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때 수능 망쳐서 생각지도 못한 학교로 입학하게 되었다. 수능 망친 것을 그냥 실력이라고 생각 안하고 삐끗했다고 생각했었다. 자존심이 매우 상했었던 것 같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친구의 말에 의하면 잔뜩 취해서 ‘내가 OO대를 오다니..’라고 말했다고 전해 들었다. 근데 사실 그 해 6월 모의고사와 9월 모의고사가 쉽게 나와서 점수가 실력보다 잘 나왔던 것이라 수능을 망쳤다고 할 순 없었다. 그렇다기보단 그냥 그게 나의 실력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튼 그때 재수할 용기는 없어서 OO대에 일단 진학을 했고, 수업을 들으면서 반수（학교를 다니면서 수능 시험을 준비하는 것）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하면 부끄럽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땐 같은 과 친구들을 속으로 무시하고 낮잡아보았다. 그 시기가 스물의 사, 오월쯤이니, 친구, 동기들은 허구한 날 술 마시러 한창 놀러 다니는데 나는 독서실에 박혀있다는 자기연민의 생각에만 빠져서 결국엔 공부도 놀기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이비에스 수능특강을 과목 별로, 과목 안에서도 국어면 화법과 작문이니 문학이니 독서니 하는 문제집들을 분야별로 잔뜩 사놓고 독서실 사물함에 쌓아두었다. 쌓여있는 책을 보고 있노라면 처음엔,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괜시리 뿌듯했던 것 같은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들은 어느새 외면하고 싶은 존재가 되어 마음만 복잡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독서실에 가면 커튼을 쳐놓고 핸드폰만 했다. 몇 시간 핸드폰만 하다가 저녁에 집에 오면 기분이 그렇게 거지같을 수 없었다. 집에 오면 낮에 실컷 잔 탓에 잠이 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컴퓨터 게임을 새벽 내내 했다. 같이 게임하는 친구들이 대학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할 때면 헤드폰을 벗어버리고 싶었다.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접속을 종료하고 부지런한 참새들이 여명을 맞이하며 울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나는 피곤에 못 이겨 잠에 들었다. 눈을 뜨면 항상 오후 4시였다. 그런 아들도 굶지 말라고 어머니께서 바쁜 출근길에 해 놓으신 반찬이 식탁에서 식은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배가 고파서 밥을 먹겠다고 꾸역꾸역 쳐먹고 있는 스스로가 기가 막혔다. 제깟 것도 살겠다고 아침에 아니, 남들 퇴근을 앞둔 그 시간에 눈을 뜨고 숨을 후욱후욱 폐에 불어넣는 것조차 한심했다. 그러면서도 책 조금 들여다보다가 졸리면 자고 핸드폰을 하다가 조용히 울고 그랬다.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 즈음 무렵이다. 그냥 콱 죽었으면. 그 땐 선택과 책임이라던가 대학에 가고 싶은 이유라던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그땐 그랬다. 길 가다가 차가 나를 덮치거나 어디서 사고라도 나길 바랬다. 아니면 당시 살던 주택의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리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여느 새벽처럼 찔리는 양심을 애써 무시하며 게임을 주구장창하고 피로와 지겨움을 견딜 수 없어 자려고 누웠을 때였다. 순간 창문 밖에 검은 실루엣이 스르륵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우리 집은 2층 주택인데,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들어올 수는 있었지만 가족들 외엔 그럴 이유도 없었거니와 누군가 그런 적을 본 적도 없었다. 물론 나쁜 마음을 먹으면 그런 일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는 점에서 치안이 좋진 않았다. 나는 도둑이 들어서 창문이 깨지고 집이 난장판 되었던 친구의 경험담이 떠올랐다. 식은땀이 나면서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하여튼 심장이 그렇게 크게 뛸 수 있는 줄은 그 때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창문 쪽 벽을 지나 ㄱ자로 돌면 바로 현관문이 등장하는 구조였다. 발걸음 소리가 어두운 새벽 그 특유의 침묵을 깨고, 저벅저벅 들렸다. 합하면 5미터가 될까 말까한 거리인데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던 그 순간만큼은 정말 1초가 수십 수백 배는 길게 느껴졌다.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온갖 고민을 했다. 문 뒤로 숨었다가 역습할까? 자는 척 하다가 공격할까? 방에 무기로 쓸 만한 것은 없나?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실루엣이 현관문 앞에 드리웠다. 현관문은 투명하지만 번지는 유리 재질로 되어 있었다. 이때의 심장은 어찌나 쿵쾅거리며 뛰던지 온 몸이 심장 박동에 맞춰서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 사람의 손이 쿵 하고 유리문에 충돌했다. 그리고는 왔던 길로 돌아갔음.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고, 창문으로 다시 지나가는 실루엣을 확인한 뒤에야 그 사람의 손이 닿았던 현관문을 자세히 봤는데

전단지가 붙어있었다. 그 때 안도하면서 화가 치미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어떻게든 살라고 저항하던 내 모습을 돌아보며 그동안 나는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냥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누구나 아는 뻔한 사실을 나는 이렇게 깨달았다. 그리고 옥상이나 사고나는 것 따위를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철없는 생각이었는지도 깨달았다. 적어도, 내가 처한 상황은 내가 바꿀 수 있는 상황 아니던가.

사람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 사건 이후로 갑자기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다. 대신 이대로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어차피 해야 할 국방의 의무를 지기 위해 입대를 했다.

지금도 죽을 만큼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 때 생각이 난다. 그 때의 경험은 내게 말해준다. 죽고 싶다는 마음 아래에 숨겨진 진심은 진정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더 잘 살아보고 더 잘 해내보고 싶다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