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의 발가락이 움직였다. K는 가장 높게 떠오른 태양이 두려워 잠에서 깨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 돈은 알아서 따라온다는 세간의 말은 예상외로 무거웠고 지금의 K를 만들었다. 장사꾼들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자기계발서를 몇 권 펼쳐볼수록 불공평과 모자람을 구분하려고 애썼지만 일이년이 지나자 머릿속을 비웠다. K가 유수의 대학원을 알아볼 때 몇몇 교수들이 K에게 우물을 인지하고 벗어나라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발가락은 이끼가 무성한 벽돌을 건드렸고 그제서야 어둡고 깊은 우물 바닥에서 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끝에는 흐린 하늘 가운데 태양만이 무심히 K를 내리쬐고 있었다. 점심이 지나서야 겨드랑이가 가려웠다.

K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태우며 누워 있는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의 왼쪽 눈 부근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상처가 있었지만 이제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자기 몸을 태평히 핥고 있었다. 자기 몸을 혀로 핥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생각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고양이가 되고 싶었다. 어두운 먹구름은 고양이의 털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K는 씻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투명한 물이 자신을 정화할 것을 믿으며 벌컥벌컥 마셔댔다. K는 곧 밀어버릴 자신의 때를 부각하려는 마음에 흰옷을 걸쳐 입고 대문을 열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옆집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화려한 옷차림과는 달리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으며 계단을 올랐다. 굳은 것처럼 붕 뜬 여자의 화장은 마치 가면을 쓴 것 같았고 나풀거리는 팔다리는 여자만의 심란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K는 여자의 얼굴에서 때를 보았다. 분명히 피부와 화장 사이에 때가 껴 있을 것이다. 하지만 K는 집을 나섰고 여자는 집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여자는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 아는 사이지만 아는 건 없는 둘은 시선을 돌렸다. 여자가 대문을 열자 K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의 뒤를 쫓아 큼직한 파리 한 마리가 여자의 대문을 따라 들어갔다. 파리는 여자가 아닌 얼굴의 때를 따라간 것이다. K는 닫히는 문을 지켜보다가 건물을 나왔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 축축한 흙은 K의 다리를 잡아끌었고 물방울이 맺힐 것 같은 공기는 K의 시야를 흐리게 하였다. 하지만 K는 지치지 않았다. 오른손잡이인 K는 사람들이 자신을 지나칠 때마다 시계를 찬 왼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누구에게 통화하는 척을 하였다. 왼손을 들면 K의 얼굴 근처에서 시계가 반짝였고 흐린 하늘 사이를 질주하는 광채는 K를 휘감고 K와 낡은 도시를 철저히 구분하였다. 부모님께 대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빛나는 시계는 외출할 일이 없는 근 몇 년간 건드리지 못하였다. 하지만 K는 시계에 햇빛이 반사될 때마다 생기는 은빛을 즐겼다. 생각해 놓은 가짜 전화 통화의 대사가 고갈될 즈음에 목욕탕에 도착하였다.

K는 목욕탕의 문고리를 잡을 때까지 가짜 전화 통화를 하였다. 카운터의 직원에게 ‘주식’과 ‘오천만 원’이라는 단어를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몇 마디의 새로운 대사를 적절히 만든 후 문고리를 당겼지만 열리지 않았다. 한 번 더 힘차게 당겼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K가 기억하던 목욕탕은 오래전에 폐업하였다. K는 문 넘어 금기된 곳에 두고 온 것이 있듯이 멀뚱히 바라보다가 가짜 전화 통화를 그만두었다. 겨드랑이는 여전히 가려웠다. 회색 하늘은 낮게 내려앉았고 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습기는 때와 섞여 불쾌하게 미끌거렸다. 문 앞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는 K는 발걸음을 돌렸다. 골목을 나오려 방향을 틀자 누군가 K를 스치며 목욕탕으로 향했다. K는 조용히 멈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사람이 어떤 식으로 실망할지 기대하였다.

