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다만 반쯤 열린 방문으로 흘러나온 빛이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에 반사되고 있을 뿐이었다.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것은 빛만이 아니었다.
'흑...으흐흑...끄윽...'
누군가의 억눌린 울음소리도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만약 그 울음소리가 여성의 것으로 들렸다면, 듣는 사람에 따라 동정심이나 혹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법했다. 하지만 그 울음소리의 주인은 남자였고, 그 주인은 굳이 자신의 성별을 속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그 울음소리가 청자에게 불러일으킨 감정은 동정심도 공포심도 아닌 혐오감이었고, （주로 옆집 주인인） 청자는 그 혐오감을 수차례에 걸친 민원을 통해 표출했다.
안타깝게도, 방안에서 모니터를 앞에 두고 울먹이는 남자에게는 민원이 별 효과가 없는 듯했다.
“소피…로베르트…방앗간집 할머니…어흑!”
그의 모니터에 떠 있는 것은 ‘유감이지만 재능이 없네요, 로베르트 군’이라는 소설의 첫화였다. 숙련된 프롤로거의 작품답게 첫화는 유려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었고, 이는 컴퓨터 앞에 앉은 사내, 힐좀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벌써 열한 번째 읽는 거지만, 이 프롤로그는 읽을 때마다 힐좀여에게 깊은 감동과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하지만 힐좀여는 이와 함께 한가지 사소한 부작용을 얻게 되었는데, 바로 소설 속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늘 밤에도 힐좀여는 현실 이웃의 소음피해보다는 소설 속 친구의 죽음을 더 중시하며 오열하고 있었다.
“으어어어어엉!..끄으…끄으윽…으어어어엉!”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힐좀여는 모니터 옆에 있던 휴지를 뽑아 눈물을 닦았다. 일부 남성들은 남녀가 교미하는 영상을 보며 자신의 성기를 말아쥐고 흔들다가 나오는 정액을 닦기 위해 컴퓨터 옆에 휴지를 놓는다는데, 힐좀여 입장에서는 이보다 저열한 취미가 있을 수 없었다. 힐좀여는 로베르트 소설과 같은 고급스러운 취미를 알지 못하는 이들을 불쌍하게 생각했다.
눈물을 마저 닦아낸 힐좀여는 무판게에 접속했다. 멍청이들밖에 없는 곳이기는 했지만, 그가 로베르트의 작가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는 접속하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여전히 현실의 이웃들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모습이었다.
‘초…초성어가 게시판에 있어!’
힐좀여는 떨리는 마음으로 자판 위에 손을 올려놓았지만, 머리가 새햐얘져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초성어를 만났을 때 하려고 준비해두었던 말은 이미 머리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으으…어쩌지…’
전전긍긍하는 힐좀여에게 먼저 말을 건넨건 초성어였다.
“로베르트 꿀잼 ㅇㅈ?”
힐좀여는 뇌와 심장의 위치가 바뀐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의 가슴은 갑자기 시냅스로 구성되어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릿찌릿했고, 머릿속은 마구 쿵쾅대고 있었다.
“로…로베르트 씹노잼? ㅇㅈ? 어 ㅇㅈ. 소피: ㅇㅈ합니다.”
당황한 힐좀여는 나오는대로 말을 뱉어냈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을 때는 이미 엔터키를 누른 뒤였다.
‘어…어쩌지…초성어…기분이 상한 거 아닐까? 대답이 없잖아…분명 이제 날 미워하는 거야. 힐좀여 이 바보, 멍청이! 초성어 앞에서 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거야!’
“ㅋㅋㅋㅋㅋㅋㅋ”
‘우…웃고 있어? 기분이 풀린걸까? 아니야…분명 한심한 내 모습을 비웃는 거야. 앞으로 초성어는 날 상대도 안하겠지. 하긴, 난 무판게에 똥글이나 싸지르는 얼간이고, 초성어는 조아라 순위권에도 든 작가인걸? 이제 초성어랑은 끝난거야! 으흐흑…’
“순간 소피가 누군가 했네. 너 매번 로베르트 재미없다고 하는거치곤 분량도 없는 엑스트라를 너무 잘 기억하는데? 알고보면 로베르트 광팬이라거나, 그런거 아니야?”
정곡을 찌르는 말에 힐좀여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누…누가 그 따위 소설을 좋아한다는거야! 난 그, 그저…기억력이 좋을 뿐이라구! 알았어?”
“ㅋㅋㅋㅋㅋㅋ 그래. 뭐 어쨌든 누군가 내 소설을 열심히 읽어준다니 힘나는걸?”
힐좀여는 이어서 타자를 치고 싶었지만, 이미 온몸의 힘이 빠진 그에겐 타자를 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온몸의 힘이 빠졌기 때문이다.
‘초…초성어가…로베르트의 작가님이…내덕에 힘이 난대!’
나른하게 되뇌이며 힐좀여는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동안 로베르트를 정독하느라 부족해진 수면을 보충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