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내가 사랑하는 밤의 공원, 덕진）

문득 그런 날이 있다.
하루종일 멀쩡하다가 해가 떨어진 뒤 사소한 일 하나에 우울해져서 목적 없이 자판을 두들기고 싶어지는 날 말이다.
우울한 일, 혹은 그런 영상이나 글들.

흔히 새벽 감성이라고 하던가.
3천 번은 우려낸 100% 핸드메이드 INFP인 필자는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궤변은 있다. 한 주 내내 1교시가 낀 시간표가 완성되었고, 미처 덮쳐오는 시대의 광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생체리듬은 박살이 나,
점심 이후 집에 쓰러져 정신을 잃는 날이 늘고 있는 요즘이다.
해가 쨍쨍한 대낮에 베개에 코를 처박고 자고 있으니 잠이 제대로 올 리가 없다.
그런 날들이다. 어느덧 가을이 온다.

이젠 너무나 멀어진 고등학교 시절에, 시대의 흐름을 사회 규범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아노미라고 배웠던 것 같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씩 대학을 떠나 돈을 벌기 시작하고 있다. 누군가는 가업을 이어받고, 누군가는 취직을 해 버스비가 부담스러운 곳 까지 떠났다.
나는 아노미일까?

아주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나는 졸업이 다가옴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레이스는 이미 포기한 지 오래됐고, 장내를 걸으면 먼지가 밟혀 발자국이 남는 경기장에 나 홀로 남았다.
친절하게도 뚜껑이 덮혀 바깥도 보이지 않고, 당최 언제 꺼지는지 모를 조명만이 경기장을 비추고 있는데, 꼴에 경기장이라고 발자욱을 남길 때마다 소리가 울리는 공간이다.
마치 어린 시절의 체육관 강당을 혼자 걷는 것 처럼, 나는 언제나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남았다.

재능에 있어서 가장 잔인한 말은 '평범하다' 는 말인 것 같다.
'엉성하다' 나 '부족하다' 라는 말이란, 그래도 그 사람이 몰두하는 분야에 있어 재능이 있음을 전제하고 실력을 평가하는 표현인데,
'평범하다' 라는 말은 당최, 그 사람이 재능 자체가 없는, '無' 라는 표현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굳이 이걸 적으려고 휴대폰을 킨 것은 아닌,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이다. 아픈 손가락이 몇 마디 있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엔 딴 짓을 참 좋아하는 편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 평범했던 성적에 비해서도 집중력은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으며, 긴 시간 강제로 들어야 했던 수업으로부터 도망가고자 상당히 노력해왔다.
무려 초등학생땐 하루 종일 커터칼로 지우개를 깎다 참다못한 선생님께 혼이 났으며, 그 자랑스러운 결과물을 모조리 압수당한 일도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잡았던 것이 그림과 글이었다.
본격적으로 딴 짓을 했던 것은 초등학교 4학년으로 기억한다.
밥 먹듯이 타던 성적우수상을 놓치고, 반대로 형님이 성적우수상을 타기 시작하자 스스로 분위기가 바뀜을 느낀 것이다.
집에서는 [흉몽]이 반복되었으며,
기억 속 어느샌가부터 반복되던 빌어먹을 놈의 행정고시와 공무원에 대한 이야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신물이 났다는 이야기다.
집에 있던 만화책을 몇 번 따라 그렸던 노트를 보다, 문득 아침공기를 마시며 줄 없는 연습장을 홀린듯 샀던 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당시 최고의 선택지였다. 아무도 터치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아마 저 놈이 열심히 필기하는게 아닌 낙서를 하는 것임을 눈치채더라도, 노트와 펜을 잡고 있는 아이를 구태여 터치하지 않았다.

하다 못해 커터칼을 하루 종일 쥐고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나는 이른 바 신이 났다. 수업에 집중을 안 하자니 간간히 지적이 들어오고,
그렇다고 집중하고 있으면 '부담스러울 정도의 집중' 이란 소리를 듣곤 했다.
도대체 어떡하란 말인가? 스스로에게 암만 물어도 해답은 없었다.
그런 가불기에 걸려있던 나에게, 그림이란 하나의 구원처럼 내려온 천사님이나 다름이 없었단 말이다.

물론 언제 봐도 허접한, 그림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것들이었다.
자주 보던 플래시인 졸라맨 체로, 만화방에서 감명깊게 빌려읽은 드래곤볼을 끄적였다.
연습장은 한 장, 두 장을 졸라맨만 그려대는데 실력은 늘 리가 없었고, 덕분에 초등학생 시절의 그림은 내게 단순한 흥미본위 이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올라서기 전엔 말이다.

[흉몽]은, 결국 내 인생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이야기다. 녹은 타이어가 몸에 끈끈이마냥 붙은 것 같다. 중학교 시절 필자의 감성은 사춘기를 맞아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그 전성기는 눈물나게도 [흉몽]에 가장 많이 노출되곤 했다.
나는 말 그대로 속으로 썩어들어가고 있었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찾아보던 시절이었다.

그런 와중에 뻗은 손을 붙잡은게, 요즘까지도 변함없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놈이다.
서브컬쳐와 마찬가지로 그림을 좋아하던 친구였으며, 초등학교 6학년 막바지쯤 소개받은 친구였다.
우연히 같은 반이 된 구면은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녀석으로부터 보게 된 새로운 세상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시중에 흔히 팔던 마법천자문 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만화책, 미소녀가 나오는 만화와 글들.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발견한 나는 그 특유의 포근함, 너그러운 분위기에 미친듯이 빨려들어갔다.

