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와 집의 거리가 멀어서 버스를 타고 등, 하교를 했었다.



중학교 때 아버지의 사업 문제로 자주 전학을 다녔고 살가운 성격도 아니어서



고등학교 주변이나 집 인근에 친하다고 말할만한 친구들이 없었다.



몇 몇 동창들이 있었지만 그리 친하지도 않았고 학교도 달라서 혼자라고 해도 무리가 없었다.



입학식 때 일진녀를 보지 못했었는데 일진녀를 처음 본 날은



이른 아침부터 학생들 한 무리가 정거장에 우르르 모여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입학 초기라서 아는 애들도 없고 복잡한게 싫어서 매일 등교시간을 늦춰서 사람 수가
보다 적은 버스를 타곤 했다.



그럴 때 마다 버스 뒷자석에 자주 앉는 여자애랑 마주치곤 했었다.



BB크림을 진하게 바르고 입술을 붉게 칠했는데 붙임머리도 했었다.



생김새도 까칠하게 생겨서 눈을 마주칠 때마다 뻘줌했기에 시선이 가는 것을 참았었다.



블라우스는 몸에 딱 붙고 치마는 짧게 입었는데 키도 적당히 크고 몸매도 좋아서 맵시가 참 보기 좋았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면 애가 먼저 내리길 길다렸다가 천천히 뒤따라갔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데 앞서 가면 애가 나를 계속 쳐다볼거란 생각에 신경이 쓰였었다.



그렇게 몇 주 정도가 지나서 평소처럼
거리를 두고 일진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애가 가다말고 갑자기 멈춰서있었다.



왜 저럴까 궁금했지만 못 본척하고 앞만 보고 지나가려는 찰라, 일진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야, 너 담배있어?






당황한 나는 뻘줌하게 서있다가 우물쭈물거리며 담밸 피지않는다고 말했다.



일진녀는 미간을 찌푸리고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쪽으로 와달라고 말했다.



대화내용을 듣고 친구한테 담배를 얻어피는거 같아서 먼저 가려고 했는데



일진녀가 어디가? 기다려줘..라고 말했다. 톤은 높은데 청아하고 고운 목소리였다.






그래서 뻘줌하게 몇 분 동안 서있었는데



서로간에 아무런 말도 주고 받지 않았다. 소리라면은 지나가는 차소리 밖에 없었다.



쭈그려 앉아서 폴더폰만 만지작 거리던 일진녀가 일어나서는 옆에 있던 골목에 가있자길래



으응..이라 말하며 따라갔다.



곧 지각할거 같길래 자연스럽게 교문에 있을 학주쌤이 떠올라 막막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여자애랑 같이 이 시간에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서로 쭈그리고 앉아서 마주보고 있다니



설레이기도 하고 기분이 참 묘했다.



그러다가 일진녀의 친구가 왔는데 떡칠한 화장에 머리가 푸석푸석해보였다.



내 눈으로 보기엔 생김새가 나쁘진 않았지만 아무리봐도 일진녀 보다 못했다.



둘이서 격양된 모습으로 친근하게 얘길 나누더니 꺄르륵 거리며 담배를 폈다.



가끔씩 빵빵 터트리며 웃긴 얘길하다가 일진녀가 나에게 갱군아, 너는 담배안펴? 라고 질문했다.



명찰을 봤겠지만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는게 신기하고 내심 좋았다.



나는, ...원래 담배 안피는데 라고 답했다.



그러자 일진녀의 친구가 남자샛ㄲ가 담배도 못 피냐? 라 말하며 빙글빙글 웃었다.



순간 멘붕이 왔다. 왠지 모르겠지만
애네들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아서



벌떡 일어나 일진녀의 친구에게 걸어가서
정색한 표정으로 사실 끊었다고 한 개빌 달라고 말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일진녀의 친구는 에이~ 진작 말하지,
누나가 하나 쏠게! 라고 말하며 말레를 건내주었다.



그땐 몰랐지만, 말보루 레드는 독한 담배다..



세상이 하애져서 입에 물고 가만있으니까 라이터 없냐길래 두고 왔다고 말했다.



일진녀의 친구는 자기 입에 타들어가는 담배를 물고 있는 상태에서



내 얼굴쪽으로 자기 얼굴을 들이댔다.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있으니까 일진녀의 친구가 뭉게진 발음으로



야, 빨리~ 라고 말했다. 그때 어림짐작으로 알아채고 일진녀의 친구가 입에 문 담배에



내 담배 끝을 갖다대며 쭉 들이켰다.



담배키스라는 거다.



그리고 나서 바로 폭풍과도 같은 기침이 나왔다.



여자애들이 날 보고 빵 터져서 웃는데
정작 나는 죽을 지경이었다.



몇 모금을 더 폈는데 괜찮아진 것 같고 텁텁하고 진한 냄새 말고는 별게 없길래



태연히 앉았다. 셋이서 쪼르륵 둘러 앉아 뽀끔뽀금했는데 반쯤 피니까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좁아지며 세상이 흐릿하고 새까매졌다.



너무 어지럽고 토할것 같아서 일어나지도
못하겠는데 억지로 안 그런척 참았다.



담배를 다피자 여자들이 늦었다며 향수인지 방향제인지 모를 무언가를



가방에서 꺼내 칙칙 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우 일어나서 애네 꽁무니 쫒아 걸어가는데 내가 걷는건지 모르겠더라.



세상이 핑핑도는데 발을 헛디딜뻔하기도 했다. 술을 과하게 마셨을 때 처럼..



아홉시 가까이 되니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반에 들어가서 엎드리자 눈을
감아도 세상이 핑핑돌았다.



화장실에 토하러 갈까말까를 계속 고민하다, 점심시간 즈음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학교에 급식실이 따로 있었는데 자유롭게 앉아서 먹을 수도 있었지만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따로 구분지어 눈치껏 앉아서 식사를 했었다.



밥을 먹으러 걸어가는데 일진녀가 내게 걸어왔다.


갱군아, 밥 같이 먹고 식후땡 하러갈래?


식후땡이 뭔지 몰랐지만 지체없이, 생각없이 반사적으로 아.. 그래! 라고 말했다.



...둘이서 먹는 줄 알았는데 걔 친구도 왔다.



다들 남녀가 따로 따로 많은 수가 모여 바짝 붙어서 식사를 하는데



우리만 셋이서 같이 밥을 먹고 있으니까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게 느껴졌다.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대한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다. 막 음식 흘리면 민망하니까.



숫가락으로 국을 떠먹을 때도 국이 흐를 까봐 조금만 떠서 소리 안나게 먹고



젓가락질도 천천히 하고.. 그러다 눈 마주치면 다 티나지만 괜히 못 본척하고..



애들이 밥을 진짜 천천히 먹어서 점심시간이 거의 끝날 때 즈음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난 벌써 이십분도 전에 다 먹고 민망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렇게 대망의 식후땡 후에 토가 쏠리는 걸
참아가며 또 엎드려서 낑낑거렸다.



이런걸 어떻게 필 수 있는 걸까? 내 몸에 문제가 있는 건지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한번은 늦잠을 자서 엄마한테 혼나고 부리나케 등교를 했었는데



뭐, 갈 수록 지각을 많이 하기 시작했지만..



편의점에 들려 비닐봉투에 빵 2개랑 우유, 군것질거리 몇 개 사서 등교를 하는데



9시가 다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대충 계산해보니 수업시간 전엔 들어갈 수 있을거 같아서 여유롭게 걷는데



어쩐지 먹구름이 꼈다 싶더니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산이 없어서 중얼중얼 거리면서 뛰려고 하는데 학교 앞에서 일진녀와 마주쳤었다.



먼저 간단한 인사를 하고 일진녀도 우산없이 비를 맞고 있길래 학교 앞에 있는 작은 빌라로 향했다.



정문까지 뛴다면 5분, 걸어가면 1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비가 맞으면 아플정도로 엄청나게 쏟아졌고 앞도 안보일정도로 퍼부었기에



너나 할것없이 가까운 빌라 입구로 비를 피했었다.



옷에 있는 물기를 털어도 축축함이 가시지 않더라.



일진녀를 봤는데 머리카락이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투덜거리면서 쭈그려앉아 두팔을 몸에 두르고 콜록콜럭 거리더라.



그렇게 두 사람 다 아무 말없이 시끄럽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진녀야.


응?


밥 먹었어?


아니..


나도 안먹었는데, 이거 같이 먹을래..?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우린 간식거리를 먹었다.



빵이 좀 눅눅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런건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있고 분명 지각할게 뻔했지만 일부러 지각에 대한 얘길 꺼내지 않았다.



일진녀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 담담하게 있었다. 걱정스러우면서도 들뜬 기분이었다.



몸에. 물기가 있어서 그런진 몰라도 살짝 닭살이 돋더니 쏴-한 기분도 들었다.



꾸역꾸역 빵을 목구멍이로 넘기자 일진녀가 담배를 꺼내서 피더라.



그리곤 날 보더니 넌 안펴? 라고 묻길래 오면서 폈다고 말했다.



쪼그려 앉아서 담배를 피는 그 옆모습이 왜 그땐 그리도 예뻐보였을까..?



일진녀가 담배를 끄고는 그만 들어가자길래 아쉬웠지만 그러자고 했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리고 있어서 또 옷이 다젖을 것 같았다.



마의를 벗어 툴툴 털고는 일진녀에게 건냈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쓰고 달려가고 싶었지만 거기까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진녀가 괜찮다고 했지만 난 어짜피 물 먹은거라서 신경쓰지 마라고 말했다.



그렇게 마의를 건내주고 양주머니에 손을 넣고 빗속으로 먼저 걸어갔다.



속으로 와.. 나 존ㄴ 멋진듯..!! 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진녀도 뒤에서 쫄래쫄래 따라왔고 같이 교실에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갔다.



선생님은 물먹은 우릴 보고 측은했는지 크게 혼내진 않았고



일진녀는 일진녀의 친구들이 모여와서 옷을 툭툭 털어주고 쉬는 시간에



가방에서 드라이기랑 고데기를 꺼내서 헤어스타일을 바로 잡아주더라.



난 창문에 마의를 널어놓았다.



애들 세명이 붙어 일진녀를 화장시키고 꾸며주는데 일진녀가 흘깃흘깃 나를 쳐다봤다.






어느덧 하교시간이 되었다.



하교 때에도 일진녀랑 같이 갈까하는
기대감에 괜시리 애 주위를 맴돌았는데



그냥 자기 먼저 걸어가더라. 따라가서 말이라도 걸어 볼까라고 생각했지만



자신감이 부족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정거장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올거란 생각에 처음으로 정거장까지 뛰어가보았다.



정거장은 하교 하는 애들로 붐비는데 아무리 기다리며 찾아봐도 일진녀는 보이지 않더라.



그때 든 생각이 나처럼 집에 바로 가지않고 당연히 어디론가 놀러갔겠지..였다.



생각해보니 내가 참 한심해서 다음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창밖에 일진녀가 걸어가는게 보였다.



지나가는 짧은 순간에 그 애 얼굴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일진녀의 옆에는 우리학교 교복을 입은 남자애가 있었다.






무언가 꽉 막힌 기분이 들었다.






털컹 내려앉은 가슴, 혼자 머리속으로
여러가질 상상하다가 생각을 멈추었다.



내가 제 애인도 아닌데 무슨..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다. 평소에는
늦게 등교해서 걔를 보았지만



이번에는 일찍 등교를 해서 학교에
먼저 들어가버렸다.



수업 도중에 나도 몰래 일진녀를 자꾸 힐끗힐끗 쳐다보기 시작했다.



한번은 선생님이 갱군아 일진녀한테
꿀 발라놨니라고 말하더라.



순간 민망함에 대꾸없이 어버버거리니까 반애들이 나랑 일진녀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정작 일진녀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진녀를 몰랐던 시절로 돌아왔다. 그저 서로 신경쓰지 않고 같은 학교 애,



버스타면 있는 애 사이로 돌아간 것이다.



밥 한끼 같이 먹은 걸로 알게 됐다고
하기도 좀 그렇지만..



애초에 애랑은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하교를 하며 모퉁이를 도니 일진녀가 불쑥 튀어나왔다. 인사를 해야하는데 때를 놓쳐서 봤는걸 뻔히 아는데



못본 것처럼 내 갈길을 갔다. 하지만 일진녀와 가는 방향이 같아서 서로 옆에서 같이 걸어가고 있더라..



지금이라도 말을 걸어볼까 안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뻘줌한데..



혼자 잡생각을 하다가 같이 옆에서 걷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완전 손발이 베베꼬였다.



그러다가 나도 몰래 말이 튀어나왔다.


일진녀야, 너 남자친구있어?


진정 내가 뱉은 말인지 의심이 들었다. 왜 하필 많고 많은 말중에 가장 최악의 말을 꺼냈을까.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고 딱 하루 얘길 한 사이인데 이런 말을 꺼내게 될 줄이야.



일진녀는 놀랐는지, 뜬금없었는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 응ㅋㅋㅋ


아... 있구나. 짐작은 했지만 직접 들고나니 후련해야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언제 올지 모를 어떤 누군가를 홀로 한참동안 기다리는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표정관리를 못하고 이상한 표정으로 있으니까 일진녀가 말을 꺼냈다.


넌 여자친구 있어?


아, ... 있지.


진짜? 어디 사는 애야?


어? 아.. 근처ㅎ


그래? 이름이 뭔데?


아.. 김여자야. （가명）


..이름 이쁘네.


나도 모르게 엄마 이름을 꺼내며 없는 여자친구를 만들어냈다.



그냥 사실대로 없다고 하면 됐지만 뭔가 애한테 연애경험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까봐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이름이 이쁘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나는 먼저 간다는 말도 없이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평소에 이름 이쁘단말 많이 들어?






그날 이후 더이상 어색해질거 같지 않던 사이로인해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일진녀를 처음 본 날 우리가 어울린것은 단순한 심심풀이 장난이었나 싶기도했다.