그는 K와 똑같이 목욕탕의 문을 두세 번 잡고 흔들더니 뒤돌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K와 눈이 마주쳤다. K는 눈을 피하려 했지만 익숙한 얼굴에 시선을 조금 더 고정하기로 하였다. 그는 옆집 여자였다. 여자 또한 단번에 K를 알아차렸고 둘은 동시에 땅에 눈을 붙였다. K는 여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는 것에 스스로 신기해하였다. 여자의 얼굴은 집을 나올 때 보았던 진한 화장이 없었고,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K는 여자를 매끄럽고 깨끗하다고 생각하였다. 여자는 담배를 피우러 골목으로 돌아갔지만 주머니를 더듬거리더니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을 본 K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담배를 건네주러 다가갔다.
“오래전에 닫았나 봐요.”
K가 자신만이 알아낸 비밀을 전수하듯이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여자는 K를 흘깃 보고는 다시 땅을 보며 중얼거렸다.
“씨발… 간판을 떼던가…”
K는 다시 말하였다.
“담배 태우세요?”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대화가 끊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K는 자신의 디스를 왼손으로 건네주었다. 담배를 휘감은 시계의 은색 광채가 여자에게 닿았다.
“이딴 걸 피우세요?”
여자가 말했다. K는 얻어 피우는 주제에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말을 붙였다.
“어제는 좀 바쁘셨나요?”
K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였다고 생각해 급히 말을 덧붙였다.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여자의 담배 연기는 회색 하늘에 섞여 잘 보이지 않았다.
“가끔 날 샐 때도 있어요.”
“혹시 무슨 일하시는지…?”
K가 질문하자 여자는 노려보며 말하였다.
“알아서 뭐하게요?”
“네?”
K는 여자의 말을 정확히 들었지만 다시 물었다.
“알아서 뭐할 거냐고요. 노래방 다녀요.”
K는 당황하여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두세 가지의 대답 중 적절한 말을 고르고 있었다. ‘아니요’로 시작하는 무난한 답을 하려다가 여자의 얼굴에서 멍 자국을 보았다. 집에서 나오면서 보았을 때는 멍을 보지 못하였는데, 여자의 화장과 피부 사이에는 푸른 멍이 있었다. 여자는 그것을 씻으러 나왔을 것이다. 여자는 K의 시선을 의식한 듯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으로 멍 자국을 가렸다. 여자의 검고 긴 머리카락 사이로 푸른 멍 자국이 조금씩 보이자 K는 철창 너머로 무기력한 죄수를 바라보듯 약간의 안쓰러움을 느꼈다. 담배 연기는 여자의 멍 자국을 가리기 위해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고 곧장 회색 하늘과 하나가 되었다. K는 허공을 헤엄치는 여자의 시야를 붙잡으려다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여전히 매끄럽고 깨끗하였다.
"사람은 자신이 힘든 만큼 보상받을 수 있다고 착각한대요."
K는 여자와 마주친 시선을 떼어내며 말하였다.
"그럼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데요?“
여자는 자신이 뿜어낸 담배 연기를 바라보다가 말하였다. K와 여자는 같이 있었지만 다른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고 낡은 도시는 바람 한 줌조차 두 사람에게 골목을 양보하였다.
"사람마다 사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원하는 건 비슷하다고들 해요. 무슨 일을 하려면 포기해야 할 것들은 항상 존재하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그때 무엇을 포기했는지에 따라 성취와 보상을 측정한다는데, 틀린 말은 아니죠. 틀린 말은 아닌데, 제 생각에는 살아가는 방법에 따라 둘 다 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K는 말하면서 긴장을 느꼈다.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고 자신의 말이 여자에게 설교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게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요."
K는 자신도 같은 상황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살아가는 방법이 뭐냐고요. 당신은 그렇게 살고 있는 거예요?"
여자가 비꼬듯 질문하였다. 옆집에 살면서 어떻게 사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도 여자가 보기에 K의 생활은 나태함과 게으름 그 자체였다.
"제가 어때서요?"
K가 질문하였다.
"아니에요. 본인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렇게 살고 있나 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래서 그 방법이 무엇인데요?"
여자는 K의 뻔뻔함을 모른 채 넘어갔지만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사람마다 다르겠죠. 알맞은 방법을 찾으면 그게 정답일 테고요."
