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녀랑 사귄 썰 [Behind 01~20화 / 完]
http://m.humoruniv.com/board/read.html?&table=guest&pg=0&number=343354













일진녀가 경찰서에 있다는 문자를 받으니까 막 자다 일어난 맨탈로는 감당이 안됐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었지만



결국은 집적 눈으로 봐야 사실을 알 것이니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주섬주섬 손에 잡히는 대로 주워 입고 신발에 발을 구겨 넣고 달려나가면서 대충 신었다.



날이 어두컴컴하더라. 츄리링에 바막 하나만 입고 나오니까 쌀쌀하기도 했고..



그리고 그날 따라 택시도 안 잡혀서 속이 타 들어가고 있었다.



일진경찰서 앞에 택시가 정차하고 내리려는데 아차 싶더라.



옷을 갈아입고 허겁지겁 나온다고 지갑을 안 들고 왔던 거다..



택시기사 아저씨가 나를 빤히 보는데 나는 삐질삐질한 표정으로



제가.. ㅈ지갑을 두고 와서 그런데요..
폰 두고 갈 테니 경찰서 좀 갔다 와도 될까요..? ㅠ


나 참 학생!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죄송한데요 잠깐 경찰서 들렸다가 나와서
바로 저희 집 가면 제가 지갑 가져 나와 돈 드릴게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경찰서 가고 싶어? 가자 그럼 내려 이 ㅅ끼야!!



그렇게 기사아저씨가 내 멱살을 잡고 경찰서에 들어갔다.



현관에 들어가니 경찰아저씨들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더라.



진짜 험악하게 생겨서 무서웠다. 그 와중에 나는 눈알을 굴려 일진녀를 찾아보았다.



그러다 구석에 일진녀와 일진녀 친구랑 처음 보는 학생 네 명이 줄줄이 않아있더라.



웃긴 건 다 여자들이란 거..



그때 기사아저씨가 씩씩대며 날 밀치더니 목청 높여 소리를 질렀다.


이 놈 콩밥 좀 먹여야겠소!


사복차림의 아저씨 한 분이 무슨 일이냐고 다가왔고 기사 아저씨는 택시비를 안 냈다고 화를 냈다.



우리를 보고 있던 일진녀가 내게로 뛰어왔다.


아저씨! 얼마에요? 얼마냐고요 내가 낼게요!


택시아저씨는 날 보고 일진녀를 보더니 체, 운 좋은 줄 알아 이러면서 중얼중얼대더니 성큼성큼 나가버렸다.



상남자다..


아저씨가 돌아가자 경찰 분이 내게 그만 돌아가도 좋다고 얘기를 했다.



그래서 내가 경찰 아저씨한테일진녀 지인인데 잠깐 밖에서 얘기하고 와도 되냐고 물었다.



경찰아저씨가 안 된다고 하자 일진녀가 언성을 높이며 도망 안가요! 라고 하더라.



그러자 아저씨가 어린 놈이 어디서 말대꾸냐고 하다가 경찰서 밖으로는 나가지 마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일진녀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가려는데 아까 앉아있던 학생들을 유심히 보게 되더라.


헉..?


일진녀와 경찰서 구석으로 가니까 일진녀는 곽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여기 경찰서인데 학생이 담배 피면 어쩌냐고 하니까 그런 거 모른다고 딱 짤라 말하고 불을 붙이더라.



나도 착잡해서 하나 달라고 하니까 돛대라고 했다. 부모님이 달라고 해도 안주는..


나눠 피자, 반 피고 너 줄게.


그래..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 친구랑 골목에서 담배 피는데 중딩들이 우리 앞을 떠들면서 지나가잖아.


그래서 팼어?


나는 아니고 친구가.. 그랬더니 한 ㄴ이 신고를 했더라고..
여하튼 걔들이 나한테도 맞았다고 우기잖아.


이후에 다같이 불려가서 이러고 있던 거였다.



일진녀가 왜 나를 불렀는지는 모르겠다. 물어보지도 않았고 딱히 묻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일진남이 아닌 내게 연락을 했다는 것에 대해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일진녀가 반을 피고 건내 준 담배를 받아 입에 무니까 필터의 촉촉함이 느껴졌다.



일진녀를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더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고 또박또박 얘기를 하더라.



난 더크게 씩 웃으며 들어가자고 얘기를 했다.



같이 들어간 이후 경찰아저씨가 나를 노려보는걸 애써 무시한 채



피해자들인 여자애들에게 걸어갔다.



그 와중에 일진녀 친구가 내게 인사를 건네기에 나도 꾸벅 받아주며 여자애들 앞에 다가갔다.



그 중에 한 애가 나를 보더니 헉.... 이란 표정과 함께 벌떡 일어났다.



난 걔한테 화장실 가려고? 라고 말했고 걔는 으..네..이러면서 화장실로 걸어갔다.



자식..그래도 눈친 있네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따라갔다.



경찰아저씨의 눈초리가 따가웠지만 못 본척하고 태연히 지나갔다.






화장실은 두 칸짜리였고 남자화장실처럼 소변기가 있는 방과 문 안에 변기가 있는 방이 있었다.



난 변기가 있는 방에 여자애를 대리고 들어갔다..



둘이서 그 좁은 곳에서 변기를 사이에 두고 얘기를 하려니까 처음에는 당당했지만 어색한 감도 있더라.



그래도 일진녀를 떠올리며 차분하게 얘기했다.


너 나 알지?


네.. 선배님..


..너랑 나랑 얘기는 안 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인사는 하고 다니는 사이잖아..?
난 실은 내 친구가 널 아껴서 네가 혹시나
네가 나쁜 일 당하면 언제나 도와줄 생각을 하곤 했다.


네...


근데 내 친구가 너희한테 신고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뛰어왔다.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냐?
맞은 사람은 내가 아끼는 친구와 인연이 있고 때린 사람은... 내 친..구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너희나 걔네 중 누가 잘 못했던 지,
난 너희가 이번 일을 계기로 친하게 지냈으면 한다.
서로가 조금 이해를 못해서 일어난 일이니까 서로 조금만
이해하면 얼마 안돼서 그땐 그랬지 라며 보기 좋게 서로 술잔을 나누고 있을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 네 선배


하.. 내가 대신 사과할 테니 친구들한테 얘기해서 좋게 풀자... 그래도 될까?


아.. 선배가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잘 말해볼게요..


난 쥐뿔도 없는 놈이지만 친구 이름을 팔아 겨우 고소는 모면했다.



평소 같았으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왠지 모르게 이번 기회에 일진녀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주고



내가 이런 사람이다, 네 생각보다 나는 힘이 있다 라는 걸 보여주고 팠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스스로가 웃기지만 그땐 그랬었다..



결국 서로 화해하는 선에서 끝이 났고



나는 서를 나가기 전에 경찰아저씨한테 90도로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막상 밖에 나오니 차가운 공기가 나를 반겨주더라 일진녀가 친구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내게 걸어왔다.고마워 갱군아.. 덕분에 살았어.


아냐, 서로 도와줘야지ㅎ 우린 베프잖아.


....


.. 왜 그래?


베..프.. 베프맞지... 근데ㅡ 있잖아.. 갱아.. 우리.. 사이가 그냥 단순한 베프일까?











일진녀는 내게 우리가 단순한 베프 사이냐고 묻고 있었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기분이 싸 했다.



예전에 학교에서 어느 정도 일진녀에 대한 마음을 알았기에



지금 일진녀가 용기를 내어 내게 고백을 유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고백을 해.. 멍ㅊ아! 라고..



나는 그런 일진녀의 물음에 답을 하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멋진 장소에서 좋은 멘트와 함께 선물을 주며 프로포즈를 하는 걸 잠을 이루기전



머리 속에서 수십 번씩 되내이며 연습했었다.



비록 여기가 경찰서고 분위기도 그리 좋지는 않지만 드디어 근 일년이 넘도록 기다려 온 고백을 할때였다.


갱군아..?


..응... .. 있잖아.. ㅅ


우우우웅~


어느 삼류 영화에서 나올 법한 장면처럼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머쓱해져서 받을까 말까 하는데 일진녀가 안받냐고 물어보더라.



하필이면 이럴 때에 전화가 오다니..


여보세요?


아들 어디야?


응? 지금 경ㅊ.. 경..치구경ㅎ


그래? 오랜만에 아버지 오셨는데 외식가야지.


어? 아 그게..


얼른 들어와, 아버지 기다리신다


뚜뚜뚜..


뚜뚜란 소리가 한번씩 나의 가슴을 내려치는 것 같았다..






일진녀가 무슨 일이냐고 묻길래 해외출장 나가셨던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고 했다..



일진녀는 진짜? 그럼 가봐야지 얼른ㅎ 이란 말을 하며 웃어주더라..



나는 바로 앞에 일진녀를 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아쉽지만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모여 외식을 하니 좋기는 했으나



아버지께서 술을 드시고 내게 이런저런 훈계를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나의 학교생활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마다 옆에서 지적을 하며 아버지를 거들어주었다.



어쩌다 그렇게 됐냐, 성적표를 보니 꼴이 아니더라 혹시, 누구한테 괴롭힘 당하거나 그러진 않지?


예.. 아버지..


근데 왜 학교도 잘 안 나가? 혹시.. 여자 끼고 사냐?


아.. 아니요..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아버지의 훈계를 받았는데 틀린 말은 하나도 없더라.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집에 올 수 있었다..



잠을 자기 전에 여러 가지 생각들을 했다. 일진녀도 생각나고 여학생 문제도 있고 성적도 있고..



고질적인 불면증의 원인은 너무 많은 생각들이었다.



예전에는 복잡한 심정일 때마다 문제지를 들고 와서 일부러 어려운 문제를 풀기도 했다.



그것에 집중하면 그나마 다른 잡생각들이 사라지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렇게 누워있다가 불을 키고 정말 오랜만에 학습지를 가져와 어려운 문제를 낑낑거리면서 풀어보았다.






꽃샘추위 지나 날은 조금씩 포근해졌다. 사람의 마음은 계절의 영향을 받는 건가..



여름에는 일진녀와 마냥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겨울에는 냉전이었고



이제 봄 되어 꽃피니 다시 예전처럼 가까워졌있더라.



여름으로 접어들었을 때 일진녀는 학교를 자퇴했다.



원래는 퇴학이었으나 교감선생님의 선처로 자퇴로 처리되었다.



딱히 큰 사건이 없었지만 학교를 자주 나오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일진녀는 학교 근처에 구한 방을 빼고 반년간 부모님과 있다가



삼학년이 되는 다음 해에 입학을 할 수 있는 학교를 찾아 가기로 했다.



그렇게 다른 지역에 있는 학교를 구하게 됐고 일진녀는 그 지역에 방을 구해서 등교를 했다.



우리 지역과는 버스로 두 시간, 또 시내버스로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내가 삼학년이 되기 반년 전,



육개월간 일진녀와는 아직까지는 같은 지역이라서 매일 볼 수 있었다.




지금부터는 이학년 여름에서



일진녀가 다른 지역으로 떠나가는 반년간의 일들을 풀어보려한다.









일진녀의 자퇴소식은 이미 학교 전체로 퍼져있었고



나는 미리 일진녀에게 따로 자퇴를 한다는 말을 들었던지라



애들 앞에서 표정관리를 할 수 있었다.



이때 잠깐 용돈을 벌기 위해 야간알바를 했었는데



과거에 피방에서 놀던 경력이 있어서 피돌이 생활을 했었다.



당시에 최소임금 수당이 3,000원이 조금 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야간이었지만



미성년자라서 3,200원으로 가라 수당을 받았었다.



친구들 오면 몰래 공짜로 시켜주고.. 물론 그것 때문에 한달만에 짤리고



돈 물어주고, 얼마남지도 않는 돈을
은 음주가무로 다 날렸지만..



평일 야간만 했었는데 피곤하기는 되게 피곤했다. 학교에선 자고 밤엔 일하고..



수입은 담배값과 술값으로 다나가고.. 대신에 밤에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었다.



난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가?



졸업하면 무얼할까, 원하는 대학은 갈 수 있을까..?







사장이 등교시간을 맞춰 주어서 아침 6시에 퇴근할 수 있었다.



7시 전에 집엘 들어가서 8시 조금 넘어서 등교를 했었다.



내가 알바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진녀가 놀러왔었다.



게임과는 거리가 먼 애라서 겜은 안하고 카운터에 작은 의자 하날 두고 나와 놀아주었다.



잠깐 화장실에 갔을 땐 자기가 알아서 계산하고 있고..



새벽 늦게까지 옆에 꼭 붙어서 심심하다고 칭얼거리다가 돌아보니 자고 있고..



머릴 쓰다듬어 주니까 끄응- 거리길래 괜히 미안하더라.



다음부터는 일진녀가 거의 매일 나와서 나와 놀아주었다.



한 날은 사정이 있어서 7시까지 일을 해달라길래 가방에 교복을 챙겨왔었다.



일진녀는 놀다가 지쳐 잠들어있었고 7시가 되서 진녈 깨워주고 인수인계를 마친 후에



화장실에 들어가 간단하게 씻고서 교복을 입고 나왔다.



교복을 입고 나오는 나를 물끄럼히 보던 일진녀가 씁쓸한 표정을 보였다.


나도 학교가고 싶어..


난 일진녀를 대리고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리며 일진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학교에 다와갈 때 등교를 하는 학생들이 많아지자 나는 잡은 손을 놓았다.



후문은 잠겨있었지만 내겐 별 의미가 없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현관문에 다다르자 일진녀가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자 일진녀가 말했다.


잘가, 졸지말고 공부 열심히 해.


난 일진녀의 손을 낚아채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정문에서 주임이 지각생들을 체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쟤, 또 저러네.


누구? 주임?


응. 갱.. 그거 생각난다.
우리 지각해서 매 맞을 때, 네가 나 매 맞는다고 주임한테 대들다가 엄청 두들겨 맞은거.


ㅋㅋㅋㅋㅋ 아~ 그때! 나 진짜 잘못맞아서 허벅지 살 다 터졌었는데....아, 싫다.


ㅋㅋㅋ 그러길래 왜 그랬냐?


그냥... ㅋㅋ



수업 종소리가 났다.


안 들어가?


고민을 하다 어렵게 답했다.


가자..



나는 일진녀를 교문 밖까지 바래다주었다. 일진녀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돌아갔다.


담번엔 내가 너 바래다줄게..



일진녀가 자퇴를 한 날로부터 얼마 후,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렀었다.


