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초보 작가입니다.
마음에 드는 판타지 소설을 찾다가 없어서 직접 써보자고 결심했습니다.
몇번을 끄적이다가 뒤엎기를 반복하고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3개월에 걸쳐서 설정 놀이만 했습니다.
긴 고민 끝에 첫번째 화를 써내려가 봤어요.
부족한 글솜씨지만 즐겁게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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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브리즐덴 마을은 어느 때보다도 복작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연례 가장 큰 축제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의 곳곳에 형형색색의 천과 리본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골목은 준비 중인 축제 음식의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고, 마을 공방의 장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역작을 진열하기 바빴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마을 여자들이 깔깔거리는 소리, 무거운 걸 나르는 인부들의 고함이 마을 광장에 어지러이 울려 퍼졌다. 마을 전체가 그야말로 축제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브리즐덴 마을의 한켠에 위치한 “마법사 아저씨의 잡화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곳은 마법사 베로스가 운영하는 자그마한 마법약 가게였다. 가게 앞에는 축제에 필요한 마법약을 사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레이나는 머리를 질끈 묶은 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녀는 손님의 요청을 듣고 마법약을 제조하거나 진열된 마법약을 친절한 설명과 건네주고 있었다. 레이나의 소꿉친구이자 가게의 직원인 토비는 가게 안팎을 오가며 물건을 정리하고, 기다리는 손님을 안내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베로스는 종종 동이 난 약초와 재료를 구하거나 마법약을 연구하러 자리를 비우곤 했지만, 베로스의 양딸인 레이나는 언제나 그렇듯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바로 그녀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마법약을 사러 오기도 하지만, 사려 깊고 배려심 있는 레이나에게 저마다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렇듯, “마법사 아저씨의 잡화방”은 단순한 마법약 상점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작은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음 손님!”

토비가 다음 손님을 호명하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나, 내가 부탁한 마법 효소 물약! 아직 남아있니?”

마을의 빵집 아주머니였다. 문에 걸려있는 자그마한 종이 애처롭게 이리저리 딸랑거리자 토비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아줌마를 쏘아보았다.

“아주머니! 문을 부수려면 더 세게 여셔야죠! 그거 가지고 되겠어요?”
미안해, 워낙 급해서, 라고 황급히 둘러대는 아줌마에게 레이나는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몇 병 남겨놨어요. 베로스 아저씨가 오늘은 아침 일찍 약초를 구하러 다른 마을에 가셨거든요. 아주머니가 부탁하신 거라 남은 재료로 간신히 만들어 둔 거예요.”

레이나는 선반 쪽으로 손을 뻗어, 찰랑거리는 회색 액체가 담긴 병을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아주머니는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병을 받아들었다.

“아휴, 다행이다. 잊지 않고 만들어 주었네. 정말 고마워.”

아주머니는 감사를 표하며 앞치마에서 주섬주섬 동전 몇 개를 꺼냈다. 그러나 가격표를 본 그녀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지는 것을 레이나는 놓치지 않았다.

“요새 물약값이 조금 비싸죠? 약초들이 요새 잘 안 나와서 가격이 좀 올랐어요.”

레이나는 조심스럽게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이번엔 제가 조금 깎아드릴게요. 베로스 아저씨에게는 비밀이에요.”

“아휴, 어떻게 고마워해야 할지 모르겠네. 정말 고맙구나, 레이나. 축제에 준비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아주머니는 약간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대신, 이번 축제에는 대장장이 아저씨에게 함께 춤추자고 해보시는 게 어때요?”

레이나의 말을 돌은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아휴, 얘는. 춤은 무슨. 주책맞게. 그냥 나는… 빵이나 열심히 굽지. 뭐.”

아주머니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궜다. 레이나는 그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번에 드린 물약 말이에요. 케이크 만들기 딱 좋으실 거예요. 특별히 신경 썼어요.’

아주머니는 놀란 듯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내가 케이크 만든다고 말했던가?”

마치 일기장을 들켜버린 어린 소녀 같은 표정으로 아주머니가 레이나를 바라보자, 레이나는 빙그레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뇨. 말씀 안 하셨어요. 왠지 효소를 부탁하실 때 표정을 보고 그러실 것 같았어요. 아무래도 아주머니는 케이크 만드실 때 신경 많이 쓰시잖아요. 아무 때나 안 만들기도 하시고. 비록 지난번엔 대장장이 아저씨께 드리진 못했지만...”

