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이었습니다.
모처럼의 불금인데도 학교에 박혀 야자를 해야 했습니다.
눈물이 나더군요（시발）. 그래도 집중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11:30분. 야자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습니다.
해방의 신호탄이 곳곳에 퍼진 아이들의 입에서부터 터져나왔습니다.
정석 책을 위로 던지고, 연필을 부러뜨리는 병신도 있었습니다.
저는 조촐하게 공책을 찢어 쓰래기통에 버리는 정도로 끝냈지만 말입니다.


학교의 밤은 외로웠습니다.
저 멀리 빛나는 달빛 주위에서 아득히 굽어보는 별들의 인사.
수많은 별들 사이에 내가 있을 공간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펐습니다.
더군다나 날씨는 후덥지근, 몸은 천근만근. 집까지 걸어갈 생각을 하니 정신은 아찔아찔.
가족은 전부 저만 빼놓고 여름 휴가를 떠났습니다. 나쁜 사람들. 나쁜 누나새끼（헤헷）
여하튼 울적해진 저는 교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러고 있던 찰나에, 제 등 뒤를 탁치는 손짓이 있었습니다.
태훈이었습니다. 검은테 안경을 쓴 머리가 곱슬거리는 웃긴 녀석입니다.
"민철병신아, 집에 안가고 뭐해?"
민철병신은 제 애칭입니다. 저에 대한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으...응. 태훈아."
"민철병신. 너 집에 지금 아무도 없다매?"
며칠 전, 그나마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곱슬머리 녀석에게만 살짝 귀뜸한 일이었는데
입이 가벼운 그 아이가 여기저기 퍼트리고 다녔다 봅니다.
그 씹새끼를 당장 처죽이고 싶었지만, 반에서 유일하게 같은 애니를 보는 사이라서（오레이모）
용서해주기로 했습니다. 얼마 전에 서거하신 故루리 선생의 낯을 봐서 참았습니다.
"으..응. 그런데?"
"나 자취하는 거 너도 알지?"
태훈이는 집 근처에서 자취를 합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나 심심하다."
그리고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차피 너 집에 아무도 없는 거, 오늘 너네 집에서 잘래."



저는 강한 거절의 뜻을 담아서 녀석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얼마든지. 네가 원한다면 같이 자자."
그렇습니다. 제 입은 뇌와 따로 놀았습니다. 잦은 갈굼의 결과로 얻어진 처세술입니다.
"병신민철아. 혹시 나랑 같이 자는 게 불만인 건 아니겠지?."
저도 모르게 생각했던 그것을 태훈이는 용케도 눈치챘었나 봅니다.
머쓱해진 저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습니다.
"태훈아. 오늘은 안 돼.."
"뭐?"
"아..아냐. 그냥 혼잣말."
다행히 녀석은 듣지 못했습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녀석과 같이 집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달빛 조각이 우리의 그림자를 비추며 우수수 떨어지는 밤이었습니다.
20분쯤 걷자, 마침내 저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현관문을 여니 조용한 침묵이 우리를 반겨줬습니다.
졸졸 흐르는 어둠의 냄새. 아무도 없는 집이란 그렇게 처량한 것이었습니다.





"집에 뭐 없냐?"
소파에 드러누워 OCN에서 방영하는 성인 영화를 감상하다말고 태훈이 불쑥 말했습니다.
마침 샤워를 끝내고 머리에 김을 풀풀 날리며 화장실에서 나오던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 늦었잖아. 밤에 뭐 먹으면 몸에도 안좋고...또.."
속으로는 씨발새끼! 씨발새끼!를 외치고 있었지만 저는 어느새 녀석의 똥꼬를 햛고 있었습니다.
"아니..그런 거 말고."
태훈이의 입이 음흉하게 비틀렸습니다.
순간 저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습니다.
"너....설마."
"병신아, 뭔 생각해. 술 말이야, 술."



