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글은 제가 연재하고 있는 도서부 시리즈의 단편 소설입니다. 하나의 사건에 맞춰 이야기를 서술하는 만큼 각 사건마다 부제를 붙혀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해당 작품은 3편（완） 부분입니다. 다음 글의 내용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앞서 연재된 글들을 읽고 와주시면 더욱 재밌게 글을 읽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눌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단서들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이 소녀와 처음 만났을 때 당장 어울릴만한 이름이라,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만들 때에는 다수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름을 지어놓는 경우와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 아이를 보고 이름을 짓는 경우 두 경우가 있을 것이다. 후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지만, 만약 이 소녀가 어릴 때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름에 ㅇ자만 왕창 넣어서 이름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아영이나 양우영같이 이름만 보고도 사람을 알아맞힐 수 있을만한 이름. 실제로 그렇게 만들었다면 좀 우스웠을지도 모른다. 저 얼굴에 이름이 이아영이라면 아마도 나중에 길거리에 카드를 흘려서 경찰서에 찾으러 간다 해도 이름만 보고 경찰도 이 사람이 이아영이겠는데? 싶을 만한 얼굴이다. 이런 바보 같은 잡생각은 그만두기로 하고 오랜만에 머리를 쓰는 일인만큼 진지하게 다가가 보기로 했다. 아직 내가 이 소녀에 대해서 아는 정보에 대해서는 나보다 나이는 많을 것이고 키는 조그마하고.. 이런 외형적 특성들이 이름을 유추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둘이서 나눈 대화 속에 힌트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이마트에 나를 데려온 이유가 홍차였으니까 홍차.. 홍차..


”그럼 홍씨려나요“
소녀는 생각없이 내뱉은 말에 살짝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선배가 한 말이 홍차 사러가자고 했잖아요. 당연히 그럴 일은 없지만, 그냥 홍차 홍차 하다가 대충 홍씨가 생각나서 해본 말일 뿐이에요“
”오.. 되게 똑똑하다 너, 맞아 내 이름은 홍차랑 관련된 이름이거든“
이런 거를 대단하게 여기는 모습이 살짝 바보같아보였다.. 대충 찍었던 걸로도 신기하게 여길 정도면 이 사람은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실시간으로 감탄을 연발하는 종류의 사람이 아닐까. 진짜 도서관에서 그러고 있는다면 한번 구경해보고 싶었다.


”홍차연은 어때요“
”땡, 아예 틀렸어“
아직 이름을 추측하기엔 내가 이 소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소녀로부터 단서를 이끌어내는 방법밖에 없겠다 싶었다. 사사로운 이야기가 이어지다보니 어느새 차 코너에 도착했다. 만약 홍차와 관련 있는 이름이라면 고르는 홍차의 종류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녀는 자연스럽게 차들이 늘어져있는 위치로 향해서 트와이닝의 얼그레이 홍차를 집어들었다.


”선배, 얼그레이 홍차는 왜 얼그레이 홍차인가요“
”좋은 질문이야, 얼그레이 홍차는 19세기의 영국의 수상이었던 그레이 백작의 이름을 따서 만든 차야, 홍차가 17세기 중엽부터 중국에서 포르투갈로, 포르투갈에서 영국으로 전해졌다는 거는 기본 바탕으로 깔아두고 그레이 백작이 수상으로 있던 영국의 외교 사절단들은 중국에 파견 갔다 돌아오는 길에 랍상소총이라는 차를 가져왔어, 그레이 백작은 이 랍상소총으로 만든 차를 좋아했는데 중국에서만 나는 차 종류라서 영국에서 즐기기 위해서는 매번 가져와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지“
소녀는 자신의 손에 쥔 차 상자를 올려 보였다.
”그때 이 트와이닝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랍상소총과 비슷한 맛을 내기 위해 베르가모트의 향을 홍차에 입혀 그레이 백작에게 선물했대. 차의 이름은 거기서 나온 거야. 영어로 얼（earl）이 백작을 뜻하거든 그래서 백작 그레이라는 이름의 차가 얼그레이가 된거지“
방대한 홍차에 대한 지식을 펼쳐놓는 소녀의 모습은 어쩐지 차 전문가의 모습이 물씬 풍겼다. 얼그레이라는 이름을 통해 말장난을 살짝 섞어서 이름을 지으면 선회（*先灰 - early gray） 같은 말장난을 할 순 있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정색한 얼굴을 마주해야 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선배는 홍차나 다른 차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세요?“
”응, 어렸을 때 고향이 보성이라 차를 접할 기회가 많기도 했고 아버지도 옛날에 일본식 개인 카페를 크게 하셨어 가지고 차라면 다양하게 알고 있어“
밝기만 했던 선배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진 기미가 보였다.
”선배 이름은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건가요?“
”내 이름은 우리 아버지가 지어주셨어“
”혹시 선배 동생이나 오빠 있어요?“
”음. 외동이야, 사촌들도 따로 만난 적이 오래돼서 그냥 또래 가족은 없다고 봐도 괜찮아“
요즘은 부모들이 직접 짓는 경우가 잦지만 조금 옛날로 가더라도 이름 대다수는 작명소에서 태어난 날짜나 시간을 통해 사주와 팔자를 잘 섞고 돌림자도 섞어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여성도 돌림자를 쓰는 경우는 있지만, 외동이라면 돌림자가 무엇인지 알 겨를은 없다고 봐도 된다.


