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참 반찬투정이 심했었어. 그래서 엄마가 챙겨준 밥상 앞에서 자주 칭얼거렸던 것 같아. 교복을 입으면서 요리를 하나 둘 해보았다. 하루는 정성껏 반찬을 만들었는데, 동생 놈이 한 입 집어 먹어보드만 맛없다고 하는데 화가 무지 나더라구. 그런데 갑자기 문득 엄마 생각이 나드라. 언제나 당연스레 밥은 엄마가 해주는 거였고, 자주 투정을 부렸었는데도 항상 웃던 엄마.. 동생에게 화를 내면서 벌개졌던 얼굴이 그 생각에 더 빨개지드라. 엄마한테 미안해서.
자기와 연애를 시작할 때, 처음에 그냥 또 하나의 연애가 시작되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여느 연애와 다름없이 시간이 흐르면서 그냥 일상같은 일이었어. 언덕 위에 있는 우리 집을 항상 데려다주던 자기, 그것도 일상같은 연애의 한 부분이었지. 재밌게 데이트를 한 날이나 평범한 날이나 가끔은 싸워서 화도 날 법한데 말없이 뒤를 꾿꾿이 따라오며 데려다주던 날이나 항상 자기는 한결같았어. 그리고 나도 한결같이 별 생각이 없었지.
그날은 바람이 세차던 추운 겨울날이었어. 그 날도 평소와 같이 1124번 버스에서 내려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 우리 집에 도착한 뒤 돌아가는 자기를 처음으로 계속 지켜보았어. 우연히 뒤를 돌아 자기를 본 거였는데 많이 추운지 손을 비벼 귀에 손을 데기도 하고, 조금 더 멀어졌을 때는 어깨를 움츠리고 혹시 얼었을 수도 있는 계단을 조심히 내려가며 작아지는 자기를 봤을 때 눈물이 핑 돌드라. 하루 하루 자기 감정도 달랐을거고, 피곤하거나 그 날처럼 날씨가 궂은 날도 있었지만 항상 자기는 한결같이 그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곁에 있어주었지. 그리고 나는 이기적기게도 당연히 그걸 받아들였고. 마치 우리 엄마한테 한 것처럼.
자기야. 이제 그만 집에 데려다주어도 되.
같이 살게. 내 청혼을 받아주겠니?
"제 첫 작품이었죠."
"지금의 발록구니가 있게한 시작을 알리는 편지기도 했고요."
"고마워요 선미씨. 지금 봐도 기가 막혀요, 이 편지는."
의뢰자의 사연을 듣고 며칠을 고민해서 썼던 편지였다. 의뢰자는 어느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다며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마음이냐고 되물었다.
"그는 마치 우리 엄마같아요. 시간이 지나고보니 미안함이 들게 저에게 해주었더라고요. 미안하다는 말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의뢰자가 어머니에게 느끼는 마음, 그와의 있었던 일들 등 여러 번의 미팅을 한 뒤 편지의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편지를 초안을 써서 감에게 보여주었다.
"음.. 반찬투정을 하다가 엄마에게 미안함이 들게 된 계기가 되는 이야기를 넣었으면 좋겠어."
"음.. 어떤 이야기가 좋을까."
"의뢰자 동생있나 혹시?"
"응. 남동생."
의뢰자의 가족관계 및 가족과 있었던 일 조사는 인터뷰에서 기본이었다.
"좋아. 그럼 반찬을 만들었더니 남동생이 투정부려서 죽여버리고 싶었다고 쓰자."
"경험담이니?"
"니가 그렇잖아. 저번에 내가 만든 요리 맛없다며."
"맛없는걸 어쩌니."
"요리 기껏 만들어서 줬더니 맛없다고 하면 얼마나 화나는지 아니? 줘봐. 내가 고쳐줄게."
감은 고개를 몇 번 젓다가 글을 완성시켰다.
"마지막에 동생한테 화나서 얼굴이 붉어졌다가 엄마한테 미안해서 더 붉어졌단 표현을 넣는게 어때?"
"오 아이디어 좋다."