갱군아, 여기 앉아봐.. 흠. 너도 선생님이 무슨 말 할지 알고 있지?


선생님이 왠 서류 같은 걸 내 쪽으로 밀어서 보여주는데



출석일수가 있는 난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일학년 때는 안 그러더니 왜 그러냐?
이대로라면 너도 여자친구처럼 될 수 있어.


.. 여자친구 아닌데요


아냐? 헤어진 거야?


..아뇨 저희 안 사귀어요.


... 그래? 아무튼 학교만은 나와야지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성적도 계속 떨어지는데 어쩌려고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공부하면 나쁘지 않은 대학은 갈수 있어.


..네, 알겠어요.


흐음.. 그래, 나가봐..


착잡하더라.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내 신분은 고등학생이고 고등학생이라면 공부를 하고 학교를 빠지지 않는 게 기본인데



난 그런 기본조차 하고 있지 않으니..



그날은 오랜만에 수업시간에 졸지 않고 집중해봤다.



선생님이 문제를 풀어 볼 사람이 없느냐 기에 민망함을 감추고 손을 들었다.



친구들은 제가 왜 저러나 싶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고 나는 당당하게 답을 말했다.



그러나 틀린 답이었고 몇몇이 키득키득 웃더라.



쪽 팔리기는 했지만 나로써는 가치 있는 도약이었다.






방과후, 일진녀에게서 문자가 한 통 와있었다.



우리는 같이 공원 벤치에 앉아 푸른 하늘과 따사로운 햇살을 맞이하며



홀가분한 맘으로 바람을 쐬었다.



일진녀가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으려 했다.


진녀야.


응? 왜?


오늘 집에서 뭐하고 있었냐?


아 몰라 짱나.. 심심해 죽을 뻔 했어!


있잖아..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누가 우리보고 학생이라고 생각할까..?


ㅋㅋㅋㅋ 그렇네?


있잖아, 우리 같이 담배 끊어볼래?


미쳤어? 안돼 담배 없으면 못살아.


그래..? 그럼 금연을 일주일만 하면 주말에 놀이공원 대려다 줄게.


... 아.. ㅇ 으...


어때?


일진녀는 입에 물던 담배를 곽 안에 넣더라.



매일같이 일진녀를 만나 속앓이를 들어주며 신나게 놀 수는 있겠지만



진짜 일진녀를 위한 길은 그게 아니라 비록 딱딱하고 고리타분하게 보여서



날 싫어하게 되더라도 옳은 길로 이끌어 주고 팠다.



나 또한 그러면서 손을 놓았던 학업에 집중하고 싶었다..



일진녀는 놀이공원이라는 말을 듣고 내 몸에 바짝 붙어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진짜지! 정말 가는 거다?


당연하지 약속.


약속.


서로 손가락을 교차해서 약속을 했다.



일진녀는 놀이공원에서 무얼 할지 어떤걸 탈지에 대해 신나게 계획을 잡으며 얘기를 했다.


아 맞다! 걔도 부르고 애도 부를까? 음, 애도 입담이 쩌니까 부르면 재밌겠다!


아니, 부르지마


아~ 왜?


둘만 가자


..둘만?


응.. 둘만..


일진녀는 말없이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댔다.



실제로 일진녀가 담배를 피었는지 끊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매일 저녁마다 물었을 때는 안 폈다고 말을 했고 나는 일진녀를 믿었다.



그렇게 일주일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 놀이공원에 가기로 약속을 한 주말이 되었다.









일진녀와 둘이서 버스를 타고 놀이공원에 도착했다.



많은 인파들, 여기저기서 들리는 웃음소리..



날이 화창한 게 잔디 밭에 누워서 낮잠을 자고프더라.



일진녀는 검정색 반팔 카라에 빨간 스커트를 입었다.


뽀얀 피부 덕분에 안 그래도 흰데 더 하얗게 보였다.



발이 다 보이는 분홍색 샌들을 신었는데 힐처럼 굽이 높았다.



특히나 골반 라인이 봉긋하고 허리가 들어가고 힙이 탱글해서 맵시가 .. 아주..



흰색 시계를 찬 손에 연녹색 백 지갑을 들었었고 화장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연하게 했는데



더 설명할 것 없이 그냥 무지 예쁘더라..






그렇게 나랑 딱 붙어서 싱글벙글 웃다가 내가 장난치면 그게 뭐냐고 내 가슴을 톡톡 쳤다.



자유이용권을 사서 손목에 다가 감은 다음에 입구를 지나는데



러시아 붉은광장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오고 가는 수 많은 인파들 속에서



하의가 실종된 여자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 일진녀 만한 애가 없었다 ...



뭐부터 탈까 얘기하면서 지나가는데 솜사탕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만드는 게 보였다.



일진녀가 애처럼 나 저거 사줘! 이러면서 내 손을 잡고 그 쪽으로 콧노래 흥얼거리며 걸어갔다.



솜사탕을 판매하는 곳 옆에 얼음소다 음료를 팔길래



대짜로 하나사서 빨대 두 개 끼우고 의자에 앉았다.



솜사탕이 하나라서 우리 사이에 두고 서로 한쪽씩 뜯어 먹는데



일진녀가 솜사탕을 빙빙 돌리더라.



그러다 걔가 먹던 부위가 내 입 쪽으로 왔는데 솜사탕에 침 묻으면



그 부분이 조금 딱딱하게 굳고 색이 진해져 있잖아..



그 부분 한입 베어 먹으니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 내리는 게 너무 달콤했다.



그러다 일진녀가 백에서 크고 둥근 선글라스 두 개를 꺼내더니 하나를 내게 건네더라.



받아서 써보니까 일진녀가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길래 머쓱해졌다.



일진녀도 잘 어울리더라. 연애인 보는 줄 알았다.



그렇게 처음에는 간단한 것부터 타자고 한담에 회전목마에 올라탔다.



일진녀는 내 옆에 있는 목마에 탔고 노래가 나오면서 출발했다.



내가 오 이거 어릴 때 타고 안타봤는데 재밌닼ㅋㅋ 이러니까



일진녀가 귀여운 애기 보듯 미소 짓더라.



그렇게 이것도 타고 저것도 타고 놀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일진녀와 나는 너무 돌아 다녀서 힘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고속버스 제일 뒷좌석에 탔는데 애가 의자에 눕더니



내 허벅지에 머리를 두고 나를 올려다 보더라.


갱군아


응, 일지나.


너무 재미있었어... 담에 또 가면 안돼?


그래, 그러자ㅎ


갱군아..


응..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일진녀는 눈을 감고 입 꼬리가 조금 올라간 채로 잠을 잤다.



난 걔 얼굴에 빠져 나온 머리카락을 귀로 넘겨주며 속으로



나도 그래..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일진녀와 같이 담배를 한달 정도 끊을 무렵이었다.



그 이후로도 서로 담배도 끊었고 술도 잘 안마셨다.


중딩녀와 분식점에서 떡볶이랑 순대를 시켜놓고



떡볶이 국물에 순대 찍어서 서로 먹여주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상생활 얘기하고 있는데 밖에서 요란스레 소리가 나면서 몇 명이 들어오더라.



하필이면 일진남이었다.



이때는 나도 삼학년 선배인 학교 통이랑 친해졌고 친구의 친구 넘어 이리저리


애들을 사귀다 보니 일진남도 나에게 괜한 시비는 안 걸었었다.



여하튼 일진남이 들어왔는데 다른 손님들은 생각도 안하고 자기 친구들끼리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신경 쓰이는데 그 자식 목소리가 내 고막을 더럽힐 때마다 짜증이 밀려왔다.



내가 인상 쓰고 있으니까 중딩녀가 눈치를 보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오빠, 일진남 오빠랑 싸웠어?


아니, 왜?


표정 좀 펴라ㅡㅡ!


알빠냐?


ㅡㅡ.... 왜 그래?


저 ㅅ낀 그냥 마음에 안 든다. 다 먹었으면 나가자.


내가 벌떡 일어나니까 중딩녀도 따라서 일어났다.



계산하는데 일진남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더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까 ㅈ같은 표정으로 나를 꼬나봤다.



계산 끝내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야!!


이러더라. 순간 움찔했다..



그래서 고개만 돌려 뒤를 보니까 왜? 꼽냐? 꼬우면 다이 뜰까? 이러는데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어차피 줘터지기만 할 텐데..란 생각에 일단 꼬리를 내렸다.



그래도 중딩녀가 보고 있기도 하고 일진남도 날 함부로 하진 못하니까




표정 관리하면서 담담한 척 말을 해주었다.


밥이나 곱게 먹어라


방금 뭐라 했냐, ㅅㅂ놈아?


밥이나 처먹으라고. （ㅅㅂ ㅈ댔다...）


예전에 이놈한테 땅을 기며 ㅊ맞은 기억이 되살아나더라. 바이.. 마이 라이프...


일진남 친구들이 양 옆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일진남이 진지한 표정으로 팔을 올려 걔들을 막으니까 얘네가 조용히 앉더라..



와.. 이게 말로만 듣던 포쓰구나 생각하는데 옆에 있던 중딩녀가 소리를 꽥꽥질렀다.


아 오빠 하지마! 그냥 가자ㅡㅡ


야 중딩녀, 넌 왜 저런 ㅅ끼랑 같이 있냐?


내 맘인데 왜?


햐ㅋ 얘 말하는 것 봐라?
야, 중딩녀야. 넌 나가있어라.


싫거든?


그때 일진남이 나와서 내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점점 가까워질 수록 불안감이 몰려왔으나 애써 내색은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일진남이 나의 코앞까지 왔고 나는 이놈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기다리고 있는데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더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반사적으로 피한다고 피했는데 그래도 얼굴에 맞고 내 몸뚱이가 뒤로 튕겨나갔다



넘어지자 말자 쪽 팔려서 바로 일어났는데 이미 시야가 흐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일진남이 다시 내게로 왔고 한방 더 맞으면 골로 가겠구나..



싶었는데 중딩녀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더라.


하지 마라고 ㅅㅂ!


그러자 일진남이 굳은 표정으로 비키라고 하더라.



중딩녀는 끝까지 안 비키고 목이 터져라 말했다.


아 ㅅㅂ 쫌 하지 마라고!! 진짜 ㅅㅂ 짱나게


하.. 그만해라 비켜라 했다?


아빠한테 전화할 거다!


뭐? 야.. 하지 마라


중딩녀가 급하게 폰을 꺼내서 아빠한테 전화를 했다.



일진남이 폰을 뺏으려고 했는데 중딩녀가



단호하게 일진남 손을 뿌리치고 아빠되시는 분과 통화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일진녀 아빠가 방범대장이었고



일진남 부모님과도 친분이 있고 일진남도 알고 있더라.


야..ㅋㅋ 안 팰게 미안하다..


ㅅㅂ 때려놓고 그러면 어쩌자고?


아 색끼.. 말 좀 가려 하자ㅋㅋ


아 ㄱ빡치네ㅡㅡ


중딩녀야.. 고맙다 ㅠ 이렇게 예쁜 애를 두고 나는 왜 더 잘 챙겨주지 못한 걸까..



얼마 후 중딩녀 아빠가 차를 끌고 와서 분식점 앞에 정차하고 일진남을 불렀다.



일진남이 풀이 죽어 아빠 앞에 갔는데 중딩녀 아빠 용모가 어디 조폭계에 몸 담고 계시는 분 같더라.



실실 웃으면서 온화하게 말씀하시는데 진짜 그게 더 무섭더라..



마치 누굴 죽이기 전에 마지막 가는 길 웃으며 보내준다고 친절을 배 푸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사건이 일단락되고 나와 중딩녀는 아빠한테 인사를 드리고 놀이터로 갔다.



가는 길에 중딩녀가 우겨서 약국에 들려 바르는 약을 샀는데



중딩녀가 앉아서 발라주면서 호호 바람도 불어주었다.



그렇게 다 하고 나니까 대뜸


사내ㅅ끼가 맞고만 다니냐!?


이러길래 딱히 할말이 없어서 멋쩍게 웃으니까


아퍼? 이러면서 줘터진 곳 꼬집더라ㅋㅋㅋ


아파서 끸ㅋㅋ!! 이러다가 침이 쭉 나왔다ㅋㅋㅋ


앜ㅋㅋㅅㅂ!! 아 ㄱ더러!!ㅋㅋㅋ


ㅋㅋㅋㅋ 아 ㅅㅂㅋㅋㅋㅋ미안ㅋㅋ


저녁이 되어 중딩녀를 뒤로 한 채 나는 밤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 골목에서 대기하는데문자가 왔다.



누굴까? 하고 봤는데 다름 아닌 여학생이었다.


이틀 후에 시간 있으세요?


나는 네. 그때 만나요. 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어둠이 내린 골목 끝에서 일진남이 걸어왔다.



나는 몸을 숨기고 주머니에서 짱돌을 꺼냈다.









이 ㅅ발 ㅈ같은 ㅅ끼...



난 속으로 그동안 이놈에게 ㅊ맞고 땅에 뒹굴던 과거를 떠올렸다.



게다가 일진녀랑 같이 밥도 먹고 오토바이도 탔으면서



내 앞에서 일진녀를 욕한 것도 떠올라서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러자 내 손에 잡힌 짱돌의 거칠거칠하고 단단한 촉감이 느껴졌다.



일진남의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질 수록 그 발자국 소리가 내 심장을 짓밟는 것 같았다..



짱돌을 들고 뒤에서 치는 게 치졸하고 부끄럽지만 저 ㅅ끼는 이렇게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애들을 때리고 삥 뜻은 ㅆㄹ기ㅅ끼인데 사람답게 대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열대야 때문에 날이 더웠는데 흐르는 땀은 더위가 아닌 간담의 서늘한 긴장감에서 나왔던 것 같다.


뚜벅 뚜벅... 뚜벅


나는 벽에 바짝 기대서 이놈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주저하지 말자... 보이는 그 순간..덥치는 거다..



너도 한번 개처럼 맞아봐라.. 쓰러진 니 ㅅ끼를 보며 나는 웃으며 오줌을 갈길 테다 이 ㄱㅅ끼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을 부릅떴다.. 숨조차 들리지 않게 내쉬었다..



갑자기 옆구리를 깃털로 간질이듯 참기 힘든 느낌이 몸의 전신을 감돌았다.



조급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인기척이 가까이서 들렸고 검은 무언가가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몸을 날리기 위해 움찔거렸다.



순간 긴장하며 가만히 있던 몸이 그 사이 굳어졌는지 삐걱대더라.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마 터면 큰 일 날뻔했다..