여자는 K가 대답을 회피한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정도 수긍하였다. 그리고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진 이유에도 수긍이 갔다. 여자는 그것을 찾으려 한 기억이 없었다. 입력이 있으면 그것에 맞는 출력이 있듯 여자가 살아가는 행동들은 작용에 따른 반작용의 연속이었다. 여자는 마셨던 담배 연기를 잠시 머금고 있었다. 그동안 약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여자가 담배 연기를 뱉어 내자 그 옆으로 지팡이를 짚은 한 노인이 지나갔다. 노인은 귀가 밝았던지 여자의 날숨을 듣고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K와 여자 그 사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편의점이 어디 있나요?"
노인은 쇳소리가 섞인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나름대로 뚜렷하였다. 여자는 담배를 쥔 손으로 편의점 방향을 가리키려다가 노인의 눈이 감겨 있는 것을 보고 다가가서 말하였다.
"여기서 더 가시다가... 따라오세요.”
여자는 K를 잠시 바라보다가 노인의 팔을 잡고 편의점으로 향하였다. 노인의 등장으로 대화가 끝나버린 K는 골목에 홀로 우두커니 서서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사실 더 할 말은 없었다. K는 알림도 없는 휴대폰을 몇 초 동안 쳐다보고는 여자와 애매한 거리를 유지한 채 걸었다. K는 여자의 뒷모습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흔들리는 여자의 긴 생머리에 K의 눈동자가 매달려 같이 흔들렸다. 노인에 대한 여자의 이러한 반작용들이 지금의 여자를 만들었고 K가 그것을 직접 관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노인은 편의점에 도착하자 여자에게 청테이프 두 개를 부탁하고는 만 원을 건네주었다. 편의점 직원이 계산을 마치자 노인의 아내로 보이는 사람이 찾아왔다.
"한 개여도 충분할 것 같은데? 방문하고 창문만 막으면 돼."
노인의 아내는 이미 구입된 청테이프를 보며 말하였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남편이 밖에서 혼자 돌아다녔다는 사실은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살며시 웃으며 노인을 바라보는 아내의 표정은 인자하였다. K는 노인의 아내가 들고 있는 번개탄을 보며 방금 들은 말을 상기하였다. 여자의 선의가 노부부의 동반자살을 도운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K는 여자의 삶을 천천히 짚어보았다. 꼭 붙어있는 노부부가 등을 돌려 집으로 향하는 순간 여자가 노부부를 붙잡았다.
“저기요, 무슨 생각이세요?”
여자는 노부부가 끔찍한 일을 벌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급하게 말하였다. 하지만 노인의 아내는 평온하게 답하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번개탄으로 뭐 하실 거냐고요.”
K는 둘의 대화를 보고만 있었다. 노인의 아내는 회색 하늘을 잠깐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남편하고 놀러 가려고요. 호호.”
“네?”
노인의 아내는 말을 마치고 돌아갔다. 여자는 할 말을 잃었고 아내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그 괴리 속에서 여자는 자신은 평생 저렇게 웃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여자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들어 112를 눌렀다. 그러자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던 휴대폰이 방전되었다.
“씨발, 하필… 당신이 경찰에 연락해봐요.”
여자가 K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네? 왜요?”
그 자리에서 급한 사람은 여자뿐이었다.
“야, 경찰에 연락하라고.”
K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하자 K는 의아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씨발, 머저리 같은 새끼.”
여자는 K에게 욕을 내뱉고 편의점 직원을 찾았지만 그 사이에 어디로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자 자신이 노부부의 의도를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주변은 몇 분 전처럼 조용해졌다. 노부부는 선선한 바람을 타듯 저벅저벅 걸어갔고 여자가 그들을 다시 보았을 때는 이미 너무 멀어져 있었다. 노부부의 뒷모습은 여자의 시야 속에서 점점 작아지다가 이내 소실점 속으로 사라졌다.

K와 여자는 편의점 안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름 바람은 길바닥을 천천히 쓸고 있었지만 유리문을 뚫지 못하였고 편의점 내부에는 들리지 않았던 기기들의 낮은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자 편의점 직원이 모습을 보였다. K는 허기를 느꼈다. K는 말없이 가장 싼 도시락을 하나 계산하고는 전자레인지에 돌린 후 창가에 붙어있는 탁자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여자는 나가려다가 담배 한 갑과 K와 같은 도시락을 하나 구입하였다. 여자는 집에 먹을 것이 없었다. 여자는 다른 전자레인지에 도시락을 넣어 돌리고 K와 한 자리 떨어져 앉았다. 둘은 숨겨진 글귀라도 찾듯 유리의 한가운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자가 먼저 말하였다.