레이나는 어느덧 아주머니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이번엔 꼭 주시면서 같이 춤추자고 해보셔요.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그래요. 그 아저씨도 분명, 아줌마를 좋아하는 눈치던데 숙맥이라 절대 먼저 못 말씀하실 거예요.”

옆에서 진열대를 정리하던 토비도 한마디 거들었다.

“참.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속 마음이 들켜버린 것 같아서 부끄럽네.”

아주머니가 발갛게 물든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마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레이나의 말에 놀라면서도 조금은 후련해 보였다. 그녀는 이내 손에 든 물약을 단단히 쥐었다. 어느새 그녀의 표정이 약간은 결연해진 듯했다.

“그래! 이번엔 한 번 용기 내볼게.”

그녀는 가게를 나서면서도 한 번 더 뒤돌아 레이나와 토비에게 고마운 표정을 지었다. 레이나는 밝게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너는 용케 사람 마음을 잘 안단 말이지. 어떻게 아는거냐?”

빵집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토비가 말했다. 레이나는 쑥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세... 그냥 느껴지던데?”

“오호라, 독심술하는 법은 알려주지 않겠다 이거지?”

“그런 건 독심술이라고 안 해. ‘눈치’라고 하지.”

“그럼 내가 눈치가 없다는 거야?”

“정답!”

레이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거리며 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비는 더 이상의 반격은 자신에게 손해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그만두기로 했다. 토비가 말을 말자는 듯 손을 휘저으며 다음 손님을 부르러 문을 열자마자, 조그만 꼬맹이들의 실루엣이 휙휙 그를 지나쳐 지나갔다.

“누나! 저희 불꽃 폭죽 물약 4개 주세요! 축제 때 엄마 아빠가 필요하대요.”

큰길 앞에 사는 꼬맹이 4총사였다. 그중 대장 격인 녀석이 당돌한 표정으로 레이나에게 폭죽 물약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엄마 아빠가? 어라, 이상하다. 분명히 어젠 너희 어머니께서는 절대 폭죽 물약은 주지 말라고 하셨었는데?”

레이나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꼬맹이들은 당황한 듯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대장 꼬맹이가 금세 머리를 굴리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어…. 그러니까…. 그건! 엄마는 주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아빠는요. 오늘 갑자기. 축제니까. 미리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하셔서. 어…. 그래서…. 저희한테 ‘소화제 물약’을 사 오라고 시켰어요.

꼬맹이 녀석이 말을 더듬대며 둘러댔다. 토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뭔가 바뀌지 않았어? 라고 지적했다. 꼬맹이는 황급히 ‘폭죽 물약’이라고 정정했다. 레이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꼬맹이들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니까. 아빠가 ‘내일’ 쓸 불꽃 폭죽 물약을 굳이 오늘 써보고 싶으시다는 거지? 누나는 왠지 아빠가 아니라 너희가 써보고 싶은 것 같은데?”

대장 꼬맹이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하자 옆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꼬맹이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녀석이 ‘거봐. 누나한테는 안 통한다고 했잖아.’라고 속삭이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큰 소리로 소곤거리자 레이나는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레이나는 웃으며 아이들에게 무릎을 굽혀 눈을 마주쳤다.

“얘들아. 너희들이 폭죽 물약을 터뜨려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건 위험해서 어른들만 쓰는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폭죽 물약을 써보고 싶으면 거짓말하지 말고 부모님에게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허락을 맡는 거야! 알겠니?”

“네에….”

아이들에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레이나는 한명씩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좋아. 누나에게 앞으로 안 그러겠다고 약속하면 폭죽은 아니지만 조그만 선물을 줄게. 약속할 수 있지?”

레이나는 반딧불 물약을 등 뒤로 살며시 감추며 말했다. 금세 시무룩하던 꼬맹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네! 약속할게요.”

합창하듯이 아이들이 외쳤다. 아이들은 조그만 불빛을 담은 병들을 들고 신나게 가게를 뛰어나갔다.