그건 그림자였다. 덜컥하구 정신이 혼나기도 잠시,



그림자가 먼저 보여지고 무섭도록 빠르게 순간 적으로 일진남의 발이 튀어 나왔다.


지금이다..!!!






야 이 ㅅㅂ ㄱㅅㄲㅇㅡ!!!






난 팔에 모든 힘을 쏟아 부어 그 ㅅㄲ의 면상을 가격했다.



무리한 힘으로 나는 내 팔을 멈출 수가 없었고 일진남의 얼굴을 가격하고 나서도



팔을 따라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굴렀다.



일진남은 갑작스런 공격과 혼을 빼놓은 함성을 들으며 힘없이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난 살인자는 되고 싶지 않아서 짱돌을 손바닥에 쥔 채로 머리를 가격했다.



덕분에 일진남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때리면서 같이 쓰러지니 손 뼈가 다 나간 듯이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짱돌은 반으로 갈라져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이건 학교 통 선배한테 배운 것이다.



손에 무언가를 움켜쥐고 때리면 힘이 훨씬 많이 들어간다더라.



실제로 그 형은 라이터를 쥐고 팼지만..






일진남은 작게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잠시 후에 욕을 뱉어대며 머리를 감쌌다.



나는 벌떡 일어나 이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팔다리 하나는 분질러 놓겠다는 심정으로



두 다리를 이용해서 보이는 곳이 어디던 무차별적으로 축구공 차듯 차대기 시작했다.



모든 방법을 이용해서 차다가 이놈이 옆으로 누워 손으로 가드를 올리고 발을 올려 배를 막고 있길래



그 위로 올라가 주먹으로 미친 듯이 내려쳤다.



조금만 뜸을 들이면 이 녀석이 정신을 차릴 테고 아무리 내가 애를 ㅈ패 놓았어도 질 수도 있을거다.



가드 때문에 팔만 때리고 있길래 그 놈 손을 잡고 손가락 하나를 젖히니까



손에 ㅈ같은 느낌이 들면서 그 놈 손가락이 부러져 나가는걸 느꼈다.



그 놈이 비명을 지르며 손가락을 움켜쥐고 발버둥 치는 바람에 내 몸이 뒤집힐 뻔 했다.



간 떨리는 기분을 느끼며 겨우 버티고 가드가 내려진 그 놈 얼굴을 뼈나간 손으로 가격했다.



한번 칠 때마다 내 주먹이 그 놈 볼에 부딪히며 촤악! 촥! 빠아악! 하는 소리가 나는데



아프면서도 그게 그렇게 경쾌하더라.


디져 이 ㄱ ㅅㅆㄲ야 !!! ㄱ ㅆㅂㄴ아!!


그놈의 기어들어가는 신ㅇ소리를 들으니까 이 ㅅ끼를 조지고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났다.



지금까지 억누르며 쌓아놓았던 내 감정들이 폭발하면서 무너진 내 자존심에 보상이라도 하듯



한참이나 패고 또 패고 또 팼다. 지겨워 쓰러질 때까지..


하아... 하아아.. 이 ㅅㅂㅅㄲ...하아..


그 놈 옆에 드러누워 숨을 헐떡이니까 그 놈이 숨을 쉬기 어렵다는 듯이


허어어억..끄어억..케..켁...


이러는데 내가 옆에서 그 놈보고 들어 라고



한번만 시비걸면 네가 죽든 내가 죽든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죽는다..


라고 차분하고 절도 있게 말하고 힘겹게 일어났다.



일진남은 숨을 헐떡이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나는 119에 신고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끝나고 나니까 힘이 쭉 빠지고 긴장이 풀려서 휘청휘청 집으로 걸어갔다.



아무리 잘 싸우고 허세를 부려도 한번 죽도록 달려들면 그 다음부터 저놈은 ㄸㄹ이다 란 생각으로



대부분은 건들지 않는다.. 잘 된 것이다.



이상한 것은 전혀 기쁘지가 않다는 것이다. 죄책감이라고 해야 하나..



오히려 마음이 후련해야 하는데 무겁더라..


걔 걱정이 들길래 내가 왜 걔를 걱정하냐고 머리 속에서 생각들이 서로 싸워댔다.



손에서부터 슬슬 고통이 밀려오는데 집에 다 와가니까 진짜 뼈가 다 부서진 것처럼 아팠다.



정말 이 날엔 나 자신도 두렵고 놀랄만큼 악마ㅅ끼로 빙의했었다.



그날도 역시 잠을 못 이루고 앓으며 잤다..



다음날 엄마한테 들켜 뚜드려 맞고 학교를 빠지고 병원 가서 깁스했다...






일진남은 자기도 나에게 털린 게 쪽 팔렸는지 경찰이나 친구에게 말을 안 꺼냈다.



나와도 서로 무시한 채 대화도 없이 지냈다.



119에서도 내게 연락이 왔는데 그냥 지나가는 길에 왠 ㅂㅅ이 낑낑거리길래



신고 했다 하니까 조용히 넘어가더라..



그렇게 여학생을 만나는 날이 되었다.



그 동안 폰으로 연락만 하다가 오랜만에 만나는거라서 잔뜩 기대를 했다..



물론 그냥 친한 친구 만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보는 것이었다.









깁스하셨네요..?


아, 네. 개한테 물렸어요ㅎ


개요?


네.. 개요


안 아파요..?


괜찮아요ㅎ


여학생과는 영화를 보기 위해 시내에서 만났다.



서로 거리가 멀다 보니 한번 만나면 뽕을 뽑았었고 그간 영화를 같이 본적이 없길래 내가 제안을 했었다.



물론 서로 버스를 타고 중간지점에서 만나도 됐지만은



그 사이에 놀만한 도시도 없고 지리도 모른다는 단점이 있었다.



한번은 내가 여학생이 사는 지역에 가려고 했었는데



어찌나 단호한지 본인이 이리 온다고 하길래 실패한 적이 있다.



그건 여학생의 성격상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에 그랬던 것 같더라.



누구랑 결혼할지 모르겠지만 남편 되는 사람은 참 부럽다고 생각했다..



내조를 잘 할 테니..



표를 끊고 시작까지 시간이 남길래 달콤한 팝콘이랑 콜라를 사서 의자에 앉아 기다리면서



학교 얘기를 했다. 어느 대학 갈 거냐 공부하는 건 어떠냐를 얘기하다가



여학생이 공부에 대한 철학적인 얘기를 하더라.



암기식교육 보다 이해식 교육을 해야 한다거나 간접적 경험 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이 낫고



학교와 학원, 교과서와 문제집에 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우와.. ...무슨 말이지....



여학생은 한 우물을 파는 전문화 시대가 되어가면서 이 사회에서는



학력이 높은 사람일 수록 농사짓는 법을 모른다고 하더라.



역시 배운 사람은 다르구나.. 내 주위에 친구들은 연예나 오락, 놀이 같은 주제로만 얘기를 하는데



여학생은 벌써 우리보다 몇 걸음 앞서고 있네.. 나도 뒤쳐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그런 여학생의 '늙은 생각'이 좋았다.



안 그래도 여학생은 단아하고 청아한데 지적인 이미지까지 쌓이니까 왠지 모를 괴리감이 느껴졌다.



나와는 급이 다르구나.. 그러면 어떠냐,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따라가면 되는 거다.


조급해 하지 말자..



그렇게 영화 한편을 봤는데도 집중이 안됐다.



생각이 많은 것에도 장단점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생각을 얼마나 잘 정리하고 실행했냐는 것이다..






팝콘을 집으려다 여학생의 손을 잡았다.



여학생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어머..라고 작게 말을 했다.



나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학생이 당혹스럽던지 눈을 아래로 내리더라.



난 가만히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뚫어지게..


그리고 잠시 후에 입을 땠다.


영화 끝나고 할 얘기가 있어요..


여학생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고 난 손을 놓아주었다.



여학생은 얼른 손을 자기에게 가져가서 그 손을 살며시 만지더라.



영화가 끝나고 나는 여학생을 대리고 밖으로 나갔다.



근처에 돈까스 집이 있어서 거기 대리고가서 앉았다.



주문을 하고 물로 목을 축이면서 여학생을 슬쩍 보았는데 두 손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놓고서 민망한 듯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영화관에서 한 말 때문인가..



그렇게 돈까스가 나왔고 말없이 한 그릇을 비웠다.



담배가 말렸지만 인내를 하며 참고 있으니까



여학생이 내가 부끄러워 얘기를 못하고 있는 줄 알고



제게 말하실 꺼 있다고 하셨지 않아요? 라고 내게 물었다.


아..네. 실은 제가 공부를 잘 못해요.. 하지도 않고..


...ㅎ


근데 요즘 들어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많은걸 느꼈어요.


네...


......그래서 앞으로는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요..


아.. ...


북적북적한 손님들이 얘길 하고 떠들어 소란스런 와중에



세상에 단 두 사람만이 남은 듯이 주변이 고요해졌다. 분위기도 냉랭해지고..



똑똑한 여학생이라면 이미 내가 할말을 알고 있겠지..



나는 입을 다물고 여학생의 표정변화를 살폈다.



여학생의 하얗고 고운 얼굴에서 어둠이 보이더라.


그럼, 그래야죠. 갱씨가 공부한다면 저야 반가운 소식이에요..


좋은 대학가야죠.. 후회하지 않게..
여학생씨도 주말마다 저를 만나면 황금 같은 공부시간.. 버리는 꼴이잖아요.
피해주고 싶지 않아요..


...연락은 하실 거죠..?


그쪽이 안받더라도 할거에요..


..히, 그럼 됐어요 ...


그날따라 무겁던 몸을 일으키고 도심으로 나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곧장 여학생은 내게 인사를 건넸다.


가시려고요? 바래다 드릴게요.


아녜요.. 먼저 들어가세요..


아.. 음.


연락.. 꼭 주세요.. 평소에 뭘 하는지..
가끔씩이라도 알려주세요..


..... 예..


...그럼 안녕..


여학생은 인사를 하다 말고 말을 흐리면서 곧장 뒤로 돌아갔다.



안녕.. 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만나서 반갑다라는 뜻과



잘 가라는 뜻...



여학생의 안녕에 뜻은 그 두 가지 뜻, 모두 아닐 것이다..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는 다시 만나요.. 인 것 같았다.



홀로 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은 너무나 작아 보였다..



집으로 걸어가는 내 모습도 초라해 보였다..









얼마 후 중딩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빠ㅠㅠ


왜 또?


ㅋㅋ나 집 나왓샤.... ...


헐...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ㅋㅋ오빠, 나 오빠 집에서 재워주면 안댕??


.... 잠시만 .... .. 알았으니 내 방으로 와.






이미 중딩녀는 내게 집에 다와 간다고 문자를 보냈었고



나는 그게 이제 출발했다는 말인 줄 알고 있었으나



조금 있으면 중딩녀가 올 것이고 이 사실을 모르는 부모님은 당혹감을 느끼며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혼자 침대에서 머리를 쥐어짜며 변명을 생각했지만



그간 쌓아온 신뢰가 있어 이실직고 하기로 했다.



부모님 방문에 노크를 하기 전에 나는 문 앞에서 고민을 했다.



과연 나의 계획대로 될지..



그러다 부딪혀 보자는 생각으로 노크를 두 번하고 벌컥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엄마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그래 무슨 말이냐?


아버지의 단호한 말투에 심장이 쫄깃해졌다.


실은 그게... 그...ㅇ...


사내자식이 뭔 뜸을 들여? 말해 봐.


오늘... 음.. 제가 아는 학교 후배가 가출했는데...
제 방에서 재우기로 했어...요..


뭐? 누구냐? 사내냐..?


여자요... （ㅈ댔다..）


............



한동안의 정적이 흐르고 엄마는 등을 긁기 위한 도구이자 다용도로 쓰여지는 효자손을 손에 잡으셨다.


이리 와서 앉아 봐라..


나는 두려움과 나 조차도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속으로 덜덜 떨며 부모님 앞에 앉았다.



하지만 중딩녀를 떠올리며 남자가 약속하나 못 지킨다는 게 쪽 팔려서



나는 이미 내 생각을 굳혔었다.



쫓겨나더라도 여중생과 방을 구해서 약속을 지키자는 마음에



나는 부모님의 공포 앞에서도 단호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나를 의심에 눈초리로 바라보며 혹시 애가..하는 게 뻔히 보이길래



나는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중딩녀의 아버지를 거론하며 내가 이 아이를 잘 돌려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처음엔 못미더워하던 부모님도 내가 이리 말을 하니 하는 수 없단 듯이 받아주셨고



그 순간 띵똥하는 알림음이 울렸다.






나가려는데 엄마가같이 따라 나오셨다...



문을 여니까... 아무리 여름이라도 그렇지 나시 하나에



짧은 반바지만걸친 중딩녀가 들어왔고 엄마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인사를 건넸다.



스모키 화장을 한 탓에 뭐라고 포장하든 엄마가 이 애를 착실하게 생각하지는 않겠구나



생각하며 앞으로 닥칠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의 불안감은 내 생각보다 더 위험하게 다가왔다..



손님이 왔으니 식사를 하자는 엄마의 말에도 중딩녀는 괜찮다며 거절을 했다.



뻔히 봐도 굶은 게 보이고 안 그래도 마른 앤데 쓰러질 것 같길래



내가 옆에서 같이 밥을 먹자고 꼬드겨댔다...






중딩녀는 날 물끄러미 보더니 입술을 모아서 쪽하고 키스를 날렸고



나는 엄마가 볼까 싶어 시선을 외면했다.



침대에 누워 중딩녀를 기다리고 있자니 부모님께 어떤 말을 할지 고민되었다.



아버지는 방에서 나오시지 않았고 중딩녀와 나 그리고 엄마는 식탁에서 별말없이 식사를 했다.



중딩녀를 챙겨주는 게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내 표정을 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는 방은 내 방뿐이고 집주인이 거실에서 자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중딩녀 혼자 거실에서 재울 수 는 없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이불을 덮고 나의 방에서 잠을 이루어야 했다..



엄마는 설거지를 하고 일찍 자라는 여운을 남긴 채 방으로 들어가셨고



중딩녀는 내가 칫솔을 빌려주어 먼저 씻게 해주었다..



중딩녀는 아직 덜 마른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침대에서 폰을 만지작 거리는 나의 옆에 와 누웠다.



그러면서 손가락 하나를 펼쳐서 내 배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보드랍고 물컹한 중딩녀의 살갗이 내 팔에 비벼졌다.