아버지께서 이름을 지으신 만큼 특별한 뜻을 통해 이름을 짓지 않으셨을까 싶었다. 홍차를 사러 가자는 말을 하며 홍씨 성을 맞추었을 때 흠칫하는 것으로 보아 홍차와 관련이 깊은 것 같은 낌새가 느껴졌었다.
”아버님께서도 홍차를 좋아하셨나요?“
”무지 좋아하셨어, 성도 홍씨인데다가 ‘내가 만든 차는 다 홍차가 아닐까’ 하시면서 다른 차들보다 가장 애착 가지신 차였거든“
갑작스럽게 들어온 재미없는 말장난에 살짝 웃음이 터질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낼 수 있었다.
”홍차만의 특징이랄 것이 뭐가 있을까요“
”홍차 하면 역시 영국이지? 아버지께서 옛날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셨다가 만난 영국인 친구들이랑 어울리면서 다양한 홍차를 맛보셨나 봐, 그러면서 영국 내에서 홍차가 퍼지게 된 계기와 역사에 대해 들으시면서 더 홍차에 빠져드셨대. 그 영국인 친구들이랑은 일본 생활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시면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까지 배웅해줄 만큼 각별한 사이라고 하셨어“
”아버님께서는 홍차의 어떤 점이 맘에 드셨던 걸까요“
”음, 먼저 생각나는 점은 홍차가 전파되면서 서양과 동양이 같은 문화요소를 즐겼다는 점일까, 한국인이었던 아버지가 일본이라는 말도 잘 안 통하고 생활 풍습도 차이가 심한 곳에서 홍차를 매개체로 한 식구처럼 친근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점을 좋아하셨어. 홍차를 가운데 두고 있다면 홍차의 향과 분위기를 즐기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셨거든. 아버지가 유학 갔을 때 이야기를 나한테 자주 해주셨는데 들을 때마다 마치 로빈슨 크루소의 무용담을 듣는 것 같아서 되게 멋있었어“
실제로 일본의 문학들을 보면 일본 부 활동 중 다도부에서 홍차를 자주 즐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홍차를 통해 지구 공동체의 화합까지 생각하셨다는 점에서 평화주의자 같은 모습이 강하게 들었다. 이런 분이 선배의 이름을 지었다면 분명 홍차의 특징과 관련하여 짓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께서는 어떤 종류의 홍차를 좋아하셨나요?“
”아버지는 딱히 차의 종류를 가리거나 하시진 않으셨어, 종류마다 맛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 맛의 차이들 모두가 개개인의 특성이라 오히려 찾아 마시는 즐거움이 있다면서 좋아하셨지. 인터넷을 보시면서 새로 나오는 차의 종류나 기존의 차를 활용하여 만드는 티 종류들을 찾아보시고 직접 만들어 드시는 것을 즐기기도 하셨던 만큼 가리진 않으셨던 거 같아“
홍차에 대한 소녀의 아버지가 가진 생각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들어볼수록 차에 대한 생각이 깊으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분 밑에서 자란 만큼 이 소녀도 차를 좋아할 수밖에 없을 테지.
”이건 살짝 궁금한 건데 아버지께서는 영국인이랑 대화할 때 영어를 썼을까요 일본어를 썼을까요?“
”음 일본어일까 영어일까, 그건 안 물어봐서 잘 모르겠는데 아빠가 차 종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대부분 영어를 쓰긴 했었어. 홍차는 홍차라고 불렀지만“
”선배 이름 있잖아요, 홍차랑 관련 있는 이름이 맞죠?“
”응, 인제 와서 거짓말하는 것도 재미없으니깐“
가볍게 지금까지 생각해본 것들을 정리하고 확실한 답을 정하기 위해서 몇 가지 질문들을 던져보기로 했다. 이름의 후보가 될 수 있는 것들은 3~4가지 되는 데 선배의 아버지께서 새로운 트렌드에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만큼 선배가 태어난 01년도에도 촌스럽지 않은 이름으로 지으셨을 것이기에 제외할만한 이름들은 전부 제외하였다. 홍차홍같은 이름은 아무래도 여자애한테 붙여주면 평생의 원망을 들을만한 이름일테니깐 말이다.