“할머니가 번개탄을 들고 계셔서… 착각했나봐요. 방문하고 창문을 막는다고도 했잖아요.”
“무슨 착각이요?”
“방을 모두 막고… 번개탄 피워서… 두 분이 같이 그…”
여자는 특정 단어를 말하지 못하며 뜸을 들이자 K가 말하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안 했어요? 왜 경찰에 연락하지 않았어요?”
여자는 황당해하며 물었다.
“제가 가만히 있던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오히려 당황스럽네요. 전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가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중이었어요.”
여자가 아무 말도 없이 바라만 보고 있자 K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저 노인들을 방금 처음 봤습니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 단편적인 순간만 보았을 뿐이에요. 저 사람들이 몇 년간 마음의 준비를 했고, 몇 주간 이런 행동들의 준비를 했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우리가 저 사람들의 자살을 말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지랄하네. 그것을 무슨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건 그런 종류의 행동이 아니에요. 좋으려고 그러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해요?”
여자는 의도적으로 특정 단어를 피해 가며 말하였다. 여자가 생각하는 '그것'은 의도나 결과가 어떻든 속을 메스껍게 만드는 것이었다.
“좋다는 것도 결국 사람마다 달라요. 우리가 겪어보지 못했을 뿐이죠. 눈앞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깊을 수 있어요. 아니면 아예 생각하지도 못한 것일 수도 있고요. 저 사람들이 실제로 놀러 가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테이프야 방문이나 창문에 쓰지 말란 법도 없고요.”
여자는 자신이 바라던 대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안도심을 가져다 주지는 못하였다. 그렇다고 불안한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던 것도 아니었다. 여자의 눈에 노부부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노부부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란 줄 알았다. 하지만 여자는 또 다른 작용을 찾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낡아버린 신발을 내려보다가 말하였다.
"그럼 저한테 한 말은 뭔데요."
"무슨 말이요?"
"힘든 만큼 보상받는다고 착각하면서 산다고 말했잖아요. 저한테 한 말 아니에요?"
"당신한테 한 말이죠."
"살아가는 방법이니 뭐니 설교해댔으면서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기보다는 당신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하세요?"
K는 여자에게 말을 건 목적을 에둘러 말하였다. K는 여자가 고통받고 있으며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생각하였다. 여자는 K에게 있어 자신을 표상할 적당한 대상이었기 때문에 K가 말을 건 것이었다.
"몇 번 봤다고 아는 척하고 있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개의 전자레인지가 도시락을 덥혔다는 소리가 차례로 들렸다.
“대학생이세요?”
K는 여자의 도시락까지 모두 꺼내어 놓고 물었다.
“아니요. 대학 안 갔는데?”
“왜 안 가셨어요?”
여자는 자신의 신상을 캐묻는 것이 거슬려 K의 생활을 대강 예상하여 대답하였다.
“돈 벌려고요. 맨날 방바닥에 누워 있을 순 없잖아요?”
K는 자신이 떠올랐지만 침착하게 이야기하였다.
“어느 정도의 돈을 벌려고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름 만족하면서 지내려면 대학을 가는 게 나아요. 지금이라도요.”
K는 여자의 나이가 궁금했다. 생각해보면 몇 살인지도 모르는데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에 조금은 부끄러웠다.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K가 질문하였다. 여자는 K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시간도 때울 겸 조금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였다.
“95년생이요.”
“저하고 동갑이네요.”
“말 놓을 생각은 없어요.”
“친구 하자고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력서에 한두 줄 더 채워 넣으면 노래방 도우미보다 더 나은 일거리를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력서라는 단어는 여자의 삶에서 필요하지 않았던 어떤 것이었지만 K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였다. K는 팔을 앞으로 뻗으며 시계가 보이도록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서요?”
여자가 피식 웃었다.
“더 나은 방법이잖아요. 그런 가능성을 알지 못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당장 받을 수 있는 돈 때문에 모두 잊어버리는 날이 반복되는 건 누구나 싫어해요. 당신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당신이 집에 오고 가는 건 저도 자주 봐왔고 딱히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러면서까지 힘들게 일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대학교를 가는 것은 여러 방법 중 하나고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얘기한 거예요.”