비로소 마음을 놓고 제가 다정하게 녀석을 타일렀습니다.
"미..민철군! 밤에 술 마시면 나쁜 어린이라능! 그러면 안된다능!"
깜찍한 미소가 돋보이는 저의 제스처를 녀석은 과감히 무시했습니다.
"좆까지 말고, 술 있어, 없어? 그것만 말해."
민망해진 저는 고개를 푹 수그렸습니다.
"설마..없으면.."
그러더니 태훈이는 주먹을 부릅 쥐며 폭력의 행사를 암시했습니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마트에서 사오신 보드카를 찬장에 넣어두셨던 기억이 났습니다.
극한의 상황이다보니 용케도 그런 일이 퍼뜩 떠오르던 것이었습니다.
굉장한 기쁨을 느끼며 저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들며 말했습니다.
"응! 있어! 저기 찬장에....그런데 태훈아? 뭐하게?"
"병신아. 뭐하긴. 당연히 마실려고 그러지. 너도 마실래?"



이 개새끼가.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우리 집에 침입한 것이었습니다.
순간 너무도 화가 치밀어오른 저는 꺼내면 안되는 말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안주는? 냉장고에 치즈 있는데."
눈짓을 찡긋하며 상냥하게 응답하자 녀석의 얼굴이 흡족해졌습니다.
"민철이 이거, 병신인줄만 알았더니, 어른 비유도 맞출 줄 아네. 다 컸어..."




곧 우리 앞에 개봉 안한 보드카 한병과 고급 치즈가 담긴 그릇이 놓여졌습니다.
물론 제가 서빙한 것입니다. 비록 강제적인 일이었지만 집주인인 이상 손님을 대접해야 했습니다.
치즈를 입에 넣고 씹으며, 흰 유리잔에 따른 보드카를 한모금 넘기더니 녀석이 유쾌하게 말했습니다.
"크...역시 술은 보드카야. 금방 오르잖아?"
좆고딩새끼가,술은 마셔본 적도 없는 녀석이 허세만 잔뜩 부리는 꼴이 우습기만 했습니다.
"태훈아. 여기 한잔 더...."
두 손으로 병을 들어 녀석의 컵을 채우는 제 머리를 녀석이 슬슬 쓰다듬어 줬습니다.
"착하네, 병신민철. 아니지? 이제는 그냥 민철이다! 승급 시켜줄게!"
승급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마냥 저의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새벽까지 마시고 씹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물론 내가 씹었던 것은 굴욕과 눈물의 시간이었습니다.
술은 물론, 한조각 치즈에 손을 대는 것조차 녀석은 엄하게 금하였습니다.



새벽 2시쯤. 슬슬 보드카 병이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그때는 이미 아버지가 숨겨두신 소주며, 냉장고에 있는 맥주도 다 마셔버린 상태였습니다.
나중에 집에 돌아오실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저는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녀석이 불쑥 말했습니다.



"너...디지몬이라고 알지?"
꼬부라진 혀를 잔뜩 굴리며 술김을 팍팍 내뱉는 녀석은 이미 만취 상태였습니다.
"아...알지."
"홀리엔젤몬도 알아?"
꼬꼬마 시절.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봤던 기억이 났습니다.
삐애로새끼를 홍콩으로 보내버리던 『천국의 문』이 인상 깊었던 디지몬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독교에서 로비를 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성（聖）적 에너지가 충만했던 디지몬.
그래도 어린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응. 아포카리몬 전에 있던 보스디지몬을 보내버린 디지몬이잖아."
이런 쪽으로는 꽤나 박식한 지식을 자랑했던 저는 손가락을 올리며 자세하게 말했습니다.
"역시 병신민철이라 그런지 이런 건 꽤 잘 아네."
너털웃음을 지으며 녀석이 말했습니다. 칭찬에 목말라했던 저는 그저 한없이 기쁠 따름이었습니다.