그것은 바로 슴가였고.. 중딩녀는 앙탈을 부리며몸을 흔들어댔다.



그때마다 나시 한 장만 걸친 슴가가 내 팔에 비벼졌다....



슬며시 바라본 여중생의 회색 나시는 물기 때문에 가슴 위에 티 부분이 젖어있었다.



나는, 이게 무슨 뜻일까.. 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멘탈이 박살 나 있었다.



설마 애가 나한테 신호를 보내는 건가 싶더라..



지금 부모님도 계신데.. 앙칼진 녀ㄴ..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자 중딩녀는 내게 웃으면서 말을 했다.


오빠 안 씻어?


나는 이..잉.ㅇ.. 이라는 숨가픈 말과 함께 바지를 꼬올리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씻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중딩녀와 함께 살을 맞대고 잔다는 기대감과 흥분에 젖어있었다.



그러다 샤워를 하기 위해 바지를 벋었는데 주머니에 무언가 묵직한 게 들어있음을 깨달았다.



그 것은 지갑이었고 무의식 중에 펼친 지갑 속에는 일진녀와 나의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중딩녀랑 한 이불을 덥고 누워있으니 샴푸 향인지 바디워시 향인지 좋은 냄새가 코를 콕콕 찔렀다.



다른 사람에게는 안 그러는데 평소에도 나에게만은 애교가 많은 애라서



스킨쉽은 크게 관여치 않았는데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내 옆에 나무늘보가 나무에 달라붙어 안 떨어지듯 착 달라붙어 있으니까



살결이 닿은 감촉과 비벼지며 나는 살 소리가 되게 자극되었다.



상황이 상황인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중딩녀가 쌩얼로 있으니



의외로 순한 인상이 되었다는 게 신기했다.


그렇다고 하는 행동은 여우라는 게 변함이 없지만..



쇄골과 팔, 허벅지가 훤히 보이길래 가릴 거 찾아준다고 일어나니까



나를 잡고 다시 침대에 눕혀서 가지마 라고 칭얼대더라.



그래서 누워서 차려 자세로 딱딱하게 있었다...



근데 애가 어디가 불편하다는 건지 자리가 번잡하다며 내 몸뚱이 위로 올라탔다.



서있었다면 끌어 안는 자세였겠지.



중딩녀가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 보는 자세로 있는데



중딩녀 머리카락이 내 목에 닿아 간질간질했다.



애가 드디어 내 양기를 빨아먹으려나..?



뭐, 평소에도 스킨쉽을 많이하며 장난을 쳐서 크게 신경쓰이진 않았지만



이날따라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었다.



진짜 일진녀와 여학생만 없었더라면 이 날..






（참고로 이땐 두 사람 다 미성년자였다. 철컹철컹.. 오해 없으시길..）






중딩녀가 나를 내려다 보며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생ㄹ하냐? 왜 이래 갑자기?


오빠ㅋㅋㅋ 흥분돼?


?? ... 아뿔사..


내 위에 올라탄 중딩녀의 허벅지 안쪽을 내 배꼽아래 기요미가 톡톡 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어때?


중딩녀는 상체만을 숙여 내 몸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동그랗고 큰 도토리묵 두개의 출렁거림에



나는 이상과 이성 사이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해 애썼다.. 요망한 것..



이땐 장난인지 진심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머리에 번개가 빠르게 시쳐지나가면서 ..



ㄱ..그린라이트?!



라고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기요미에게 다음을 기약한다는 마음의 목소리를 남기고



중딩녀를 옆으로 밀어내었다..



스스로의 도도함에 자뻑을 하고 싶었지만 눈에서는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중딩녀는 치-라고 말하며 화난 표정을 짓고 내 반대 방향으로 돌아 누웠다.



나는 중딩녀의 뒤 태...와 잘록한 허리, 볼록한 골반,



매끈한 다리를 바라보다가 잠시 하늘을 원망했다.



불을 끄기 전 나는 중딩녀에게 행위의 중요성을 설교했다.



당시에 중딩녀는 세상을 무슨 생각으로 사는 지 모를 정도로



자기 멋대로 살았었고 개념이란 것도 없었다.



정말 어디 혼자 떨어트려 놓아도 상황파악이나 계획도 없이



심심하다며 칭얼대다가 굶어 죽을 애였다.



그래서 나는 이 애에게 잘 해주었다.



남녀간의 끌림 때문일 수 도 있고 측은함일 수도 있겠지만, 그저 잘해주고 싶었다.



귀엽고 애교많고 .. 정신나간... 여동생 같았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같이 한방에서 있으면서 민망했던 적도 많다.



부모님과 식사를 하는데 비엔나 소시지가 반찬으로 나왔을 때



중딩녀와 내가 너 나 할 것 없이 폭풍흡입을 했고



마지막 하나가 남았을 때 젓가락을 치고 박다 내가 한쪽 손을 사용하여 입으로 쏙 넣은 적이 있다.



승리의 미소를 지어주니 중딩녀가 모야!! 라고 하면서



소스가 묻어있는 내 손가락을자기 입에 넣고 빨아댔다...



이 정도로 막장이었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는데



우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들리는 츄룹..하..쯉.. 하는 소리는 잊혀지지 않는다...









여중생과 동거를 한지 어느덧 사흘째 날이 되었다.



무더운 날씨 탓에 옷이 한 벌뿐인 여중생은 나의 옷을 입었다.



여중생은 나보다 몸집이 작아서 옷을 입으면 헐렁해졌고



나는 옷이 크다며 칭얼대는 여중생 때문에 반바지 대신 팬티를 입혔다.



그랬더니 어느 정도 맞길래 위에는 반팔 티를 입혔고 길이가 길다 보니



팬티가 어느 정도 가려져서 딱히 민망한 차림새는 아니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여중생은 내게 자주 심심하다며 놀아달라고 했다.



손동작과 함께 곰 세마리 동요를 부르며 율동을 하거나



내 몸에 달라붙어 부비적 부비적하며 혀를 꼬아



중딩이 까까사쥬때요! 메롱ㅋㅋ 야아! 심심하다고ㅠ라는 뻘짓도 일삼았다.



그러다가 사건이 하나 터졌다.



왠 일인지 조용히 내 옆에와서 쑥스럽다는 듯자기 혼자 몸을 베베 꼬길래



똥 마렵냐고 물었더니 베시시 웃으면서 귓속말로 나 오늘 그날이얌..ㅋㅋ하고 도망갔다..



너무 무서웠다...



결국 날개가 필요하다는 말이었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날개를 샀다...



밤에 누워있는데 애가 옆에서 나지막이 신ㅇ소리를 내길래



손모가지를 다 뿡군다고 말했는데



중딩녀가 아.. 배아파ㅠㅠ라고 말했다.



그 무섭다는 ㅅ리통이었다...



나는 중딩녀의 배에 손을 얹고 빙글빙글 돌려주었다.



배가 따듯하면 좀 덜할 것 같았는데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애가


아씨..ㅠ 오빠샛꺄.. 나 어떡해ㅠㅠ
너무 아퍼 흐규ㅠㄱ 잘좀해봐..ㅗ


라고 하며 칭얼대는데 쫌 불쌍하더라..



우으...으 으오오...시ㅂ..하면서 자꾸 뒤척거리니까 신경 쓰여 잘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배를 따듯하게 하는 게 좋다고 했다.



방금했는데도 별 소용이 없어서 긴가민가하다가 따듯한 생강차를 끓여주었다...



일진녀한테도 이렇게 지극정성은 아니었는데..



삐뚤어진 딸 하나 키우는 줄..




생강차가 통증에 좋다며 주니까 낑낑대며 마시는데



도로 뱉어내더니 이거 독극물이야; 완전.. 웩..이라고 하는 거 빡쳐서 붙잡고 강제로 다 먹였다.



투덜투덜 대는 거 다시 옆에 눕혀서 배를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왜 인지 모르게 배꼽이 신경 쓰여서 후볐다.



ㅋㅋ하며 좋아하길래 계속했는데 갑자기 싸대기 맞았다...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ㅡㅡ...



그리해놓고 다시 꺄르륵 웃는데 애가 싸이ㅋ인지,



여자가 생ㄹ하면 다 이렇게 변하는지 긴가민가하며 배만 만지작 거리다가



넌지시 아프니까 집 생각 안나? 라고 말했다.



조금 뜸을 들이고 기다렸는데 말이 없길래 가출에 대한 이야기나 부모님 얘길 조심스럽게 꺼냈다.



말을해라고 중간중간 마다 쉬면서 말했는데도 가만히 듣고 있길래 봤더니 어느새 폭풍수면...



걔가 잠 들고 나서도 한참 동안 배를 비벼주었다.



아침에 일어나는데 뭐가 그리 좋았던지 내 볼에 뽀뽀를 해주더라.






그리고 며칠이 지나 여중생은 집으로 돌아갔고



여중생의 아빠는 내게 감사를 표해주셨다.









여학생과는 가끔씩 술을 마실 때 안부를 묻기 위해 연락을 하곤 했다.



취했단 걸 알면서도 묻지도 않고 받아주더라...



일진녀와도 그 전보다 자주 만나지 않았다.


일진녀의 소식에 절반은 친구의 입으로 전해 들었고 나는 공부에 매진했다.



그런 내 사정을 아는 일진녀는 보기와는 다르게 나를 이해해줬다.



자기랑 안 놀아준다고 칭얼거릴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고 이해를 해주는 게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주로 만나면 예전처럼 술을 먹는다거나 사고를 친다거나 하지는 않고



건전한 장소에서 못다한 얘기들을 나누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다 필요 없이 일진녀와 그저 마음 가는 데로 놀고 싶었다.



문자나 전화 한통만 날리면 우린 닿을 수 있었지만



난 지겹고 보다 어려운 공부를 선택했다.



금연에 성공하고 나서는 무엇이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스스로 자제했다. 그렇게 일진녀와 나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다.






허나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그건 일진녀가 자퇴를 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데 중졸이라는 타이틀은 언제나 일진녀를 따라다닐 거고



본인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아도 학력이란 알게 모르게 중요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서 주로 집안이나 인맥, 자본과 학벌을 보았고



공부를 잘하더라도 어떤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서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을 경우,



단지 종이 쪼가리에 중졸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인상을 쓰며



그 사람에 대해 판단하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퇴를 한 일진녀에게 검정고시를 보자고 했고



처음에는 귀찮고 싫어하던 일진녀도 지극정성인 나의 마음을 알아주었는지



고맙게도 검정고시를 위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만나 얘기를 할 때면 예전과는 다르게 조금 더 의미 있는 말과



여운이 남는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끔 시간이 날 때마다 일진녀에게 찾아가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고



이런 말들이 기억에 남았고 이런 것을 느꼈다고 얘기를 전해주었다.



역시나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공부란 고리타분한 것이었고



그러다가 가끔 눈이 맞아 관계를 맺기도 했다. 젊은 혈기다 보니...



그럴 때마다 나는 일진녀를 꼭 껴안고 체온을 느끼며



일진녀의 눈썹을 엄지손가락으로 그 결을 따라 쓰다듬어 주었다.



일진녀와 있을 때면 불면증이 사라지고 나도 모르는 사이 스르르르 눈이 감겼다.



그래도 우리는 공부에 전념하자는 신념 하에 사귀자거나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일체 꺼내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 흘러, 가을로 접어들었고



검정고시를 치겠다는 일진녀는 마음을 바꿔 다시 입학을 결심했다.






나는 무척이나 기뻤고 그런 일진녀를 위해 시간을 내어 단풍도 예쁘게 물들었겠다,



11월 초에 수목원에 단풍구경을 가자고 했다.



안 그래도 다음 학기가 시작됨에 따라 일진녀는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기에 마지막 추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이 됐다.









수목 원은 많은 인파들로 북적 였다.



대부분 연령이 높거나 어린 애들이어서 교복을 입고 있는 우리들은



그 나이 때가 없는 걸 감안하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일진녀는 당시에 머리카락을 레드와인 색으로 염색했는데



교복 위에 하얀 후드 티를 입고 있어서 더 눈에 띄었을 수도 있었겠다.



그리고 워낙 치마가 짧아서 후드 티에서 한 뼘만 내려오면 치마가 끝났다.



하필이면 스타킹도 속이 비치는 검정색이라서 쳐다보기 부끄럽기에 눈이 고생했다.






진 붉게 물이든 단풍나무 아래로 일진녀와 손을 잡고 걸으니 온 세상이 우리 주위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구름 한 점, 바람 한 풍 없는 선선한 오후 하늘아래



일진녀와 나는 어쩌면.. 앞으로 우리에게 놓여진 길이 평탄치만은 않은 길이란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마치 연인과도 같은
지금의 우리를



추억이라는 소망 한 켠에 고이 간직해두고 싶어하는 것 일지도 모른다.



내 곁에서 나의 발걸음과 같이 맞춰 걷고



함께 숨 쉬고



함께 웃는



이토록 고운 일진녀와는 이제 서서히 서로의 마음 속에 흔적만을 남긴 채로



조금씩 천천히 흐릿해져 가겠지만 설령 그리 되더라도 훗날 오늘을 되돌아 볼 때



그때는 참 행복했었다고 말할 수 있길 바라며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나와 있는 것 일 수도 있다.









우리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었기에..









일진녀는 길을 걷다가 걸음을 멈추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면 멍하니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다.



내가 손을 내밀고 나서야 내 손을 잡고 같이 걷는다.



앞으로는 내가 손을 내밀어주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럴 때면 누가 그 손을 잡아줄까?



지금도 길을 걷다 말고 멈추어 서서 얌전히 숨을 쉰다.



나는 손을 내밀지 않고 함께 멈추어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아, 그 사람 곁에 빈자리 하나만 두어 주라.






두 그루의 붉고 보란나무가 한 자리의 벤치 옆에 심어져 있다.



그 두 나무는 서로를 지켜주듯 벤치 쪽으로 가지를 펼쳐 벤치가 포근해 보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아무 말도 않은 채 그곳에 앉았다.






외진 곳이라 그런지 인적이 드물었다.



우리는 그곳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갱군아 기억나?


어떤 거..?


네가 담벼락에 거미 그림 그린 거..


아, 생각난다. 그거 때문에 우리 학교에 몰래 들어가서 교실에서 뽀뽀했잖아.


그랬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네?


난 네가 창가에 입김 불어서 글 쓰던 것도 기억하는데.


잠탱이?


잠탱이.. 그때 너 조금 귀여웠다?


