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5일, 수요일 신문의 활자들에 적힌 믿을 수 없는 글을 바라보면서, 남자는 그가 그녀에게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를 떠올린다. 2월 14일. 머릿속에서 날짜가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다. 누군가의 ‘팬‘ 이 된다는 것은 뭘까, 이 충격적인 사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남자는 손톱을 깨물며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사랑함에도 마음은 아프지 않은, 오히려 그쪽이 나를 모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기형적인 사랑,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운명적으로 인연이 생기기를 고대하는, 누군가의 팬이라는 것. 남자는 이제 스물다섯이었고, 여자는 스물일곱의 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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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그녀가 오늘 죽었다. 작은 해안 도시에서 자라 골프를 배웠다가, 우연히 간 대학의 축제에서 엄청난 반응을 얻어 단숨에 일약 스타덤에 올라, 수많은 히트곡을 발매하고 수많은 팬의 사랑과 응원을 받던 그녀가 어제 죽어버렸다. 원인은 허무하다. 교통사고였다. 심장마비나 당뇨, 암이 아니고서야 사람들은 전부 교통사고로 죽는 것만 같다. 남자는 사진에서 눈을 떼고 흘러내릴 것만 같은 눈물을 억지로 참으면서 글을 읽어 내려간다. 빙판길에 과속을 하던 차가 눈이 얼어 제동이 되지 않는 상태로 일곱 번이나 가드레일에 부딪히며 내리막길을 내려갔고, 때마침 끼인 안개에 내려가던 다섯 대의 차가 내리 부딪혔는데, 그녀는 마지막 차에 타고 있었다. 4시 20분. 머릿속에서 시각이 둥둥 떠나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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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검고 빛나는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왜 첫 차는 빙판길에서 과속을 했을까, 아니, 왜 그 지역에 그렇게 유독 안개가 많이 끼었을까. 일이라고는 하지 않는 남자가 가장 좋아했던 여자는 그녀 밖에는 없었다. 남자의 일상이라고는 그저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임대료를 받아내면서, 어느 마음씨 좋고 아리따운 여성이 자신을 찾아와주기를 고대하며, 그녀의 노래를 듣고 가사를 상상하면서, 졸음이 올 때면 자고, 배가 고프면 먹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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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그날은 남자의 인생이 바뀐 날이었다. 그녀의 노래를 듣자마자 남자는 바다로 갔다. 숲으로 갔고, 담배를 피웠고, 도시의 비둘기들과 빌딩을 스케치하고, 기차에서 불꽃놀이를 보았다. 그때마다 무대 위에서 희망찬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든 가사와 자신의 풍경을 하나씩 바라보는 것은 유일한 취미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상상을 하다 보면, 꼭 그녀가 옆에 있는 것만 같았다. 밖이라고는 통 나가는 법이 없던 남자에게 그녀는 삶을 살게 한 은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그를 살게 한 날에 죽었다. 그날은 남자가 그녀를 처음 본 날이자, 그녀의 생일이자, 그녀의 기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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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죽어야 할 사람들은 죽지 않는 걸까? 왜 살아야 할 사람들이 죽는 걸까? 남자는 이대로 자신의 사랑을 떠나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남자는 울기로 한다. 울기로 생각한 순간 눈물이 난다. 침대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남자는 얼굴을 파묻고, 약간의 숨구멍을 낸 뒤 기나긴 잠에 빠진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목숨을 잃기 전, 아니, 그가 그녀를 알기 전, 마치 14일 아침처럼 남자는 긴 자책과 무료의 구렁텅이 속으로 꿈처럼 빠져들어 간다. 꿈처럼 빠져든 잠은 꿈처럼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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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이불을 치우고 일어난다. 새벽을 지나 아침에 가까스로 도달한 시각은 일곱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다. 남자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미친 듯이 침대에서 내려 간 뒤 휴대폰의 캘린더를 헤집는다. 그녀의 사진이, 그녀의 생일이 표시된 달력은 2월 14일을 표시했다. 14일은 어제였다. 남자는 달력을 보았다가, 이내 집어던지고는 기막힌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꿈이라기에는 그녀의 죽음과 그 이유, 그의 반응까지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 남자는 믿을 수 없었다. 예지몽이라던가, 예언이라던가, 30년 뒤 한 국가의 수상이 죽는다던가의 예언은 비웃으며 넘겨왔던 남자였다. 하지만 분명히도 오늘은 그녀가 죽기 하루 전이다. 남자는 홀로 진실을 아는 용자가 된 기분이 됨을 느낀다. 한 여자의 생명이 그의 손에 달려 있다. 그녀를 떠나보낼 수는 없다. 남자는 그녀가 유일한 삶의 이유라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불안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잡은 채 남자는 차고를 향해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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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탄 남자의 손이 병자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시동을 걸고 남자는 사고가 난 도시의 도로로 핸들을 돌렸다. 