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유증

"소년이여! 내 의지를 이어라!"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스쳐지나갔다.
상식적으로 저따위 말을 하는 건 내 망상에 불과할테니까.

"어째서 나를 그냥 무시하는가! 소년!! 세계를 구해주게!!"
그래. 이렇게 나를 향해 거대한 가슴을 들이밀며 하는 행동도 모두 환상. 망상. 환청에 불과하지.

"소년~!!"
으으..
이렇게 두통이 일도록 내 몸뚱아리를 흔들어도 소용없어. 알아!? 그러니까 좀 꺼져버려!! 나는 지극히 정상인이 될 거란 말야!

아. 내가 어째서 이렇게 장담하는거냐고?
그도 그럴것이 나는 병에 걸렸으니 말야.
그것도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중증에.

그렇기에 나는 확신해. 이 녀석은 가짜야. 그것도 아주 질이 나쁜.

-
그 날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기억나는 것은 어느 날 정신을 차리니, 마왕이 세계를 정복할 위기에 처한 어느 시골마을이었다는 것 정도.
그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에게 마을사람들은 갑자기 나를 용사라고 칭하질 않나. 세계를 구원할 용자라고를 하질 않나.
그렇게 한 몇달을 시달리다보니, 나 스스로도 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조금 혼동하기 시작한거지.
내가 정말로 용사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십 수년이 흘렀고. 나는 마왕을 무찌르고 그 세계를 구원했다.
나는 벅찬 가슴을 끌어안고 이제부터 왕국을 물려받고, 공주님과 콩닥콩닥한 일상을 보내리라고 굳게 믿었건만.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니, 다시 내 방의 침대였다.

내 주변에는 수다쟁이 마법사 제인도. 근엄한 방패용사 조나단. 절망의 수녀 에이미도 없었다.
그냥 내 방이었다. 허탈하기 그지없었지. 절망. 혼란. 패닉이 내 머리속을 이리저리 흔들어 놓아버렸고. 나는 쇼크를 받아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릴 때는 어느 병원의 응급실이었다.
눈 앞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고. 나는 생각했다.
아. 다시 돌아왔구나.
라고

하아. 그 때 생각하니, 다시 또 허탈함이 몰려오는군.

"소년. 마왕 베엘제붑이 이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네!!"
금발을 휘날리며, 이 세계와 맞지않는 판금복장을 한 이 여자. 심히 불쾌하다.
만약 이게 현실이라면, 이 여자는 코스플레이어로 유명세를 좀 떨쳤겠지. 마인드가 짱이라면서 커뮤니티에서도 유명했을거야.
하지만 아니잖아? 이건 내 '휴유증'이야.

내가 그 이세계에 한 20년 정도 있었거든? 생각해보면 내가 현실에 있었던 시간보다 이세계에 있었던 시간이 더 길었던 셈이지. 사실 이쯤 되면 현실과 ‘그쪽세계’와의 경계도 좀 애매해진단 말이지. 여기가 진짜인가? 그쪽이 진짜인가? 싶은 생각도 많이 들고.
그쯤 이었던가? 나로서도 그 이세계가 좀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야. 이 세계로 돌아온 지 3달쯤이었나? 내 눈에 이상한 녀석들이 보이기 시작했어. 그건 귀신같이 꼴사나운 것들은 아니고.
길따란 고깔모자를 쓴 어린 여자애라던가. 길거리에서 물약을 파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여자성기사 같은 녀석들 말이야. 내가 그 이세계에서 보던 녀석들이지.
뭐. 처음에는 반가워서 달려가기도 했어. 하지만 어쩌겠어? 다시 이세계로 돌아갈 방법이 없는데. 이 현실세계（일단 여기를 현실이라고 칭해두자）에 충실하는 수 밖에. 이 현실세계에서는 저 따위 복장을 한 여자는 ‘전파녀’, ’중2병’이라던가. 하며 온갖 질타를 받잖아?
실제로 내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데까지 그 녀석들이 쫒아와서는.. 날 동류로 취급해버렸지. 결국 나를 학교에서 미친놈. 정신병자로 만들어 버리질않나..
한마디로 말해서 민폐덩어리야. 현실세계에서는 말이지.

그래서 내가 내린 결정은. 이 녀석들을 철저히 무시하자. 는 거야. 어때? 꽤 괜찮지?
요즘 커뮤니티에서 흔히들 말하잖아? ‘병먹금’이라고.
실제로 내가 이 녀석들을 계속 무시하다 보니까. 어느새 하나 둘씩 내 곁을 떠나더라고? 그 덕에 나는 현실에 좀 더 충실할 수 있었지. 크크.
완벽한 나의 승리랄까. 현실세계에서의 승리지. 이거 꽤 카타르시스가 장난 아니라구?

“흐음.. 소년.. 그렇게 무시하다가는 이 세계가 위험해질지도 모를텐데.. 베엘제붑이 소년을 노리고 있다구..”
나는 그 말을 무시하며 다시금 가방을 고쳐맸다.
아. 어쩌라는거야. 그래서 아무런 힘이 없는 내가 다시 그 힘든 수련을 하라는거야? 큭. 수련하니까 또 생각나는군. 그쪽세계에서도 아무런 재능이 없었던 나라는 녀석은 다른 녀석들이 10년이면 되는걸 20년이나 걸려버렸지. 그 케이른이라는 교관녀석도 어지간히 내 머리를 후렸었는데..크..!
잠깐. 이거 생각해보면 마왕녀석 꽤 약했던거 아냐?

뭐. 아무리 그래도 나에겐 그쪽세계에서 쌓은 20년이라는 지식이 있는 몸이니까. 보통녀석보단 나을진 모르지. 하지만 다시하긴 싫어. 세계멸망VS다시 수련 중에 고르라면 분명히 전자를 택할 테다.

“소년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네. 엄청나게 빠르고 정교한 검술덕분에 ‘섬광’이라고 불렸다지? 어때? 나와 힘을 합친다면 이 세계의 평화를..!”
캬! 오랜만이네. 섬광이라.. 에이미녀석은 그 광（光）을 광（狂）이라고 놀려댔었는데..!
그보다 이 세계는 지극히 평화로운데 대체 무슨 평화를 지키자는건지. 우습군. 그리고 좀 더 찾아보면 나 정도의 실력자는 더 있을걸? 괜히 나한테 시간을 투자하는 것보다 다른 녀석을 찾는 게 좀 더 이득일거야.

“소년~~~!!!”
새빨간 노을 너머로 그녀의 애절한 외침이 이어졌고.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집으로 향했다.
젠장. 저 녀석들은 드라마틱한 상황을 만드는게 재능인가. 나도 모르게 양심의 가책을 느낄 뻔 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