하하...


...


있잖아 갱군아, 나 전학가면 자주 못 만나겠다 그치?


아무래도 그렇겠지..?


너 공부도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가면 예쁜 여자애들 많이 사귀겠다?


너는 전학가면 멋진 남자애들이 졸졸 따라다니겠네?


.....


.......


야! 갱군!


응?


너는 어쩜 남자애가 계절이 일곱 번이나 바뀔 동안 여자한테 고백도 안 해봤냐..?
여자친구도 안 만들고..


..고백했었는데..


어..? 정말... ? 누구한테? 내가 아는 애야?


응..


왜 말 안 했어?


안 사귀었거든..


.... 그래..






너는 모르지..



네가 내 어깨에 기대 잘 때 귓가에 대고 사귀자는 말을 속삭였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야 말을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오히려 사귀었다가 혹시라도 시간이 지나 헤어진다면 영영 만날 수 없게 될 테니..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런 감정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그저 이대로, 이대로만.. 영원했으면 한다는 것을..


너는 일진남이랑 왜 안 사귄 거야?


뭐... 나랑 안 맞아 걔는.. 그리 좋지도 않고..


그래? ...그럼 너도 남자친구 한 명 없었네.


그렇게 되네? 히히.. ...


... 좋다.


응? 뭐가?


그냥 날씨도 서늘하고 풍경도 좋고..
분위기도 좋고.. 이렇게 같이 있는 것도..


일진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눈썹에서 콧대를 따라 입술까지 천천히 내려왔다.



그리고 눈을 바라본다. 일진녀의 눈망울에서 내 모습이 비추어진다.



이런 나를 바라보는 일진녀도 아무런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 머리 속에 각인이라도 시킬 듯이,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르고 일진녀는 다른 학교에 복학생으로 들어갔고



나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났었다.



만날 시간도 없고 정작 만나더라도 함께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했고 일진녀도 나와 같이 일과 공부를 함께 했다.



졸업식이 다가오던 추운 겨울.



일진녀와 나를 포함한 친구들 9명이 미리 졸업여행을 떠났다.



일진녀는 일년을 더 다녀야 졸업을 했지만 우린 친구였기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행지로 그간 학업과 시험으로 인해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겸



가슴이 시원하게 뚫릴 바닷가를 선택했고



해변에 위치한 오두막 모양의 아담한 집을 예약했다.






겨울바다, 차갑고 거센 바람이 불던 그곳에서 일진녀와 나는



파스텔로 그린 꿈결같은 몽환적인 학창시절을 마무리 지을 준비를 했다.



비록 주말이 낀 1박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미리 사둔 새옷들과



세면도구, 취사도구 등을 챙기니 여행용 가방 한개, 손에 쥐는 핸드백 한개, 빽팩 한개..



이렇게 많은 양이 되어버렸다.






면허증이 있는 애들이 없었지만 전연령을 대상으로 렌트를 해주는



자동차 대여점을 알고 있었기에 그곳에서 차 두대를 대여하고



그중에 한대를 내가 운전했다..



면허는 없지만 운전엔 자신이 있었다.



오토바이 단속이 심해져서 한 때 친구들이 자신들의 아버지 차를 몰래 타고



자주 드라이브를 했었는데 이때 기어 넣는 방법을 5분 정도 듣고 곧장 국도를 탔다.



덕분에 나중에 운전면허를 한번에 쉽게 땄지만 따라하지 말길 바란다.



20대 초반까지 친구들이 운전해주는 차를 얻어탔다가 과속으로 사고가 5, 6번 정도 났는데



박고나서 눈을 떠보니 바퀴가 차 앞으로 굴러가고 있더라..



난 지금도 차를 타면 정차하기 전까지 앞좌석이던 귓좌석이던 버스를 타던



안전벨트는 무조건 맨다.



친척 어르신분이 운전할 때 내가 벨트를 착용한 적이 있는데 그런거 불편하게 왜 하냐고



운전실력이 모자랄꺼 같냐, 사고 안난다, 목숨 되게 챙기네라며 핍박을 주셨는데



어르신만 아니였으면 언성을 높힐 뻔했다. 이건 기본이자 당연시할 게 아닌가?



물론 신호등 건널 때 손들고 건너는건 좋은 행동이지만 어른이 그러기엔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전벨트는 다르다. 내가 하도 차사고를 많이 겪어봐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안전벨트 미착용은 죽음을 인정한다는 무언의 유언과도 같다.






여튼,






친구들과 경상북도에 있는 동해바다로 향했는데



일진녀는 나와 다른 차를 탔기에 아쉬웠다.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출근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국도에 차가 별로 없었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친구렌트카가 우리차 옆으로 엔진음을 부앙~하고 내면서 다가왔다.



친구들이 창문을 내리고 서로 장난치고 놀면서 창문 너머로 과자를 교환하고 놀더라.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니까 눈 앞에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일진녀가 목도리를 돌돌 말아서 손에 쥐고 바달보며 손을 흔들더라.



진녀의 친구녀도 신이나서 방방 뛰어다녔다.



우린 먼저 오두막으로 가선 짐을 풀고 놀 준비를 했다.



여자 5명, 남자 4명이 방에 짐을 푸니까 누워 잘 공간이 부족할 수도 있겠더라.






해변에서 일진녀는 주로 여자애들과 놀고 나는 남자애들과 놀았다.



못내 아쉬웠지만 일진녀와의 추억이 많았기에 친구들과 더 놀게 내버려두었다.



춥긴 엄청 추워서 일진녀의 코 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는데



윗옷을 벗어주고파도 주변에 눈치가 보여 때를 기다렸지만 기회가 없었다.



친구 한 녀석이 춥다며 공원쪽에 있는 소나무 숲에서 나뭇가지랑



솔잎, 솔방울을 한움큼 들고 오길래 나는 좋은 생각이 나서 돌들을 들고 왔다.



땅을 파고 자갈을 깔고 그 주변에 동그랗게 돌을 쌓아서 안엔 나뭇가지들과 솔잎을 덮었다.



불이 잘 붙지 않고 금방 꺼지길래 솔방울을 넣었는데...



혹시, 캠프파이어 할 일이 있다면 솔방울을 추천한다.



엄청난 화력이다..



불이 거세지자 굵은 나무들을 그 위에 올렸다.



공원에서 놀던 여자애들은 불을보자 너나 할 것 없이 몰려왔다.






마을로 향한 친구가 쇼핑해온 삼겹살로 우린 그곳에 둘러앉아 음주가무를 즐겼다.



날이 저물 때까지 세병은 마신거 같은데 좀처럼 취하지 않았다..



중간에 천천히 마시긴 했는데 취하려하면 풀리고 또 취하려하면 풀리길 반복했었다.



숯과 재가 붉게 달아올라 천천히 꺼져갈 때 일진녀와 애 친구녀가 춥다고 말하고는



먼저 오두막으로 향해걸어갔다.






여학생을 내게 소개시켜준 친구녀석도 소변이 마렵다며 일어나길래



일진녀를 따라 가고 싶던 나도 같이 누자며 일어났다.



친구가 노상방뇨를 한다길래 따뜻한 방에 들어가서 해결하자고 말했다.



오두막으로 걸어가는데 일진녀의 친구녀가 혼자 걸어오고 있더라.


어? 진녀는?


응? 방에 있어.


왜 혼자가?


화장 고치고 나온대.


손을 흔들며 친구녀를 보내주고 내 친구와 방엘 들어갔다.



그런데 진녀의 신발이 보이지 않더라.



이불이 깔려있는데 비좁아서 그런지 가방 위에 깔려있거나



반으로 접혀서 울퉁불퉁하게 있거나, 개판이었다.



친구가 용무를 끝내고 나오자 먼저 바닷가로 가보라고 말했다.


넌 안가?


좀 있다가.


왜?


그냥.


... 너 혹시..??! ㅋㅋㅋ


뭐.. 뭐가??


혹시 너 일진녀 기다리냐? 아까 친구녀한테도 일진녀 행방만 물어보더니.


ㅋㅋㅋ 아닌데..


까고 있네, 새ㄲ야ㅋ 너 여학생 버리는거냐?


아니라고ㅋㅋㅋ


아- 야. 앉아봐. 너 형이랑 진지한 얘기 좀 하자.


술을 마셔서 그런지, 진지한 표정의 친구 모습을 봐서 그런지,



일진녀의 대한 말이 나올까 그런진 몰라도 친구의 말을 듣고자



나도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너 혹시... 여학생을 두고 일진녀랑 사귀냐?
너희가 아니라고 해서 큰 신경은 안 썼는데
생각해볼 수록 이상하단 말이지..
비밀로 해줄테니까 말해봐라, 솔직하게.
너... 일진녀를 사랑하냐?


친구는 여학생에 대한 얘길 했고 내심 나와 일진녀의 사이를 의심했다.



일진녀와 나. 우리는 지금까지 남들에게 베스트 프랜드의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쿵짝이 잘 맞는, 잘 어울리는 짝궁의 이미지 말이다.



게다가 우린 다른 애들이 혹시 사귀냐고 물어볼 때마다 부정적인 답을 해주었다.






일진녀도 하지 못한 말을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는 고민했고 친구는 내 말을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친구는 한숨을 푹 쉬고는 밖으로 나갔다.



따라 나가려다가 소변이 마렵길래 화장실에 들렸는데 그곳에 일진녀의 신발이 있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퍼졌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목을 따라 올라와 귀를 마구 때렸다.



얼어있던 몸을 겨우겨우 돌려서 발을 땅바닥에 붙인 상태로



한발, 두발 밀며 나아갔다.



가방이라고 생각했던 이불 안의 물체 앞까지.






손이 떨리더라.



차라리 술에 취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그때 이불을 들추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이불을 조심스럽게 걷어내자 앞머리카락으로 얼굴이 가려진,









일진녀가 상체를 들어올렸다.



난 동그라진 눈으로 일진녀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일진녀는 자신의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30초 동안 그렇게 얼어있었다.





얼음으로 된 날카로운 송곳으로 심장을 찔린 것 같더라.



분명 내 얼굴은 완전히 붉어졌거나 창백해졌을 것이다.



나는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싶었다.



친구와 나눈 얘기를 못듣고 자고 있다가 방금 깨어났을거라고 믿고 싶었다.


... ..잤 .. .....어....?


정적이 흘렀다.



일진녀는, 아무런 말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가려진 머리카락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더라..






그날 저녁, 나는 차 안에서 몸을 꽁꽁 싸매고 오지 않는 잠을 이루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창문 밖에서



집에 갈 준비를 하는 애들이 보였다.



그리고 해변에서 밀려오는 바닷물에 닿을 듯 말듯 서있는 일진녀가 보였다.



나는 차 밖으로 나와 오두막집 마당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는 친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내 폰을 쥐어주곤 이렇게 말했다.


.. 우리 뒷모습 좀 찍어줄래..?


나는 일진녀에게 다가갔다.



일진녀는 나를 본채 만채하고 수평선만 바라보고 있더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나도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뼈 속까지 불어오더라.



갑자기 의외였지만, 일진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 그림 좋네.


괜히 찔렸다. 분명 바다를 보고 얘길한건 아닐 것이다.


김갱군. 넌 졸업하면 뭐 할거야?


... 대..ㅎ


대학 가는거 빼고. 취업도 말고.
하고픈.. 다른 거.


.. 글쎄.. 넌?


... 기억나..? 나 자퇴했을 때, 네가 나 학교에 대려가서 구경시켜준 날.


으응..


그때 수업 시작해서 나갈 때 네가 수업도 늦었는데 밖에 까지 바래다줬잖아.


..그랬었지.


그 때 나가면서 내가 너한테 해주었던 말. 아직 기억나?


....


..









그날 이후 일진녀와 연락하지 않았다.



추운 겨울날의 냉기가 마음을 얼려버린 것 같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달이 더 흘렀다.



그간 간간히 일진녀와 마주쳤었는데 우린 항상 주변에 서로 친구들을 끼고 있었다.



일진녀가 무척 신경쓰였지만 먼저 말을 건다거나 그러진 못했다.



일진녀에게 궁금한게 있을 땐 우리 사이, 중간에 앉아있는 친구를 통해서 은근히 물어봤다.



예를 들면 너희는 요즘에 뭐해? 라는 식으로..



그럼 친구는 자기와 진녀의 근황을 말해주었고 나는 두 걸음 옆에 있는 일진녀의 근황을



한걸음 옆에 있는 친구를 통해 전해들었다.



그리고 마음과는 달리 오랫동안 일진녀와 만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진학하는 그 사이에 나는 친구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여중생은 물론이고 여학생까지.



가장 큰 이유는 일진녀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한번은 전화도 씹고 문자도 보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친구들이 화가 났는지



늦저녁에 마당으로 들어와서 내방 창문에 노크를 했다.



창문을 열자 친구 네명과 일진녀가 보였다.



몇 초도 안 지나고 나는 말없이 창문을 닫아버렸다.



친구들이 자꾸 창문을 두드리길래 부모님이 오실까봐 하는 수 없이 다시 창문을 열어주었다.


야, 왜 그러는데?


그냥. 혼자 있고 싶다.


그러지말고 졸업도 했는데 오래간만에 술 한잔 하자.


안 간다니까?


아, 진짜 너 요즘 왜 그러냐?


너희끼리 마셔라. 난 안간다.



단호하게 딱 짤라 말하고서 창문을 닫았다.



밖에서 웅성웅성 거리는게 신경쓰였지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네가 들어가봐라.


그래, 빨리 들어가서 데리고 나와.


잠시 후, 창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서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는데 일진녀가 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곤 다짜고짜 성큼성큼 걸어와서 내 팔을 잡고 당겼다.



얼떨결에 일어났는데 일진녀가 인상을 팍 찌푸리곤 고갤 들이내밀면서 나가자더라.


김갱! 빨리 일어나!


... 안간다고.


안가긴 뭘 안가? 너 안가면 나도 안 갈거야.


네가 왜 내가 가야 간다는건데?


가자, 갱군아. 너랑 같이 술 마시고 싶어.


술 끊었다.


아씨, 진짜!! 가자니까!


그때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는지 엄마가 방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친구들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도망가버렸고 엄마의 시선엔 젊은 처자와 아들이



서로 팔을 잡고 얼굴을 맞댄채 투닥거리는 모습이 비추어져있었다.



엄마는 ..오늘... 일찍자라.. 란 말을 하곤 조용히 문을 닫고 가버렸다.