나는 일진녀를 그저 먼 발치에서 지켜만 봤다. 그리고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새 학가기 끝나갈 무렵, 체육시간 때 무릎이 안좋아서 홀로 교실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교실문을 열었는데 텅빈 교실에 일진녀
혼자서 자리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난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다가
괜시리 어색해질까봐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근데 막상나오니 할 것도 갈 곳도 없어서 복도를 거닐며 학교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학교 앞에 마트가 하나 있었는데 군것질이 땡겨서 몰래 간식을 사러갔다.



음식품을 고르다가 눈에 들어오는 과자가 보였다.






일부러 교실문을 소리내며 쿵-하고 여니까 일진녀가 눈을 감고 고갤 빼꼼히 들더니 실눈을 뜨며



끄응.. 하는 소릴 내면서 내 쪽을 바라봤다.



이때다 싶어 작게 기침소릴 내고 걔 자리로 다가가서 음료랑 과자를 건내주었다.



일진녀가 평소에 먹던 과자이다.


갱군아 왠 거야..?


곧 점심인데 너 밥 안먹을거 같아서..


뒤쪽으로 갈수록 말을 얼버무렸다.

일진녀는 어..?? 라며 놀라는 표정으로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창가에 따스한 빛줄기가 걔의 얼굴을 비추는데 반짝반짝 빛나는거 같았다.



그 말하고 바로 뒤돌아서 천천히 교실 밖으로 걸어나왔는데 나오고나서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가슴이 콩닥콩닥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이때 같았다. 내가 일진녀를 좋아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건.






점심먹고 교실에 돌아왔는데 걔 자리가 비어있었다. 수업을 끝마칠때까지
계속 신경쓰였다.



누구도 별말을 안하니까 혼자 계속 일진녀 생각만 하다가 학교를 나섰다.



걸어가는데 혹시나 일진녀랑 마주칠까, 이 골목 저 골목 뚫어지게 보았다.



그러다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어 그만두었다.



그 다음 부터 걔 등교 시간에 맞춰서 같이 가려고 매일 정거장에 늦은 시간에
나와서 버스를 타곤했다.



잘 마주치지 않더라. 따로 차를 타나 싶었다.



그 다음부터 학주한테 자주 지각한다고
혼났기에 일찍 등교를 하기 시작했다.



교실에선 그 애를 매일은 아니어도 자주봤는데 걔 주위에 기쌘 애들이
많아서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어느날엔가 등교 때 우연히 마주쳤을 때 일진녀가 처음으로 내게 인사를 건내주었다.



갱군아라고 다가오는데 멍청하게 으..윽 이라며 대답과 비슷한.. 의사표현을 했다. 하..



일진녀가 알을 다써서 그런데 폰 좀 빌려달라더라. （당시엔 데이터가 알이었다. 문자 15알）



그래서 어? 어어.. 하고 재빨리 건내주니까 어디다가 전화하더라.


나야 일찌니. 너 지금 후문쪽으로 와. 어? 어디라고? 야! 왜 혼자갔냐! 씨이..


후문엔 개구멍이 있었는데 담벼락을 넘어가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여자들은 담타기란 결점 때문에 잘 이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애가 통화를 끝나고 문자를 쓰는지
뭘 더 톡톡거리면서 만지고서



내 번호야. 라면서 내 폰을 돌려주었다. 말없이 폰을 건내받는데 걔 손가락이랑 닿게되었다.



정전기가 손가락 끝에서 부터 간질간질하게 팔을 따라 쭉 올라왔다.



폰을 받는 상태로 잠깐 멈춰있었는데 걔가 나를 지나쳐가면서 가자고 말했다.



난 걔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고개를 땅으로 묻고서..



그렇게 일진녀를 담 위로 올려줘야하는데 그리 높진 않았지만 올리려면 걔를 터치해야 됐었다.



일진녀는 아무렇지 않게 새침한 표정으로 올려달라는 말을 꺼냈다.



나도 애써 아무렇지않게 어. 라고 말한 다음에.... 망부석처럼 얼어있었다.



그걸보고서 뭐해? 이러길래 어.. 어? 라며 늦게 행동을 취했다.



걔 등에 맨 가방을 두 손으로 밀며 위로 띄어주었다. 당연히 잘 안올라갔지만.



그러다 걔가 힘에 겨웠는지 떨어지려
하기에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허리를
잡아버렸다..



순간 향기가 풍겨왔는데 자꾸 맡아보고 싶은 좋은 향이었다.



두 사람 다 겨우 담을 넘었는데 남자가 왜 이렇게 힘이없냐는 일진녀의 말에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장난친다고
네가 무거운거야 라고 말해버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차라리 애가 내 뺨이라도 때려줬으면하고 바랬다.



근데 일진녀는 막 웃으면서 뭐래~ 라고 답해 주었다.



다행이다 싶어서 같이 웃었는데 그래도
혹시나 기분상하지 않았을까 싶어
괜스레 미안했다.



그렇게 둘이서 걷고 있으니까 등교하는 애들이 하나 둘씩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쟤네 둘이 왜 같이 다니지? 라고 소근거리는게 느껴져서 이만 가본다고 말했다.


지금 놀러 가는데 너도 같이가자!


일진녀의 말 듣고 설레였는데 내 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라서 일진녀에게 아는 번호냐고 화면을 보여주니까



아, 아까 전화했던 애야 라고 하더라.



통화가 끝나고 친구가 온다길래 기다려주었다.


나는 별 말없이 있었고 걔는 심심했는지 가끔씩 나한테 이런저런 얘기와 질문을 해주었다.



난 그걸 단답으로만 대답했다..



내가 얼마나 답답해보일까란 생각에 옆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는것 같은 기분이들었다.



그래.. 나도 쟤한테 살갑게 말을 걸어보자! 라고 다짐했는데 막상 할말이 떠오르지 않아 낑낑댔다.



그때 정거장에서 내게 담배를 가르쳐준 일진친구녀와 일진녀랑 같이 걸어갔던 남자애가 이리로 걸어왔다.






일진녀와 어울리던 남자애가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짧은 투블럭 머리는 무스를 발라 약간 모히칸 스타일이고 말투나 목소리, 몸을 보니 상남자였다.



매처럼 날렵하고 뚜렿하게 생겨서 쉽사리 쳐다보지도 못할 놈이었다.



이녀석이 일진녀와 나를 번갈아 가면서
보더니 야, 애 누구냐? 라고 말했다.



내가 가만히 있자 일진녀가 아~ 있어 친구. 라고 말했다.



내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때 그놈이 나를 노려보더니 왠지 한심하다는듯이 웃었던 것 같다.



기분이 나빴지만 표현은 못했다.



일진녀가 야 우리 그만가자~ 라면서 그놈이랑 팔짱을 끼고 가버렸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일진녀 친구가 걔들을 따라가려다가 날 보며 너는 안가? 라고 물었었다.



일진녀도 그 말 듣고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 집에 늦게 들어가면 안돼 라고 말해버렸다.


......



이미 멘탈이 붕괴되어 버린 나로써는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해도 이건 너무 병ㅅ같은 말이었다.



그런말을 하고 나서 나 혼자 분을 삼키며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일진녀와 그놈이 히히덕 거리며
놀 생각을 하니 오장육부가 뒤틀리더라.



집에 돌아와서 매일 먹던 저녁밥도 거르고 방안에 박혀 베개를 잡고 혼자만의 심란함의 빠졌다.



그렇게 밤잠을 설치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문자가 한통 와있었다.



바로 일진녀 한테서 온 문자였다. 삼십분만 늦게 잤어도 읽을 수 있었기에 아쉬워하며 내용을 읽어보았다.






나 너 좋아해.






문자받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게 뻥져있었다.



믿기지 않아서 볼을 잡아 당기다가 뒹굴었다. 아픈걸 보니 진짜인가 싶어 혼자 낄낄거려 보았다.



이렇게 빨리 사귈 수 있을까..



답장을 눌러서 문자를 쓰다가 어떤 말을
써야할지 몰라서 낑낑거렸다.



사실은 나도 네가 좋은거 같애. 라고 썼다가 머릴 한번 긁적이고 지웠다.



정말이야? 라고 적었다가 뒤를 이을 글이 생각나지 않아서 이것도 지웠다.



그렇게 방방대다가 아무런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막상 답장을 보내고나면 되게 떨리고 기분이 이상할 거 같아서였다.



아직 애 번호에 이름도 입력하지 않았었기에, 뭔가 앞뒤가 막 섞인 관계같았다.



그렇게 아무 말없이 토,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에 등교를 한 뒤 교실에 박혀있었다.



잠시후 걔도 등교를 해서 자리에 앉았는데 내게 무슨 말을 건내려 올까봐 일부러 앞만 보고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지나고 수업이 끝나가는데도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근데 쉬는 시간에 일진녀의 친구가 내게 다가왔다.


갱군아 전에 일진이한테 문자 한통 안왔어?


어..? 아.. 왔는데


왜 답장 안해줘?


아... 내가 문자를 잘 못써서...


ㅋㅋㅋ그래? 그거 내가 보낸거야.


어..?


장난이야. 장난ㅋㅋㅋ 담배나 하나 피자.


없는데..


줄게~ 빨리 가자!


충격이었다. 주말동안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하며 오늘을 기다렸는데..



친구가 보낸 장난문자였다니 허탈하고 어이없고 심란했다.



그렇게 체육시간이 되어 피구를 했는데 나는 얼이빠져 넋나간 사람처럼 에... 하고 있었다.



두명씩 짝으로 피구공을 피하는 것이었는데 선생님이 일진녀랑 나를 같은 짝으로 지어주셨다.



다시 정신이 들게된 계기였다. 일진녀를 슬쩍 보니까 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라인 안에 들어가서 날아오는 공으로 한짝씩 탈락하고 있었는데



져도 좋으니 일진녀가 공에만 맞게 하지 말잔 생각을 했다.



손을 잡고 있다가 놓으면 탈락했기에
오히려 이 룰을 이용해 손을 더 꼭 잡았다.



이 시간이 길었으면하고 바랬다.



역시나 공이 우리쪽으로 날아왔고 내가 일진녀를 대신해서 공을 맞았다.



비록 우리팀이 졌지만 일진녀를 지켰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하교를 했다.



골목에 남학생 둘이서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같은 반 애였다.



걔네가 나를 부르길래 갔더니 내게 혹시 일진녀랑 사귀냐고 묻더라.



학교에서 조용히 지내는 애가 일진녀와 걔 친구랑 어울려 노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거 같았다.



나는 별 관계 아니라고 말했다.



그 애가 일진녀에 관한 얘기를 해주었다. 중학교 때 어디서 잘 나갔느니,



다른 고등학교 일진남이랑 노느니 등등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었다.



그렇게 그냥 듣다가 담배를 건내길래
같이 폈고 나중에는 친해져서 걔들이랑
어울려 다니게되었다.



그러다 밤에 이녀석들과 술을 사들고 야외에서 음주를 하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친구 한명이
시끄럽다고 패러간다길래



같이 따라갔는데 그곳에서 일진녀랑 그 무리들이 술을 먹고 있었다.



일진녀 무리의 한녀석이 내 친구를 보고 넌 뭐냐? 라고 말했고 친구는 언짢았는지 넌 뭔데? 라고 받아쳤다.



분위기가 안좋아졌는데 우리쪽이나 일진녀쪽이나 서로 알고 있는 애들이 있어서 싸우지는 않았다.



그렇게 돌아가려고 하는데 일진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갱군아, 우리 술 같이 마실래?


옳다구나 싶어 친구놈을 설득해서 이쪽 무리와 합쳤다.



나는 일부러 앉을 자리를 찾는척 하면서
일진녀 옆에 가서 앉았다.



일진녀도 싫지는 않았는지 내색없이 있고..



술을 마시다가 소변이 마려워서 친구랑 같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노상방뇨를 하고 있는데



일진녀친구가 일진녀의 부축을 받으면서 떡하니 나타났다.



순간 급히 바지를 꼬올리다가 쪼금 찔끔했다...



일진녀 친구가 웩웩 거리길래 자릴 비켜줬다.



그렇게 술게임이 시작됐고 접어게임을
하는데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애인있는 사람은 접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일진녀가 손가락을 접었다.



덕분에 벌칙주에 일진녀가 걸렸고 애한테 애인이 있다는 것과



내가 일진녀에게 벌칙주를 마시게 한다는 죄책감에 가시방석에 앉은 것 처럼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일진녀가 벌칙주를 반 쯤 마시고나서
안좋은 표정으로 있었는데 눈치있는 애가



흑기사! 흑기사! 하면서 대신 벌칙주를 마셔줄 사람을 요청했다.



나는 당연히 내가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손을 들려했는데



일진녀랑 같이 다니던 그 놈이 먼저 손을 들고 남은 벌칙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러자 그걸 지켜보고 있던 일진녀. 친구가 에휴.. 나도 남친있었으면 다 마셔줬을텐데~



라고 말했고 일진녀는 호응을 하며 박수를 쳐주었다. 역시 이놈은 일진녀랑 사귀는 애였나보다.



그렇게 나 혼자 술을 퍼먹다가 뻗어버렸다. 애초에 술을 많이 못 마셨다.



눈을 떠보니 집이었고 방학까지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애초에 싸움이랑은 거리가 멀었는데
기가 쎈 애들과 어울리고



매일 밤에 돌아다니다 보니 학급친구들이 나도 그런 애인줄 알더라.



그래서 학교 생활은 편한편이었는데 내가 마음이 좀 여린편이어서



친구들이 다른 애들 삥뜯거나 괴롭히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구석에 박혀있었다.



그리 시간이 흘러 일진녀와도 많이
친해져서



그냥 별 뜻없이 선듯 먼저 실없는 말을 건내도 이런저런 얘기로 주제가 안끊기고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일진녀랑은 보통 일주일에 못해도 한두번씩은 술자리를 가졌던 걸로 기억한다.