K는 은연중에 멍 자국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말에 여자는 조금 화가 났지만 K가 하는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K가 말한 겪지 않아도 될 고통 같은 것은 여자에게 없었다. 여자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모두 필요한 고통이었다. 여자가 물었다.
“그걸 왜 저한테 얘기하는 거예요? 당신이 보기에 내가 안타까워 보여요?”
K는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여자가 K로 인해 지옥 같은 삶에서 구제되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K는 잃어버린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여자를 붙잡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누구한테 맞은 거예요?”
K는 여자를 자극하고 싶었다.
“자기도 방구석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계속 이래라 저래라야. 씨발, 내가 너 같은 사람 한둘 본 줄 알아? 너는 대학 나와서 그따구로 사냐?”
화가 난 여자는 K를 노려보며 말하였다. 여자는 왼쪽 광대에 내려앉은 멍 때문에 말하면서도 고통을 느꼈다.
“2차 가자고 하는 늙은 새끼가 때렸다. 네가 대신 때려주게? 그럴 깡도 없으면 조용히 하고 있어.”
K가 은근히 바라는 반응이었다. 여자가 화를 내기를 바랐다. K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말투에 드디어 한번 이겼다는 듯이 되려 침착하게 이야기하였다.
“알고 있어요. 일하다가 누군가 때렸겠죠. 하지만 이름 없는 중소기업보다 돈을 더 받을 수는 있어도 그것이 능사는 아니잖아요. 조금이라도 편하고 행복하게 살자고 다들 돈 버는 것이 아니겠어요?”
여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K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K에게 듣는 것은 어딘가 시원치 않았다. 여자가 물었다.
“그렇게 잘난 당신은 뭐 어쩌고 있는데요? 말해봐요.”
K는 이 자리와 대화를 지키려면 무엇이라도 이야기해야 했다. 적당한 두세 가지의 말 중 적당한 대답을 선택하였다.
“저는 이미 세 군데 회사에 지원한 상태입니다. 전부 금융계열인데 두 군데는 거의 확실해서 고민 중이에요.”
K는 ‘금융계열’이라는 단어가 멋지다고 생각해 일부러 말하였다. 또한 K는 어느 회사에도 지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답은 거짓말인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았다. 대답을 일단 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여자는 K의 시계를 잠깐 쳐다보고는 비웃으며 말하였다.
“거짓말이죠? 당신, 내 옆집에 살면서 집은 일주일에 한 번 나갈까 말까 하는 것을 대충 아는데?”
여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K는 창문 넘어 벽에 스프레이로 거칠게 적힌 욕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집에서도 다 할 수 있어요. 당신이 그렇게 해본 적이 없을 뿐이지.”
K가 대답한 후 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공부부터 지원서 제출까지 정말 집에서 나가지 않고 할 수 있는지 아무도 몰랐고, 할 수 있다고 해도 둘 다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가로운 오후의 회색 구름은 어색하게 떠 있었고, K와 여자는 반 정도 남아있는 도시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여자가 먼저 약속하지 않은 침묵을 깼다.
“거짓말해도 상관없어요. 당신이 뭘 하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당신이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몰라도 당신이 동정할 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부모님한테 돈 받고 살고 있죠? 그걸로 지금까지 뭘 했어요?”
K는 여자가 자신이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아 적당히 둘러댔다.
“책 사고 공부했죠.”
여자가 취조하듯 물었다.
“무슨 책이요? 얼마나 했는데요?”
K는 답하지 않았다. K가 실제로 산 책이 있긴 했다. [컴퓨터활용능력 필기-1급]이다. 하지만 책 제목을 언급할 수 없었다. 제대로 본 적도 없고 지금 그 책이 K의 방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K는 부끄러움을 느끼자 되려 화를 냈다.
“당신은 말해봤자 몰라요.”
K는 여자가 떠올릴 어려운 전문 서적에 관해 개인적인 어려움이 있다는 듯이 말하였지만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지랄하네. 있어봤자 첫 장만 너덜너덜하겠지. 꼭 지금 당신처럼.”
K는 그만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K가 원하던 것은 대화가 아니라 교육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K가 원하는 고분고분한 학생이 아니었고, K에게 교육할 자격도 없음을 학생이 대신 말해준 꼴이었다.