“너는 사람이 너무 좋은거야? 아니면 바보 같은 거야? 이 사람 저 사람 사정 다 봐주면 어떡해?”

토비가 내심 마음이 훈훈해졌음에도 괜스레 레이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처방을 할꺼면 끝까지 해줘야지! 마법약이란 게 꼭 병에 담긴 것만은 아니니까.”

레이나가 토비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토비가 못 당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휴. 베로스 아저씨가 두 명이네, 그래. 이러니까 가게에서 맨날 나만 나쁜 놈이 되는 거야.”

토비는 문에 걸린 ‘영업 중’ 팻말을 ‘식사 중’으로 바꿔 걸며 궁시렁거렸다. 또 나쁜 짓이나 해야겠다며 토비는 문을 열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자, 지금부터 잡화방 식사 시간입니다. 기다리시는 분들 죄송하지만 30분 후에 다시 와주세요! 안 그러면 축제 내내 춤추게 할 거야!”

가게 앞에 줄지어 서있던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도 토비의 말에 피식 웃으며 흩어졌다. 그러고 보니 아침 일찍부터 쉼 없이 일해온 둘이었다. 미처 아침 식사도 하지 못했지만, 정신없이 바빴던 탓에 배가 고픈지도 몰랐다. 토비가 적당히 손님을 끊지 않았다면, 레이나는 점심 식사까지 걸렀을지도 모른다.

“고마워. 토비. 덕분에 한숨 돌리겠어.”

레이나는 토비에게 엄지를 치켜올리며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토비는 손을 대충 휘적거리며 화답했다. 참으로 긴 반나절을 보내고, 둘 다 잠시나마 휴식을 만끽하려던 찰나, 가게 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문에 걸린 종이 딸랑거리자 토비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쉬는 시간입니다. 이따가 30분 뒤에-”

손님을 돌려보낼 참이던 토비는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의 기묘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손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는 긴 망토를 입고 있었고, 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내뿜는 서늘한 느낌이 가게를 채우는 듯했다. 손님은 미끄러지듯 가게로 들어서더니, 천천히 두리번거리며 가게 안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막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나에게서 멈췄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레이나를 응시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저... 혹시 찾으시는 게 있나요?”

어색한 침묵을 깨고 레이나가 입을 뗐다. 손님은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레이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무언가가 그녀를 관통하는 것 같았다. 레이나는 식은땀이 나는 듯했다.

“네가... 레이나로군.”

쇳소리가 섞인 낮은 음성이 망토에서 나왔다. 가까이에서 들렸음에도, 마치 아득한 곳에서 이야기한 듯 위화감이 있었다. 토비는 그 작은 몸집으로 레이나 앞을 막아섰다.

“지금은 쉬는 시간입니다. 찾으시는 물건이 없으시다면 나가주세요.”

토비는 강하게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님은 잠시 토비를 바라보더니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헛기침했다. 미안하군, 손님은 사과하고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말했다.

“오래된 상처에 좋은 약도 있나?”

“아니 글쎄, 지금은 쉬는 시간이라니까요?”

불쾌한 기운을 풍기는 손님을 향해 토비가 조금 더 단호하게 말했다. 레이나는 그런 토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만류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님에게 되물었다.

“어떤 상처... 말씀이실까요?”

“마음의 상처야. 오랫동안 없어지질 않아서 말이지.”

손님은 아까보다 조금 부드러워진 말투로 대답했으나, 그 안에는 깊은 공허와 쓸쓸함이 녹아 있었다. 레이나는 그가 그의 무거운 감정에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많은 사람의 고민을 들어온 그녀였지만, 이토록 무거운 감정이 느낀 적은 없었다.

“마음의 상처라면...”

레이나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녀는 선반 쪽으로 손을 뻗어 고요하게 일렁이는 주황색 약병을 집어 들었다.

“이건 햇살 물약이에요. 마음이 힘드실 때, 한 방울씩 드시면 잠시 기분을 따듯하게 해줄 거예요. 그렇지만... 마음의 상처는 약으로만 치료할 수는 없어요.”

레이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약만으로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무엇이 손님을 그렇게 힘들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오래된 마음의 상처라면, 그 근본적인 걸 없애셔야 해요.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스스로 내려놓는 것도 방법이에요. 물론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요.”