어느덧 방학시즌이 되서 아침 늦게까지
자고 오후에는 친구들과 시내를 거닐고



저녁에는 늘 그렇듯 어느 골목이나 외진 장소에서 술을 퍼먹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지내고 있다가 한날은 친구가 고깃집에 가고 싶다해서



여자애들을 불러서 모 고기집에 간적이 있었다.



남녀 두명씩 앉아서 장난을 치며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우리쪽으로 걸어왔는데 자세히 보니 일진녀였다.



똥꼬머리라고 길게 한가닥 내려온 구렛나루랑 앞머리 빼고는



전부 동그랗게 머리 뒤쪽으로 말아올린
헤어스타일을 했는데



몇 가닥 목선을 따라 삐져나온 머리카락들이 예뻐보였다.



이곳에서 만난게 신기해서 먼저 인사를
했는데 애도 웃으면서 안녕- 이라고 해주더라.



왜 그랬을까, 아무것도 아닌데 되게 설레었다.



입술에 연분홍색 립스틱을 바른거 같은데



안쪽으로 들어갈 수록 진붉어지는 게 보기만 해도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그때 일진녀가 내 옆자리에 와서 앉는데
방금전까지 웃고 떠들던 여자애들이
한 순간 조용해지더라.



친구랑 나만 일진녀와 대화하고 걔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일진녀가


데이트왔어?


라고 물었는데 친구가 갑자기 어, 밥 먹고 있다가 영화보러 가려고 라고 말했다.



친구가 미워졌다. 왠 데이트? 사귀지도 않을 애들인데.. 그것도 일진녀가 듣고 있는 앞에서..



그러자 일진녀가 친구를 보면서


어머 우리 친구 （가명） 다 컷네? 우리 갱군이도 잘 부탁해~


라고 말하고선 가버렸다. 나는 멘붕이 와서 어버버거렸다. 결론적으로 나는 아무런 말도 않하고 있었으니



그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남은 거라곤
일진녀가 일어나면서 남긴 좋은 향기
뿐이었다.



고기가 나오고 입으로 들어 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꾸역꾸역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우리가 앉은 자리에서는 안보여서 몰랐는데 나가는 길에 보니



일진녀랑 흑기사를 해주던 일진남이랑 둘이서 고기를 먹고 있더라.



그 자리에서 굳어서 잠시 멍때리고
있으니까 친구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뭐하냐고 묻더라.



친구는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일진녀랑 일진남쪽으로 시선을 옮겨 바라보았다.



그렇게 처음과는 다르게 여자애들에게
형식적으로 대답만 해주면서 영화를 보다가 헤어지고



친구랑 둘이서 야외에서 똥술을 빨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종이컵에 소주를 꽉 따르고



꿀떡꿀떡 먹고 킇윿얿엌...하고 뒹굴뒹굴 거리니까 친구놈이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더니 하는 말이


야.. 너 일진녀 좋아하지?


뭐? ..ㅁ 뭔 소리하냐ㅋ


다 알어 이 새끼야ㅋ 형을 속이려고?


아니라고-


라 답했는데 지금까지 나 스스로도 걔를 좋아한다고 인정한적이 없는데



갑자기 다른 누구에게 걔를 좋아한다고
말하려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랬더니 친구가 종이컵에 소주를 꽉 따라주고 자기도 다 채우더니



씩 웃으면서 원샷! 이라고 말했다.



또 그거 꾸역꾸역 받아 먹고 땅바닥을 몇번 뒹굴거리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


야.. 내가 일진남 패줄까?


어? 왜?


둘이 헤어지게ㅋ


야 됐다. 헛소리 말고 술이나 먹자. 그리고 괜히 걔랑 나랑 엮지마라.


왜? 좋아하면서.


좋든 싫든 내가 알아서 한다.


새끼, 다 컷네. 자- 원샷!


어느새 종이컵에 소주가 가득 담겨있었다. 그렇게 마시다보니



친구와 나는 둘다 꽐라가 되어 서로 부모님 안부를 묻고 있었다.



그렇게 비틀대면서 집안으로 들어오니
부모님이 또 어디를 나갔다 오냐고
핀잔을 주었다.



요즘들어 전에라면 안했을 일들을 하다보니 부모님도 걱정이 많으셨지만



나는 나쁜짓은 하지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그렇게 일진녀와 가까워질 수록 조금씩 멀어져가는 미묘한 사이가 계속되었다.



방학이 중간 즈음으로 흘러갈 때 친구 몇 명과 함께 애들을 모아서 강원도에 있는 팬션에 놀러가게 되었다.



근데 이게 사람을 타고 소문이 퍼지다보니 일진녀의 귀에 까지 들어갔고



계획과는 다르게 일진녀 무리들도 같이 가겠다고 청해왔다.


이말을 들었을 때 귀찮을 것만 같던 여행이 기대되고 기다려졌다.



더욱 좋은건 일진남이 무슨 사정에서 인지 오지 않는단 거였다.



일진녀를 만났을 때는 딱 붙는 원피스에
단화를 신고 리본이 딸린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내가 태어나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이쁜 모습이었다.



팬션은 산꼴에 있어서 택시를 타고 더 들어가야 했는데



주변에 계곡도 있고 무더운 날씨와는 다르게 선선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산뜻한게 좋은 장소였다.



팬션도 2층에 나름 봐줄만한 시설이여서 마음에 들었다.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잠시 쉬다가 2층 발코니로 가서 담배를 입에 무는데



누가 내 담배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어엉ㅇ? 하고 쳐다보니 다름이 아닌 일진녀.



그 자리에서 굳어져서 가만히 쳐다봤는데
일진녀가 가까이 있었기에 눈동자가
크게 보였다.



눈끼리 마주치고 있는데 세상이 멈추는 것 같아 민망했지만 시선을 피하고 싶은 생각보다



애가 어떤 생각을 하던지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다 그쪽이 먼저 풉하고 웃길래 나도 따라 웃다가 담배연기 때문에 포풍콜록콜록 거렸다..



그렇게 발코니 끝에서 둘이 쪼그려 앉아
넓게 펼쳐진 산등성이와 흐르는 계곡을
바라보며 조용히 뻐끔대고 있었다.


일진녀야 그거 알어?


응? 어떤거?


나 담배 가르쳐 준 사람이 너야.


아.. 진짜네? ㅋㅋㅋㅋ 여자한테 담배를 배웠네 갱군이?

ㅋㅋㅋㅋ 으..


그렇게 옛날 일들을 회상하며 웃고 있었다. 하필 이럴때만 왜 이렇게 담배가 빨리 타들어가는지..



일분도 안됐을거 같은데 벌써 일진녀가
일어나더라. 나도 따라 일어나려다 포기하고 그냥 앉아있었다.



이 기분을 조금 더 간직하고 파서 그랬던 것 같다.



일진녀가 먼저 내려간단 말을 하고
가버리고 나서도 혼자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친구가 전화를 걸어줘서 내려가 보니 다들 계곡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슬슬 덥던 터라 다들 별 말없이 우르르 물가로 몰려갔다.



깊은 곳은 목까지 물이 차올랐는데 대체로 허리를 조금 넘는 깊이라서



무리 없이 다들 들어와 물장난을 쳤다.



그러다 일진녀를 슬쩍 보니 뽀얀 피부에 젖은 머리카락이 햇빛에 비추어져 빤짝이고 있었다.



친구들은 여자애들에게 장난을 친다고
쫒거나 도망다니고 있었고 저 멀리에 가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에는 일진녀와
나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일진녀 쪽으로 가니까 애도 내가 자기를 물에 빠뜨릴거란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렇게 허리 높이까지 오는 곳에서 일진녀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무표정이 었던 둘이서 서로를 바라만 보다가 슬쩍 서로 미소를 지었다.


빠뜨리려고?


음, 보고?


그게 뭐야ㅋㅋㅋㅋ


손을 쭉 내미니까 일진녀가 작게 꺄- 거리면서 나의 옆쪽으로 돌아왔다.



이때다 싶어 일진녀의 팔을 잡았다.


꺄ㅋㅋ 으으! 왜 이래~


으쌰!


일진녀의 팔을 붙잡은 상태에서 내 몸 쪽으로 힘껏 당기니



일진녀의 등이 내 앞쪽으로 딱 달라붙어져서 내가 뒤에서 애를 안은 모양이 되었다.



그때 온몸으로 뭔가 포근한 느낌이
들어 쭈삣쭈삣했다. 그렇게 또 정지...



애는 자기를 물에 빠뜨리게 하는 줄 알고 조마조마하며 가만히 있었고



나는 기분이 묘해 가만히 있었다..



막상 들어서 빠트리려하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더라.



그렇게 가만히 안고 있기만 했다.



그러다 걔가 민망했는지 군아..? 뭐해..? 라고 고개를 돌려 물어봤는데



바로 내 얼굴 앞에 걔의 옆모습이 보이니까 나도 이제는 민망하다 못해 부끄러워서



아.. 막상하려니까 너 물 먹을거 같아서...
라고 말하면서 놓아주었다.



그랬더니 애가 딱 붙은 상태에서 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더라.



그래서 아.. 큰일났다.. 분위기가 너무 이상했나..? 라고 생각 하고있는데



갑자기 애가 야압-! 하면서 내게로 붕 달려들었다.



그렇게 공중에서 서로 포응을 하는 자세로
둘다 꼬르를륵 하고 입수했다.



그 짧은 순간에 물속에서 둘이 부둥켜
안고 눈이 마주쳤는데



순간 끅.. 거리다 물을 먹어서 벌떡 일어나 콧물을 흘리며 콜록거렸다.



일어나자마자 어디선가 달려온 친구놈에게 덥쳐져 또 물을 먹었다.






그렇게 저녁이 됐고 낮에 있었던 물장난으로 서로 조금 가까워졌다.



밤이되고 보니 애들끼리 둘러앉아 술을 마셨고 일진녀와 나는 멀리 떨어져 앉아있었다.



일진녀와 나는 각자 왼쪽과 오른쪽에 세 명씩을 끼고 있어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였지만



둥글게 앉아있다 보니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술을 마시면서 나도 몰래 일진녀를 힐끗 힐끗 쳐다보았는데



애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에 관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낮에 계곡에서 서로 몸을 맞대고.. 으흥으흠......



하지만 내 기분과는 다르게 애는 자기 옆자리에 앉는 남자들과 웃으면서 떠들고 놀기에만 바빴다.






한잔 두잔 혈기 넘치는 애들끼리 방해할 사람 없이 마시다 보니 빼는 사람도 없었고


소주만 주구장창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술을 많이는 못 마셔서 소주 2병 정도가 주량인데



이놈들은 죽어라 퍼 마시니 버텨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진녀 앞이니까 토가 쏠려도 빼지도 못하고



아이고.. 이놈들아, 제발 그만 마셔라.. 이리 속으로 끙끙거리며 주는 대로 마셔 댔다.



그러다가 도저히 스스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멍을 때리면서



좀비처럼 으우...으오......거리며 구석에 가서 드러누워 빙빙 돌아가는 천정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 다음날 눈을 뜨면 이놈들이 내가 취했다고 놀리겠구나..




이제 스르르 눈을 감겠구나.. 생각하는 찰나에 전화가 따르릉 울렸다.






무슨 정신으로 전화를 받았는지 모르겠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화장실에서 어머니랑 통화를 하고 있었다.



원래 어머니랑은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고 정말 친근하게 대화를 하기에



응~ 아! 지금 애들이랑 술 마시고 있어~ 응! 걱정 마~ 아 맞다. 더운데 에어컨 계속 틀고 자면



감기 드니까 조심해서 주무시고 내일 일찍 갈게! 기다리고 계셔~ 어..? 어.. 쪽! 잘 주무셔요~! 헤헿ㅎ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누가 보기엔 연인과 대화를 하는 걸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화장실에서 나왔다. 이 팬션은 특이한 게 방과 방 사이에 복도가 있었다.




우리가 술을 마시던 거실과 내가 있던 화장실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여기 니은 자 （ㄴ） 코너가 있었다.



거기를 딱 도니까 일진녀가 팔짱을 끼고 땅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맨 정신도 아니고 막 엄마랑 다정다감하게 통화하고 나온 길이라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애가 혹시 토 하려고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나..? 괜히 말을 걸면 안되겠다..



그 애를 쳐다보지도 않고서 아무 말없이 지나가려고 하는데 일진녀가 그 순간 내게 말을 걸었다.


..누구랑 통화 했어?


그 말을 듣자 말자 나는 괜스레 애한테 나도 좀 인기 있는 남자라는 걸 보이고 싶어서


..있어 여자친구


라고 말하고 말았다. 이 말을 하자말자 일진녀를 속인 것 보다



왠지 우리 사이가 더 멀어 지는 것 같은 기분에 나 스스로가 미워졌다.



술을 마시고 감정 기복이 커진 것도 한 몫을 했었다.






그 말을 하자 일진녀가 아무런 말없이 땅바닥만을 진지한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는데




나는 지나가다 말고 일진녀 앞에서 가만히 멈춰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 냉랭한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가버릴까 말까 하다가 일진녀의 답변이 듣고 싶은 마음에



그 자리에 서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일진녀 쪽에서 먼저 입을 땠다.


그 때 말한 그.. 김여자（가명） 란 애야?


.. 어? ..응.. 걔.. 근데 왜?


왜? ...


....


나는 바보같이 그 자리를 먼저 벗어나 한참 떠들고 있는 친구들에게로 가버렸다.



그리고 한참 후에 일진녀가 돌아왔고 나는 속이 너무 안 좋아서 역시나 구석에 박혀 끄응 거리고 있었다.



일진녀는 누워있는 내게로 오더니 자꾸 팔을 잡고 당기면서



야, 김갱군! 일어나-! 라고 말했다.



난 지금이라도 토가올라올 것 같은 맘에 일부러 취해서 뻗은 척을 했다..






