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린김에 마저 올립니다.
앞부분 너무 조금 올린거 같아
이번건 좀 길어졌어요.
그럼...

==========================================================================

환과 이도의 만남（하）

“그 놈들은 의식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게 아니야.”

귀를 후비는 그녀의 말에 환은 정신을 추스렸다. 그녀는 취기가 올라 경계심이 누그러졌는지 장난스러운 얼굴에 말이 조금 많아졌다.

“당신은 제대로 알아두는게 좋겠지. 그 놈들은 살기 위해서 피를 마시는거야.”

“뭐… 그럼 진짜 뱀파이어라는거야?”

“그렇지… 서양에서 말하는 뱀파이어와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말이야.”

“……”

“니가 그들을 쫓아다녀봤다니까 알겠지. 피해자의 몸엔 아무 상처도 없어. 이놈들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목을 물어서 피를 빠는게 아니라…”

그녀는 앞에 놓인 데킬라 잔을 원샷하곤 말을 이었다.

“…입으로 빨거든. 그래서 들여다보면 식도가 엉망이야. 게다가 한번 빨린다고 죽는게 아니라, 수십번 수백번 빨리다가 죽임 당하지. 점점 맛이 없어지거든.”

환은 왠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맛이 없다니, 피는 다 같은 피가 아닌가?”

그녀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흡혈족이라고 아무 피나 다 먹는게 아니야. 먹는 피가 따로 있지… 맛있는 피… 그건 그렇고… 이름이 뭐야?”

“환.”

“그래… 환… 근데 왜 그놈들을 쫓는건데?”

“……”

“가까운 사람이라도 당한 모양이지? 후후후…”

그녀는 갑자기 기분나쁘게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웃기다는 거냐. 환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그래… 동업자를 자칭하시는 양반아… 그놈들은 몇마리나 잡으셨는지?”

환은 그 때의 일을 떠올리곤 부르르 몸을 떨었다. 동생을 죽이고 달아나던 그놈들. 인간의 빠르기가 아니었다.

“거의 잡았는데… 도망쳐버렸어”

그녀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흡혈족이 그렇게 쉽게 죽어줄 것 같아? 흡혈족은 겉으로 보기엔 인간과 똑같아. 하지만 인간보다 빠르지. 개중 비상한 능력을 가진 놈들도 있지.”

“마늘, 햇빛, 십자가, 은탄환 그딴건 아무것도 소용이 없지. 단 한가지 방법은…”

그녀는 다시 잔을 비웠다.

“심장에서 피를 뽑아내는 거야. 단 한방울의 피라도 괜찮아. 심장에 있는 한방울의 피. 다른 피는 소용없어.”

“총으로 심장을 맞추면 되는거군.”

“뭐 그러면 되겠지. 사시미 칼로 쑤시던지. 자기 스타일 대로 하는거지.”

그녀는 다시한번 잔을 비웠다. 마시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군. 저 정도로 마시면서 쓰러지지 않는게 신기하다고 환은 생각했다. 반대로 그녀는 조금씩 깨어가는 듯 날카로운 눈매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놈들을 어떻게 감별해내지?”

그녀는 빙글 빙글 웃으며 환을 쳐다보았다.

“알고 싶어?”

끄덕이는 환을 빤히 쳐다보며 그녀는 라임 조각을 빨았다. 바라보고 있던 환의 입안에도 덩달아 라임의 신 맛이 퍼져 입안 한가득 침이 배어나왔다. 환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놈들이 평소에는… 잡기 힘들지. 표가 안나는 데다가… 알아채더라도 인간보다 빠르거든. 잘못하다간 당하기 십상이지. 그런데 한가지 약점이 있다면… 이놈들이 식탐이 심하다는 거지.”

그녀는 킬킬킬 웃으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에 감았다.

“내가 말했지? 맛있는 피가 따로 있다고… 이놈들은 그걸 ‘향기로운 피’라고 부르지. 그걸 보면… 미치지.”

환은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얼핏 보기에 카메라 릴리즈（주: 셔터를 누를 때 카메라가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장착하는 줄）같이 생긴 긴 금속줄을 양손에 감고 있었다. 금속줄의 끝에는 세개의 뾰족한 블레이드가 방사형으로 붙어 있었고 가운데 마치 스포이드와 같이 입구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작은 유리관이 보였다.

갑자기 그녀는 블레이드로 자신의 왼쪽 손등을 길게 그었다. 순식간에 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당황하는 환을 보며 그녀가 속삭였다.

“사냥 시간이야, 동업자 나리.”



