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을과 봄. 뭔가 애매한 그사이의 계절을 좋아한다.
어떤 사람은 반팔을 입고, 어떤 사람은 긴팔을 입는 계절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날이다.
그 애매한 날씨 사이에 나는 입을 옷을 고민하고 입고 외출을 했다.
오랜만에 타는 지하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약 40분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지하철에서 처음 공황발작을 겪었던 나에게 지하철은 굉장히 괴로운 곳이었으니 말이다.
유난히 운이 좋은 날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내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곧바로 내리고 자리에 앉았으니 말이다.
그나마 괜찮아진 김에 마음을 다잡고 호흡을 천천히 다시 가라앉혔다.
평소에 지하철을 탔었다면 아무것도 듣지 않아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보다 조용한 환경을 만들려 노력을 했을 텐데.
바로 내 옆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시는 할머님에게 눈이 갔다.
사람들도 많고 지금 어디를 지나는지 모르는 상황에 많이 당황하신 모습이었다.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고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놈의 오지랖은 어찌나 넓고 질긴지, 결국 손에 쥐고 계신 메모를 살짝 훔쳐봤다.
'상봉역에서 내린 다음 춘천행 열차로 갈아타서 청평에서 내리세요'
사람 가득한 열차 속 이런저런 잡다한 소리가 가득한 곳에서
꽤 많이 당황하신 듯 했다.
조심스럽게 할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어디로 가시는지 봐 드려도 괜찮을까요?'
할머니는 안도의 숨을 쉬시며 그래 줄 수 있겠느냐 물어보셨다.
물론 몰래 이미 봐서 목적지를 알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핸드폰으로 상봉역과 청평을 검색해봤다. 그리고 할머니께 설명을 시작했다.
'앞으로 이 열차 타고 한 시간 더 가셔야 상봉역이 나와요. 할머니.
그리고 내리셔서 춘천 방향으로 갈아타셔야 하는데 아마 많이 바뀌고 그래서 잘 모르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근처에 지하철에서 일하시는 분들 금방 찾으실 수 있을 테니까
그분들에게 춘천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서 타야 하는지 물어보시면 될 것 같아요.'
할머니는 고맙다며 그제야 자세를 고쳐 앉으셨다.
젊은 시절엔 자주 가서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던 곳이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시는데
저는 아직 젊은데도 핸드폰 하나 없으면 어디도 가지 못하네요.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곧 내가 내릴 곳에 다다르고 조심히 가시라고 인사를 드린 뒤 뭔가 씁쓸한 기분을 안고 내리게 됐다.
나는 참 조부모에 대한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건 약 50여 년 전이었고, 새할머니는 유난히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월남전 파병 이후 금방 돌아가셨으며
외할머니가 치매 때문에 우리 집에 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나는 사랑을 받는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내가 가장 예민했던 10대 후반의 시간과 20대 초반의 시간을
치매에 힘들어하시는 외할머니와 함께했고
그만큼 나에게 주어진 보이지 않는 압박은 커져만 갔다.
그렇게 좋은 기억은 하나도 남겨주지 않고서 외할머니는 나의 곁을 떠나셨다.
아마 그래서 그런 걸까 다른 어르신들을 보면 조금이라도 챙기려는 마음이 드는 건.
뭔가 불편한 무언가가 나를 건들이고, 결국 도와주고 있는 나를 보게 되는 건.
난 외할머니가 참 싫다.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온 몸을 던졌던 내가 싫고
울음을 참으며 전화기를 붙잡고 앉아있던 시간이 너무 싫다.
한 번도 내게 잘해준 적 없었으면서
치매로 가끔 이것저것 헷갈리면서 내게 쥐여줬던 만 원짜리 한장 한장이 너무 싫다.
당신의 마지막에 조심스레 이마를 맞추며 먼저 행복하게 살고 계시라고 말했던 내가 너무 싫다.
왜 당신은 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대답을 해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던 그 순간들이 너무 끔찍하다.
나는 평생 죄책감을 느끼며 살겠지.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든 당신이 나는 너무 싫다.
그래도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동환아 지금 몇 시냐?' 하는 말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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