 알고 있었어.”

레이나는 베로스에 말에 멈칫했다. 베로스는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가려 했지만,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네 아버지와는 나는... 막역한 사이였어. 처음 만난 건, 대학 교수 시절이었지. 그는 나보다 나이는 한참 어렸지만, 누구보다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 순간 그의 눈은 과거로 돌아가, 아리안과 함께했던 시간을 더듬는 듯했다.

“우린 많은 연구를 함께했고,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단다. 그리고 어느날, 그가 결혼할 여인을 소개했지. 그 때, 네 어머니를 처음 만났단다. 정말 빛나는 사람이었어.”

베로스의 눈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간 것처럼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내 그는 레이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입술은 결심한 듯 파르르 떨렸다.

“네 어머니의 이름은, 에밀리아 엘데린. 엘데린 가문의 마지막 아르콘이란다.”

레이나는 베로스의 입에서 나온 말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에밀리아 엘데린. 엘데린 가문의 마지막 아르콘이자 대전쟁의 영웅. 엘리온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하여 사람들을 지키고 공허를 패퇴시킨 그녀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공허가 에르세티아를 침공했을 때, 네 어머니는 자신을 희생해서 너를 구했어.. 그 덕분에 네 아버지, 아리안은 간신히 너를 데리고 와 나에게 맡겼단다. 그 즉시, 에밀리아를 구하러 돌아갔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했어. ”

베로스가 말을 이어 나가기 힘겨운 듯, 파이프를 입에 물고 한숨 같은 연기를 뿜었다. 그 때,그를 말리지 못한 사실은 깊은 후회가 되어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길로 나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너와 함께 이곳으로 왔단다. 아리안도 에밀리아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를 숨기는 것뿐이었단다. 공허가 널 찾을 수 없도록 말이야.”

베로스는 다시 한 번 연기를 내뿜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사실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어. 레이나 너에게조차도.”

레이나는 베로스의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촉촉해진 눈가가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베로스는 레이나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베로스는 담담히 레이나의 답을 기다렸다. 레이나는 목이 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셨어요?”

“미안하구나. ”

“아니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레이나가 베로스의 말을 잘랐다. 그녀가 베로스를 바라보는 눈에는 눈물이 고여 반짝이고 있엇다.

“왜 모든걸 포기하셨나요? 아저씨는... 연구를 사랑하시잖아요. 교수를 하시던 시절이 가장 빛나던 시절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이나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레이나는 눈물을 참으려 애쓰며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제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신거에요. 아저씨도 아저씨의 삶이 있었는데.”

베로스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레이나는 자신보다 베로스를 더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이 도리어 가슴을 아프게 했다.

“... 너는 나에게 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너를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었어.”

베로스가 목이 메어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아리안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그에게는 너무나 큰 책임이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레이나는 어느덧 그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있었다. 레이나는 말없이 다가와 베로스의 손을 잡았다. 따듯한 온기가 그의 마음에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제 진짜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무리 대단한 영웅일지라도, 제 진짜 영웅은 아저씨에요.”

레이나는 베로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베로스는 쉬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이윽고, 베로스는 주머니에서 상자를 꺼내 들었다. 상자는 아무 소리 없이 고요하게 불빛을 반사할 뿐이었다.

“너에게 이걸 전해준 자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겠니?”

베로스가 눈은 상자에 고정한 채, 레이나에게 물었다.

“솔직히 별로 말할 게 없어요. 긴 망토를 입고 있었고, 두건을 쓰고 있어서 얼굴도 보이지 않았어요. 풍기는 분위기가 평범하진 않았고 뭔가 쓸쓸하고 공허한 감정이 느껴졌어요.”

“긴 망토에 두건이라...어쩌면...”

베로스가 레이나의 말을 듣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야. 나도 추측해볼 뿐이란다.”

베로스가 코끝에 걸친 안경을 추켜올렸다.

“실제로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허구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울드렌이라고 하는 존재들이 있단다. 망토를 쓰고 가면을 쓴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의 운명을 사고파는 상인에 대한 설화는 들어본 적 있니?”

레이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가 하는 말이 설화라고는 하지만, 현실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 떠올라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베로스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조용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은 그림자 상인, 예언자, 방랑자처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 그렇지만 어느 설화에서나 망토를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는 건 똑같단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다가오는 위기를 경고하는 선견자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그저 재앙을 몰고 오는 화신이라고도 하지. 재앙이 다가오기 전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존재 말이야.”