우린 멍하게 있다가 내가 일진녀의 눈을 응시한채 말을 꺼냈다.


안간다고.


일진녀는 잠깐 멈추어 서있다가 유리창이 다 깨질듯이 쌔게 창문을 닫고 나갔다.



조용해진 방에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으니까 심장이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돌덩이에 짖눌린듯 무겁고 숨 쉬기 힘들었다.









일년이 지나고 일진녀의 졸업식 날이 되었다.



사이가 멀어져서 연락조차 하지 않지만 평생 한번 뿐인 졸업식이기에



망설였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전에 일진녀가 나의 머리를 손봐줄 때 이마에 손을 대고 휙하고 올려서는 올빽도 잘 어울린다고 했기에



머리를 뒤로 넘기고 몸에 딱 맞는 수트를 위아래로 세트로 입어보았다.



넥타이도 매고 넥타이 핀도 꽂고 뾰족구두도 신고,



좋은 향이나는 스킨 로션에 향수, 연한 BB크림도 발랐다.



이게 뭐하는 짓일까 생각했지만 최대한 깔끔하고 멋있게 나를 치장했다.



나가는 길이 산뜻했다.



꽃집에 들려서 꽃을 고르려는데 어떤 꽃을 골라야할지 몰라서 예뻐보이는 걸로 몇 가지 골랐다.



그리고 푯말에 잊지말아요라는 꽃말이 적혀있던 꽃이 있었는데 이것도 한송이 샀다.



학교로 꽃을 한아름 들고 걸어가다가



중고명품집이 보이길래 지갑을 들여다보다 들어가서 선물도 샀다.



학부모들과 많은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강당으로 향했다.



꽃을 선물 받고 가족, 친척,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 학생들.



멀지 않은 곳에 일진녀도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우린 서로 눈이 마주쳤다.



사복을 입고 있었기에 나를 몰라봤던 걸까.



금방 고개를 돌리고 활짝웃으며 얘기를 나누더라.



대화가 끝났는지 일진녀의 부모님은 일진녀를 감싸안고 밀며 밖으로 향했다.



일진녀가 강당을 빠져 나갈 때까지 나는 등뒤로 감춘 선물을 들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였다.



강당이 텅비고 테이블과 기기들을 옮기고 사람들이 빠져나갈 때 일진녀가 머물렀던 그 자리에



나는 꽃과 선물을 두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넥타이를 풀어해치려는데 고정되어 있던 넥타이핀 때문에 잘 풀리지 않았다.



풀다말고 가만히 침대에 앉아있다가 손으로 머릴 터니까 뒤로넘겨 고정되어 있던 머리가 새집처럼 엉망이 되었다.



그 자리에 풀썩하고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는데 한숨이랑 웃음이 동시에 나와서 기침을 해댔다.



꾸미는게 아니었는데 라고 생각하다가 잠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학창시절은 끝이났다.









세월이 흐르고 일진녀는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나는 운명인지 모르게 여학생과 같은 대학교에서 만났다.









여학생과는 가끔씩 통화로 안부를 물으며 지내는 사이었는데



같은 대학교로 입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가지 않은 대학교인데도 떨린다는 것 보다는



기대감이 더 커서 벌써부터 들뜨기도 했다.



나는 여학생에게 과를 물었고 아쉽게도 나와는 다른 과였다.



씁쓸함을 뒤로 한 채 시간이 흘렀다.






대학교 입학 첫날,



나는 벌써부터 마음에 맞는 친구를 알게 되었고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더 충족되었다.



공강시간이 되니 여학생은 잘 있는지 궁금해졌다.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 장거리 데이트를 했고



그때 나는 여학생에게 서로 공부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어색함의 앙금이 있었기에



그간 연락은 하고 지냈어도 먼저 전화하기가 조금은 그런 면도 있었다.



여학생은 많이 바뀌었을 까..



아직도 단아하고 청아한 모습으로 볼에 홍조를 띠고 나를 바라볼 까.



그런 생각으로 괜스레 할 일없이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이제부터 이십 대 청춘의 절반을 있어야 할 곳이기에 미리 이리저리 둘러보아야겠다는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길을 가다가 여학생이랑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시설도 좋고 수풀과 꽃들도 아름답게 조성되어있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일진녀와 수목원에 갔던 때가 떠올라 나도 몰래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일진녀와 있을 때 일진녀가 자주 나를 보고 너는 뭐가 그리 좋은데 혼자서 실실 쪼개냐?



라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나도 몰래 미소를 짓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언제나 우리 ~ 웃을 수 있는 ~ 아름다운 얘기들을 만들어가요 외로움이 다가와도~ 그대 슬퍼하지마♬



전화가 울려왔지만 나는 벨소리를 더 듣고파서 일부러 받지 않았다.



그렇게 노래를 음미하다가 화면을보았는데 여학생의 실명 세 글자가 찍혀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네, 학교를 조금 둘러보고 있었어요.


아.. 시간되시면 만날 수 있을까요..?


네. 어디서 볼까요?


나는 텅 비어 있는 강의실에서 몸을 뒤로 젖히고 목을 기댄 채 여학생을 기다렸다.



그리고는 지난 날의 일들을 떠올리며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겼다.



그러면서도 이곳에서 단 둘이 만난다는 것에 알게 모르게 긴장감이 들었다.



무슨 말을 먼저 할지 고민하는 동안 뒤쪽에서 철컥 하고 문이 열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육감적으로 지금 문을 연 사람이 여학생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또각 또각하는 발걸음 소리에서 긴장감과 설렘이, 맡지는 못하지만 여학생 특유의 향기가 느껴졌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고개를 돌려 천천히 뒤를 돌아 보았다.



여학생이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지적이고 예의 바른 양반집 아씨로 태어났을 것이다.



나는 여학생을 처음 본 그 순간 그것을 느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여학생은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내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런 여학생에게서무언가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



사람을 비교한다는 게 웃기고 부질없는 짓이라고는 해도 여학생은 일진녀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렇다고 누가 더 잘 났냐고 하는 건 아니다.



무엇인가 서로 다르다는 게 내게는 새롭게 느껴지고 자극적이었다.



여학생은 자신의 몸에 맡게 옷을 입었다.



노출은 피하지만 현대의 트렌드를 따라 가는 패션..



여학생은 나의 옆에 와서 쑥스러운 듯이 두 손을 앞 짐 지고 가만히 서있었다.



나는 그런 여학생에게 옆자리를 향해 손을 펼치고 목 인사를 했고 여학생은 살며시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여러 얘기들을 나누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제 고등학생 신분이 아닌 성인으로써 자리 했기에 예전처럼 조금은 농담을 섞어가며


하는 의미 없는 말들 보다는 현실적인 얘기를 했었다. 나는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그저 내 옆에서 나를 바라보며 함께 대화하고 이해하려는 여학생이 좋을 뿐이었다.






시간이 물결이 되어 여러 갈래의 물줄기로 나뉜다면



나는 여학생과 일진녀라는 물갈래 중에서어느 곳으로 흘러갔을 까?



어쩌면 운명이란 물결로 인해 나는 여학생이라는 물줄기로 갈 수 밖에 없었을 까?



거센 물살 탓에 헤엄쳐 갈 수 없기에, 바라만 보아야 했을까?



글쎄, 분명 기회는 많았다.



생각해야할 것이 많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나친 생각들이 해가 되었겠지만



마음은 감정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었다.



말하고파도 더 멀어질까 봐 삼켰던 말들.



하고싶은 말이 해서는 안될 말이라면 얼마나 아파해야할까.



꼭두새벽이던 날엔 일진녀의 문자가 왔었다.


잠들 때까지 나랑 문자로 놀아주면 안돼?


난 답장을 보내려다 잠들었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남은 하루들을 버린다하더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다.









페미과에서 사용하는 작은 미용실이 있었다.



나는 그곳의 크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학생은 가위를 들고 나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다듬어 주었다.



한 올 한 올 잘리는 머리카락에는 감각이란 없지만



만약 머리카락에 감각이 있다면 나는 가라앉지 않는 마음이 두근거렸다고 답했을 것이다.






여학생이 나의 앞머리를 자르기 위해 정면으로 다가왔고



무릎을 조금 굽히고 나와 시선을 같이 했다.



여학생의 입에서 나오는 숨결이 내 얼굴을 간질였다..



나는 나의 얼굴을 면도하는 여학생을 젖혀진 의자에 누운 채로 바라 보았다.



여학생의 복부가 자꾸나의 손에 닿았다.



여학생은 시큼한 식초 향이 나는 진득한 젤을 내 얼굴에 비벼댔다.



뻑뻑하게 내 피부에 스며드는 젤과는 달리 여학생의 손은 너무도 부드러웠다..



코에 나있는 잔털을 정리하기 위해 여학생은 나의 입술을 엄지 손가락으로 살며시 눌렀다.



젤이 묻은 여학생의 손가락은 나의 입술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나는 민망함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으니 그 감촉이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미끌거리는 손가락이 내 입술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나는 애써 간지러움과 민망함을 참았다.



위에서 불어오는 여학생의 따듯한 숨결에 나도 모르게 면도중인 여학생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나는 젖혀진 의자에서 허리의 힘을 주어 상반신을 조금 일으켰다.



여학생은 놀란듯 동그라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이후, 우리의 입술은 뜨거워졌다.









여학생과 나는 같은 학교라는 것과 자취방이 가까워서 자주 어울렸었다.



이때 당시 일진녀는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한창 바빴었고



나는 새내기 학생이었다.



동기들은 놀러 다니기 바빴지만 이미 고등학교 때 지겹도록 놀아봤었기에



마땅히 재미있다거나 하는 새로운 것도 없었고 귀찮아서 밤늦게 까지 돌아 다니지도 않았다.



여학생은 원래 그런 것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우리 두 사람만 따로 만나는 일이 많았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여학생은 친구와 연인 사이의 존재였고



나의 심적 고민에 있어서는 일진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삼월 말이었다..









그날은 주말이었고 나는 여학생과 아침부터 만나 주변에 가볼 만한 곳을 물색했다.



카페에 앉아 음료를 앞에 두고 거기가 경치도 좋고 예쁘던데,



거기에 인공호수가 있다던데 하며 데이트 코스를 정했다.



결국에는 추억 쌓기를 주제로 장소를 정하다 보니 고딩 때 살았던 울 지역으로 가서



소소하게 이곳 저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늘 지내던 곳이라 지겨울 만도 한대



그래도 곳곳에 여고생과 만났던 장소들에 때묻지 않은 기억이 하나하나 배어 있었다.



처음 만났던 곳.. 않아 얘길 했던 공원벤치..



팝콘 먹다 손잡았던 영화관, 팔짱을 끼고 걸었던 맛집 골목.. 대려다 주던 정거장 ..



우리는 그 장소를 지날 때 마다 그땐 그랬었지 라고 하며 과거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러다 어릴 때부터 들리던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마트가 보이길래



저기도 한번 들리자며 여학생과 손을 잡고 갔다.



아줌마는 잘 계시려나.. 학생 때 날 참 좋아해주셨지.. 라고 하면서.



도착할 때 즈음에 위아래로 회색 운동복을 입고 모자와 후드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그 매점에서 검은 비닐에 무엇을 가득 담고 팔에 낀 채로 나왔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난 그 애가 일진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달에 삼 일을 쉴 수 있고 쉬는 날을 고르는 백화점은 원래 주말에 한참 바빴다.



그래서 대부분 평일에 쉴 수 있는데.. 라고 생각하며 일진녀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미 그 사람이 일진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손을 잡고 훈훈한 표정으로 마트에 가까워지는 여학생의 모습을 보고 나는 애써 일진녀를 외면했다.



제발... 못 보고 지나가라... 마음 속으로 외쳐댔다..



빨리 걷지도 느리게 걷지도 못하며 가슴을 조렸다.



일진녀로 보이는 사람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땅을 보며 걸었고 우리와 몇 걸음까지 가까워졌다.



나는 앞만 보고 가고 있었으나 그 애가 우리 옆을 지나는 찰나에 엄청난 고민에 빠졌었다.



그냥 이대로 지나갈 것 같은데 한번 슬쩍 훑어볼까..? 지금까지 날 못 본 것 같은데...



일진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일 수 있잖아..



심각한 궁금증이 나의 마음을 이끌었다.



그 애가 나를 지나칠 때 나는 얼굴은 앞으로 향한 채로 눈만 돌려 그 애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 애는 고개를 들어 우리가 지나갈 때까지 내가 아닌,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나는 모자 때문에 그 애의 코까지 밖에 볼 수 없었지만 단번에 그 애가 일진녀가 확실하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입을 앙다문 채 서로를 지나쳐갔다..



왠지 모르게 날씨가 추워진 것 같았다.



11월의 수목 원에서 일진녀와 함께 곱게 물든 단풍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물이 들어 간다는 것은 빛을 잃어간다는 것과 같다.



서서히 탈색됨에 따라 언젠가는 그 잎이 시들어 낙엽이 된다..



여학생과 나는 3월 말의 앙상하고 연약한 나무 가지 사이를 걷고 있다.



하지만 삭막한 회색 빛 가지는 누구도 모르게 그 속에서 새싹을 틔울 준비를 했고


그 싹은 곧 아름답게 꽃을 피어낼 것이다.






그날은 늦게까지 야외에서 여학생과 거리를 걷고 쉬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마지막 코스로 기와집으로 향했다. 시간이 늦었는데



등산복을 입은 중년의 남녀가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마당을 두른 돌담까지 백여 평이 조금 넘을 이곳은 주말마다



면사무소에서 사람이 나와 청소를 하고갔었다.



딱히 관리자가 없어서 고딩 시절 애들과 담을 넘어 문을 따고 들어가 술을 마시고는 했던 곳이다.



나는 그 스킬을 발휘하기로 했다.



여학생을 대리고 사랑채 뒤쪽으로 갔다.



문지방의 고리를 푸는 법을알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열었는데



여학생이 내 뒤에서 새침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한지를 바른 나무문을 활짝 여니 오래된 고목나무 냄새가 풍겨왔다.



시골에 온 기분이었다.



여학생은 불안해하며 무단침입이 아니냐고 했지만



나는 씩 웃으며 괜찮다고 말을 하며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겉과는 다르게 속은 심플하게 필요한 가구들만 있었다.



우리는 문 앞에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조선시대 풍의 가구들이 예쁘다며 골똘히 들여다 보고 있는 여학생의 옆모습이 무척 예뻤다.



아침에 청소를 하고 갔는지 깨끗했다.




