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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브리즐덴 마을의 언덕 위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축제를 준비하는 들뜬 마음마저 실어 나르는 듯했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자 베로스는 마을에 가까이 왔음을 깨닫고 마차에서 눈을 떴다. 조금 졸더라도 집까지 알아서 모셔다 주는 당나귀 녀석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베로스는 당나귀의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마차는 조그맣지만, 약초와 마법 재료들이 제법 실하게 실려있었다.

마을의 입구가 시야에 들어올 무렵, 베로스는 낡은 모자를 고쳐 쓰고 허리춤에 약초와 재료를 담은 재료를 단단히 메었다. “마법사 아저씨의 잡화방”. 레이나가 어느 정도 자라고 난 뒤에는 자리를 비워도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레이나가 가게를 볼 때, 더 장사가 잘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흐뭇한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문을 열고 들어간 베로스는 순간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토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주방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끔찍한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베로스는 즉시 코를 감싸 쥐며 소리 질렀다. 토비가 주방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씩 웃었다.

“아저씨! 돌아오셨네요?”

레이나도 주방에 나와 힘없이 인사했다. 그녀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베로스를 바라봤다.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분명 표정으로는 베로스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최선을 다했지만, 토비를 말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토비는 뒤이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주방에서 나왔다.

“한 번 드셔보시겠어요? 이번엔 틀림없이 좋아할 겁니다.”

토비는 손에 그릇을 든 채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릇에 든 것은 검고 끈적한 부글거리는 어떤 액체였다. 베로스는 팔짱을 끼고 토비와 그릇에 든 무언가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건 독이군. 넌 날 독살하려는 게야.”

“에이. 아니에요. 이번엔 제대로 했어요. 흑곰보 버섯을 조금 넣긴 했지만요.”

“조금? 5송이가 조금? 게다가 그건 식재료도 아니잖아.”

레이나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니가 진정한 어른의 맛을 몰라서 그래. 한번 먹어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토비는 숟가락을 들고 보란 듯이 크게 한술 떠서 입에 수프를 밀어 넣었다.

“컥!”

수프는 토비의 입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밖으로 튀어나왔다. 토비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요란스럽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

“물! 물!”

토비는 애처롭게 소리쳤다. 연신 기침해댄 탓에 얼굴은 빨갛게 변했고, 목소리는 마치 닭의 울음소리와 같았다. 베로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흥미롭군. 사람의 목소리를 닭 소리로 바꾸는 수프를 만든 건가?’라고 중얼거렸다. 레이나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물을 따라오며 레이나는 히죽거리며 토비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이게 어른의 맛이야?’

토비는 분하지만 어쩔 수 없이 황급히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토비가 이제야 살겠다는 표정을 짓던 그 순간, 바닥에 흐른 검은 액체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더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액체가 닿은 돌바닥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장면을 본 세 명은 잠시 얼어붙었다.

“토비, 이게 대체…. 뭘 만든 거냐?”

베로스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는 진심으로 토비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몸은 액체에서 최대한 멀리한 채, 지팡이로 연신 액체를 두드려보는 것이었다.

“뭐냐니요?! 수프요! 수프!”

토비가 뻔뻔스럽게도 대꾸했다. 레이나는 이미 연기가 나는 정체불명의 액체로부터 멀리 도망쳐 매대 뒤에 숨어 소리쳤다.

“아니, 세상에. 너 대체 뭘 넣은 거야?”

“진짜 흑곰보 버섯밖에 안 넣었어! 아니 뭐, 몇 가지 더 넣긴 했는데. 뭘 넣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토비는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했다. 베로스는 눈을 반짝이며 수첩을 꺼냈다.

“흥미롭군. 흑곰보 버섯이 이런 열을 발산하다니. 이건 분명 네가 넣은 다른 재료와 반응한 거야. 돌까지 녹일 줄이야. 네가 뭐를 넣었는지 더 자세히 말해봐라.”

토비의 끔찍한 작품이 베로스의 학자적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베로스는 토비에게 꼬치꼬치 캐물으며 무언가 열심히 적어 내려갔다. 토비는 베로스의 질문 세례에 뭔가를 기억해내려고 애썼지만 진전이 없었다. 또 시작이네, 레이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혼잣말했다. 그녀는 베로스의 열성적인 심문을 뒤로 한 채 매대로 시선을 옮겼다. 레이나의 눈에 잠시 잊고 있었던 물건이 들어왔다. 그것은 의문의 손님이 남기고 간 상자였다.