계기판의 시속이 아무리 높아져도 그녀를 위해서라면,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상관하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빨리, 그녀보다 먼저 도착해 그녀가 난 차를 막거나, 경고등을 흔들며 속도를 줄여야 했다. 남자는 무서운 속도로 고속도로와 국도를 오가면서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 도로가 있는 도시에 도착했다. 차로 시간이 좀 걸리는 거리였기에 시계는 3시에서 점점 아래를 향해가고 있었다. 살려야 했다. 살려야 한다. 시계가 4시를 가리키는 순간부터 점점 안개가 차를 조여오기 시작했다. 산등성이의 차가 달리는 도로의 고도가 높아질수록 안개는 사방에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고, 미처 녹지 않은 채로 반쯤 갉아먹힌 얼음은 검은 형체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차들에 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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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십 분 뒤면 이곳에서 연쇄 추돌이 일어난다. 그런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곳에서 죽는 사람은 뉴스에서 무시하던 해외 테러의 피해자들도 아닌, 노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자신이 제일로 사랑하는 가수였던 것이다. 두 눈을 부릅뜨고 운전하던 남자는 문득 도로의 앞 차가 아무도 없음을 깨닫는다. 하얗게 덮인 설산의 모습은 처량스러운 모습으로 뚫린 일자선의 검은색 도로와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공허하게 비쳤다. 그리고 그 을씨년스럽게 안개가 낀 도로에서는, 그의 차 앞으로 달리는 차는 물론 앞으로 도로를 달릴 차마저 없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침묵과도 같은 느낌이 났다. 남자는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조용한 설산의 고속도로에서는 어떤 사고도 날 수가 없다. 안개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사고가 날 정도는 아니었고, 얼음도 차를 전복시키거나 밀고 당길 정도로 얼어 있지는 않았다. 멀어져 가는 과속 주의 표지판을 지나쳐가면서 남자는 혹시 그녀를 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을 살린 가수를 자기 손으로 살리다니, 어디선가 들었던 나비 효과처럼, 그가 운전하는 차가 고속도로의 얼음을 미리 없애버렸고, 그녀는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따위의 생면부지인 가수의 사고를 꿈에서 알고 미리 구했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알릴 수 있을지 생각하던 남자는 커브길에서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여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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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를 세게 밟았지만, 계기판의 눈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빠르고, 주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차를 세게 흔들어 댔다. 핸들을 꺾은 손은 무의식적으로 도로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차는 더욱 세차게 흔들렸고, 몇 미터를 더 내려가서는 안개 때문에 도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유리창에 보이는 것은 오직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한 나무 가지와 회색 가드레일, 그리고 검은색 도로만이 차례를 바꿔가면서, 위태롭게 방향이 흔들릴 때마다 나왔다, 사라졌다, 부딪혔다가 안개에 가렸다를 반복해 갔다. 얼음으로 차는 더 위험하게 내리막을 미끄러져 갔고, 유리창에는 안개만이 서리다가 기어코 차가 점점 부서지기 시작했다. 굉음을 내는 차와 도로의 마찰음이 엄청난 먼지와 함께 일어나고, 전조등이 깨지고, 유리창에 금이 가다가 큰 충돌이 일어나 에어백이 터져 얼굴을 감쌌다. 남자는 기절한 듯이 흰색 천들에 얼굴이 파묻히면서도, 몇 번의 충격을 더 느낄 수 있었다. 남자가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4시 20분을 가리키는 형광색 시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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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의사가 그에게 전해준 말을 듣자마자 그는 또다시 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얼음이 남아 있던 도로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해 일곱 번 가드레일을 받고 정신을 잃어 있었고,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던 차를 보고 급하게 핸들을 꺾던 승용차와 경차 석 대가 차례로 추돌했고, 마지막으로 추돌한 차 안에는 여가수 한 명과 동료 남자 가수 한 명이 타고 있더라, 하는 말이었다. 의사는 빙판길에서는 제대로 감속을 할 수 없어 고의적이지 않은 사고가 일어난다며, 사람이 죽었다니 유감이라며 자리를 떠났다. 남자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그 안갯속에서 죽은 여자가 그녀인지, 혹은 다른 누구인지를 남자는 평생 궁금해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병상에서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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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5일이 되어서야, 또 다른 여자의 집으로 신문이 왔다. 수요일 신문의 활자들에 적힌 믿을 수 없는 글을 바라보면서, 여자는 그녀가 그에게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