"오빠는 한 솜씨 하잖아."
"넌 위선적이야."
이제 의뢰인의 남자와 엄마를 연결시켜야 했다. 매일 같이 해주는 일, 의뢰인을 위한 일, 사랑이 담겼지만 의뢰인이 잘 알아채지 못한 일을 찾아야 했다. 의뢰인과 몇 번의 미팅동안 힌트를 잡지 못했다.
"뭐가 좋을까?"
"그러게. 마땅히 떠오르는게 없네. 넌 언제 나한테 사랑을 느끼냐?"
"섹스하고나서 꼭 안아줄 때."
"그렇지 그것도 일상적이지만 널 위한 배려지."
"아니다. 하긴 만족시켜주지 못할 때가 많으니까 미안해서라도 그래야지."
"죽을래?"
"휴우.."
"한숨쉬지마라."
나는 감의 머리를 주먹으로 살짝 콩 쳤다. 감은 고개를 치켜들고 째려보더니 슝하고 달려들어 안겼다.
"뭐냐."
"한 번 할까?"
변태처럼 실실 웃으며 말했다.
"변태같아. 꼭 얼굴이 홍씨같다."
"왜에~ 오늘은 만족좀 시켜보지."
우리에게 편지를 쓰는 작업은 의뢰인의 역사와 우리들의 경험의 융합이었다. 의뢰인에게 주던 편지 완성품은 우리들의 새로운 역사이기도 했다.
"후보는 발록작가 중에 희망자로 하죠."
의뢰자가 희망하는 편지와 데이터를 프로그램으로 돌려 편지의 뼈대가 만들어지면 편지를 완성시키는 작가 중에 호응도가 일정 기준을 넘는 사람들을 발록작가로 칭했다. 우리 회사의 천여명의 작가 중에 발록작가는 채 30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편지 생산의 절반은 발록작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주일이 흘렀다.
"몇 명이나 지원했죠?"
"꽤나 많은 발록작가가 지원을 했네요. 음.. 이것도 문제인데요."
"왜요?"
"우리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들이잖아요. 괜히 떨어져서 기분 나빠지면 좀 그렇잖아요."
"그건 그러슴더. 아예 면접을 다 보지 말고 몇 명만 보는게 어떴슴더?"
"민기씨는 어떤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음.. 이왕 저와 확연히 다른 스타일이었으면 좋겠슴다."
"그래요. 선미씨 후보자 명단 주세요."
후보 발록작가들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 눈에 확 띄는 작가가 있었다.
필명 딸기우유.
주로 연애편지를 담당하는 발록작가였다. 우리 회사에는 철칙이 있었는데 연락처이외에는 작가들의 신상을 하나도 갖지 않고 있었다. 작가의 나이, 성별등의 정보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작가들의 완성의 편지였고, 의뢰자에 관해서는 최대한 많은 정보가 있어야 좋은 편지가 나왔지만 작가들은 오히려 정보가 없어야 최대한 객관적으로 편지를 맡길 수 있었다.
한편 내가 딸기우유에게 관심을 갖은 이유가 있었다. 딸기우유는 10대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령을 가리지 않고 연애편지를 썼는데 언제나 훌륭한 편지를 써주었다. 보통 편지를 읽다보면 작가의 흔적들이 나오기 마련인데 딸기우유의 편지들은 철저히 흔적들을 감추고 있었다. 그래서 딸기우유의 정체가 궁금했었다.
"딸기우유 어때요?"
"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궁금하기도 하고요."
"역시 선미씨는 나랑 통하는데가 많아요."
"저도 노처녀가 되면 어쩌죠?"
"아.. 진짜 저 상처 받아요. 노총각 놀리면 벌 받습니다."
"헤헤.."
"일단 면접을 한 번 보죠."
며칠 뒤 딸기우유가 면접을 보러 회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다 놀라고 말았다. 어린 한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 본인이 딸기우유라고 했기 때문이다.
3
0
0
531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네티켓의 기본입니다.게시물에 상관없는 답글이나 추천유도성 답글을 달지 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