물론 당시에 많이 취했었지만.. 근데 나중에 생각하니



그때는 다들 술에 취해 자리를 비우고 여자애들 하나씩 끼고 다른 방에 가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땐 굳이 술을 더 마시자고 뻗은 놈을 깨운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난 그걸 모르고 더 마시자는 줄 알고 일어나지 않고 내가 깨우는 입장이었어도 화날만큼 개겼었다.



그렇게 있다가 한 시간이 지나니 빈 소주병들과 식어버린 안주들이 있는 자리에



걔 혼자 앉아 조금 남은 소주를 홀짝홀짝 들이키고 있더라.



이제 정신이 좀 들고 소주를 몇 잔 정도는 더 들이킬 수 있게 되자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서 걔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러니까 걔가 조금 어지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보더니 씨익하고 웃음지었다.



그게 얼마나 섹시한지.. 어찌 할 수도 없고..


왜 혼자 마시냐..?


왜? 너도 마시게?


뭐.. 그러려고ㅎ


..역시 너 밖에 없다! 웅?






역시 너 밖에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그냥 자기 혼자 술을 먹다가 같이 마실 사람이 오니까 좋아서 하는 말일까..



아니면 나를 겨냥해서 하는 말일까..



나는 이런 저런 생각에 들어가지도 않는 술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기다가



소주가 역으로 올라와버렸다. 일진녀 앞에서 토를 하면 더 이상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아서



나, 잠깐 바람 쐬고 올게 라고 애써 밝을 척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어두운 수풀 속에 구토를 하니 좀 숨이 트였다. 이제 그만 들어가야지 하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일진녀가 밖에 나와 담배를 피고 있었다. 난 혹시 내가 토하는 걸 본건가 싶어 너무 민망했다.






내가 토를 하며 소리를 크게 냈나..? 들었으려나..?



하는 오만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근데 일진녀는 그런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또는 일부러 모른 척을 하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담배만 피고 있었다.



애써 모른 척 팬션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일진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갱구나..


우..우엑.. 웁으..응..ㅎ 일진녀야..


하나 물어봐도 돼?


웁.. 응..


거미가.. 거미줄을 왜 치는 줄 알아..?


응....? ... ... .... 잘 모르겠는데 히...


알면서..


.... 네가 말해줄래..?


..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아서래… 사람이 다가오지 않아서..


.........


난 해롱거리면서 아무런 말없이 팬션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알쏭달쏭 모를 일진녀의 말을 뒤로하고 나는 팬션으로 들어가서 2층의 빈방을 찾았다.



다들 일층에서 퍼져 잤기에 조용하게 2층에서 혼자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자고 팠다.



2층 거실에 누워 일진녀가 내게 했던 행동들을 생각했었다.



계곡에서 서로 끌어 앉고 있었을 땐 조금 민망했는데 일진녀는 딱히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속에서 서로 눈을 마주보았던 게 생각났다.



일진녀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



화장실에서 전화를 받고 나올 때 팔짱을 끼고 밖에서 내 전화를 엿듣던 일진녀..



술 취한 나를 계속 끌어 당기며 같이 마시자고 하던 일진녀..



갱구나, 거미가 왜 거미줄을 치는 줄 알아?


...모르겠는데..?


..에이.. 알면서..


말해줄래..?


사람이 다가오지 않아서래...






확실히 일진녀는 이미지는 거미와 같았다.






사람이 다가오지 않아서 거미줄을 친다는 건 내가 다가가지 않아서 실망했다는 건가..



에이.. 알면서라는 말은 일진녀도 내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머리가 어지럽고 감정이 복잡해지는 게 느껴지더라.



그냥, 하아.. 그냥 내가 술에 취해 쓸데없는 과대망상을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슬슬 눈이 감기려는 찰나에 계단에서부터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났다.



고요한 늦 저녁, 삐걱 삐걱하는 마찰음과 함께 어둠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느낌으로



막연하게 어렴풋이 누구인지 알 것 같은 그런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그 짧은 순간에 마음을 먹었다. 지금까지 여러 일들이 있었고 많은 생각을 했다.



그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호.구 짓을 했는지.. 이제 그만 혼자만의 착각은 접고 일진녀를




위한 게 무엇인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보통 같았으면 끝까지 자는 척하며



일진녀가 무얼 하던지 간에 애써 모른 척 했겠지만



술기운 탓인지 마음가짐 때문인지 더 이상은 피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물론 상대가 누구인지 눈을 떠 확인하지 않았지만 마치 운명인 것을 확신하듯 말했다.






만약에.. 그 거미가 거미줄을 치면 어떻게 될까?


....안잤어?


지나가는 사람이 거미줄을 망치려나?


.. 그 거미줄 보기보다 튼튼해..


.. 그럼 지나가는 사람이 거기 걸리면 거미는 뭘 할 거야?


... 잡을 거야


보기보다 튼튼한 거미줄이라.. 그만큼 이 아이도 나를 오래 봐왔고 많이 생각했다는 건가..



것보다 잡는다 라... 고백으로 보아야 하나..? 일진녀가 나 같은 애를......?






아침에 눈을 뜨니 밤에 있었던 일들이 숙취로 인해 어지럽고 아픈 머리의 통증 사이를 비집고 올라왔다.



입술에 손을 갖다 대니까 일진녀의 촉촉하고 말캉 말랑한 그 감촉의 여운이 남아있었다.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정말 그랬을까 하고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현자타임을 가졌다.



그러다 아침을 먹기 위해 아래 층으로 내려가다가 마당에서 모닝 빵이나 할 생각에



마당으로 나갔는데 일진녀와 마주쳤다. 일진녀는 당황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나도 갑작스런 마주침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얽.. 업.. 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일진녀가 조그맣게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잘 잤어..? 히


옭.. 오 으응..^^


후아압- 아침공기 좋다 그치?


후..후앜콜록컬록ㅋ코 웩ㅠ


ㅋㅋㅋㅋ 덜 깼구나 술


읍..햐ㅋ


좀 걸을까..?






팬션 뒤쪽으로 오솔길이 나있는데 길 양 옆으로 잘 가꾸어진 나무와 수풀이 예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가 걔가 공손히 손을 앞으로 모아서 걷고 있길래 왠 용기인지 내 손을 건넸다.



그랬더니 일진녀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일진녀는 나시 티를 입고 있어서 노출되어진 부위가 많다 보니 그쪽으로 보고 있기가 민망했다.



그렇게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걷다가 일진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제.. 기억나?


..어으응


풉..ㅎ


일진녀가 손가락 하나를 꿈틀거리는데 손을 잡고 있다 보니 그 움직임이 내 손으로 전해졌다.



별 것 아니었지만 그 간지러운 전기가 내 손에서부터 팔까지를 타고 올라왔다.



일진녀는 말을 이어갔다.


... 여자친구 손도 이렇게 잘 잡아줘?


어..? 없.. 끄


응? 무슨 말이야?


없어.. 여자친구


어라? 전에 있다면서, 김여자.


그거.. 엄마이름이야


...ㅍ 푸하하하ㅋㅋㅋㅋ 뭐야 그게!?


그냥 갑자기 묻길래.. 있다 한 거야


ㅋㅋㅋㅋ아 진짜? 그런 거였어??


응.. 그 있지 너는 남자친구 있다고 들었는데..


어? 누가 그래 갱군아?


일진남 있잖아..


걔? 아냐ㅋㅋㅋ 바보야 내가 걔랑 왜 사귀어??






다행이었다. 역시 주변에서 들리는 근거 없는 소문들은 믿을게 되지 않았다..



그렇게 흙길을 걸으며 훈훈함의 싹을 틔우던 우리는



아침을 먹으라는 친구의 전화로 인해서 다시 팬션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같이 들어오는 걸 본 친구들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신기한 듯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둘러앉아 식사를 하면서 일진녀 쪽으로 흘깃 흘깃 쳐다보다가 눈을 마주쳐서 콜록대고..



친구들은 애가 미쳤냐 란 듯이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일진녀는 소리 없이 웃음지었다.



이게 진정 현실인가 싶어서 혼자 멍 때리며 생각하다가 슬슬 입가에 미소를 짓게 되었다.



고백하면 받아주려나 싶기도 했지만 우리가 사귀면 내가 애를 따라가지



못할 것만 같아 그렇게 혼자 마음을 졸이면서 이대로만 계속 이어져나가길 바랬다.









방학이 끝날 무렵에 가족들을 따라 다른 지역으로 올라갔었는데 하필이면 그 때 폰을 잃어버렸다..



친가에서 며칠 살면서 일진녀나 다른 친구들과도 연락을 하지 못했다.



평소에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았기에 일진녀 번호가 생각날 리 없었다.



그렇게 한 삼 사흘 정도 친가에서 있다가 방학이 끝날 때에 집으로 내려왔다.



내일부터 2학기가 시작되는구나 라는 막연함보다 일진녀를 만날 수 있다는 게 더 좋아서



빨리 내일이 오기를 기다리며 행복함과 포근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일진녀를 빨리 보고 싶고 할 말도 많아서 학교에 일찍 갔다가




교실에 안 들어가고 교실 앞 복도에서 친구 놈이랑 이야길 하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다른 반에 가끔 인사만 하던 애가 있었는데 갑지기 애가 나한테 오더니 나를 다짜고짜 끌어 안았다….


갱군아~ 오랜만이야! 반갑다


얽컼...???? 어법볍ㅁ..?


키킼킼 짜식 귀엽네?






이러고 사라졌다..



뭔 일인지 몰라 얼 타는데 안았을 때 말캉말캉했던 슴가의 여운은 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일 교시가 시작될 때까지 복도에서 일진녀를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이교시가 되어 체육시간이라 밖에 나가 놀다가 더워서 친구들이랑 교실로 들어갔는데



옆 반에 있던 애가 등교를 늦게 해서 자기 반에는 못 들어가고 비어있는 우리 반에 와있었다.



그때 애가 폰을 만지 작 거리더니 우리한테 말을 걸었다.


야야! 일진녀 걔가 아까 슴가녀（나랑 안은 애） 때려서 지금 밑에 불려갔데!



나는 벼락을 맞은 듯 했다.



그렇게 점심시간을 먹고 쉬는 시간이 되어서 교실에 박혀 있었는데



문이 열리더니 일진녀가 진짜 차가운 표정으로 들어와서 정색을 하며,






야 김갱군.. 나와.






이러고 휙 돌아나갔다..



친구들이 내게 우르르 몰려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댔는데 나는 모르겠다고 말하고 따라 나갔다.



일진녀랑 거리를 두고 쫄래쫄래 따라가는데 그와 중에 뒤태가 너무 예뻤다....



걔가 학교건물 밖으로 나가는데 어디까지 가려나 싶어서 궁금 반 걱정 반의 마음을 먹고 있는데



일진녀는 창고 뒤쪽으로 나를 대려 왔다.



그리고는 획하고 돌더니 팔짱을 끼고 나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안 그래도 인상이 또렷하고 날카로워서 차가워 보이는데 그런 식으로 나를 보면 내가 어찌할 수 있겠냐.



그때 일진녀가 따박 따박 말을 했다.


너, 내가 얼마나 많이 연락 했는 줄 알아?


아.. 그..


문자도 안 읽었더니? 전화는 꺼져있고.


실은..


게다가 오늘아침에는 슴가녀랑 부둥켜안고 난리가 났더라고?
내가 싫으면 싫어졌다고 얘기해.



아니라고! ....일진녀야 들어봐.. 얼마 전에 친척집에 갔다가 폰을 잃어버려서 연락 못 받았어..
그리고 그 애가 왜 그랬는지는 몰라 왜 날 안았는지. 난 애초에 걔를 잘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아..


.... 진짜야?


진짜야. 그리고 그날에 있었던 일을 그렇게 함부로 말 할 수 있어?
난 진심이었는데 넌 아니었나 보네..


.. ....


..너, 진심이었어?


..응


일진녀가 팔짱을 빼고 울먹거리려 하자 다가가서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귀에서부터 턱 선을 따라 어루만지다가 검지손가락으로 눈썹을 보듬어주니까 눈을 살며시 감더라.



그리고 창고 뒤쪽에서 뽀뽀를 했다. 그 와중에 종소리가 들려서 한번 쓰다듬고 나서 같이 교실로 들어갔다.






어찌되었던 간에 일진녀와는 몸의 대화를 나누었기에 거의 사귄다고 봐야 하겠지만



실질적인 고백도 안 했고 다른 이들도 우리가 친한 줄만 알지 어느 정도로 가까운지는 몰랐다.



게다가 일진녀는 남자친구가 없다고 했지만 예전에 물었을 때는 있다고 했고



일진남의 존재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렇게 가깝고도 먼 일진녀와 알 수 없는 묘한 관계를 유지해나갔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저녁에 친구랑 시내를 거닐고 있는데 한 무리가 도로에 모여있었다.



자세히 보니 일진녀와 그 또래들로 보이는 학생들이 바이크 앞에서 죽을 치고 있었다.



일진녀랑 일진녀 친구 말고는 다 모르는 사이라서 괜히 저기로 가기가 민망해 자리를 피했는데



저 멀리서 바이크의 엔진 음이 시끄럽게 들리더니 그들 무리로 쏙 하고 가버렸다.



헬멧을 벗고 나자 그 사람이 일진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떠들더니 일진남이 바이크 뒤에 일진녀를 태우고 출발했다.






난 그 모습을 보고 있기만 했다.



바이크가 우리 쪽으로 와서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데 일진녀와 눈을 마주쳤다.



두 손을 일진남 허리에 둔 채로 웃고 있던 일진녀도 짧은 순간 나와 눈을 마주쳤다.



지나가고 나서도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난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안하고 바이크가 지나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친구가 안가고 뭐하냐고 불러서 정신을 차렸다.



가서 일진녀를 대리고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사귀지도 않는 사이일뿐더러 자기들은 매번 저렇게 노는데 가서 데려오는 건 괜한 오지랖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막연히 일진녀가 바이크에서 내려 내가 있는 쪽으로 오지 않을까 하는 맘도 있었다.