“베로스 아저씨?”

레이나는 여전히 토비에게 꼬치꼬치 캐묻고 있는 베로스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어둠 뿌리 가루와 금송 껍질을 넣은 게로군. 잠깐만. 음식에 대체 금송 껍질을 왜 넣은 게냐?”

“아저씨!”

레이나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다시 베로스를 불렀다. 아무래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금송 껍질과 반응한 게 분명해. 이 성질을 이용하면 새로운...”

“아! 저! 씨!”

레이나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자 베로스는 그제야 수첩에 무언가 적는 것을 멈추고 레이나를 바라봤다. 레이나가 심통 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베로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레이나는 베로스에게 다가와 상자를 내밀었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수상한 손님과 상자, 손님에게서 느껴졌던 쓸쓸하고 공허한 감정, 그리고 베로스가 돌아오기 전까지 열어보지 않기로 한 사실까지. 베로스는 상자를 찬찬히 살펴보며 레이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미세하긴 하지만 그의 표정이 조금씩 심각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상자를 열어보진 않았어요. 토비가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고, 아저씨라면 이게 뭔지 아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요.”

레이나의 말에 토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베로스는 이야기를 다 듣고 마른세수를 하며 벽난로 앞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파이프에 불을 붙이는 것이었다. 레이나와 토비는 베로스의 반응을 살피며 서로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베로스는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신 연기를 내뿜었다. 담배 연기가 그의 시야를 서서히 가리기 시작했다. 그 연기가 점점 짙어지며 베로스의 머릿속에 오래된 장면들이 자욱한 안개와 함께 피어올랐다.

쾅- 쾅- 쾅- 쾅-!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운 그날 밤이었다. 벽난로 앞에서 책을 읽다가 꾸벅꾸벅 졸던 베로스는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소스라치듯 몸을 일으켰다. 오래된 톱니 시계는 잘 시간을 훌쩍 넘겼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베로스는 누군지 몰라도 참 무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아리안? 이 밤 중에 자네가 왜...”

베로스는 문 앞에 선 사람을 보고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입은 망토와 옷은 곳곳이 찢어져 있었고, 얼굴은 먼지와 피로 얼룩져 있었다. 한쪽 팔은 깊은 상처로 피에 절어있었다.

“부상이 심각하지 않나! 어서 들어오게. 치료를-”

베로스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리안은 말없이 망토에 쌓인 작은 아이를 내밀었다. 아버지의 모습과는 반대로 아이는 평화로이 잠들어있었다.

“이게 대체?”

얼떨결에 아이를 받아든 베로스는 깜짝 놀라 무슨 상황인지 물었다.

“레이나를 부탁합니다. 베로스. 놈들이 왔습니다. 다시 돌아가야 해요.”

“그 몸으로 어딜 다시 간다는 건가? 그리고 놈들이라니, 대체 무슨 일인가?”

“에밀리아가 위험합니다.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리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베로스에게 힘겹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큼은 결연했다. 그 모습을 본 베로스는 끝내 그를 말릴 수 없음을 직감했다.

“부디 몸조심하게. 아리안”

그는 마지막으로 베로스의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며 꼭 돌아오겠노라고 약속했다. 마지막 인사를 건넨 아리안은 뒤돌아 말을 타고 달렸다. 짙은 안개 속으로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베로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품 안에 고이 잠든 아이, 레이나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저씨?’

아리안은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결국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에야 베로스는 에밀리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홀로 어둠의 군대를 상대하며 사람들을 지켜냈지만, 자신의 목숨까지 지킬 수 없었다. 이제, 레이나에겐 베로스가 유일한 보호자였다.

‘아저씨, 괜찮아요?’

자욱한 안개 속으로 점점 멀어져가던 아리안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때 그를 말렸더라면 어땠을까? 베로스의 마음속에 후회스러운 의문들이 안개처럼 피어오르며 그를 감쌌다.

“아저씨!”