나는 대감마님들이 앉던 자리에 앉았고 여학생은 방 중간에 두 다리를 한쪽으로
놓고 다소곳이 앉았다.



아무도 오지 않을 곳에서 여학생과 있다는 것과



혹시나 관계자가 들어올까 하는 불안감과 설렘에 기분이 무척이나 묘했다.



밖은 이미 땅거미가 져서 어둑어둑하고 중년 부부는 돌아갔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두운 빛이 한지를 뚫고 들어와 푸른 빛을 내는 방 안은 무척 몽환적이었다.



여학생은 단아하고 고운 목소리로 옛날 아기씨의 말투를 쓰며 내게 말을 건넸다.


오늘 무척 재미있었사옵니다..


나는 그 말에 빵 터졌고 여학생도 입을 손으로 가리고 웃음지었다.



나 또한 양반의 말투로 답했다.


많이 걸어서 피곤할 터인데 괜찮으신지요?

저야 걷는 게 좋아서 더 좋았던 걸요.
이렇게 있으니까 오붓하고 정겹네요ㅎ


..있죠, 갱군씨는 우리가 연인 같지 않아요..?


네? 아ㅎ 네.. 뭐..


많이 생각해봤는데.. 저.. 실은 갱군씨를 조..아해요..


....


.. 갱군씨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작스러운 여학생의 고백에 난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그간 만나오면서 애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먼저 갑자기 고백을 해 올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갑작스럽게 고백을 했다기보다는 내 쪽에서 고백의 고짜도 안 꺼냈으니



쟤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겠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고민 끝에 여학생은 자신이 먼저 고백을 꺼낸 것이다..



나는 솔직히 여학생이 좋았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나는 일진녀를 잊지 못하고 있었고



여학생은 내게 있어 너무 과분한 사람이었다..









여학생에게 고백을 받고 나서 자취방으로 돌아와 누워있는데



마트 앞에서 마주친 일진녀 생각이 났다.



여학생과 손을 잡고 걸으며 자신을 모른척한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어째서 문자 한 통 보내질 않지..?



..그거야 나도 마찬가지겠지 만은... 자존심 때문에 그러는 걸까?



지금이라도 연락을 해볼까.. ?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있었다. 내일 연락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니 눈이 스르르 감겼다.



다음 날 학교에서 여학생을 만나지 못했다.


여학생의 고백 이후 나는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고



일진녀 또한 연락이 안 되었고 그렇게 시간만이 홀로 흘러갔다.



그리고 어느 날 고등학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는 여학생을 소개 시켜준 애였고 대충 안부를 묻더니



곧장 여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술자리를 가졌는데 표정이 안 좋아 보이길래 꼬치꼬치 캐묻다 보니



여학생이 술기운에 내게 고백을 한 사실을 불었다고 한다.



평소 나에 대한 얘기를 잘 하지 않는 여학생이었기에 나는 조금 놀라워했고



한편으로는 여학생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여학생은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구는 일진녀 때문이냐는 일침을 내게 날렸고 나는 뜨끔했다.


야, 일진녀 지금 걔랑 사귀는 거 몰라?


뭐..? ..누구랑 사귀는데..?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같이 다니는 남자친구가 있더라고.


진짜...야?


어, 그리고 여학생처럼 지극정성인 애가 어디 있냐?
그런 애 없다.. 그렇게 너한테 잘하는데...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고 하루 종일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떨려오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고 다시 한번 일진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나는 여학생이 좋으면서도 내게는 과하다고 생각했었고 이미 상처를 주었다.



내게는 아직까지 일진녀가 있었기에..



하지만 일진녀에게 짝이 생기고



여학생에게 빛을 진 지금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며칠 후 나는 멋들어진 곳에서 여학생에게 고백을 했고 여학생은 글썽이며 내 고백을 받아주었다.



우리는 매일같이 만났고 주말에는 멀리 여행을 떠나는 약속을 잡아두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날을 보내는 중에 뜻밖에도 일진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아, 갱군아. 미안.. 그 동안 너무 바빠서 못 받았어..


..문자 하나라도 남겨놓지..


미안.. 목소리 들으면서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 괜찮아, 바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참..


응.. 말해.


너 남자친구... 생겼다며?


어라...? 그게 무슨 말이야?


같이 다니는 남자애 있다고 들었는데..


아냐, 걔가 나 쫓아다니는 거야..
또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나 보네..






뭐...?






바보ㅋㅋ 맞다, 우리 토요일에 만날래?
오랜만에 너 얼굴 한번 봐야지.. 보고 싶다.. 히


....


뭐야ㅋㅋㅋ 자?..


아 .. 나 주말에 약속 있는데..


응..? 그래...? 나 그날 밖에 못 쉬는데...
무슨 약속이야? 누구랑 가?


아...그 ...


혹시.. 그때 마트 앞에서 봤던 애야?


.... 응


..아, 음.. 그래.. 약속이니까 할 수 없지.. 그럼 담에 연락할게.









보고있지 않아도 술을 많이 마신게 눈에 보였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연락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졸업전 여행 때 진녀가 듣고 있을 때 난 진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나의 데이트를 진녀가 보고 말았고 나는 진녀가 지나가고 있음에도 아는척도 안했다.



내심 나의 애인이 누구인지 궁금했겠지만 묻지 않다가 술기운에 물어본 것이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어렵게 연락이 왔는데 하필..






친구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원인은 나에게 있으니까.



졸업식 이후.. 아니, 내가 공부 때문에 일진녀를 멀리한 그 이후부터



이미 우리는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미리 떠난 졸업여행, 오두막집에서



우린 더는 가까워질 수 없게 되었다.






그 날을 잊고 싶었지만,



그 아픔마저 잊는다면 일진녀와 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부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끝이 이별이라면 이별도 사랑이 아닐까..?



그래서 사랑한 기억들을 떠올릴 때면 아려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별을 겪은 후에, 사랑했었다.. 라고 말하는게 아닐까..?



사랑은 이별의 또 다른 표기일 뿐이라면



좋았던 추억만큼 슬펐던 기억도 차별없이 간직할 수 있을까.








그러다 어느 겨울,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일진녀의 목소리 마저 희미해질 때,



오래간만에 일진녀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은 시간은 꼭두새벽이었다.



평소라면은 벨이 울리는 것도 몰랐겠지만 그때는 눈이 떠졌다.



일진녀의 실명 세 글자가 적힌 번호였다.


여보세요..?


...하, 나야. 오래간만이야.


그러게.. 안 자고 뭐하냐..?


이제 자려고 히..


술 마셨구나..


쪼끔! 히히... 뭐해?


아..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거든..


음.. 그렇구나! 흐..


왜 그래?


아니 그냥.. 안부나 물어 보려고...히히


잘 지내지...


다행이다... 있지..


응..






여자친구는 만들었냐 쨔샤?!






....아 ... 응


....그래...?


응.. 지금 옆에 누워있어...


..........


.....


.... 히 짜식 다컸네..?


.... 아.. 으응...









그게 그 시절 일진녀와의 마지막 전화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사이를 확인하는 전화였다.









공부에 매진하지 않는 대학생 시절..



일진녀와 나는 더 이상 멀어질 이유가 없었다.



사귀었다면 서로에게 피해만 주는 고등학생 때는



공부와 진학, 주위의 이목으로 인해 사랑하지만..



사랑한다면 서로를 위해서 서로를 멀리해야 했다.






수년을 기다려서 그 벽이 허물어질 때가 되어서 우리는 마음을 놓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의도치 않았던 실수들과 이미 내게 짝이 있었기에 우린 함께 할 수 없었다.



여학생은 나의 목소리 때문인지 잠에서 깨었다.






나는 여학생의 볼을 보듬어주고 다시 재웠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창가로 나갔다.



창문을 여니 시린 바람이 와닿았다.



나는 유리병에 얼음을 담고 양주를 부었다.



그리고는 여학생이 일어날 때까지 찬바람을 느끼며 술을 마셔보았다...









훈련소 기간, 주말마다 편지를 쓸 수 있었다.



편지를 쓸 시간이 길지 않아서 주로 부모님과 중딩녀, 여학생에게 편지를 붙였다.



그렇게 마지막 훈련기간에 뜻밖에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일진녀의 편지였다.



매일 구르고 기합을 받아가며 사회와는 단절된 채



고된 훈련을 받는 와중에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소중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편지였다.



흙먼지 섞인 밥을 먹어가면서도 내일 편지가 온다는 생각을 하면 밥이 꿀맛처럼 느껴지며 설레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일진녀가 보내 온 편지를 읽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일병이 되었을 때 나는 따로 소초 생활을 했다.



일개소대 병력만이 남은 채로 특정 지역에서 경계를 서며 생활을 하는 곳이다.


인원이 적다 보니 훈련은 안하고 돌아가며 경계와 순찰, 매복만을 했다.



그날도 위병소에서 소총에 검을 착검하여 끼우고 실탄과 공포탄을 휴대하고



방한용 전투모를 쓰고 피복을 입고 있었는데



위병소 입구 왼쪽으로 내리막길이 있는 골목에서 어느 민간인이 올라오고 있었다.



철조망 울타리가 고가초소에 붙어 있어서 골목과 고가초소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골목에서는 내 모습이 허리 위로 전부 보였고 내 위치에서 골목은 뛰면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나중에 검열 관이 와서 이것에 대해 탈영위험이 있다고 지적해서 바뀌기는 했지만..



그 민간인은 위병소 울타리를 따라 내가 있는 고가초소에서 발걸음을 멈추었고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다름이 아닌 일진녀였다..


왜 답장 안 해줬어?


야.. 너 여기가 어디라고 온거야?!


왜 답장 안 해줬냐고!


쉿..! 목소리 낮춰..


편지 .. 붙였는데..


너, 내 주소 어떻게 알았냐..?


갱군일병님 무슨 일이 신지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같이 근무를 서던 두 달 후임 일병이 내게 말을 걸었다.



너무 떨렸다. 우리 소초장은 재 정신이 아니어서 민간인에 대해 보고도 안하고



얘기를 나누었다는 걸 들킨다면 나는 폭언（행）과 함께 영창에 갈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보다도 일진녀와 이렇게 있다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한 우선순위였다.


야, 너는 신경 끄고 누가 오는 지나 잘 보고 있어라.


일병 김후임! 예, 알겠습니다.


음, 여기 주소 어떻게 알았냐고.


네 친구에게 물었는데..
여기 있다 해서 면회도 안 된다고 자기도 못 만난다는데 내가 어쩌냐!


야, 쉿..! ... 하아.. 편지는 받았다.


근데 왜 답장 안 했어?


그게... 주소가 적힌 봉투를 잃어버려서..


....너 죽을래?!


나는 검지손가락을 펴서 입술에 가져다 대며 제발 조용히 얘기를 하자는 제스쳐를 취했다.


일진녀는 단단히 화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위병소와 우리 건물은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어서 크게 말하면 상황실까지 들리기도 했고



간부가 건물에서 나오면 곧장 위병소가 보여 위험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 내 친구가 나에게 근무시간에 대해 집요하게 물은 적이 있다.



나는 일주일 어 치의 경계작전명령서를 보고 내가 투입되는 시간을 다 말해주었는데



생각해보니 일진녀가 친구를 통해 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후임에게 수첩 빌려서 종이에 할 말을 써서 울타리 너머로 구겨서 던졌다.


"할 말 있으면 이 종이 뒤에 글로 적어서 넘겨줘."


그리고 일진녀에게 여분의 볼펜을 던져주었다.



일진녀는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겨진 종이를 손으로 곱게 펴서 비행기 모양으로 접은 뒤에 내게 날렸다.



바람결을 따라 날아온 종이비행기를 잡고 그것을 읽었다..



그리고 남은 공백에 글을 쓰고 일진녀에게 날렸다.






그렇게 한참 가시 돋힌 철조망 울타리 사이로 종이비행기들이 날아다녔다..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도 여학생은 나를 기다려주었다.



여학생은 아직도 변함없이 나를 좋아해주었고



나도 그런 여학생의 정성이 싫지만은 않았다.



나는 어느덧 직장을 가졌고 여학생의 부모님을 만나 인사도 드렸다.



아버님께서는 나를 좋게 봐주셨다.



주말이 되면 여학생과 함께 차를 타고 명산지나 관광지 같은 곳들을 갔다.



우린 등산이나 승마, 탁 틘 곳 등.. 풍경이 좋거나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장소를 다녔다.



여학생은 늘 도시락을 싸왔고 우리는 알콩 달콩하고 오붓하게 밥을 함께 먹었다.



어느 날 고등학교 동창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진남의 어머니께서 생을 달리했다는 내용이었다.



장례식에 오냐고 묻는 친구에게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내가 예전에 사두었던 양복을 여학생이 정성스럽게 다려주었다.



여학생의 손길이 닿은 것에는 항상 은은한 향이 났다.



나는 차를 몰고 일진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조문객들로 붐비는 장례식장에는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한참이나 차 안에서 망설이다가 천천히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빈소 쪽으로 가니 유가족들이 있었다. 나는 간단하게 목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일진남과 눈을 마주쳤는데 일진남의 눈에는 단 한번도 보지 못한 눈물이 고여있었다.



나는 먼저 영정을 향해 두 번의 절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일진남과 마주보며 맞절을 할 차례였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일진남과는 서로 죽일 듯이 치고 박은 사이라서 얘가 내 절을 받아줄지 몰랐다.



내가 조금 뜸을 들이자 일진남은 가만히 나를 보더니 먼저 내게 절을 했고 나도 얼른 따라 절을 했다.



인사말과 조의를 표하는 것이 예의이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음이.. 많이 아프겠구나,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일진남은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고맙다... 친구야.


이상하게 그때 눈물이 났다. 가슴 속이 뜨거워지며 뜨거운 눈물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애써 눈물을 삼켰다.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나는 뒤를 돌아 나왔다.



곧장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몇몇 동창들이 나를 불렀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많이 와있었고 그들은 쭉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나를 반기는 애들과 악수를 하고 있었는데



구석진 자리에 일진녀가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일진녀의 시선을 피했다.



마치 못 본 것처럼..



친구들과 악수를 하고 간단히 안부를 묻고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다는 핑계로 밖을 나왔다.



차에 타려는 찰나 일진녀가 나의 뒤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일진녀가 한번 더 내 이름은 부른다.



나는 핸들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어쩌면 나는 거기서 일진녀를 뒤로하고 떠났어야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차에서 내려 일진녀에게 다가갔다.



일진녀도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오랜만이야.. 갱군아..