혹시나 연락이 올까 봐 폰을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가진 거라곤 주머니 속의 먼지뿐이더라.



난 일진녀와는 다른 세상에 살았고



누구와는 달리 바이크 하나 없어서 같이 가고픈 곳에도 데려다 주지 못할뿐더러



잘 놀지도 않아서 재미있게 해줄 수도 없었다.



웃고 있던 모습을 보니 행복해 보이고 좋더라..



그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그날도 친구를 떠나 보내고 홀로 빈방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이학년 진학 때 늦잠을 자서 학교엘 늦게 갔는데


버스를 타니 일진녀가 떡 하니 뒤쪽 창가에 무표정으로 기대있더라.



난 일진녀의 옆이 아닌 앞 좌석에 앉았다.



나를 보던 일진녀가 깜짝 놀라며 표정이 밝아졌다.


어? 갱군아 안녕! 같이 버스 타는 거 오랜만이다


그러게.. 피곤해서 그런데 눈 좀 붙일게. 도착하면 깨워줄래?


어..? 응..


그렇게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버스의 우우우웅~ 하는 바퀴소리를 들으니까 슬슬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꿈이랑 현실에 중간 즈음에서 해롱거리는데



귓가에서 뽀득, 뽀드드득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그냥 신경 끄고 있었는데 뒤쪽에서 계속 들리기에 살며시 뒤를 돌아보니까



일진녀가 창문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그래서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까 일진녀가



씨익하고 웃으면서 창문에 입김을 호- 하고 불었다. 그러면서 살짝 씩 지문을 따라 글이 보이는데


잠탱이


라고 적혀있었다. 그때 일진녀가 원래 목소리가 고왔지만 진짜 미성의 고운 목소리로



잠탱이.. 라고 내게 말했다.



살짝 붕 뜨는 느낌이 들면서 기분이 묘했다.






한번은 슈팅게임인 서든에 빠져 친구들과 게임방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원래 게임에는 큰 관심도 없고 잘 하지도 않았지만 한두번 친구따라 서든을 하다가



자꾸 죽다보니 오기가 생겨서 계속했었는데 이게 꽤나 중독성이 강했다.



친구들이랑 방과후에 피씨방 구석자리에 나란히 자리잡고 클랜전만 뛰었다.



이게 심해져서 방과후에 매일 애들이랑 같이갔고



학교를 빠지고 pc방에 간적도 자주 있었다.



그러다보니 담임선생님이 아침마다 연락이 왔다.



가장 왼쪽 친구부터 오른쪽 끝에 있던 나에게 앉은 자리 순서대로



쌤에게 전화가 와서 우린 겜을 하다 빵터졌고 다음부터는 누구에게



먼저 전화가 걸려오나 컵라면 내기를 하기도 했다.



지각을 밥 먹듯이 하다보니 학교엘 안가기도 했었는데



부모님이 집에 안계실 때는 집에서 서든을 하고 계실 때는 pc방으로 직행했었다.



한번은 점심시간 때까지 집에서 자다가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깼었다.



부스스하게 새집이 되어버린 머리를 긁적이며 인터폰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며 든 생각이 혹시 선생님이 아닐까하는 것이었다.



순간 두려움이 밀려오더라.






없는척을 해야할 것 같아서 초인종을 무시하고 창문에 커튼을 살짝 열어 빼꼼히 내다봤는데



집이 주택이라서 대문에 가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에 인터폰은 소리 밖에 전하지 못해서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없는 척을 하고 있자니 좀 그래서 욕실에 들어가 좀 씻고 나와서



폰을 찾았는데 전화와 문자가 여러통 와있었다.



일진녀에게서.






문자를 확인하고 나는 옷을 후다닥 갈아입고 마당으로 뛰어나가 대문을 쾅하고 열었다.



대문밖에는 일진녀가 쭈그려앉아 날 노려보고 있었다.


진녀야, 왠 일...


야! 갱이, 너 뭐했어!? 얼마나 기다렸다고!


아.. 미안;


하아.... 죽을래 너?!


ㅋㅋㅋ진짜 미안! 근데 여긴 왜 왔어?


오면 안돼?!


뭐.. 그건 아니지만..ㅎ


후으.. 조퇴하는 길에 들렸어.


조퇴? 어디 아파?


아니.. 그냥, 수업에 집중이 안되서..


.....ㅋㅋ ...그래...??


일진녀는 교무실에서 선생님을 만나 복통 때문에 조퇴를 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일진녀의 집과 우리집은 길이 달랐다.



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일진녀는 때때로 짜증을 내거나 갑자기 축 처져서는 우울한 표정을 보이기도 했다.



일진녀를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뭐하고 같이 나가려니 돈이 없어서 집에 들어오라고 했다.



집으로 들어온 일진녀는 고개를 치켜들고 거실을 스윽하고 크게 훑어보더니


네 방은 어디야?


라고 내게 질문을 했다. 손가락으로 찝어주니까 쫑쫑 걸어가서 문을 열더라.



고개만 빼꼼 내밀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들어가도 돼? 라고 말하길래 알았다고 했다.



손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짚고 뒷꿈치를 들더니 허리를 돌려 뒤돌아보며 씩 웃더라.



그러다 침대에 앉아 엉덩이를 몇 번 튕기며 오.. 라고 짧게 감탄했다.



날 새침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책상으로 후다닥 뛰어가 서랍을 활짝 열더라.



내가 아, 거긴.. 이러니까 키득키득 거리면서



우리 갱인 어떤 취미가 있는지 볼까? 라고 말하곤 탐정인냥 하나 하나 다 뒤지더라.



장롱 문을 열고 옷걸이에 걸어논 채로 있는 옷을 자기 몸에 맞춰보곤 어울려? 라고 했다.



아니라고 하면 맞을것 같아서 급히 고갤 끄덕여주었다.



일진녀는 만족했는지 또 깔깔 웃으면서 옷들을 꺼내 패션쇼를 시작했다.



겨울 옷도 꺼내 입어보고 내가 아끼는 티를 돌돌 말아서 양머리로 만들어 버렸다.



놀고나니 배가 고파서 먹을게 있나 찾아보다가 비빔냉면 3개가 있었다.



일진녀는 비냉요리를 잘한다며 나서서 요리를 했다.



요리중인 일진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집에서 나를 위해 요리를 하는 여자.



그 여자를 바라보면 마냥 좋기만한 남자.



언젠가, 먼 훗날.. 가족을 꾸린다면 이런 기분이려나.. 싶더라.






우린 그간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다.



학교에서도 애들은 우리가 사귀는 줄 알고 있었고



우리도 그걸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과학이나 미술시간처럼 과학실, 미술실로 교실을 옮겨 수업 할 때면



과제나 시험이 있을 때는 번호순으로 앉곤 했었는데



그외의 평범한 수업시간에는 끼리끼리 앉아 있었다.



난 학교에서 논다하는 애들이랑 무리지어 다녔고 그래서 늘 같이 앉았었다.



일진녀는 일진녀 친구녀와 친한 애들 두명, 꼭 이렇게 넷이서 다녔었다.



미술실에서 일진녀 무리가 한 테이블에, 우리남자들 무리가 옆테이블에 둘러앉았었는데



일진녀와 가까워지고 나서는 교실을 옮겨 수업을 할 때마다 매번 옆에 같이 앉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작은 공간에서 같이 앉아 있었지만 우린 함께 할 수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매일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친구녀석과 일진녀 무리의 여학생이 짧게 썸을 탔었는데



그 때 몇번 우리무리와 일진녀 무리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일진녀의 양 옆엔 걔의 친구들이 앉았기에 다가갈 순 없었지만



정면에서 한 칸 대각에 앉았던 날이 있었다.



일진녀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누군가 테이블 아래로 내 발을 밟았다.



깜짝 놀라 앞을 쳐다봤는데 여자애들이 반응이나 표정의 변화없이 수업을 듣고 있었다.



발을 움직이다가 부딫혔나보다.. 싶어서 신경안쓰고 다시 공부를 하는데



또 누군가가 내 발을 밟더라.



분명 앞에서 밟은 거라서 재빨리 앞을 쳐다봤는데 그순간 일진녀가 고갤 획 하고 돌려서 시선을 피하더라.



설마 일진녀인가? 생각하다가 일진녀 쪽으로 삐죽삐죽 다리를 내밀었다.



톡 하고 무언가와 닿았는데 일진녀가 갑자기 빵터지면서 웃더라.



그때 나도 같이 따라웃다가 둘다 불려나가서 혼났다....



옥상에도 자주 올라갔었는데 거기 있던 담배꽁초들은 모두 우리 작품이었다.



특이한게 옥상은 계단이 아니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했고



그 사다리가 여자화장실에 있어서 매번 여자화장실에 출입했었다.



그래서 남녀의 구분없이 잘 어울릴 수 있었다.



일진녀의 친구녀와 밥 먹고 식후땡하러 옥상에 올라가려고 같이 여자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소변보고 올라간다길래 화장실 안에서 기다렸다가 쪼로록 소리가 난 다음,



치마 안으로 블라우스를 구겨 넣으며 나와선 꼬꼬!! 이러면 ㅋㅋ가자 이러고..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닌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한번은 진녀가 몸이 안좋았을 때 선생님이 번호순으로 앞에 나와서 숙제를 제출하라고 했는데



일진녀와 친구녀가 대화를 하는 것을 듣고 일진녀가 숙젤 못했단걸 알았다.



끙.. 거리며 아픈 표정으로 있으니까 마음이 아팠다.



난 필기로 적는게 아닌 프린터 출력형식이었기에 내 차례가 되기전에



선생님이 앞번호의 숙제를 집중해서 보고있을 때 사물함에



숙제를 가지러 가는척하면서 일진녀의 책상 위에 내 숙제를 놓아주었다.



일진녀는 깜짝 놀라했고 난 담담히 체벌을 받고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일진녀 친구가 내게 작게 뭐라고 말을 걸었는데 허벅지가 아파서 들은 척도 못했다.



일진녀와 같이 카페나 편의점에 들릴 때면 종업원이나 알바생이



우리를 커플로 착각하고 곤욕을 치른 적도 많았다.



누가 커플이 아니냐고 물을 때마다 우린 웃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무언가 아쉬움을 느꼈다.



아, 죄송해요. 커플인줄 알았어요. 이럴 때면 실은 사겨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일진녀가 몸을 숙이고 해맑게 키득키득 거릴 때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심 궁금했다.



길을 걷다가 예쁜 목도리가 있으면 그 동안 모아둔 돈으로 사주기도 하고



붕어빵이나 오뎅도 사서 먹여주고 하는 훈훈한 일상을 보내면서 마냥 행복했었다.




이학년이 되고 위조한 민증으로 모텔에 들어가 둘이 술을 마시다가



침대에 기대 영화를 보는데 일진녀가 내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가까이 있다 보니 그 애의 숨소리가 새근새근 들려왔고



그럴 때마다 내 심장은 콩닥콩닥 뛰었었다.



그렇게 곤히 자고 있는 일진녀에게



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작게 혼잣말을 하곤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일년의 시간동안



일진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나날들이었다.


역시나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닌 것처럼 겨울지나 꽃샘추위 오듯



우리에게도 시린 바람 한 점이 불어왔다.









이학년 일학기 초봄 어느 날이었다.



하교를 하고 친구 놈이랑 코인노래방에 가서 노랠 부르는데




그간 학업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 겸 대낮부터 신명 나게 흔들어 댔다.



그러다가 내가 화장실에 가있는 사이에 우리 룸 쪽에서 누군가가 싸우는 소리가 났다.



설마 친구 목소리인가 싶어 가보니까 친구 놈이랑 일진남이 주먹다짐을 하기 직전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당혹스러워서 일단은 말려야겠단 생각에 끼어들었는데



일진남이 나에게 넌 뭐 하는 xx인데 껴드냐는 거냐고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일진녀를 만나면서 가끔 술도 마신 사이인데 사람은 병ㅅ 취급하니까



나도 거기서 욱하더라고.. 게다가 안 그래도 일진녀 때문에 이놈에게 쌓인 감정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욕을 내뱉어 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핑 돌더니 시야가 까맣게 흐려지면서



바닥에 내 몸뚱이가 구르고 있더라고 ㅠ...






몇 초 후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니까



친구 놈이랑 일진남이랑 치고 박고 싸우고 있었다.



우리 방 밖에서는 교복 입은 애들이랑



노래방 손님 몇 명이 몰려와 우리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맞고 나서 정신을 차리니까 입술이 따갑길래 손등으로 한번 스윽 닦으니



붉은 선이 쭉..



이기던 지던 일진남에게 그냥 몸을 날렸다.


그렇게 있으니까 밖에서 경찰차가 왔는지 삐뽀 삐뽀 거려서



친구머리 부여잡고 밖으로 죽어라 달려 나갔다.



뛰면서 뒤를 돌아보니 일진남도 후문으로 나와서 눈에 불을 켜서 주위를 스캔하고 있더라..



골목골목을 지나 공중화장실로 들어가서 친구 놈이랑 숨을 돌렸다.



다리가 후덜 후덜 떨려와서 보니까 오다가 벽 모서리에 박았는지



무릎에 넓게 검붉고 보랏빛을 뜨인 멍 자국이 생기려 했다.



흥분해서인지 친구랑 눈을 마주치고 너나 할 것 없이 빵 터져서 미친 듯이 웃었다.



비록 입술이 까지고 한방 얻어맞았지만 그 놈을



그 비좁은 곳에서 패줬다는 생각에 고소해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밖을 보니까 조용하길래 나오게 되었다.



골목을 지나 각자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저 앞에서 야 이 x새ㄲ들아-!!! 이러면서



일진남이 달려왔다.. 그 뒤에 무리들과 함께..



사연은 이랬다.. 우리 룸 옆에 일진남이 있었고 그 놈은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우리가 난리를 치면서 떠들고 노래를 부르다가 의도치 않게 자꾸 벽을 쳤던 것이다.