말을 마친 레이나는 햇살 물약을 손님에게 건넸다. 그러나 손님은 물약을 받지 않고 말없이 레이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전혀 볼 수 없었지만, 레이나는 그의 미묘한 감정의 동요가 느껴졌다.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데 주제넘게 말씀드렸다면 죄송해요.”

또다시 고요한 적막이 흐르자 레이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자 손님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쇳소리가 섞인, 여전히 조금은 듣기 거북한 소리였지만 어딘가 슬프고 쓸쓸한 느낌이었다. 그는 햇살 물약이라,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그는 중얼거리며 물약을 받아들었다.

“고맙군. 내가 무례하게 행동했다면 사과하지.”

손님은 망토 속에 무언가를 더듬어 찾았다. 그가 꺼낸 것은 정교하게 금으로 각인된 작은 상자였다.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은 돈이 없어서 말이야. 이걸로 대신 내지. 약값 이상은 분명히 할 거야.”

손님은 상자를 매대 위에 내려놓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레이나가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손님은 미끄러지듯 가게를 빠져나갔다.

“저기요! 물건으로는 안 받는다고요!”

토비가 황급히 손님을 뒤쫓아 문을 열었다. 그러나 짧은 찰나에 흔적도 없이 손님은 사라져 버렸고, 토비는 하릴없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토비는 씩씩거리며 가게 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내가 저런 손님까지 다 챙기지 말라고 했잖-”

토비가 투덜거리며 레이나에게 한 소리 하려던 순간, 레이나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당황한 토비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듯 멈추어 섰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레이나 곁으로 다가갔다.

“뭐야, 왜 그래? 괜찮아?”

토비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으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레이나는 그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괜찮아. 이상하게... 속상하네. 그 사람. 엄청 쓸쓸해 보여서.”

레이나는 손끝으로 눈가를 훔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레이나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유독 잘 읽어내곤 했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레이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그만큼 레이나가 남의 감정을 너무 깊이 받아들여 스스로 힘들어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토비는 그럴 때마다 아무 말 없이 다독여 주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본 사람이잖아. 게다가 무례하고, 이상하고, 불길하고. 너무 신경 쓰지마.”

토비는 레이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레이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토비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이건 어쩌지?”

레이나는 매대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물그러미 바라보았다. 상자는 모서리가 매끄럽게 가공되어 있었고, 각 면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금박 문양이 새겨져 고급스러워 보였다. 황금빛 문양은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마치 상자 안에서 무언가 공명하는 듯한 신비한 느낌을 자아냈다. 레이나는 무심코 상자를 집어들었다. 그 순간, 상자의 황금빛이 살짝 더 강해지며 미세하게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레이나는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열여보려고 했다.

“열지 마!”

토비가 깜짝 놀라 레이나의 손을 탁 쳐냈다.

“이 멍청아. 그 인간이 뭘 줬을지 알고 그냥 열어 보려고 해!”

“그렇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토비는 레이나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 제일 수상한 사람이었는데, 넌 대체 무슨 세상에 사는 거냐?”

토비는 답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이건 베로스 아저씨가 돌아오시면 보여드리자. 그전까진 절대 열어보지 마.”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상자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운이 마음에 걸렸다. 마치 상자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억누르며 상자를 내려놓았다. 무언가 아쉬운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토비는 비장의 수를 꺼냈다.

“내 말을 안 들으시겠다? 좋아. 오늘 점심은 내가 만들겠어.”

“그것만은 절대 안 돼.”

레이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토비의 요리 솜씨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그는 수프를 끓일 때마다 마법 약재를 쓰겠다며 쓴맛만 가득한 기괴한 요리를 만들거나, 약한 불로 오랫동안 끓여야 할 요리를 5분 만에 끝내겠다며 불길이 치솟는 화로에 던져넣고 자신만만에 하는 등, 끔찍한 전과가 있었다. 토비는 악랄하게 씩 웃으며 순식간에 주방으로 뛰어갔다.

“안 돼! 제발.”

레이나는 절박한 비명을 지르며 토비의 뒤를 쫓았다. 둘의 투닥거리는 소리가 점차 멀어지자 가게 안은 다시 고요해졌고, 오직 매대 위에 놓인 상자만이 은은한 빛을 내며 고요히 진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