순간 환은 술집 안이, 여전히 시끄러운 음악 소리로 꽉 차있음에도 불구하고 싸늘하게 얼어붙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손등을 긋는 그 순간, 투명한 고밀도의 공간이그녀를 중심으로 도우넛 형태로 퍼져나갔다. 공간은 터질듯한 긴장으로 가득차 있었다. 환은 술집안의 사람 절반 정도가 우두커니 서서 불안하게 눈을 빛내며 바에 앉아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째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무심하게 피가 흐르는 손등 위에 데킬라를 위해 준비되어 있던 소금을 털었다. 그리곤 의자를 휙 돌려 사람들을 향했다. 그리고는… 보란듯이 사람들을 향해 미소를 흘리며, 손등의 피와 소금을 아주 천천히 핥았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환의 머리속에 완전히 각인되어 버렸다. 그녀의 빨간 혓바닥. 터질것 같은 공기. 사람들의 형형한 눈빛.
부들부들 떨며 서있던 사람들 중 건장한 사내 넷이 동시에 공중으로 튀여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환을 밀어 넘어뜨리고는 자신의 양 옆에 있는 동그란 철제 의자의 윗부분을 강하게 내리쳤다. 바에서 떨어져나간 의자들은 각각 바닥을 튕겨 올라 달려드는 두 사내를 쳐서 넘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두 손을 뻗어 금속줄을 날렸고 환은 그 금속 블레이드가 뱀처럼 구불거리며 날아가 다른 두 사내의 심장에 박혔다가 빠져나오는 것을 보았다. 블레이드의 끝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모든 일은 불과 3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환의 눈엔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뭐해, 계속 누워서 쉴 참이야? 빨리기 싫으면 찌르라구.”

그녀의 앞으로 또 다른 놈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야유에 정신을 차린 환은 재빨리 일어나 의자를 맞고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내의 심장을 찌르려 달려들었다.

‘젠장… 뭘로 찌르란 말이야.’

다급한 김에 환은 테이블에 놓여있던 포크를 들어 사내의 심장을 겨냥했다. 하지만 괴물일지 보통 인간일지 모르는 것을 포크로 찔러 죽인다는 것이 너무 엽기적이라는 생각에 환은 주춤거리다가 그다지 깊지 않게 찔러넣고 말았다. 사내는 포크에 찔린 순간 눈을 번쩍 뜨고 환의 머리를 잡아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자신의 머리 쪽으로 당기기 시작했다.

“헉… 놔! 이 변태 새끼가!”

환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입이 환의 입에 닿을만치 가까워졌을 때 환은 오른쪽 귀에 가벼운 공기의 떨림을 느꼈다. 그녀가 던진 블레이드가 사내의 왼손에 박혀있었다. 사내가 발버둥을 치는 동안 환은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도움은 못되더라도 방해는 하지 말아야할 것 아냐. 동업자 선생. 고작 포크로 괴물을 잡으시려고?”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데다 면박까지 당한 환은 누구에게라고도 말할 수 없는 갑작스런 분노에 사로잡혀 바 뒷쪽으로 달려갔다. 저런 괴물같은 년… 동업자라고 나선 내가 미쳤지. 서랍을 마구 뒤지다 얼음 깨는 송곳을 발견한 환은 바를 뛰어넘어 다시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엔 제대로 찔렀다. 심장을 깊숙히 찔렀던 송곳을 빼는 순간 사내는 사뭇 놀랍다는 듯한 표정으로 환을 쳐다보다가, 이어 뭔가 부끄럽다는 표정이 되더니, 그대로 굳어져 부스러지듯 사라졌다.

‘뭐… 뭐야… 사라져버리다니…’

환은 그녀의 설명을 들은 후에도 반신반의하던 일을 직접 격게 되자 아연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 그녀의 면박을 또 받을까 두려워 환은 황급히 다음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쉴새 없이 달려드는 괴물들을 다루는 그녀의 솜씨는 가히 천재적이였다. 아니, 초인적이었다. 양 손의 블레이드를 이용해 동시에 두 놈씩 찌르고, 찔린 놈들을 줄에 되말아 덤벼드는 다른 놈들에게 던지는가 하면, 테이블에 놓인 맥주병들을 블레이드로 깨서 날리기도 했다. 흩날리는 유리 조각들 사이로 쉴새없이 휘몰아치는 그녀를 보며 환은 마치 그녀가 그녀의 생을 건 춤을 추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쿵… 쿵… 환에겐 자신의 심장 소리 이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그 비트에 맞춰 춤을 추는 그녀를 바라보며 환은 자신의 짧은 생애 중 최고의 긴장 상태에 빠져 있었다. 모든 일이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은 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냥 그녀의 몸짓 하나 하나를 머릿 속에 담고 있었다. 이어 자신에게 달려드는 괴물들의 가슴을 하나 하나 찌를 때마다 긴장감은 희열로 바뀌어 조금씩 조금씩 몸 속을 빠져나갔다. 마침내 몸속에 풍선처럼 부풀었던 긴장감이 모두 빠져나간 순간에 팔을 멈춘 환은 주변에 달려드는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 이런…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환은 마약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했다. 희열감은 마지막 여운을 남기고 몸에서 빠져나갔다. 갑자기 몰려오는 피로감에 망연자실해 자신의 손을 보고 있다가 문득 눈을 들어보니 그녀가 비죽이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머쓱해진 환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모른채 무작정 입을 열었다.