그러다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빡친 일진남이 친구와 싸운 것이었고 경찰을 피해 달아난 후,



도착한 일진남 친구들은 일진남과 합세하여 동내를 이 잡듯이 뒤진 것이었다.



그렇게 그 놈들한테 붙잡혀서 대낮에 죽도록 줘터졌다.. 좋지 않은 기억이니 디테일은 생략하겠지만



걔 친구 중에 우산을 가져온 샛ㄲ가 있었을 거다.



우산으로 ㅊ맞은건 기억난다.... 다굴 맞으며 주먹들이 날아오는 와중에



어떤 ㅅ끼인지 우산꼭대기로 찌르더라.. 겨우 손가락만 움직일 힘만 남았을 때




일진남이 흥분을 못 가라앉히고 헉헉대면서 내 앞에서 일진녀를 욕했다..



그때 맞아 죽던 말던 멘붕이 와서






그 놈한테 쌍 욕을 날리다가 발에 차였다..



그랬더니 그 놈이 일진녀한테 스피커 폰으로 전화를 했다..


일진녀야 어디야?


웅? 나 시내야~ 너는?


나? ㅋㅋ 어떤 ㅂ신들 죠패고 있지 듣보 놈인데
얘가 너 좋아한다 길래 니 까짓 게 어디서 넘보냐고ㅋㅋ


헐! 뭐야 누구야?


스토커 같은데ㅋㅋㅋ


징그러 더 패죠 - 3-


오..그래^^ 여하튼 있다가 봐






그러고서 전화 끊고 침을 뱉더니 자기 무리랑 이곳을 떠났다.



ㅈ나게 고먑다 ㅅ바룸....



그 놈들이 가고 나서 친구가 나를 부축해주는데 뿌리쳤다.



눈물이 줄줄 나더라 이놈들한테 당한 것 보다



일진녀와 통화로 인해 자존심이 다쳤었다.. 친구가 옆에서 담배 하나를 건네주었다.



길게 한숨을 한번 쉬고 입에 갖다 대는데 손가락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입술인줄 알았는데 눈썹이 찢어져서 볼을 타고 턱으로 줄줄 흐르고 있더라.



그렇게 친구랑 나랑 약국에 가려고 둘이서 부축해서 밝은 대낮에 얼굴에서는 피가 뚝뚝 흐르고



교복은 곳곳이 째진 채로 인적으로 북적북적한 시내를 지나갔다..



안 그래도 아픈 상처가 사람들의 시선이 덕분인지 되게 따갑더라.



그 와중에 일진녀 친구랑 눈이 마주쳤는데 무시하고 지나갔다.



약국에 들려 약을 사는데 약사가 놀라서 우리 앉혀놓고 상처부터 치료하자 길래 됐다고 말하고 나오는데



폰을 보니 일진녀의 문자랑 부재중전화가 꽤 많이 와있더라고.



일진녀 친구가 말했나 보다 싶어 쪽 팔리기도 하고 이런 모습 보이기 싫어서 서둘러 돌아가는데



운도 참 안 좋지.. 일진녀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왔다.






난 일진녀를 못 본채하고 빠른 발걸음으로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몸이 말처럼 잘 움직이지 않더라고.



그러다 일진녀가 내게로 뛰어와서 울먹였다.



무슨 일이냐고..



난 이런 꼴을 보이기 싫었고 거기다가 일진남이 일진녀에게 전화한 게 생각나서 쪽 팔려서 입을 다물었다.



그때 친구가 일진남 그 ㅅ끼 짓이라고 고자질해주었다..^^.....



일진녀가 놀라서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데 나를 못 가게 하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팔을 잡고 있었다..



난 일진녀한테 더러워진 내 모습을 보이기도 싫고 피를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난 괜찮으니 그만 놀러 가보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걷다 말고 멈춰서 우리를 보는데 애써 괜찮은 척 하려 해도



시선이 시선인 지라 그저 일진녀와 사람들로 부터 벗어나 혼자 있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내가 무표정으로 친구 쪽을 바라보니까



친구가 갱군이는 내가 챙길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말을 해주었다.



유일하게 이때만 이 녀석이 예뻐보였다.



일진녀는 그래도 싫다고 하면서 나를 붙잡는데



내가 자꾸 가려 하니까 못 가게 하려고 팔을 벌려 나를 감싸 안으려 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아름답고 좋은 향이 나는 일진녀를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



그 순간 일진녀에게 화를 내며 손을 밀쳐 뿌리쳤다..



그리고 1초 후 급 후회가 미칠 듯이 밀려왔다.



잘한 것도 없는 놈이 자기를 걱정해주는 일진녀에게



절을 하며 감사하기는 커녕 소리를 지르고 밀쳐내다니..



그래도 나는 정색을 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있었는데



날 바라보던 일진녀의 표정이 굳어가는 걸 느끼며 마음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일진녀와 눈을 마주보고 일분이 일년처럼 느리게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일진녀는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소매로 훔쳐내고서



단단히 삐진 표정 （진짜무섭..） 으로 뒤를 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막상 일진녀를 보내고 나니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친구녀석이 으휴.. ㅂ신ㅅㄲ라고 말하는데



나를 더 욕해주길 바랬다..



그렇게 그날도 집에 들어가서 오지 않는 잠과의 사투를 벌이며 자려고 했는데



친구 놈이 자꾸 술 먹자고 해서 저녁에는 술을 마셨다.



마실 때 마다 입술이 쓰려왔다..



친구 놈이랑 마시면서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하니까



내가 뱉은 말인지 모를 말들을 주정처럼 말하고 있었다. 취중진담이라고들 하지..


친구야..


왜 빙구야


나는 일진녀가 일진남에게 가서 아무 말도 안 했으면 좋겠다.


왜 빙구야


그 놈 성질은 더러워도 인맥도 넓고.. 힘도 있고 나랑은 달리 아무도 못 건들잖아
걔랑 멀어지면 혹시 아냐 일진녀가 왕따될지..?


빙구새ㄲ... 것보다 이제 우린 학교 다 다녔다. 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그렇네






그렇게 둘이서 어깨동무하고 우정과 의리를 외치며 정신 줄을 놓아갔다..



다음날 학교를 무단 결석 했다.



일진녀 보기도 그렇고 가기도 싫어서



친구들이랑 선생님이 전화 오는 것도 다 무시한 채로 집 밖에 나와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있으니 일진녀한테 문자도 한통 안 오더라고..



애가 기분이 많이 상했나.. 어제 내가 너무하긴 했지.. 그래도 문자 한 통 없냐..



것보다 이제 쪽 팔려서 만나지도 못하겠다 란 생각이 드는데 막연히 일진녀가 그립더라.



가까이 있는데, 만날 수 있는데..



그럴 수 없는 게, 못 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 같더라.



담밸 피려고 마당으로 나왔는데 저녁이 아닌데도 어두컴컴하길래 하늘을 올려다 봤다.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는데 조금씩 약하게 빗줄기가 떨어졌다.



눅눅한 공기에 마음까지 꿀꿀한게 기분이 영 좋지가 않아서 그 자리에서 담배를 폈다.



그날 따라 뭉게뭉게 연기가 많이 나오더라.










일진남에게 먼지가 나도록 털리고 영혼의 상처를 입고 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삼학년 선배의 부름을 받고 친구랑 손 꼭 잡고 운동장 뒤로 불려갔다..



거기 가니까 학교 통으로 불리는 선배들이 조폭포스를 풍기며 있었다.



눈에서 쏘아지는 살기하며 덩치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눈앞에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오늘로써 내 학창시절이 막을 내리는 가보다..



란 생각에 늑대 우리에 넣어진 아기강아지를 보는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때 형님께서 중저음의 어조로 나와 친구의 이름을 친히 불러주셨다...



우리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앞으로 가는 지 뒤로 물러서는지 모를 어색한 스텝으로 다가갔다.



워킹의 자신감을 상실한 모델처럼..



그 앞에 있으니까 위압감이엄청났다. 그러자 형님께서 일단 맞자 라고 하셨다.



ㅋㅋㅋㅋ정말요..?



길고 긴 시간이 끝나고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친근한 말투로



형이 너희가 미워서 이러는 게 아냐 어? 너희가 내가 아끼는 동생을 때렸다 길래 이러는 거지 어?
마음 같아서는 죽여놓고 싶지만 그래도 어?
걔가 따로 너희를 손봐줬다 길래 이까지만 한다 어?
앞으로 행동 똑바로 하고 다니고 누가 괴롭히면 형 이름 대라 사내ㅅㄲ가 좀 맞았다고
엄마한테 이르지 말고 알겠냐? 어?






이러면서 같이 자장면 먹으러 갔다...



됐다 싶더라.. 이것으로 학교생활은 평소처럼 할 수 있겠다 싶어서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당분간은 조용히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쉬는 시간이나 점심때 일진녀와




자주는 아니더라도 간간히 마주쳤었다.



근데 내가 미안하기도 하고 먼저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아서



울며 겨자 먹기로 외면하곤 했다. 애도 날 봐도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가슴앓이를 하면서 한달 정도를 보냈다. 떨어져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해봤는데 일진녀는



내가 좀 맞았다고 남자가 삐쳐서 ㅎ구처럼 있다고 생각할까... 실은 그게 아닌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팠는데..



그날 이후 무너진 자존심이 회복되지 않아 그러기가 어려운 건데..



어디서부터 꼬이고 누가 더 잘못한 것일까?



예전에 팬션에서 나누었던 사랑은 단순히 술기운에 저지른 풋사랑일까..



나는 걔에게 그저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인가..



애초에 어울리는 급이 다른 사람과 그런 나날을 보냈으니 이렇게 되어도 행복했다고 말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밑도 끝도 없이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남들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애가 첫사랑이었고



밀당이라면 의도치 않은 밀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다 보니



감정기복이 심했고 복잡한 우리관계를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일진녀와 모른 채 지낸 한달 동안 어디를 가도 그 애의 흔적이 남아서 나를 심란하게 했다.



같이 떡볶이 먹던 곳을 지나자 호호 불어먹던 그 모습이 떠오르고



같이 앉던 그 벤치에는 이제 먼지만이 자욱이 쌓여있었다.



아직도 너는 창가에 기대 먼 곳을 바라볼까..



입김을 불어야 보이는 글을 또 적고 있을까..



잠탱이라는 일진녀의 말투에 난 미소를 짓고



뜬 눈으로 본 일진녀의 모습이 마치 꿈만 같아 이마를 똑똑 두드려도 보았다.



물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기도 했고



햇빛이 일렁이는 물결에 반사되어 아름답게 빛나던 그 계곡에서 서로를 끌어 안았었다.



같이 영화를 보다 내 어깨에 기대 잠이 들던



일진녀의 새근 거린 숨소리에 두근 거린 내 가슴이 얼마나 떨렸던지..



아직 넌 모르겠지..



속삭이듯 말한 혼잣말 알아들었을지..






일진녀와 함께 했던 지난 날이 마치 필름처럼 눈 앞에 펼쳐졌다.



눈꺼풀 속에 새겨진 지문처럼 눈을 감아도 보이는..



서로를 모른 척하고 지내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단 한마디만 대화를 하면 다 풀릴 텐데



예전으로 돌아갈 텐데.. 그 한마디를 먼저 건네는 게 뭐가 힘이 든다고..



서로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해서 사과를 안하고 있었다.






그러다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어떤 여학생을 만나게 됐다.






친구놈이 왠 여학생이랑 앉아있는데 짜증이 밀려오더라.



누구랑 같이 있으면 있다고 미리 말을 하던가.



마음의 준비도 못한 상태에서 모르는 사람과 대면하다니..



그도 그럴 것이 이놈이 나를 보더니 인사만 하고 부리나케 도망가버린 거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 나와 여학생만이 남아 있게 됐다.



난감함에 음료에 담긴 빨대만 담그고 돌리는걸 반복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내 앞에 있는 저 여학생에 대해 궁금해졌다.



아이보리색 코트를 교복 밖에 걸쳐 입고 목도리로 입을 가린 애였는데 단발이 잘 어울렸다.



화장을 옅게 칠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화장을 안 하는 게 더 예쁠 것 같았다.



남학생들한테 꽤 인기 있을 거 같았다..



시간이 지나갈 수록 어색함이 커지는데 이 애의 관한 궁금증도 함께 자라났다.



몇 번 스치듯이 눈을 마주쳐서 이때다 싶어 입을 때려 했는데



애가 눈이 마주치자말자 고개를 홱 돌려 볼 것도 없는 곳에 시선을 두길래 실패하고 말았다.



어색함과 무안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혹시 내가 자리를 비켜주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내가 눈치가 없는 거였나..



그래서 그만 일어나려고 의자를 뒤로 뺐다.


저기.. 친구분이랑 베프 사이시죠?


목도리를 아래로 내리면서 얘기를 하는데 목소리가 앳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확실히 예뻤다. 청순 미가 물씬 나더라.



난 일어나다 말고 천천히 앉으면서 말을 받아주었다.


예? 네, 친하게 지내는데..


그러셨구나, 반가워요 저도 걔랑 아는 사이에요.


정말이요? 한번도 못 들었는데...


어릴 때 친구였어요. 연락한지 얼마 안됐고요.


아.. 근데 어쩐 일로 여기서 같이 있었어요?


그게.. 친한 친구 소개시켜 주고프다고 막무가내로..



역시 내 친구다 생각이 없는걸 보니까 확실했다.



이놈은 분명 내가 좋아할 줄 알고 그랬겠지만 나는 여자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안 그래도 일진녀랑 냉전 중이라 마음고생 인데 다른 애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청순하고 여린 여학생을 두고 남몰라라 하며 갈 수는 없었다.



목이 타길래 음료를 꿀떡 꿀꺽 삼키고 나서 친구가 남기고 간 음료도 뺏어 마셨다.



여학생의 교복을 보니 우리 지역학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멀리서 하교를 하자마자 바로 왔다는 건데.. 바로 돌려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저기 전 갱군이라고 하고 일진고에 다녀요.


네. 저는 여학생이고요. 여고에 다녀요.


