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장인 한명회를 필두로 한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출신의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기 시작한 성종. 그가 왕에 오르고 어느덧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남촌, 필동.

해가 서산 넘어 뉘엿뉘엿 지고 있는 어스름한 기운이 올라오는 3월의 어느 초저녁. 절기상 입춘은 지났지만 아직 겨울의 기운이 다 가시지 않았는지 공기가 제법 차갑다.

쌀쌀한 공기를 뚫고 허술한 울타리가 쳐진 낡고 초라한 초가집에서 한 도령이 방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 눈에 봐도 보통의 사내들보다 머리 하나는 작아 보이는 사내는 작고 야리야리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몹시 서둘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기라도 한 것일까? 사내는 계집처럼 곱상한 얼굴을 아무렇게나 집어 쓴 갓으로 가리며 갓끈을 동여매기 시작했다.


“부디 조심하거라.”

“맞아요 아가씨. 정말 조심하고 또 조심하셔야 해유?”


갓끈을 동여매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방에서 들려오는 병약한 사내의 목소리. 그리고 그를 마중 나온 중년 여성의 목소리. 형색은 사내이건만, 분명 들려온 말로는 아가씨란다.

하루 이틀 장사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 매번 이리도 걱정일까? 걱정과 근심이 가득 차 조심하라는 말에 괜히 심술 난 여인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거참, 걱정하지 말라구. 어디 하루 이틀 장사하나?”

“그래도 걱정되니 하는 소리가 아니냐.”

“그래요. 이게 다 걱정되니 하는 소리가 아니겠어유?”

“아, 알겠수. 내 얼른 다녀올 테니 다려준 약이나 잘 먹고 있어. 알겠지? 아주머니도 오라버니 잘 챙겨주시구요.”

“그래, 밤이 깊기 전에 어서 다녀오거라.”

“알겠어유. 우리는 걱정 말고 아씨나 조심하셔유!”


끝까지 걱정의 말이다. 다 큰 사내가 잠시 출타를 하는데 말이다. 비록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한들 상투까지 올린 성인이 아닌가? 물론, 행색만 그러하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말이다.

걱정하는 목소리에 조금 전 방문을 나설 때 까지만 해도 곧 있을 거래에 대해 자신에 차 있던 여인의 마음에 긴장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을 달래보려, 심호흡을 하기 위해 지그시 감은 두 눈 위로 길고 짙은 속눈썹이 흰 피부와 대조되어 탐스러워 보였다.


“그럼 나 다녀올게!”


감았던 눈을 뜨고 가족들을 향해 자신 있는 목소리로 소리친 여인. 그녀는 자신에게 버거워 보이는 보따리를 어렵게 들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적지는 남부학당이 위치한 남학동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라 약 1각이면 충분한 거리라는 것을 익히 잘 아는 그녀는, 조금 전 긴장했던 자신이 우스워 피식하고 웃었다.


“어머, 저 도련님 좀 봐. 어쩜 저리 고우실까…….”

“꿈 깨! 너 같은 애는 천 번 죽었다 살아나도 안 봐주실걸? 적어도 나 정도는 되야…….”

“뭐라고?”

“왜? 내가 못 할 말 했니?”

“이게!”


자신 때문에 길 위의 여인들이 싸움이 났다는 것은 알기나 하는 것 일까? 씩씩한 걸음으로 걷던 여인이 갑자기 길위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아련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싸우던 것을 멈추고 조신한척 고개를 숙이는 두 여인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인의 눈빛은 그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아팠다면……. 그랬다면 혹시 달라졌을까? 오늘따라 내가 왜 이러는지 참.’


아마도 집에 혼자 두고 온 이의 병색이 며칠사이 더 깊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 병약해 거동이 힘들었다. 허나 요 며칠은 그 증세가 더 심각해졌다. 자신이 받아온 성균관 유생의 숙제 때문에 무리하여 그렇게 된 것이리라.

본인 때문에 증상이 악화된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약해진다. 자책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흔들어 눈물을 털어내고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장사는 신뢰인데 약속한 시간에 맞춰가지 못하면 얼마 없는 거래마저 끊기리라. 게다가 지금 만날 이는 단골이 아니던가? 돈을 벌어야 집에 있는 사내에게 약이라도 지어줄 수 있다. 마음을 다 잡은 여인은, 찬 기운에 조금 추웠는지 도포자락을 꼭 싸매고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얼른, 약속시간에 늦으면 안 될 것이야!’


길 위에서 잠시 지체한 시간 때문에 뛰다시피 걸어온 여인은, 곧 남부학당 동쪽에 뿌리내린 커다란 소나무 아래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고객보다 일찍 도착한 듯 했다.

향긋한 소나무 향이 풍기며 마음을 안정시켜줬다. 송골송골 땀이 맺힌 이마를 도포 자락으로 스윽 닦고는, 숨을 달래기 위해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본인의 몸에 비해 버거운 보따리를 들고 뛰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잠시 나무에 기대 숨을 쉬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별안간 어둠속에서 쭉 뻗어 나온 손이 잡아챘다.


“이보시게! 정도령!”

“으허!”


어깨를 잡힘과 동시에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커다란 목소리.