“너… 너... 이름이 뭐랬지? 너무 무모한거 아니야? 이렇게 놈들이 와글와글한데서 그런식으로 도발을 하다니.”

그녀는 싸우는 도중 풀려 허리까지 흘러내린 새까만 머리카락을 다시 둘둘 말아 올렸다. 그리곤 몸 이곳 저곳에 붙어있는 유리 조각들을 털어내며 말했다.

“훗… 내가 말했잖아. 이놈들이 식탐이 여간하지 않다니까… 맛있는 피를 보면 흥분해서 오히려 평소보다 움직임이 둔해져. 거기다가…”

“내 피는 사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최고 중에 최고니깐 말이지.”

그녀는 장난스레 덧붙였다. 환은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묘한 감정을 읽었으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리 조각에 긁힌 상처들을 지혈하기 시작했다.

“어이… 좀 도와줘. 괴물들을 한 다스쯤 더 보고 싶지 않다면.”

환은 냅킨에 물을 묻혀 그녀의 뒷 목에 난 상처에서 배어나온 피를 닦아냈다. 예쁜 목이었다. 이렇게 예쁜 목에 상처라니… 라고 환은 무심코 말할뻔 했다가 참았다. 또 무슨 면박을 당할려구.



그녀는 술집 안에 남아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저들은 아마 흡혈족의 꾀어온 먹이들이리라. 꼼짝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람들의 귀에 대고 그녀는 뭐라 중얼중얼 속삭였다. 놀랍게도 그들은 멍하게 풀어지거나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녀가 술집 안의 삼분의 이 가량을 돌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환은 문득 불안한 생각에 휩싸였다. 확실히 그녀는 오늘 예상 외로 환에게 친절했다. 어떻게 보면 초면에 너무 많은 정보를 술술 털어 놓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녀는 환을 믿고 있는걸까? 아니면 딴 생각이 있는게 아닐까? 환은 다급한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넌 이름이 뭐야?

그녀는 아무말도 없이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있었다.

“내 이름을 밝혔으면 네 이름도 밝혀야하는거 아니야? 그… 이… 이도가 네 이름이야?”

“거참 사람 귀찮게 하네… 이름 따위는 알아서 뭐하게?”

그녀는 일을 마치고 짜증어린 얼굴로 환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곤 천천히 환을 향해 다가왔다. 환은 초조했다. 조금전 상황을 본다면 환이 여기서 그녀를 때려눕히거나, 도망갈 수 있는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마지막 도박이다. 환은 겨우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다.

“이… 이도.”

“이도… 나… 나는 동업자야…”

그녀는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환은 온 몸이 얼어붙은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환은 고개를 숙인채 소리쳤다.

“나… 나는 이 일을 계속해야만 해…”

그러나 결국 그녀는 환의 앞에 다가섰다. 두 눈을 감은 환은 자신의 오른뺨에 살짝 스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그녀의 가벼운 숨결이 오른귀에 전해왔다. 그녀는 그 상태로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환에게 속삭였다.

“너의 영혼을 위해서 더이상 다가서지 않는게 좋아.”

환은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를 두려워하며 잠시 서있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환은 두 눈을 천천히 뜨고 바로 앞에 놓인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말의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직 희망은 있었다. 환은 더듬거렸다.

“나... 난… 이미 내 모든걸 걸었어… 이 일을 계속하는 것 말고는 이 세상에서 더이상 할일이 없어.”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마치 눈동자의 뒷면을 보기라도 할것처럼 환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한참 후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외면한채 짤막하게 명령하듯 얘기했다.

“먹히지 마. 죽지도 말고. 도와줄 사람을 찾아.”

그리곤 뒤돌아 술집을 빠져나갔다. 환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녀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자… 잠깐… 진짜로 동업을 하는건 어때? 우리… 괜찮은 콤비잖아?”

그녀는 계단을 오르다 뒤돌아 환을 보며 반은 한심하고 반은 황당하다는 듯한 웃음을 띄고 비꼬듯 말했다.

“동업자에 콤비까지? 아아… 무리겠어. 나는 인간을 위해서 이 일을 하는게 아니거든.”

그리곤 그녀는 사라졌다.

이것이 환과 이도의 첫만남이다.


==========================================================================

다음번엔
양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연과 이도의 첫 만남입니다...
코멘 남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