여고라면은 여시에 있는 거 아니에요?


네 거기 맞아요.


와... 공부되게 잘 하시나 봐요.
그리고 되게 멀리서 오셨네요. 집엔 어떻게 들어가시려고..


친구랑 있다가 일곱 시 차 타고 가려 했는데 애가 그냥 가버렸네요.



아직 일곱 시까지는 몇 시간 정도 여유가 있기에 물배는 그만 채우고



어디 근처에서 간단하게 식사나 하자고 말하고 잠깐 볼일을 보러 가기 위해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손을 씻고 거울을 보고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나왔는데 계산을 하고 있더라고.



빨리 걸어가서 제가 낼게요 라고 했는데 괜찮아요 라고



태연한 얼굴을 비추며 서둘러 계산을 마쳤다.



좀 미안해서 밥은 내가 산다고 하니까 아무 대답이 없더라.



그렇게 시내를 지나 사거리 맛집 골목으로 가는데 사람들로 붐볐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려 가려는데 길막도 심하고 뚫기도 힘들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우리 사이를 지나가는데 여학생에게 어깨 빵을 놓았다.



여학생이 놀라 아야-라고 하길래 걔 팔을 내 손으로 잡고 인적을 뚫고 지나갔다.



알고 보니 모 걸그룹이 행사겸 댄스를 하고 있는 거였다.



난생처음 실제로 본거라서 거기에 집중해서 우와하고 삼십 분은 넋을 놓았던 것 같았다.



보고 있다 보니 학생들이 친구한테 연락을 했나 본지 우르르 몰려오기에



일진남이랑 일진녀가 생각나 자리를 비켰다.



그때서야 알았는데 어느새 여학생의 팔을 잡고 있던 내가 걔랑 팔짱을 끼고 있더라.



걔도 걸 그룹을 본다고 정신이 없었는지 아니면 딱히 신경 쓰지 않았는지



팔짱을 계속 끼고 있었다. 팔짱을 낀걸 알고 나니 걸어가면서도 신경이 되게 쓰였다.



팔이 간질간질했다.



여학생이 움직이며 걸을 때마다 내게 가까워졌다 멀어졌다하는데



초면에 모르는 사이인데 이렇게 다녀도 되려나 싶더라고.



만약 일진녀가 이 모습을 본다면....
ㅋ....ㅋㅋㅋ....ㅋㅋ......



애도 팔짱을 낀걸 알게 되면 서로 말없이 어색하게 걷기만 할까 봐



이거 그냥 미리 얘기해서 때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말을 꺼낼지 생각하다가 내 폰이 여학생이랑 팔짱을 낀 곳에 있다는 게 생각나서



어라? 진동온닿ㅎ 이라 말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폰을 꺼내면서 슬쩍 때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라? 진ㄷ· 읉엌,,!?



말을 하고 나서 팔을 움직여야 했는데



조급한 나머지 말을 꺼냄과 동시에 빠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휘어져 있던 팔이 주머니가 있는 골반 쪽으로 일자로 땅겨진 거였다.



그러다 보니 여학생은 내가 있는 쪽으로 당겨져 왔고



내가 여학생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여학생도 끌려오는 순간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서로 코가 닿을 듯 말듯 코끝이 간질거리는 위치에서 멈춰섰다..



그때 여학생의 입김이 내 볼을 스쳐지나 가는데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거기다가 립클로즈 향이 풍겨오는데 되게 달콤하더라..



그렇게 내가 무안하게 웃으며 사과하니까 걔가 입을 가리고 조숙하게 미소만 지어주었다.









몇 주간 일진녀와는 학교에서 눈치만 보고 있고 방과후에는 친구들만 만났다.



물론 여학생과는 주말마다 만나 햄 볶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학교랑은 다르게 애네는 야자를 해서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주말마다 만난 다는 생각에 일주일이 길게만 느껴지더라.



가끔 잠 못 이뤄 뒤척일 때.. 늘 마음 한 구석은 일진녀의 대한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내가 여학생을 만나는 게 잘하는 짓일까..



바람을 핀다는 죄책감도 들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린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었기에..



남들은 우리가 사귀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본인들은 말 한마디 안 꺼냈으니까..



팬션에서 그날 밤, 우리는 서로를 가졌지만



일진녀는 처음도 아닐 테고 그냥 외롭거나 본능에 이끌린 걸 수도 있으니..



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다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속사정도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하는 사람을 이렇게 욕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ㅆ레기 처럼 보이더라.






그렇게 금요일이 되었고 다음날인 토요일은 여학생과 약속을 잡아둔 날이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등교를 했다. 평소처럼 일진녀가 있는 반으로는 가지 않은 채 학교생활을 했다.



친구들과 떠들고 놀고 수업시간에는 졸린 눈을 비비고 있다 보니 시간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친구들이 당구장에 가자고 꼬시는 걸 거절하고



오늘은 집에서 푹 쉬며 컨디션을 유지해야겠다는 맘으로 열심히 뛰어갔다.



일찍 온 탓에 버스시간이 남길래



조금 떨어진 골목에서 담배를 폈다.






그렇게 사색에 빠져 있는데 둘러보니 이곳은 다름아닌 일진녀가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건 곳이었다.



혼자 피식 하고 웃다가 볼펜을 꺼내서 담벼락에 거미 한 마리를 그렸다..



일진녀와 나만 아는..



이걸 보라고 그린 건 아니고 그냥 생각 없이 그렸었다.



그러다가 버스시간이 임박했다는 걸 알고 죽어라 뛰어가서 버스에 겨우 탑승했다.



헉헉거리면서 가픈 숨을 돌리니 버스 창가 옆으로 일진녀가 지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아름답더라.



몸매나 핏이나 생김새나 그 느낌까지도..



그러고 보면 이 버스를 놓치게 되면 일진녀와 정거장에서 만났겠네ㅎ



다음 날이 되어 대망의 토요일이 되었다.



오늘 여학생을 만난다는 생각에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여학생은 지금 뮐 하고 있을까... 물론 공부를 하고 있겠지만..



걔도 지금 설렘을 느낄까?



애는 어찌 보면 일진녀와는 정반대였다. 단아하고 고지식하며 신사임당 같은 느낌이고



일진녀는 노는걸 좋아하고 공부랑은 거리가 멀 뿐더러 성격도...



그리고 마침내 들려오는 하늘의 종소리..



사교시가 끝났다는 걸 알리는 친절한 알림이었다.



오늘도 친구들이 놀자고 할까 봐 도망가듯 몰래 빠져나가려는데



여학생을 내게 소개해준 친구 놈이 나를 붙잡았다.


야 무슨 죄지었냐 어딜 그리 급히 가?


아ㅋㅋ 피곤해서~


너 요즘 수상하다? 요 근래 들어 자꾸 우리를 피하네?


아냐, 이 놈아ㅋㅋ


안되겠다. 야. 오늘은 내가 네 옆에 계속 붙어 있을 거다ㅋㅋ


징그러운 놈; 너도 알잖아 오늘 나 약속 있는 거.


알지. 근데 여학생이랑은 주말에만 만나잖냐.
그러면서 평소에도 혼자 사라지 더만?
너 혹시 다른 여자 숨겨둔 거 아냐?


아냐.. 요즘 그냥 의욕이 없다.


ㅋㅋ수상해.. 실은 형이 오늘 여자를 만나야 하거든
그래서 내가 아는 동생이랑 여학생 만날 때까지 동행 해줘야겠다.






그렇게 강제적으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중학교 삼학년 짜리 여자애를 혹으로 달았다.



애도 말투나 겉모습에서 프리한 기운이 태극기 휘날리듯 경건하게 펄럭펄럭 휘날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친구 놈한테 사채를 썼던 뭘했던 단단히 빗을 졌는지



충실하게 친구 놈의 돼먹지 않는 명령을 따르더라.



더 놀라운 사실은 애가 여학생과도 친분이 있어 번호까지 알고 있다는 거였다...



둘이 이미지가 전혀 다른데 어찌 그럴까 하고 생각하며



분식점에서 중딩 입에 순대를 넣어 먹여주며 여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생겨 좀 늦어진다는 말에 김밥을 더 시켰다.



중딩녀는 옳다구나 하고 깔깔 웃으며



김밥을 폭풍 흡입하는데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한 시간만 지나도 꽤 어두워지겠다.. 애는 언제 올까..



중딩녀가 시도 때도 없이 떠들기에 지루하지는 않았는데



그때 갑자기 일진녀에게 근 한달 만에 연락이 왔다.



그것도 통화로..






길을 걷다~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중에~ 그대나에게~ 사랑을 선물해 준 사람~♬



받을까 말까 하는 고민이 짧은 시간에 수십 번씩 머리에 맴돌았다.



끊기면 어쩔까 싶어 배에 신호가 와서 화장실에 갔는데 휴지가 없어 엉덩이를 부여잡고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처럼 나는 끙끙 앓고 있었고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중딩녀가 의아해하며 안받냐고 말을 걸었다.



혹시 다른 사람한테 건다는 걸 내게 잘못 걸었을 수 있잖아.



괜히 받았다가 무안해지면 관계가 완전히 어긋나버리ㄹ 딸깍ㄱ..






나도 몰래 받아버렸다..



몇 초가 지나는 대도 아무런 말없이 전파의 고요한 잡음만이 들렸다.



그리고 몇 초가 더 흘렀을까..



저 쪽에서 막 자다 일어난 것 같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거미 ..너야?


거미? 불현듯 어제 담벼락에 그린 거미와 얼마 후 그쪽을 지나간 일진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 응


....


...


....교실로 와.


그리고 살며시 전화가 끊겼다..



오만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내 머리를 아프게 했다. 왜 오라는 걸까?



그것도 학교로.. 혹시 방금 그 그림을 본건가?



그렇다면 그곳에서 학교는 멀지 않으니 그쪽에서 만나자고 했겠지..



근데 왜 하필 교실이지.. 학교 문이야 따고 들어가긴 쉽지만..



그보다 지금 여학생과 만나기 위해 여기서 기다리는 중인데;



좀 있으면 도착할거 같은데 걔를 나두고 일진녀를 만나러 가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나는 안 갈 수가 없었다. 그저 느낌이었지만 확고했다.









지금 안 만나면 영원히 못 볼것같다...


중딩녀야...


웅, 오빠 왜 그래?


너 지금 여학생한테 연락해서 같이 있어라.


왜?? 오빠는?


난 진짜 중요한 일이 있어서 울학교 교실에 가볼게.


헐..? 왜? 아니 그럼 언제와?


모르겠다. 오래 걸릴 수도 있어..


미쳤어?!


도와주면 네가 갖고픈 거 뭐든 하나 사줄게.


뭐래 지....ㅈ..정말..?


그렇게 허겁지겁 학교 쪽으로 뛰어가니 쌀쌀한 날씨에 찬 바람들이



폐 속으로 들어오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시원했다.



가는 길에 보니 해는 없고 가로등의 주 노란 빛만 있었다.



학교에 들어와 오르막길에서는 걸었는데 힘이 들어 그런 것도 컸지만



막상 정말로 이곳에 도착하니 곧 일진녀와 그 어두운 교실에서 단 둘이 본다는 생각에 조금 닭살이 돋았다.



일진녀의 교실을 바라보며 저곳에 혼자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구나 생각하니 다시 닭살이 돋아났다.



당시에 울 학교는 캡스가 있긴했지만



이게 현관문에만 있어서 창문으로 들어가면 끝이었다.



카메라도 교무실이나 교장실과 같은 주요한 곳에만 있기에 상관이 없었고



혹시나 들켜도 잔소리만 좀 듣고 나면 별탈 없이 지나갔기에 크게 관여치 않았다.



몇 번 정도 창문을 들씨니 열여 있는 게 하나 있었는데



으챠하고 뛰어넘어 발을 디디니 그 소리가 복도 끝까지 퍼져나가는 것처럼 울려댔다.



거기다가 막상 들어오니 어두컴컴한 게 한기가 느껴지고 조금 오싹해서 움츠려 들었다..



이 위층에서 홀로 불 꺼진 교실에 남아서 날 기다리는 일진녀는 안 무서울까..?



긴장을 하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다리에서 무언가가



우우우ㅜㅇ웅~!!하고 떨리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서 숨이 막히니까 비명도 못 질렀다..



정신을 가다듬으니까 다름이 아니라 문자 한 통이 와있더라.



그것도 중딩녀한테..



오빠ㅠㅠ 여학생 언니 택시타고
그 쪽으로 가고 있어; 나도 붙잡혀가 어떡해


이럴수가... 애초에 믿음이 안 갔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내 위치를 고자질했단 말인가?



그것보다 이제 코 앞에 일진녀가 있는데.. 여학생이 여기로 들어오면...






두 사람이 만나는 가장 끔찍한 일이 생기겠지...






그리고 자동차 불빛이 학교 창문 틈을 크게 스윽- 하고 훑고 지나갔다.









반 층 위에서는 지금까지 교실에서 일진녀 홀로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반 층 아래 건물 밖에서는 여학생과 중딩녀가 나를 만나기 위해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일진녀에게 먼저 가야 하나 아니면 지금 학교 밖을 나가야 하나..



두 사람이 만난다면 분명 누구 하나 기분 좋을 사람이 없을 거다.



만약 지금 나간다면 어떻게든 둘러대서 여학생이랑은 데이트를 계속할 수 있겠지만



일진녀와는 완전히 끝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일진녀에게 먼저 간다면 용무를 보고 다시 여학생에게 간 뒤



적당히 학교에 올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내고 기분을 풀어 줄겸 재미있게 놀아주면 될 거 같았다.






단아하고 여성스러운 성격의 여학생이 여기까지 올라오진 않겠지..



상황을 나름 괜찮게 정리했으니 이제 일진녀에게 갈 수 있게 되었다.



계단을 올라 어둠에 가려진 교실문을 조용히 열어 보았다.



그러자 그 안에서 일진녀가 자기 자리에 앉아 폰을 만지고 있었다.