베로스의 눈앞에 레이나가 손을 흔들자 비로소 그의 머릿속에 안개가 걷혔다. 그제야 고개를 든 베로스의 눈에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는 레이나와 토비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까부터 제 말도 못 들으시고.”

레이나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베로스는 잠긴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다시 상자로 향했다. 그날 밤, 레이나를 감쌌던 망토에 새겨져 있던 그 문양. 상자엔 똑같은 문양이 고요히 빛을 내고 있었다.

“토비. 오늘은 일찍 마무리하자. 오늘도 고생했다. 이만 돌아가거라.”

베로스가 상자에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네? 아직 이른 시간인데요? 게다가 내일 축제라서 곧 손님들이 곧 몰려올 텐데.”

토비는 놀라서 되물었다. 그러나 베로스의 굳은 표정을 보고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고맙구나.”

토비는 꾸벅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토비가 떠나자 베로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레이나를 바라봤다. 레이나는 베로스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아는 듯 숨죽이고 차분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레이나. 네게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많다.”

베로스는 한참 만에야 간신히 운을 띄웠다. 레이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베로스를 바라보았다. 베로스 내면의 고뇌가 그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베로스는 상자를 집어 들었다.

“먼저. 이 상자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했었지. 이것은...”

베로스는 짧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눈빛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영혼의 함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야.”

“영혼의 함이요?”

“그래. 영혼석을 담는 상자란다.”

베로스의 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레이나는 처음 듣는 말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겠구나. 혹시 엘데린 가문에 대해 들어봤겠지?”

레이나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분명 학교에서 들은 기억이 있었다. 레이나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대답했다.

“네. 위대한 가문이었다고 들었어요. 대전쟁으로 몰락했다고... 그 외엔 잘...”

“그래. 태초부터 이어져 온 유구한 역사를 지닌 가문이지. 대대로 가장 강력한 마법과 지혜를 이온 가문이기도 하고. 그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영혼석’이란다. ”

“영혼석이요?”

레이나는 다시 듣는 낯선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베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 영혼석은 단순한 돌이 아니야. 사람의 영혼을 담아내는 매우 강력한 마법의 물건이지. 엘데린 가문의 ‘아르콘’이라고 불리는 계승자들만이 영혼석을 만들고 사용하는 자격을 부여받았단다. ”

레이나는 베로스의 설명을 들으며 숨을 죽였다. 엘데린 가문. 태초부터 이어져 온 위대한 가문의 이야기였다. 레이나는 역사 수업 시간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왜 갑자기 베로스가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베로스는 차분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갈 뿐이었다.

“엘데린 가문은 대대로 영혼석을 통해 그들의 지혜와 마법, 그리고 모든 기억들을 온전하게 후대에 전할 수 있었지. 하지만 영혼석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게도 큰 부담이 된단다. 예를 들어 그 영혼의 공명을 견디지 못하면...”

베로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혼이 산산조각 나 버리기도 해.”

“뭐라고요? 그럼 엄청 위험한 물건이잖아요!”

레이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물었다. 베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그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이 영혼의 함을 만들었단다. 준비된 자만이 영혼의 함을 열고 영혼석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말이지. 이 상자는 오직 엘데린 가문에서만 만들 수 있었단다. 그리고 이 문양이 바로 엘데린의 상징이란다.”

베로스는 상자에 아로새겨진 정교한 문양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18년 전, 공허의 군대가 에르세티아를 침공했을 때. 엘데린 가문이 대대로 보존해 온 유물들은 모두 파괴되었지. 당연히, 영혼석을 포함해서. 적어도, 그렇게 알려져 있었어. 그렇지만 여기 눈앞에 있구나. 그 상자가.”

레이나는 베로스의 설명을 들을수록 자신이 왜 이런 무시무시한 물건을 건네받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규모가 큰 물건이었다.

“그럼... 그 손님에게 어떻게든 다시 돌려드려야 하지 않나요? 그렇게나 중요한 물건인데 제가 이런 걸 가지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레이나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말했다. 베로스는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란다, 레이나. 이 상자는 분명 의도적으로 너에게 전해졌단다.”

“네? 하지만 저는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베로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결심한 듯 눈을 뜨고 말했다.

“레이나, 너는... 엘데린의 후손이란다.”

순간, 가게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