“그렇게 살아요, 그럼. 꿈꾸는 미래가 있기는 하죠?”
K는 일어나며 비웃듯 이야기하였다.
“꿈만 꾸는 미래 같은 건 없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자가 답하였다. 서로에게 질문을 하였지만 서로 답을 알지 못하였다. K가 문밖으로 나가자 여자는 K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자는 K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창문에 희미하게 비친 여자의 얼굴에는 멍 자국이 선명하였고, K는 그 속을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걷고 있었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같았다.

K는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며 오늘의 대화와 여자를 다시 생각하였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화부터 내는 여자의 인생은 나아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K는 여자가 싫지 않았다. K에게 여자는 일종의 기회가 되었다. 그 보상이 있든 말든 여자와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다. K는 마음을 가다듬고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였다. 일단 집에서 때를 밀기로 하였다. 때를 모두 밀어버린 후 오래전에 사 놓은 [컴퓨터활용능력 필기-1급]을 다시 보기로 하였다. K는 자신이 과거 [컴퓨터활용능력 필기-1급]을 하루에 몇 시간 동안 보았는지 생각하였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10시 10분 35초. K는 잠깐 넋이 나갔다. 고장이 났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시계는 화려한 화장을 한 시체처럼 너무 차가웠다. 은빛 초침에 노동을 강요하듯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하루의 시작부터 계획이 틀어진 K는 팔다리를 나풀대며 대문을 열자 자신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이불에 되감기 하듯 누웠다. K는 계획과는 달리 곰팡이 핀 천장에 매달려 있는 큼직한 파리에 시선을 빼앗겨 무엇도 할 수 없었다.

K는 그 후로 여자를 본 적이 없다. 옆집의 대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한 달이 넘었다. 밖에서 누가 걷는 소리만 들려도 문 앞으로 가 귀를 바짝 붙여 여자인지 확인할 정도가 되었다. 겨드랑이가 가려운 와중에도 여자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K는 여자가 쏘아붙이듯 말하는 것에 모두 대답하고 싶었고, 똑같이 여자에게 말하고 싶었다. 매끄럽고 깨끗할뿐더러 K의 속을 툭툭 건드리는 여자의 눈빛과 말투가 그리웠다. K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잠드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그런 생각이 K를 편안하게 잠들게 할 때도 있었지만 반대로 잠을 방해할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새벽, K는 몸속의 스위치가 켜지듯 일어나 의자에 앉고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의 빛은 순식간에 K의 방에 덮인 어둠을 교차하였다. 급하게 성인 인터넷 방송 사이트에 들어가 인터넷 방송인들의 목록을 보았다. 매끄럽고 깨끗한 여자들이 경쟁하듯 수십 개의 목록이 나타났다. 푸른 멍 자국 같은 것은 그녀들의 진한 화장 속에 묻혀 있을 것이다. 그래서 K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하였다. K는 방송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었다는 어느 여성의 방을 보았다. 마우스의 딸깍 소리에 그녀는 흔쾌히 문을 열어주었다. 곧이어 K의 두 눈에 여리고 하얀 한 여자의 몸짓이 투영되었다. 그녀의 휘어지는 허리와 다리가 화면에 나풀대는 가운데 K는 가장 먼저 얼굴을 보았다. K는 저 짙은 화장 속에 분명 때가 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 달을 못 넘기고 방송을 그만둘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K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예전에 종종 마주칠 때처럼 진한 화장이었지만 무언가 다른 화장 속에서도 K는 옆집 여자임을 확신하였다. K는 가장 먼저 여자의 멍을 확인하였다.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K는 알고 있었다.

K는 어둠 속에서 모니터를 마주 보고 말을 걸었다. 상스러운 욕과 함께 소리를 질렀다. K는 여자를 한참 들여보다가 백만 원을 후원하였다. K의 어머니가 깨끗한 옷 몇 벌과 취업 준비를 위해 며칠 전에 준 돈이었지만 이제 여자가 다른 깨끗한 옷을 살 수 있게 되었다. K는 후원과 함께 몇 마디를 적었다.
“인터넷 방송하긴 아까운 외모네요. 적은 돈이지만 잠시만 즐기다 갈게요.”
