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보르스카의 시를 잇고
-류시화의 시를 이어서
떠나온 고향 바다를 두툼한 시집으로 펴낸 김 타래를 좋아한다
억새 천지 선홍빛 새치로 돋아난 각시취꽃의 거침없는 춤을 좋아한다
폐지 할머니 리어카 든든한 큰아들 같은 보조 바퀴를 좋아한다
속 알갱이는 몇 개일까 궁금한 이에게 넌지시 힌트를 주는 옥수수 수염을 좋아한다
새벽 마알간 둠벙 소금쟁이를 사알짝 놀래킨 이슬의 작은 파문을 좋아한다
실크로드 빛나던 옛 왕조의 흩어져 가는 성벽처럼 모래 위 반쪽 남은 하트를 좋아한다
에두르지 않고 휘청 거리지 않는 별똥별의 확신을 좋아한다
수직 비박이 일생이라도 함부로 허투루 떨어지지 않는 담쟁이의 안간힘을 좋아한다
꽁무니에 줄을 달고 노을 가르는 거미의 초저녁 비행을 좋아한다
설핏 뜬 낮달과 함께 온 샛별의 한 뼘 사이를 좋아한다
뱃사람들에게 길을 잃지 말라며 하루 두번씩 지도를 펴 보이는 갯골을 좋아한다
깍지 꼭 껴도 아프지 않은 풀꽃반지를 좋아한다
칼바람 얼음 나라 운명을 기꺼이 수긍한 수컷 펭귄 알 자리 태교를 좋아한다
바다로의 긴 여행 나뭇잎배 한 소금 쉬어가는 깊고 푸른 눈의 작은 소를 좋아한다
짓눌린 숙명에 아랑곳없이 투명한 미소로 천년을 말 거는 압화를 좋아한다
허공에서 느긋이 낮잠을 새 잠자리도 쉬어가는 하얀 빨랫줄을 좋아한다
울퉁불퉁 거친 자갈밭 삶도 살아갈 만한 것이라는 흰목물떼새의 힘찬 웅변을 좋아한다
바닷가 모래위 휘갈겨 놓은 시인의 글에 나름 첨삭 교정을 본 물새 발자국을 좋아한다
공사 중이니 조심조심 비켜 가라는 개미굴 앞 모래톱을 좋아한다
오늘은 조연 배경이 아닌 한 아름의 안개 꽃다발을 좋아한다
숨 막히고 움츠린 생애에도 반드시 날개를 활짝 펼 수 있다고 말해준 빈 고치 집을 좋아한다
생일 케이크 촛불을 끄려 연방 바람을 넣는 아기 볼 풍선을 좋아한다
모든 것은 바다에서 와 바다로 돌아갈 것이라는 오래된 고래 예언을 좋아한다
여전히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 모르는 인생이란 미궁의 사건에 단서를 남긴 출처 없는 새벽 안개를 좋아한다
아스라이 가물가물한 떠나온 고향 별자리를 손톱으로 새겨 넣을 수 있는 사암을 좋아한다
완고한 대지에게 잠깐만 자리를 양보해줄 수 있겠냐고 부드럽게 물어보는 호미날을 좋아한다
단골 식당 이모 모자란 밥 한 주걱 슬며시 담아주듯 어느새 피고 진 하얀 벼 꽃을 좋아한다
어는 시인이 울고 간 자리에서는 고사리화석 냄새가 났다는 갈매기의 목격담을 좋아한다
항해를 준비하지 않은 자, 이곳에서 하늘로 훌쩍 날아오르라는 바닷가 깎아지른 벼랑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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