베로스의 말에 레이나는 몸이 으스스해졌다. 그녀는 무의석 적으로 두 손을 모아 움켜쥐었다.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 들어 잠시 뒤를 흠칫 돌아보곤 베로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재앙... 이라구요?”

겁먹은 레이나의 표정을 보고 베로스는 자기 말이 너무 심각하게 이야기했음을 깨달은 듯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레이나는 차오른 불안감을 떨칠 수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베로스는 그녀를 조금 진정시키려는 듯 황급히 말했다.

“설화 속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말려무나.”

“이미 불길한 이야기는 다 해놓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 어떡해요!”

레이나가 뾰로통한 얼굴로 베로스를 나무랐다. 베로스는 변명하듯이 대답했다.

“그래도 그가 찾아온 자에겐 언제나 운명을 선택의 순간이 주어진다고 해. 어쩌면 너도 선택의 기로에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레이나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베로스는 조용히 레이나에게 손바닥을 내밀어보라고 말했다. 레이나가 손바닥을 펼치자 베로스는 상자를 들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바닥 위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상자가 레이나의 손바닥에 닿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눈을 감고 이 세상 전체가 거대한 바다라고 생각해보렴.”

베로스는 레이나에게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갑자기요?”

레이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지금 열수는 없겠지만, 확인해보고 싶은게 있어서 그렇단다.”

베로스의 말에 레이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거대한 바다?’

레이나가 머릿속으로 커다란 바다를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이 조금씩 수면 아래로 잠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녀의 몸이 물결을 따라 흔들리는 듯했다. 수많은 잔물결이 그녀의 피부에 닿아 부서졌다. 그 순간, 수많은 잔물결 중 강렬한 물결이 그녀를 흔들었따. 레이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상자에서 시작된 파도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레이나! 이제 됐다! 눈을 떠보렴!”

베로스의 말에 레이나는 눈을 떴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상자는 선명한 엘데린 가문의 문장과 함께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잠시간 밝은 빛으로 방안을 채운 상자는 다시 고요해졌다.

“역시나 네게는 반응하는구나.”

베로스는 상자를 바라보며 예상했다는 듯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영혼의 함은 오로지 그 영혼과 공명할 수 있는 자만이 열 수 있어. 마치 열쇠가 자물쇠에 꼭 맞아야 하듯이 말이야. 네가 바로 이 상자의 열쇠인 것 같구나.”

레이나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로스에게 물었다.

“제가 그런 걸 할 수 있을까요?”

“네게는 엘데린의 피가 흐르고 있어.”

베로스는 심란한 표정으로 답했다. 레이나의 손바닥에 놓인 상자가 마치 갑작스럽게 던져진 운명의 주사위 같았다.

“지금은 네가 그것을 열 준비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좋든 싫든 운명은 다가올 거야.”

레이나가 엘데린의 후손이기에 상자를 열 수 있지만, 반대로 엘데린의 후손이기 때문에 상자 속에 담긴 운명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이 베로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한참 베로스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레이나가 별안간 입에서 ‘이얍!’이라고 기합을 넣었다. 그리고는 여러 가지 괴상한 자세를 취하며 상자를 향해 기를 불어넣으려는 듯한 행동을 했다. 베로스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뭐하는 거냐?”

“아, 혹시나 이러면. 열릴까 해서요.”

레이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베로스에게 말했다.

“시도라도 해보는 건 좋은 거잖아요.”

레이나는 웃음을 참으려다 결국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레이나를 바라보던 베로스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못 말리는 녀석.”

“그거 보세요. 웃으니까 훨씬 낫잖아요. 우울해하시길래 재롱 한 번 부려봤어요.”

“우울해하다니? 누가? 네가? 네 녀석은 아까 엉엉 울어 놓고?”

“그건... 조용히 하세요!”

레이나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고 그제야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은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고, 베로스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무엇인가 생각난 듯, 로브 안쪽을 뒤적거리며 무엇인가 꺼내며 말했다.

“내가 상자에 여는 걸 도와주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구나.”

베로스는 마법으로 봉인된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날이 밝거든 윈델렌으로 가서 이 사람을 찾아가거라.”

레이나는 봉투를 받아들었다. 봉투에는 ‘친애하는 아스트레아에게. 베로스가.’라고 짤막하게 적혀있었다. 레이나는 상자와 봉투를 손에 들고 잠시 깊은 숨을 쉬었다. 상자가 조용히 떨리는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걸 열어야만 하는거죠?”

레이나는 베로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베로스는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레이나는 상자가 가져다줄 운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미 숨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레이나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베로스에게 풀꽃같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