”아버지께서는 홍차에 대해서 어느 분한테 배우셨을까요“
”아마 한국에 있을 때 홍차에 대해서 잘 아셨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아까 말했던 것처럼 영국인 친구하고 홍차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들었어“
대답을 듣고 나니 답이 명확해졌다. 오랜만에 하는 머리 쓰는 일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표정을 가다듬은 뒤 말을 이었다.
”선배, 뭔가 감히 잡힌 것 같아요“
”응?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했다고“
”그냥 홍차 하면 생각나는 이름이 하나 있어서요,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돌아가면서 이야기해 볼 테니 맞는지 아닌지만 알려주세요“
선배는 신기한 듯 쳐다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물론 계산은 지갑을 들고온 만큼 내가 했다. 선배는 다시금 미안하다 말하며 혀를 살짝 내밀어 보였는데 강아지도 아니고 실수한다고 혀를 내미는 사람이 현실에 있다는 것도 살짝 충격적이었다. 홍차와 케이크를 손에 든 채로 손목시계를 보니 7교시가 끝날 때까지 15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나는 앞머리가 눈을 가리는 거 같아 살짝 머리카락을 넘겼다. 어느새 우리는 발걸음의 속도를 맞춘 채 양옆으로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횡단보도의 불은 지금 마침 막 빨간색으로 변해있었다. 신호등의 검은 불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선배“
나지막히 소녀를 부르자 소녀는 귀 뒤로 머리를 살짝 넘기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까는 잘 몰랐는데 햇빛에 반사되어 보이는 머리카락의 색이 살짝 붉은 빛을 띠는 것 같았다.
”시현이죠 홍시현“
시내의 차들은 이른 퇴근 시간에 맞춰 엔진 소리를 울리며 빠르게 비어있는 도시의 소음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아롱거리는 아지랑이는 오늘따라 그렇게 어지럽진 않았다.


소녀의 초롱거리는 눈은 어느새 놀란 개구리처럼 변해있었다.
”어떻게 안 거야?“
나는 살짝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선배의 아버지께서 당연히 홍차와 관련된 이름을 하셨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맨 처음 말했던 것처럼 홍차 연처럼 가벼운 말장난이 아닐까 싶었어요. 하지만 선배가 해주시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수록 딸에게 차와 관련한 자신의 다양한 경험을 말씀해주시고 선배도 아버지를 존경스러워하시는 걸 보면 그렇게 이름을 가볍게 지을 분은 아니실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어느새 불은 다시 파란불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는 길을 건너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지, 우리 아버지는 카페 이름을 지을 때도 내 이름을 지을 때도 되게 고민 많이 하셨다고 했거든“
”그렇게 친다면 홍차가 가진 어떤 특성에 관해서 이야기하셨을 거 같았어요. 가장 힌트가 되었던 부분은 아버지께서 영국분들에게 홍차에 대해 배웠다는 점이었죠. 홍차는 한자로 붉을 홍（紅）에 차 차（茶）를 써요. 차의 한자가 다로도 발음된다는 점도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아버지께서 다홍 같은 이름을 지으실 거 같진 않으셨기에 많은 이름이 여기서 사라지죠“
어느새 500m 가까운 거리에 학교의 정문이 보였다. 일부러 교문 앞에서 설명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도시의 풍경에 젖어 너무 느긋해 있었다.


