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코로나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에 작성하였던 에세이로 현재에는 와 닿지 않거나 공감되지 않는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
3. 패션 왕


첫째 육아휴직 후 복직을 할 때 나는 경기도 여주에 살고 있었다. 회사는 서울에 소재해 집의 문을 열고나서 사무실문을 열고 자리에 앉기까지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아내와 나는 지방출신이지만 서울에서 만났고 결혼 후에도 한동안 서울생활을 이어오던 가운데 서울의 삶이 복잡하고 번잡하게 느껴져 서울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담이지만 우리는 （복세편살에서 굳이 ‘편’을 ‘긋’으로 바꿀 정도로） 느긋함과 여유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되면 어느 정도의 ‘불편’도 감수하는 편이다.（그런 불편에서부터 오히려 느긋함과 안정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텀블러를 가지고 카페를 가거나, 배달을 시키기 보다는 용기를 챙겨 식당이나 시장을 직접 찾으며, 물티슈 등 1회용품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친환경용품을 사용하려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성향이 우리를 보다 한적하지만 서울과 완전히 동떨어지지는 않은, 하지만 어떠한 연고도 없던 ‘경기도 여주’라는 도시로 이끌었고, 2시간 남짓한 출퇴근 시간도 감수하게 만든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의 선택이었지만 사실 이 낯선 도시에서의 삶은 꽤나 혹독했다. 특히 출근시간이 그랬다. 여주에서도 서울까지 지하철을 이용하여 왕래가 가능하지만 배차간격이 긴 편이며 여러 번의 환승도 필요하다. 9시까지 출근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늦어도 7시5분 지하철을 타야한다. 때문에 집에서 출발하는 시간은 적어도 6시30분이어야 했다. 지하철역까지의 이동은 자가용을 자주 이용했는데 날씨가 좋을 때는 더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이용하기도 했다. 간혹 걸어가야 하는 사정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자가용으로는 8~10분정도 소요되는 거리가 걸어서는 1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믿길지 모르겠지만） 나름 출근을 즐기는 마음이 컸다. 여주가 종점인 경강선을 타면 반대쪽 종점인 판교까지 가야했는데, 2016년 신설된 열차는 쾌적했고, 창 밖 경치를 구경하다보면 마치 여행하는 기분까지도 들었다. 게다가 글쓰기 같은 취미를 즐길 시간적인 여유도 있었다. （결국 부족한 잠을 채우는 경우가 가장 많기는 했지만...） 그래도 완벽한 부지런함을 갖추지는 못했던 탓에 머리를 감지 못하고 출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이 망할 바이러스가 도움이 되었던 것이 바로 모자착용이었다.
우리 회사가 원래 복장규정이 까다롭지는 않다. 그렇다고 매일같이 모자를 쓰고 출근하는 것을 좋게 볼 회사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마스크가 필수품이 된 후 마스크 걸이가 부착된 모자도 출시되고, 비말 등 바이러스 감염 가능성으로부터 최대한 몸을 지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모자착용에도 어느 정도의 당위성이 부여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주구장창 매일같이 모자를 쓰고 다닌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또 ‘원래 저런 애’로 보셨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무슨 얘기냐면 나는 옷을 잘 입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래서 서울에 살며 출퇴근을 여유롭게 할 당시 코디나 헤어스타일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는데, 남성사원들 대부분이 점잖은 차림으로 출근하는 회사에 나는 꽤 신선한 자극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느 날 회사에서는 망년회를 앞두고 직원들의 투표로 ‘친절 왕’, ‘꿀 성대’ 등을 선발하는 프로모션을 진행한 바 있는데, 여기에 ‘패션 왕’이라는 종목이 신설되었다. 다른 동료 분들에게도 내가 많이 튀어보였는지 결국 내가 1등이 되었고 이후 회사에서 나의 별명은 패션 왕이 되었다.（맞다. 부끄럽다.） 회사에서 나의 존재감이 이렇다보니 내가 모자를 쓰고 출근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낯설지 않아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러고 보니 회사에 참 고마운 점도 많고, 추억도 많다. 함께했던 동료들과 편의를 봐주신 상사님들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