만화책과 라노벨을 닥치는 대로 읽지는 않았다. 서브컬쳐 특유의 너그러운 분위기를 즐겼지, 크게 컨텐츠를 소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후 녀석으로부터 소개받은 새 친구들과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은 내게 이 세상 무엇보다 큰 항우울제로 작용했고,
매일 저녁 [흉몽]이 진행되고 있을 거실 불 켜진 집보다 학교에 있는 낮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못（MOT）의 [날개] 라는 곡이 있다.
우린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만 날았다.
처음 보는 세상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슬펐다.
깨져버릴 꿈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 3학년 즈음 부터,
아주 INFP스럽게나마 [흉몽]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기점이 된 사건은 고등학교 진학이었으며, 집은 내게 친구들과 멀어져 성적에 좋은 학교로의 진학을 강권했다.
다른 표현을 굳이 쓰고 싶지 않으니 강권이라고 하겠다.

나는 어떻게 얻은 꿈을 잊고 싶지 않았다.
꿈이 깨지지 않길 바랬고, 외진 서점에서 당시 거금을 주고 산 데포르메 책, 주말마다 학교까지 놀러 나가던 미술부의 꿈을 이어가고 싶었다.
모든 것이 집의 뜻대로 이뤄지던 것에 비해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고, 나는 집이 다른 스탠스를 취하는 것을 처음 느꼈다.

또한 결국 불가능한 싸움이란 것도 알았다.
나는 멀어졌다. 그림을 그리던 팔은 잘려나갔고, 외지인들이 가득한 고교와 기숙사에 이방인으로 팔려나갔다.

중학교 2학년때부터 시작한 글은, 이때쯤부터 몰래 적어내리기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 모든 학년의 담임 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이셨고, 특히 종잡을 수 없는 생각과 기행으로 '싸이코' 라고 불리셨던 2학년때의 선생님께선 날 위험하다고 생각하셨는지, 자주 관심을 주시곤 했다.
'꿈이 무엇이냐' 와 그걸 위한 수단을 적는 칸에,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과 내가 죽는게 빠르다는 글을 적어낸 것이 화근이었을 것이다.

싸이코 선생님은 매 주 학생들에게 자유로운 글쓰기를 숙제로 내셨고,
아는 노래가사조차 얼마 없던 나는 꼴에 시라고 주장하는 글뭉탱이들을 적어내기 시작했다.

지금 보면 정말 공감성수치 때문에 다 찢어버릴 것들인데,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은 나를 좋게 봐주셨다.

이야기는 불행하게도 배드엔딩으로 끝났다. 선생님이 나에 대해 상담하고자 아버지를 학교로 모시려고 했고, 그 날 밤 나는 폭격을 견뎌야 했다.
이후 관심을 줄여달라는 글을 숙제에 적어냈고, 그 후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런 와중에도 글을 쓰던 버릇만 지금까지 남아있다.
확실히 언어 과목에는 어느정도 머리가 있었는지, 공부량에 비해 결과가 나쁘지는 않았다.
덕분에 다들 국어에 머리가 깨지는 동안 나는 국어 문제집과 책에 담긴 작품들을 음미하는데 시간을 썼고, 이정도로나마 글을 쓸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고등학교 시절은 머리 속 봉인된 상태로 감금되어있다.
결코 나빴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은 성격이 무난하다면 성적 위주의 분위기가 있었으며,
화장실이 급한 친구에게 곧잘 휴지를 베풀어주던 내게는 나쁜 화살이 꽂히는 일이 없었다.
공립이 아닌 사립의 선생님들은 개성적이고 열정적이셨으며, 공부에 열의를 잡았던 때엔 썩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잘려나간 팔이 아팠다.
고등학교의 미술부는 진지한 사람들이 가는 곳의 느낌이라, 겁쟁이는 신청하지 못했다.
1학년 때에만 있던 뎃셍 실습 수행평가에서 극찬을 받았을 때에는 그 생각이 조금 바꼈지만 말이다.
무려 다음 해에 후배들한테도 보여줬다고 도서부 후배에게 들었다.

꿈은 이루지 못한 채로 남았고 버스는 떠나갔다.
나는 내 인생에서의 무언가가 끝나버렸음을 느꼈고, 무기력함을 학습하고 다녔다.
무기력함을 학습한 이후엔, 눈에 띄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학교에서 서브컬쳐 이야기를 떠들지 않았고, 사겼던 친구들과 데면한 관계를 넘지 않았다.
그저 3년이 지나가길 바랬다.

이후 대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수강신청 주저리 글에 적어둔 것 같다.
속이 좀 후련해지는 기분이 든다. 꼭 이렇게 붕대를 새로 감아줘야 하는 날이 있다.
누렇게 변색된 붕대를 걷어내면, 아직도 시뻘겋게 핏방울이 맺히는 상처가 하나 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오는 요즘이다. 감당이 되질 않으니 그저 새 붕대를 감아줄 뿐,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는 평생 간다는 말이 떠오른다.

먼 길을 넘어 현재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스스로에게 과분할 정도의 인복이 있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받은 것들에 모두 보답하기 위해선 나도 홀로설 수 있어야 할텐데,
겁쟁이는 아직도 누워서 밤에 글이나 끄적이고 있다.

내 몫이란 뭘까
나 같은 놈도 내 몫이란걸 할 수 있을까.

강당의 묵은 먼지냄새가 왠지 그리운 오늘이다.
그 고요함 속에 머물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