”아버지께서 영어로 차를 말씀하신 거 보면 아버지는 영어로 차 이름을 말하는 거를 더 즐기셨던 것 같아요. 영어로 홍차는 Black tea 번역하면 흑차죠. 홍차의 찻잎이 검은색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입장에서 홍차는 처음에 봤을 때는 검은 차였을 거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일본에 계시면서도 그리고 한국으로 와서도 블랙티를 홍차라고 부르니깐 아버님께서 생각하시는 블랙티는 홍차라는 이름으로 점점 변해갔을 거에요. 어쩌면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에도 홍차를 사랑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자식을 보면서 처음 홍차를 사랑하셨던 그때처럼 항상 자식을 아끼는 마음으로 처음 시（始）에 검을 현（玄）자를 넣어서 시현이라 짓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했어요“


소녀가 갑자기 나의 등을 3대 정도 치는 바람에 나는 방심하고 있던 차에 몸의 중심을 잃고 휘청거릴 뻔했다. 제 나잇대라고 볼 수 없는 호탕한 웃음과 함께 기특하다며 손을 가장 높게 뻗어 머리가 아닌 어깨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하찮아 보였다.
”맞아, 처음 시에 검을 현자를 써서 시현이야. 너도 초등학교 때 네 이름을 한자로 써 본 적이 있었지?“
”저학년 때 종종 그랬던 거 같아요“
”나도 초등학교 2학년 때 자기 이름의 한자를 알아오고 그 뜻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어서 아빠한테 물어보러 간 적이 있었어, 그때 처음에는 이름에 한자가 간단해서 좋다고 했는데 어린 마음에 생각해도 처음에는 검었다는 뜻이 이해가 안 돼서 아빠한테 무슨 의미냐 물어봤었거든“
선배는 동화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말이 이어나갈수록 혀가 꼬이고 발음이 뭉개지는 것처럼 들렸다. 어쩌면 살짝 울먹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빠가 말하기를 ‘아빠가 차에 대해 들었을 때에는 홍차가 아니라 검은 차였어, 근데 거리에 나가니까 사람들이 다 빨간 차라고 부르더라고 소방차처럼 그치? 시현이 이름은 아빠가 홍차를 배우면서 처음 깨달았던 점을 적어뒀던 거야. 아빠가 좋아하는 홍차만큼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시현이를 처음 만나고 깨달았던 점들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라고 하시더라고“
”홍차를 사랑하시는 만큼 자식을 사랑했다는 점이 역시 카페 사장님답네요“
소녀는 살짝 발을 앞으로 빼서는 내 앞으로 다가 온 뒤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뒤에 한마디를 붙이셨어, ‘아빠는 붉은 색이든 검은색이든 언제나 여러 곳에서 사랑받는 홍차처럼 시현이가 항상 사랑받는 존재였으면 좋겠네’ 라고“


어느새 우리는 교문을 지나 우리가 처음 만났던 도서실 옆 교실에 서 있었다. 선배는 치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교실은 다목적실인 만큼 창고처럼 기다란 책상 몇 개가 늘어져 있었고 교실 앞쪽에는 기다란 책상에 컴퓨터가 한 대와 커피포트가 놓여 있었으며 대학교에서나 쓸법한 큰 교탁이 있었다. 우리는 긴 책상 하나를 가운데에 둔 채 의자 두 개를 가지고 와서 마주 보고 앉았다.
”시현 선배, 그래서 저 도서부 면접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어차피 넌 합격이야. 우리는 해마다 사람이 부족해서 초기에 들어오는 애들은 이상한 애들만 아니면 대부분 받아주거든“
아무래도 많이 글러 먹은 곳인 것 같았다. 소녀는 봉투 속 케이크를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두고 커피포트에 홍차를 우려놓았다. 항상 장유유서를 지키는 한국인답게 포크를 소녀와 함께 포크를 들었지만 나는 소녀가 케이크를 먼저 먹고선 ‘음 맛있엉’ 하고 볼에 손을 가져다 대며 간식을 음미하는 걸 본 뒤에야 케이크를 살짝 포크로 갈라서 입에 넣었다. 폭신한 스펀지 케이크와 달콤한 생크림의 조화가 입안 가득히 퍼져 나가 수업시간에 몰래 학교를 탈출했던 나의 죄악감을 달달함으로 구원받는 기분이 들었다. 소녀는 도기로 된 찻잔을 양쪽에 둔 뒤 커피포트에서 홍차를 따라주었다. 두 손으로 차를 받자 ‘너무 예의 갖추는 건 불편해’ 라고 웃어 보이길래 아차 싶었다. 우리는 함께 차를 마시면서 도서부의 업무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첫 고등학교 입학 이래의 첫 사건은 이렇게 향기롭고 따스하게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