여자의 인터넷 방송 채팅창은 K가 무슨 일을 하는지, 연봉은 얼마인지 등 온갖 추측을 쏟았다. K는 그런 일회성 질문에 관심이 없었다. 여자는 추던 춤을 멈추고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K의 닉네임에 ‘오빠’라는 호칭을 붙여 말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K는 다시 모니터에 욕을 하였다.
“실실 웃는 거 봐, 멍청한 년.”
여자는 K의 닉네임인 ShiningWatch를 화면에 크게 적어 놓고 사랑한다고 연신 말을 하였다.
“샤이닝워치 오빠, 백만 원 고마워. 오빠, 사랑해.”
들어본 적 없는 괴상한 콧소리였지만 K는 나쁘지 않았다. 여자는 포스트잇 한 장에 “ShiningWatch 오빠꺼”라는 글 옆에 하트를 그리고는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붙여 화면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똑같은 콧소리로 말하였다.
“오빠, 자주 놀러 와.”
여자는 K를 위해 음악을 바꾸고 열심히 춤을 추었다. 설레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여자는 매끄러운 몸짓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어느 순간 K는 말이 없었다. 욕도 하지 않았다. 동공은 여자의 하얀 피부색으로 가득 채워졌고 심장은 너무 강하게 뛰는 나머지 온몸에 진동이 느껴졌다. 흔들리는 여자의 가슴과 함께 K의 닉네임도 같이 흔들렸다. 어느새 여자는 K를 뒤에서 안아 얕은 숨소리로 K의 달아오른 귀를 괴롭혔다. 온몸이 터질 것 같았다. 여자는 K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부드러운 손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서서히 강해지는 새벽바람은 작은 창문에 거칠게 부딪혔고 K의 욕정은 짧게 불타오르다가 이내 식어버렸다. K는 자신이 ‘멍청한 년’이라고 칭한 대상이 필요하였다. 그건 옆집 여자의 존재 자체가 아니었다. K는 쓰러지듯 누워 반쯤 풀린 멍한 눈빛으로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답을 찾고 있었다. 아직 꺼지지 않은 모니터 속 여자의 괴상한 목소리와 시끄러운 음악 그리고 산만한 손짓은 계속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K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항상 갈구하던 것이었지만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 널브러진 여러 단어 중 정답을 고르다가 잠이 들었다.

K는 그 후로도 밤마다 여자의 인터넷 방송에 접속했다. 여자를 보려는 사람들의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고 닉네임 몇 개는 항상 보였다. 그들을 보며 가끔은 어떤 사람인지 상상했지만 이내 흥미를 잃었다. 거금을 후원한 이력 때문인지 여자는 ShiningWatch라는 단어만 보이면 과하게 반겨주었고 말도 걸었다. 하지만 K는 첫날 이후로 후원도 하지 않았고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자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른 만큼 멍은 확실히 사라졌을 것이지만 K는 항상 여자의 왼쪽 광대를 뚫어져라 쳐다보곤 하였다. 그래도 여자는 K를 항상 반겨주었다. K는 그런 여자의 반응이 역겨웠다. 역겨운 기분이 올라올 때마다 어떻게든 여자의 왼쪽 광대 밑에 숨어있을 푸른 멍을 찾으려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날 밤, 여자가 K에게 말하였다.
"샤이닝워치 오빠,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해? 이 정도면 시청료 내야 하는 거 아니야?"
여자는 가볍게 웃으며 말하였다.
"후원하면 원하는 거 말해. 오빠는 특별히 개인적으로 들어줄게."
K는 다시 여자의 멍 자국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여자의 짙은 화장 밑에 있어야 할 푸른 멍이 머릿속에 그려지지도 않았다. 어둠을 뚫고 직진하는 모니터의 빛 때문에 충혈된 K의 동공에 통증이 느껴질 때쯤, 여자는 자신의 카메라를 약간 밑으로 내렸다.
"이런 것도?"
