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늦가을, 일병 첫 휴가를 받아 홍천에서 서울로 와 친척들께 인사를 드린 뒤 부모님이 계신 부산행 막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으로 갔다. 한참을 매표소에 서서 내 순서를 기다리는데 하필 앞에 세명을 남기고 좌석이 매진되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5시간반을 서서 가야한다는 생각에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지만 행군 많이 하기로 유명한 11사단 젓가락부대에서 단련된 22살의 일병에게는 대수롭지않은일이니까.
"입석이라도 주십시오"

큰소리는 쳤지만 플랫폼을 향하는 발걸음은 좀처럼 흥이 안나니까 애꿎은 기차표에게 화풀이를 한다.
'기차에서 푹 자고 아침부터 일정을 알차게 보내야하는데 너 때문에 야간 당직서고 오전 근무취침이랑 다를게 없어졌어. 천금같은 휴가 반나절을 그냥 날려버리게 생겼잖아'
짧은 한숨과 함께 입석표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어라? 이건 입석표가 아니라 좌석이 아닌가.
더구나 발권기에서 바로 뽑은 새표가 아니라 주머니에 넣었는지 구겨지고 손때도 묻어있었다. 이게 어떻게된 일일까 생각하다가 일단 계획대로 휴가를 보낼수있다는 기쁨에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한참을 생각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이 멍충이. 누가 환불한 표를 가지고있다가 다른 사람들에겐 매진이라고 말하고 나한테 슬쩍 주신거잖아.

역무원 아저씨는 좌석이 매진되어갈때 줄 서 있는 젊은 군인을 보고 어쩌면 지금 복무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당신의 아들을 떠올렸으리라.
철없는 일병 나부랑이는 그 배려를 깊이 깨닫지 못했고 지금 돌아가서 인사드리기엔 너무 늦었다고 자위하고 말았다.남은 시간 10분은 22세 육군 일병의 전투 구보로 너끈하게 다녀올수있는 거리였음에도.

결국 기차는 출발했고 그분의 배려가 아니었으면 나와 한무리가 되었을 입석 승객들이 영등포에서 타기 시작했고 수원에선 객실이 정어리 통조림이 되었다.
밤은 깊어갔고 난 기차가 평택을 지나갈때 돌아가서 감사인사를 못드린게 후회로 남았고 후회는 곧 미련으로 변해 함께 경부선을 굴러가며 점점 큰 눈사람이 되어가고있었다.
그리고 32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날이 가끔 생각난다.
고마운건 바로 감사해야하고
미안한것도 즉시 사과해야한다.
그러지않으면 나처럼 중년이 되어 어깨에 무거운 눈덩이 몇개씩 지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1992년 11월 서울역에서 군복입은 저에게 입석밖에 없다하시고 좌석표주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 어깨의 눈덩이는 선생님께서 제게 그러셨던것처럼 저도 다른 사람을 도우며 조금씩 줄여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