응... 너는 안 본 사이에 많이 달라졌네..


너 정장 입은 거 처음 본다..


아... 원래 자주 입어.. 네가 못 봐서 그렇지..


그래? .. 틀린 말은 아니네..


으음... 그... 넌 요즘 뭐하고 지내?


나 백화점 직원 됐어..


예전에 거기서 아르바이트 하더니 마음에 들었나 보네..


응.. 너는 뭐하고 지내?


나는 뭐.. 그냥 평범하게 직장 다니지..ㅎ


아.. 있지 혹시 정장 살 거면 나한테 와...


아, 너 남성정장 코너에 있어?...


아니, 여성정장..


응? ... 내꺼 맞춰준다는 거 아니었어?






너 아내 생기면 내가.. 그 사람 예쁘게 꾸며주게...






아..


저기.. 갱군아.. 나 꼭 만나면 하고팠던 얘기가 있는데..


그때 저 멀리 건물에서 어느 남자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 남자는 일진녀의 이름을 부르더니 일진녀의 뒤에서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를 봤다.


누구...?


아, 오빠.. 인사해. 내 고등학교 동창 갱군이야..


아? 그래? 반갑습니다. 일진이 남자친구에요.


아... 예.. 반갑습니다.


일진녀는 아래로 고개를 떨구었고 나는 악수를 하는 내 손이 조금 떨린다는 걸 느꼈다.


나는 집에 들어와 내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서랍을 열고 여러 서류들 아래에서



이제는 낡아버린 한장의 봉투를 손에 쥔다.









보내는 이

일진시 일진면 일진읍 17, 일진녀






나는 군대에서 받은 일진녀의 편지를 들여다 본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일진녀의 감정이 묻어있고



한 단어, 한 마디 마다 우리의 추억이 스며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오랫동안 그 편지를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찢어지고 낡은 종이비행기를 좁은 방안에 날려보았다.









여학생에게 고백을 하고 사귀고 난 이후로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 앞에 있는 투룸에서 살았었다.



그땐 여학생도 지낼곳이 따로 있었기에 같이 지내진 않았지만 여학생을 자주 룸으로 대리고 오곤했었다.



대학교를 졸업 한 이후로는 모 대기업의 사내협력업체로 들어 갔었는데



회사 안에 우리 기업이 있어서 출퇴근을 대기업 본사로 했었다.






덕분에 본사가 위치한 도시에 원룸을 구했고 여학생과는 자주 만날 수 없었다.



다행인 것은 회사엔 좋은 분들이 많아서 날 좋게봐주고 일도 적응이 잘되서 어려운게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사 경리이자 나의 1년 선배인 직장녀를 만나게 된다.






물론 미리 말해두지만 죽이 잘 맞아서 직장녀와는 친누나와 친동생처럼 지낼뿐이지 남녀간의 정은 없었다.



아무리 경리라도 그렇지, 위에서 싼 똥을 다 치워주고 이것저것 다해주고 손수발 들어주는게



적은 월급 받으면서 하는 일이라고보기엔 안쓰럽기도 하고 그래서 틈 날 때마다 나도 배울 겸



거들어주고 쉬는 시간에 앉아서 커피 마시며 같이 욕도 하다보니 친해진 것이다.



마치고 나서는 가끔 포장마차에 가거나 작은 술집에서 술도 마셨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사람 많고 시끄러운 곳은 싫었기 때문이다.



이제 친구들이랑 만나도 누가 폰으로 노래를 틀어놓으면 이어폰 꼽고 혼자 듣던가 정신 사나우니까 꺼라고 말한다.






여학생과는 주로 주말에 만났지만 평일에도 시간이 있을 땐 되도록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여학생에게 직장녀를 소개시켜주고 셋이서 몇 번 만났었는데



술자리를 가지고 있는 저녁에 직장 누나가 우리가 잘 어울린다며 칭찬하길래 너무 형식적인거 같아서



허허허.. 웃기만 했는데 직장녀랑 여학생은 그날 이후 소울메이트가 되어 자주 어울렸다.






추석 때엔 여학생은 자기 부모님께,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아직 결혼계획이 없으니까 좀 부담되서 그랬다.



나는 부모님을 뵙고 친구들이랑도 연락이 닿아서 마지막 날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었다.



원래 계획엔 없었지만 동내에 애들이 모이다보니 선배, 후배할 것 없이 눈에 떡하니 보이더라.



친했던 친구들은 한명 뿐이고 나머진 다른 반 친구들이나 인사만 좀 하던 애들이었는데 그 중에 일진녀 친구녀도 있었다.



소단에서 한두잔 간단히 하자는거 운전해야 한다고 얘기만 좀 하다가 일이 있다고 그만 나오려는데



일진녀 친구녀도 그만 가본다고 나오고 있더라.



밖에 나와서 주차장으로 가는데 일진녀 친구녀가 뒤에서 따라 왔었다.



밤이라 그런지 좀 쌀쌀하더라.



일진녀 친구녀는 잘 걸어오더니 갑자기 비틀거리면서 주차장 뒷골목으로 가더니 담밸 피더라.



술을 오래 마신게 아니었기에 벌써 취할리가 없는데 라고 생각해서 그냥 차에 타고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출발해서 친구녀 옆을 지나가려는데 또 비틀대길래 차를 세우고 조수석의 창문을 열었다.


너 괜찮냐?


아.. 니..


... 타.


난 일진녀 친구녀에게 친구들에게 먼저 간다는 연락을 해주라고 말하고 차를 몰았다.



일진녀의 친구는 이전에도 술을 마시다가 연락을 받고 모인 것이라고 했다. 같이 있던 친구들은 사정이 있어서 갔고.


후.. 담배 냄새, 좀 줄이던가 해라.


ㅋㅋㅋ 시끄러, 너도 폈잖아!


끊었... 아니. 그보다 너 때문이잖아 ㅡㅡ?


아, 그러고보니 그렇네. 고딩 때였지.. 그래도 그렇지, 왜 폈냐??


....


하아~ 고등학교 때가 그립네. 진녀도 생각나고.


... ..


일찌니랑 매일 놀러다녔었는데..ㅎ 너랑도 자주 놀았잖아?


그랬었지..


뭐야, 이 매마른 반응은? 나보다 너희가 더 친했잖아.
찌니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문자보냈을 때도 답장도 않하더니. 넌 여전하네.


... 응? 그거 네가 진녀폰으로 네가 보낸거 아니였어?


..어? 아니야~ 그때 일진녀가 너 얘기만 했었어.
너 머리 자른 날엔 막 쟤 괜찮아보이지 않냐고 그러고 너 지나갈 땐 갑자기 멋있다고 그러고.
그때 네가 문자를 봐도 반응이 없으니까 무안해해서 내가 너한테 문자 내가 보낸거라고 말한거야.


.... 그래..?


ㅋㅋㅋ 아, 진짜 반응이 없다니깐. 됐다. 말을 말자~!









나는 일진녀가 잠에 들었을 때 고백을 했고 일진녀는 내게 고백을 했었지만 그 사실을 나는 몰랐다.



거진 10년이란 시간이 지나서야 두 사람 중에서 나만 이 사실을 안 것이다.



그것도 당사자들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이다.






친구녀의 말을 듣고 일진녀가 내게 했던 행동들이 이해되었다.



처음 내게 말을 걸어주었을 때, 같이 급식실에서 밥을 먹자고 했을 때,



수업시간에 내 발을 밟고 발장난을 했을 때, 팬션에서 서로를 가졌을 때.



나는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그 사람의 시점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토록 무뎠던걸까.









서로가 서로를 좋아했었다.



그리고 둘은 두 사람 사이에 마치 어린 아이처럼 소꿉장난을 치듯이 주변환경의 잔해라는 모래로



환경이 바뀌고 시침과 분침이 한없이 제자리를 돌고 돌아가다 언제인가 모를 그때



서로가 다시 함께 할 수 있길 바라며 거대한 모래벽을 쌓았다.






우리는 몰랐다.



시간이 흐를 수록 세월의 풍파의 의해 그 벽은 더욱 굳건히 다져지고 뿌리내린다는 것을.









불을 켜기 전, 어두운 방안이 더욱 아늑할 때가 있다.



우리의 추억이 꿈과 같다면 그대로 불은 끈 채 잠들어 있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일진녀가 다른 누군가와 가정을 꾸리고 행복해질 때쯤,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 멋진 아들과 예쁜 딸을 낳을 때 쯤,



자식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노후의 여운을 즐길 때 쯤이라도



우리는 우리를 꿈 속에 가만히 놓아 두어야한다.






앞으로 서로가 마주친다면 아프기만 할테니까.






일진녀와 장례식장에서 만난지 2년이 지났다.



난 일진녀가 내게 꼭 말해주고 싶다던 말을 듣지 못한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이 미련이었다면 슬펐을 것이고 그 말이 이별이었더라면 그 또한 슬펐을테니까.



한 때는 일진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기꺼이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고통이 따른다하더라도, 일진녀를 영원히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한번만이라도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준다면 난 무엇이던 포기할 수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가는 것을 보곤 이해할 수 없었다.



나라면 저러지 않을텐데. 백년이던 천년이던 사랑할 수 있을텐데.



나는 결코 변치않는 마음을 간직할텐데.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이젠 일진녀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 조차 어렵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려고하면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는다.



일진녀의 모습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주로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같이 했던 추억들은 그나마 단편적으로 남아 몇 시간을 들여 떠올리며 느낌으로 풀어썼다.



내가 가장 가까이 했던 사람을 다른 사람의 기억에서 빌려온다.



만약 썰을 풀지 않고 몇 년이 더 흘렀다면 대부분의 기억을 잊은채



그저 막연히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그 시절엔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진녀가 고등학교를 자퇴했을 때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로를 위한 최선의 선택은 연애가 아닌 학업이었다.



내가 목표로 정한 대학교를 가고 일진녀가 복학이나 검정고시를 친다면



그 때 다시 우리에게 기회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에서야 알 것 같다.






학교를 다니지 않던 일진녀의 공부를 도와주기 위해서 부모님이 계시지 않을 때



같이 하룻밤을 보냈는데 일진녀가 잠들기 전 지친 표정으로 내게 말했었다.


군아.. 나, 머리 감겨줄래?


그 말을 듣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꽉 막히면서 울컥하더라.



머리를 감겨주는데 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털고 드라이기로 말리고서 머리를 손질해주었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선 쇼파에 앉혀놓고 그때 자주마시던



초코라떼를 타러 갔다 왔는데 그 사이에 자고 있더라.



그 날은 마음 한켠이 너무 답답하고 무거워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까 말했듯이 이제서야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알 것같다.



사소한 행동과 말 하나라도 그간 있었던 추억과 감정을 인해 소중하고 아련해진다.



우리의 끝이 어떨지 알고 있었기에 별것아닌 것에도 생각이 많아지고 의미가 커진다.






서로에게 잘못한 것이 많은 만큼 아름다운 추억도 많았다.



이제 없는 것이라면, 그때의 감정뿐이다.






장례식 이후, 일진녀와 몇 번을 마주친적이 있었다.



쇼핑장에서 한번, 길거리에서 한번, 또 한번은 일진녀 였는지 긴가민가한 한번.



그 모두, 나는 일진녀를 보았지만 일진녀는 나를 못 본채 지나갔었다.



그 때 순간적으로 나는 시선을 피할까 말까를 고민했었다.



지나가는 수 많은 사람들 덕분에 나를 못 봤을테지만..







이번 초겨울, 친남매처럼 지내던 중딩녀가 다리에 깁스를 해서 간병을 갔었다.



그때 첫 눈이 내렸고 중딩녀를 휠체어에 태우고 담요로 중딩녀를 꽁꽁 둘러매곤 병원의 뜰로 나갔다.



무척이나 추웠었는데 내리는 눈을 보자 추위도 싹 가실만큼 마음이 훈훈했다.



중딩녀를 위해서 눈사람을 만들어주다가 손에 동상이 걸릴 뻔했다.



중딩녀가 첫눈을 보면 소원을 비는거라고 하길래 그건 별똥별이 아니냐고 했는데



다리만 안다쳤더라면 아마 중딩녀에게 눈덩이로 맞았을 것이다.



어거지로 소원을 빌다가 딱히 생각나는게 없어서 기도하는 척만 했다.



중딩녀도 기도하다가 눈을 떠서 나를 보며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어보길래



너 녀석 다리 빨리 나으라고 했다.



쪼금 감동한 표정으로 쳐다보길래 머쓱해서 춥다고 병실로 들어보냈다.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에어컨 아래서 중딩녀가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과자를 먹을 때



쇼파에 앉아서 붉어진 손을 비비며 생각에 잠겼다.



소원을 빌 때 잠깐 일진녀가 떠올랐던 것 같기도 했지만,



그저 생각없이 시간을 보냈다.



왜 소원이 생각나지 않았을까.






친구들은 한달에 한두번 보는 것도 어렵지만 만날 때면 늘 예전이야기를 한다.



회사이야기도 하긴하지만 우린 고리타분한 얘기완 성격이 맞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동내에 사건이 터지면 항상 경찰이 전화왔던 얘기, 썸타던 얘기, 사고친 얘기들.



그 중에서 일진녀의 얘기도 가끔 나왔다.



난 그럴때마다 입을 닫았다.






지치는 날엔 여학생은 청순한 모습을 간직한 채 날 보듬어 주었다.



이제 여학생은 내게 있어 전부이자 하나이다.



일진녀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 주었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해주었다.



그땐 어리고 모르는 것이 많아서 서툰 행동으로 많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그렇게 상처를 주었지만 일진녀는 내 곁에 머물러주었다.



그리고 졸업여행 때, 나는 일진녀의 심장에 못을 박았다.



일진녀와의 많은 경험 덕에 여학생과 내가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었지도 모른다.






내 기억속의 일진녀는 아련한 사람으로 남았다.



일진녀의 기억 속에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일진녀와 서먹서먹해지고 난 뒤로는 내가 못다준 것들을 다른 누군가가 해주길 바랬다.



이제 그게 틀렸다는 것을 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고등학교 시절, 우린 누구보다 가까웠고 누구보다 멀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때로는 미웠고 때로는 좋았었다.



이제 이런 추억을 다시는 경험하지 못하겠지만,



후회는 없다.









어렴풋이 나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던



앳된 모습의 일진녀를 떠올릴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한다.






'행복하다' 가 '행복했었다' 로 바뀌어도



행복을 경험한 것은 같기에.



그렇기에 그 끝이 와도 비극은 아니기에.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