“으하하핫! 뭘 그렇게 놀라시나? 누가 보면 호랑이라도 본줄 알겠네. 사내대장부가 담력이 그리 약해서야 쯧…….”

“뭐……, 뭣이오! 강도령 당신이었소? 이런 장난은 재미없소이다!”


자신을 놀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화가 난 정도령이라 불린 여인이 소리쳤다. 그리 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고개를 숙이고는 붉은 입술을 샐쭉거렸다.


“어허, 설마 삐친 것이오? 여인네도 아니고 사내가 그리 속이 좁아서야…….”

“여, 여인네? 삐쳐? 이보시오 강도령!”

“아, 알겠소. 내 농은 그만하리다. 그대를 볼 때면 내, 왜 이리 장난을 치고 싶은 것인지…….”


키가 작고 야리야리한 여인보다 머리가 두 개는 더 커 보이는 강도령이라 불린 사내. 그는 고운 비단으로 만든 청색 도포를 걸친 귀티가 흐르는 미남이었다. 어두운 달빛 아래에서도 빛이 나는데 밝은 대 낮에 보면 어떻겠는가?

웃음기를 감추지 못한 얼굴로 여인을 바라보던 강도령은 문득 자신을 흘겨보는 눈초리를 느꼈다. 자신을 흘겨보는 이 자가 정말 사내란 말인가? 사실 정도령은 여인이며, 사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그저 정도령이 사내라는 사실을 속으로 안타까워하던 강도령은 헛기침을 한번 뱉었다. 그리고는 여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 어디 내 숙제는 잘 해왔소?”

“두말하면 입 아프오. 내 단골이면서 나를 못 믿는 것이오?”

“허허, 그럴 리가 있나!”

“자, 여기 한 냥이오.”

“한 냥? 이보시게 조금 깎아주시게나. 한 냥이라니…….”


한 냥이라니? 평소보다 금액을 조금 더 올려 받고 있다. 혹 일거리가 더 많았다는 얘기인 것인가? 강도령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다가, 흥정이라도 해 보기위해 말을 걸자, 이내 단호하고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림없소. 내 이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한지 아시오?”


여인이 건네주는 숙제를 받아들고 한 냥을 건네던 강도령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것인지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짝 소리 나게 쳤다. 그리고 돈을 받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아, 알겠네. 알겠어. 그리 무서운 얼굴 하지 마시오. 아참! 혹시 모레 시간 있소?”

“모레? 무슨 일이라도 있소?”

“무슨 일은 아니고, 내 그대에게 소개시켜줄 이가 있소이다.”

“소개라니……?”


별안간 소개라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인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훤히 빛나기 시작했다. 사슴 같은 커다란 눈망울에 고운 턱선. 희고 고운 피부에 붉은 입술까지. 정녕 경국지색이 따로 없는 모습이었다. 이런 그가 사내여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모습에 혀를 끌끌 차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던 강도령은, 언제까지나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궁금해 하는 여인을 놀리 듯 일부러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다시금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다.

그런 그의 태도에 강도령을 흘겨본 여인이 입술을 샐쭉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돌아서 집으로 향하려는데 강도령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고객 소개요. 고객. 명색이 단골인데 호객행위를 좀 해보았소이다.”


고객이라니? 명색이 단골인데 호객행위를 했단다. 이 얼마나 복덩이가 아닐 수 있으랴? 가뜩이나 집안의 병약한 이를 위한 약재 값이 부족했던 터인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정말이오? 내게 돈을……. 아니, 고객을 소개해 준다는 것이오?”

“그렇소이다. 사실 그 녀석 이런 일엔 절대로 반대하는 녀석이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소이다. 상당히 까다로운 고객이니 준비는 단단히 하고 나오는 것이 좋을 것이오.”

“알겠소. 그건 걱정 마시오. 내 강도령 같은 망나니 생원의 마음에 들었는데 그자의 마음에 들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소? 모레 이곳으로 오면 되는 것이오?”


까다롭다는 말은 여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성균관 유생인 강도령의 숙제를 대신 해주면 보통 한 냥. 운이 좋으면 두 냥을 벌 수 있다. 헌데 고객을 소개해 준다니? 벌이가 두 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일거리도 두 배로 늘어나겠지만 그것은 자신과 집에 남은 사내가 함께하면 될 것이다. 두 배라니. 그 돈이라면 약재를 사고도 보름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돈이었다. 흐뭇한 마음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여인이었다. 실로 복덩어리 단골을 얻은 것이라.

그나저나 망나니라니? 그녀의 말에 발끈할 뻔 했던 강도령은 이내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숙제를 맡기는 유생이라니? 망나니로 보일만도 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원하는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인에게, 강도령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소. 모레 이곳. 때는 유시 정각. 내 이미 말했으나 까다로운 위인이니 1각이라도 늦으면 아니 되오.”

“알겠소이다. 도령이나 늦지 마시오. 그럼 이만!”

“자, 잠깐!”


유시 정각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사라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강도령이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이미 저 멀리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자신의 부름을 듣지 못했나보다.


“내 오늘은 통성명이라도 하려했더니 아쉽게 되었구먼.”


은은한 달빛아래 유유히 사라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한참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강도령은,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