여자는 간을 보듯 허리를 천천히 흔들며 청바지와 속옷을 함께 내렸다. 골반의 부드러운 곡선은 강물처럼 뻗어나갔고 은밀히 감춰져 있던 살결이 청바지를 서서히 밀어내었다. 은은한 살구색 조명은 본능에 호소하는 화염처럼 허리 아래로 움푹 파인 어두운 틈새를 파고들었다. 복숭아 같은 분홍빛 둔부가 낯설게 제 모습을 드러낼 즈음에 여자는 히득대며 다시 바지를 올려 입었다. 여자의 아슬아슬한 손짓에 채팅창은 순식간에 들끓었다. 하지만 카메라를 내린 탓에 K는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K의 두 눈은 실핏줄이 터지기 시작하였고 동공은 바늘구멍처럼 작아졌다. K에게 있어서 여자는 자신의 남은 껍데기를 씌운 대상이었지만 인터넷 방송에서 바지를 벗으며 살고 있었다. 더 이상 여자의 저런 행태를 볼 수 없어 대화를 입력하였다.
"청테이프 산 노인 기억하시죠? 당신 덕분에 잘 놀러 갔을 거예요."
"응? 청테이프? 무슨 말이야?"
여자는 몇 번 눈을 굴리다가 표정이 굳어버렸다. 여자는 ShiningWatch가 K임을 직감하였다. 하지만 여자는 굳은 표정을 능숙하게 바꾸고는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몇 개 읽으며 모르는 척 넘겨버렸다. 그리고 다시 K에게 말하였다.
"오빠, 말 좀 하라니까 엉뚱한 말을 하고 있어? 시청료는 어디 갔고."
여자는 K를 퇴장시키지 않았다. 끝까지 K를 모르는 척하는 와중에 대담하게 농담도 섞어가며 말하였다. 어둠은 K의 귓속으로 들어가 뇌를 가득 채웠다. K는 여자에게 보이는 자신의 껍데기에서 좌절과 비참을 보았다. 손에 땀이 나고 몸은 덜덜 떨렸다. 어금니를 꽉 깨물며 여자의 미소를 보았다. 여자의 매끄럽고 깨끗한 피부는 K의 정신을 군데군데 쑤셔 놓았다. K는 여자에게 보낼 욕을 거칠게 쓰다가 지워버리고 방송을 나갔다. 컴퓨터에는 더 이상 여자의 성가신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K의 머릿속에서 반복되어 울려퍼졌다. 좌절은 분노로 바뀌었고 급기야 모니터를 옆으로 밀쳐 던져버렸다. 모두가 잠든 밤에 K의 방에 둔탁한 소음이 잠깐 지나가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어둠은 모든 것을 잠재웠다.

K는 의자에 걸쳐진 빨래처럼 앉아 멍하니 천장의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불을 켰다. 형광등이 K를 내리쬐자 부서진 모니터보다 먼저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무엇에 긁혔는지 왼팔에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거울 속의 깊은 상처를 눈으로 확인하니 약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피는 모니터를 천천히 물들였고 왼손에 따뜻함을 느꼈다. 반쯤 감긴 새빨간 눈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화장실로 갔다. K는 씻고 싶었다. 흘러내리는 피까지 모두 씻고 싶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틀어 놓은 뒤 거울을 보고 노인의 아내가 짓던 미소를 지어 보았다. 어딘가 이상한 미소였다. 입술에 약한 경련이 일었지만 나름대로 만족하였다. 어색한 미소를 유지하는 동안 빨갛게 물든 왼팔에서 과거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것을 남김없이 모두 빼내고 싶었다. K는 재빨리 아직 뜯지 않은 새 면도날을 꺼내고 화장실의 불을 껐다. 물이 가득 찬 욕조의 수도꼭지를 잠그고 작은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긴 달빛을 찾았다. K는 은색으로 빛나는 해방의 계단 위에 왼쪽 손목을 올려놓은 뒤 면도날로 깊게 그었다. 은빛 계단을 타고 올라가려는 자신의 셀 수 없는 과거를 보고는 오른쪽 손목도 깊게 그었다. 면도날은 메스꺼운 느낌이었지만 K는 드디어 안도하였다. 자신의 피가 이렇게 많았다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눈을 감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욕조는 좁고 깊었다. K는 정신이 흐려지는 가운데 눈을 약하게 떴다. 어둠 사이를 내리꽂는 달빛 말고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달빛을 따라 창가로 시야를 옮기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K는 예전부터 갈구하던 어떤 것을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기억한 적이 없었고 욕조에 차오르는 것은 허상이었다. K는 썩어버린 자신의 과거에 파묻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