"내가 지금부터 보여줄게."
"뭐?"
"가만히 있어."
"응."


녀석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부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놀랍게도, 녀석은 식칼을 한 개 슥 뽑아 돌아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순간 얼굴에 피가 싹 가셨습니다. 이 새끼가 술 존나 빨더니 무슨 짓을 저지를지 분간이 가지 않았습니다.


"태...태훈아!"
"보여준다니까."



녀석은 식칼을 들고, 저희집 베란다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러면서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게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저는 그저 하나의 장난감에 불과했습니다.
마치 삐에몬의 주머니에 들어갔었던 태일이나 매튜와 같이...


어느덧 다다른 베란다. 녀석은 식칼을 들고 옆에 서더니 문득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천국의 문을 연다! 악의 디지몬아, 각오해라!"
"뭐? 그게 무스.."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이 미친 새끼가 느닷없이 베란다 문을 열어제끼는 것이었습니다.
밤바람이 슝-.하며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악의 디지몬! 저 너머로 사라져라!"
그러면서 녀석은 식칼을 저에게 들이밀었습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그 문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녀석에게 살해당한다는 것을....



"으어어어어..."
미친놈처럼 비명을 지르고 손을 위로 흔들면서 저는 베란다 밖으로 나갔습니다.
최대한 빨려가는 것마냥 연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제 처지가 몹시 서글펐습니다.
마침내 저는 베란다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직 몇몇 집에서는 불을 끄지 않고 있었습니다.
새벽의 술렁이는 별빛을 받으며 저는 셔츠 차림으로 베란다에 서야 했습니다.


"자...그럼.."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녀석이 말을 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이 개새끼가, 칼로 무슨 별모양을 커다랗게 긋는 것입니다.
카드켑터 체리도 아니고. 디지몬에서 정말 저런 장면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그것은 역겹고, 슬픈 움직임이었습니다.


"악의 디지몬을 봉인했다!!"
시발. 지금 생각해도 욕이 나옵니다. 아니 이 새끼가 글쎄 베란다 문을 잠궈버렸던 것입니다.
베란다가 거실하고만 통하도록 되어있어 그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서 유리문을 쾅쾅 치며 울부짖었습니다.
"태...태훈아! 문 열어. 뭐하는 거야!"



태훈이는 저를 보며 눈을 끔뻑거렸습니다.
술에서 덜 깼는지 눈알이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녀석은 "아, 이제 자야지..."라고 말하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침대가 있는 안락한 나의 방으로.



존나 울부짖었습니다. 억울해서,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정도로 공포스러웠습니다.
미친 개새끼마냥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 탓에 옆집에서 화난 목소리를 내며 항의했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하느님의 구원보다도 절실했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사건의 자초지총을 옆집 아저씨에게 큰 소리로 알렸습니다. 당장 좆되게 생긴 상황이었습니다.
술을 마셨다고 혼나는 것 정도야 어린아이 코 묻은 돈 훔치듯 쉬운 일이었습니다.





전 지금 좆됬습니다.
자상한 옆집 아저씨가 우리 집에 오셔서 존나게 대문을 두드리셨습니다.
몽롱한 상태에서 깨어난 태훈이가 문을 열어줬고, 싸대기를 존나 쌔게 맞았습니다.
곧이어 유리문이 열렸고, 살아났다는 감격에 젖기도 전에 아저씨의 손이 제 뺨에 맞닿았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저의 삶을 실감나게 해주는 또 다른 감격이었습니다.



아저씨가, 아버지가 오시는 대로 이 일을 아버지께 알린다고 합니다.
그의 꼬추라도 빨아서 그의 엄격한 몸을 누그러뜨리고 싶었지만 그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의 문에 들어간 대가로, 진짜 천국에 가게 생겼습니다.






태훈이가 열었던 천국의 문.
그것은, 나와 녀석을 천국의 세계로 이끌었던
사랑과 희망의 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