폰의 화면불빛이 일진녀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차가운 입김을 비추었다.



일진녀는 폰을 책상 위에 놓아두고 나를 쳐다보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금 느껴지는 많은 감정 중에 미안함과 측은함이 가장 컸다.


...늦어서 미안해


한 달이야..
우리 대화를 하는 게 한 달만이야.


... 미안하다 내가 속이 좁아서..


됐어, 나도 뭐라고 말할 처지는 아니니까..


힘없이 말하던 일진녀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봐주더라.



막상 눈을 맞보고 있으니까 장소와 분위기도 한몫을 해서



착잡하면서도 설레는 묘한 감정이 치솟더라.



그때 일진녀가 허리를 굽혀 책상 위에 엎드린 자세로 있었다.



두 손은 주머니에 넣고 고개는 내가 있는 쪽을 향하는데 범접할 수 없는 포스에 심장이 떨리더라.



그러면서 아픈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갈라지는 목소리임에도 고운 목소리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어갔다.






그거 알아? ...나 고등학교 입학하고 나서 ..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이... 너야...


그 말에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공기는 차가운데 목에서부터 얼굴로 열기가 올라왔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멍 때리듯 사색에 잠긴 일진녀의 말을 기다렸다.



근데 나는 .. 너도 알잖아, 내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게 ..어울리지 안잖아.
그걸 인정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너무나 높은 성벽 같았어.. 그래서 그랬어..
좋아하면서도 그걸.. 인정하지 못했어.. 그래서 미안해..


나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저 일진녀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을 하고 한마디 한마디에 움찔했다.



일진녀는 언제나 사귈 준비가 되어 있던 거였다.



나는 그저 거기에서 사귀자는 말을 꺼내기만 했으면 되었던 거였다.



일진녀는 내가 먼저 고백하기만을 가슴 졸이며 지금까지 기다렸고


나는 어중간한 일진녀의 행동에 자신감을 잃고 혹시나 고백을 했다가 거절당하면 영영 끝이니



이렇게 그저 가까이에라도 머물 수 있는 친한 친구 사이로 계속 남아있는 걸 선택한 것이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하지만 아무도 모를것이다.



일진녀가 내 어깨에 기대 잘 때 속삭이며 해준 혼잣만이 무엇인지..



우리.. 사귈래..?



그래도 이 말은 지금 여기 일진녀 앞에서 꺼내줄 수 없었다.



일진녀의 확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존심에 먼저 사귀자는 말을 못 꺼내서 미안하다는 말만 하려고



이까지 나를 부른 게 아니란 것을 짐작하고 있었고



그 말만 하고 끝낼 거였다면 말하느니 만도 못한 것이다.



역시나 일진녀도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내 반응을 살폈고



나는 애써 담담하게 일진녀가 확답을 내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요함과 어색함이 우리 주위를 감싸고 돌고 있었다.






그리고.. 많이 들어보았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중딩녀와 여학생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소리였다.



일진녀도 갑작스런 인기척에 얼른 몸을 일으키고



교실 문을 바라보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째려보았다.






큰일난 거 같아서 멘붕 상태로 아무것도 못하고 삐질 거리고 있으니까



일진녀가 갑자기 내게 손짓을 했다.



난 소리가 안 나게 빠른 걸음으로 일진녀에게 갔다.



그랬더니 애가 손가락을 입술로 갖다 대면서 쉿- 이라고 하더라.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애가 내 허리춤을 잡고 밑으로 앉았다.



나도 따라 앉으니까 일진녀랑 가까이 얼굴을 마주보고 앉은 모양이 되더라.



둘 다 숨을 내쉬고 들이키며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들키면 어쩔까 하는 긴장감과 약간의 흥분 감이 묘하게 믹스되어 떨리더라.



복도 쪽에서 발자국소리가 어지럽게 울리면서 교실에 거의 다 와가는데



제발 들키지만 마라고 속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일진녀가 그때 사슴과 같은 눈망울로 나의 팔을 가늘고 긴 손으로 꼭 움켜쥐는데



그제서야 애가 왜 교실에서 나를 보자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학교 구석진 곳에서 봐도 되지만은



애는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들킬 위험도 없는 곳에서 나를 만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여학생과 중딩녀가 교실 뒷문 쪽으로 다가 오고 있었고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모든걸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드르르르륵.......



어!


어?


어...


각자 그 뜻이 다른 한탄이 나와 일진녀, 여학생의 입에서 세어나왔다.



갱군... 아..?


...왔어요..?


? 야 갱.. 쟤 아는 사람이야..?


..그쪽은 누구신데요..?


... 아는.. 친구에요


아는 친구?


.. 내가 그냥 아는 친구야?


오빠.. 큰일이란 게 여기서 여학생 언니 두고 다른 여자 만나는 거였어..?


아.. 그게


누군데 갱군이를 찾으세요?


.. 그쪽은 누구신데 여기 계시죠..?


.. 여자친구라면 어쩔 건데요?


네..?


아...


야 갱군! 너 똑바로 말해... 쟤랑 무슨 사이야?


오늘 데이트 약속을 했는데 갱군씨는 정작 그쪽이랑 만나고 있네요..?


...진짜야? 갱...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요함과 적막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머리 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언제부터 인지 모르게 몸이 떨리고 있었다.


식은땀 한 방울이 모여 등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더라..



모든 것이 끝나버렸구나..


갱군아... 갔어


...응?


사람들 말이야, 지나갔어..



일진녀가 조심스러운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이며 말을 걸고 있었다.



아.. 너무 긴장하다 보니 혼자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있었구나.



긴장감이 쭉 하고 풀리니까



온몸의 기운이 빠지면서 바닥에 엉덩이를 내려놓고



폐 속에 응어리진 한숨을 한방에 길게 쭉 뽑아냈다.


쟤들 이 시간에 여길 왜 왔지..? 누굴까.


ㄱ..그러게.. 아무튼 들킬 뻔 했네..


소문이라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아무리 일진녀라도 늦은 밤,



교실에서 남학생과 같이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좋은 꼴은 못 볼 테니..



허탈함과 두려움이 나의 전신을 감아 돌았다.



여학생에게는 너무 미안하지만 걔를 위해서라도 우린 여기서 만나서는 안됐다.



나를 배꼼이 보던 일진녀가 입술을 땠다.


야.. 아파..


언제부터인가 내가 걔 팔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더라.



안 그래도 애도 내 팔을 잡고 있어서



이산가족 상봉한 것처럼 우린 서로의 팔을 잡고 쳐다보고 있었다..






항상 행동을 하기 전에 생각부터 하던 나였는데



그 자리에서 앞뒤 안 따지고 일진녀의 입술을 덮쳤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불그스름한 일진녀의 연분홍 입술은 마치 빨려 들어 갈 것만 같더라.


ㅇ?! 읍!


일진녀는 내 팔을 잡던 손을 때고 내 어깨를 몇 번이나 때리더라.



그때 내가 일진녀의 등과 뒷목으로 손을 넘겨 강하게 휘감았다.



젤리처럼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뚜렷하게 전해졌다.



그랬더니 걔도 얌전해지며 내 어깨를 치던 손으로 나의 허리와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입술을 때고 나니까 쪽- 소리가 나더라. 그 소리가 그 땐 왜 그렇게 좋던지..



그렇게 둘이서 그윽하게 쳐다보다가 일진녀가 볼에 홍조를 띠며


너.. 담배 폈지?


라고 말하는데 민망했다.. 그래서 내가,


아.. 응..ㅎ 하고 슬쩍 멋쩍게 웃으니까 애도 푸-하고 살며시 웃음지어주더라.



막상 뽀뽀를 끝내니까 닭살이 돋으면서 민망해져 눈을 어디다 둘지 모르겠더라



게다가 현자타임이 왔는지 지금 학교 안에서 나를 검거하려고



눈에서 레이져를 쏘며 돌아다니는 여학생이 생각났다.



아직 일진녀에게 확답을 듣지 못한 것에 대해 떫은 느낌이 있었으나



이제 일진녀를 돌려보내고 여학생을 만나야 했다.



그때 때마침 폰에서 진동이 울리더라.


오빠 어댜! 지금 교실이얌.


중딩녀에게 온 문자였다..



중딩녀는 내 친구랑 아는 사이고 내친구가 몇 반에 있는지 알고 있었겠지..



친구랑 나랑은 같은 반이었으니 내가 우리 교실에 있다고 생각한 거군..



반이 달라진 지금, 나와 일진녀는 지금 일진녀네 반에 있고



우리 반과는 복도 끝에서 끝까지 떨어져 있다..



빨리 계단으로 나가면 들키지 않겠지..



일진녀가 나를 아기고양이 쳐다보듯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여기서 헤어지기는 싫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방금.. 엄마한테 문자 왔는데.. 병원에 자기 대리고 오래..



물론 울 엄만 바위도 손으로 들만큼 건강하셨지만 막상 떠오르는 게 그것 밖에 없더라..



게다가 일진녀가 구한 집과는 정 반대 쪽이라 학교 밖에 나가 헤어지면서



나는 여학생에게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비록 엄마를 팔았지만 아들을 살리는 거라 생각하고 이해해주길 바랬다.


잘..가 !


응.. ^^ 학교에서 봐..히


일진녀가 평소와는 다르게 밝은 모습으로 두 손을 앞에 모으고 뒤돌아갔다.



일진녀와의 여운도 잠시 아직 내게는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아ㅈ댓따... 여학생을 볼 면목도 없고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더라.



그런 순수한 애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거에 대해서 미안했다.



하지만 모두를 위해서 이게 가장 옳은 길이겠지..


여보세요..?


아... 저.. 미안해요..


아.. 아녜요.. 지금.. 어디세요..?


학교에 있었는데 분식점에 있는 줄 알고 여기 왔거든요 근데 안 계시길래..


아...


..어디세요?


이제 막 도착했어요.. 늦었죠? 미안해요


여학생은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구나..


내에게 과분한 사람이란 게 다시 한번 느껴지더라.



어쩜 저리도 속이 깊을까? 여학생의 넓고 투명한 아량에서 헤엄치고프다..


아.. 그럼 일진공원에서 만날까요?


네, 좋아요



가로등 등불 한줄기가 비추는 벤치에 앉아있으니



슬슬 긴장감이 풀리며 찬 기운과 함께 몸이 떨려왔다..



하.. 고달프다. 그러고 보니 여긴 일진녀와 함께 앉아 얘길 하던 자리였지..ㅎ



저 멀리서 여자애 두 명이 걸어오는데 여학생은 가디건을 두르고 맵시를 정리한 게



꽤나 정성 들여 준비를 하고 온 게 보였다.



선녀가 존재한다면 분명 여학생일 것이다.



어둠에서도 밝게 빛나는 모습에서 언제라도 하얀 날개가 펼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중딩녀는 인상을 오만상 찌푸리는 게 뭔가 단단히 삐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다 알고 있다라는 그런 느낌.


미안해요, 늦었네요.


오빠! 지금 만나면 어쩌자는 거야! 언니 차 시간 다 됐단 말야..


... 미안


중딩녀야 그만해, 만났으면 된 거야..
저기 갱군씨.. 학교에 급한 일이 있어서 갔다고 들었어요.


아.. 네..그게 실은..


아니에요.. 갈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거에요.


이유야 있지만은 궁금한대도 그걸 물어보지 않는 여학생이 고맙고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렇게 잠깐 앉아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정거장까지 여학생을 대려다 줬다.



좀 늦은 시간이어서 이것저것 많은 얘기도 못하고 버스가 와서 서둘러 보내는데



손을 살짝 들어 소녀 미소를 짓고 차에 타는 여학생에게 알게 모르게 씁쓸함이 묻어있더라.



그렇게 공허한 마음을 주어 담고 중딩녀와 정거장을 빠져 나왔다.



말없이 걸어 가면서 내가 중딩녀에게 조심스럽게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중딩아, 교실엔 왜 들어갔냐?


아니, 오빠가 하두 안 나오니까 언니가 걱정하길래...


네가 들어가자고 옆에서 졸랐겠지?


모.. 아 지겹잖아! 기다리는 건 싫긔.


... 야..


ㅎㅎ아 미안 댓지?


..미안하면 친구한테는 오늘 여학생이랑 만나 재미있게 놀았다고 해라.


움..ㄲ, 끄응... 아랏샤....


담에 또 뭐 먹고픈 거 있으면 사줄 테니까 말해.


진짜? 정말?


음, 끄응.... 아랏샤..


ㅋㅋㅋㅋㅋㅋ앜 오빸ㅋㅋㅋㅋ


ㅋㅋㅋㅋㅋ



중딩녀까지 바래다주니까 온몸이 다 부서질것 같더라.



힘겹게 샤워를 하러 들어갔는데 귀찮아서 대충 물 칠만 해야지 하면서



힘없이 대강 씻고 나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편안하고 안락한 게 스포츠마사지 받고 난 후의 개운함 같았다.



그러다가 입에서 침이 줄줄 나오더라. 내가 드디어 해탈했나 보다 하면서



손등으로 입술을 스윽 닦는데 입술에 자극을 주니까



일진녀와 뽀뽀한 게 생각나서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곧장 깊은 꿈나라로 승천했다...






눈을 뜨니까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잤는지.. 다음날 저녁이더라.



하루 종일 잔 거... 머리가 띵하고 눈곱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다.



끙..하고 일어나니 온 몸이 뻐근했다. 그렇게 누워서 잠결의 여운을 느끼다가



뭐 온 게 없나 싶어 폰을 봤는데 일진녀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와있었다.



으오.. 이제 다시 자연스럽게 연락할 수 있구나.



이제 우리 사이의 냉전이 풀린 것 같아 너무 기뻤다.



그렇게 두근거리며 문잘 확인했다.






나 일진경찰서야. 이리 와줘.









일진녀랑 사귄 썰 [Behind 20~40화 / 完]
http://m.humoruniv.com/board/read.html?&table=guest&pg=0&number=343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