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인이 봄을 가지고 시를 쓴다면 대부분이 죽음의 계절을 견디고 피어나는 봄꽃들과 잠꼬대를 하는 벌레들이 어우러지는 평화로운 시간이라고 쓸 것이다. 그만큼 지금 보고 있는 오늘의 봄이란 계절은 한적함이 가득하여 몸이 살짝 늘어질 정도로 따스하고 행복함이 가득한 시간이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고등학생 1학년인 나는 한창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하고 있을 시간인 오후 4시에 지금 한 소녀의 손에 이끌려 일탈행위를 하는 중이다. 5분 전까지 도서부의 면접 준비의 일환으로 예상 질문들을 나열하보고 최대한 평범하면서도 통과하기에 충분한 소시민적인 답변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런 돌발상황은 머리가 쌔하애질 뿐만 아니라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나의 손을 이끌고 가는 이 소녀의 이름 조차 모른다. 나이는 도서부 일로 나를 끌고 온 만큼 최소 고등학교 2학년일 것이다. 얼핏 보면 동갑이나 중학생이라 말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작은 체구에 희고 가녀린 손 때문에 어린 사촌들에게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처럼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는데 자세히 볼수록 어째 제 나이로 보이는 구속은 하나도 없었다. 교복 셔츠 위에 껴입은 오버핏 후드티 때문인가 처음부터 작아 보인 키는 더욱이 작아 보였으며 둥근 얼굴에 큰 눈이라 꼭 애들 만화 속에서나 볼 법한 얼굴이었다. 소녀는 나 손목을 잡고 끌고 가다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나쁜 짓을 하는 초등학생처럼 웃어 보이며 손짓으로 여기를 보라며 나를 이끌었다. “지금 시간대에는 경비아저씨가 항상 담배 피우는 시간대라서 아무도 모르거든 나가려면 지금밖에 없어” 나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관리실을 보았다. 처음 학교에 올 때 졸린 듯 턱을 괴고 학생들을 쳐다보던 늙은 경비아저씨는 없고 창문만 살짝 열려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좌우를 살피며 지나가는 선생님들이 없나 잘 살핀 뒤 도둑질을 성공한 강도들처럼 종종걸음으로 학교를 빠져나갔다.

학교를 빠져나간 후 소녀는 머리에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고된 일을 해결했다는 표정을 취했다. 나는 당연히 나오기 전에 물어봤어야 하는 질문들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저희 어디 가는 건가요?”
“응? 홍차 사러 간다니까”
너무 당연하게 말하는 모습에 살짝 어이가 없었다. “지금 수업시간 아니에요?”
“수업시간이면 뭐 어때, 어차피 자습시간이라 할 것도 없고 뭔가 너는 자습 때도 책이나 읽고 있을 거 같은 얼굴인데 이렇게 밖에 나가는 것도 재밌을 거 같진 않아?
틀린 말은 아니어서 수긍할 뻔 했다. 지난주에도 나는 자습시간이라고 주어진 월요일 7교시에도 학기 초에 공부는 사치라고 생각하면서 시내 도서관에서 빌려 온 시집을 읽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지금 시간대에 홍차를 사러 나간다는 게 또 그 이유가 재밌을 거 같다는 이유는 쉽게 이해되는 설명은 아니었다.
”홍차라면 방과 후에라도 사러 갈 수 있잖아요“
”내가 당장 홍차가 먹고 싶다면?“
”참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못 참는다면? 홍차를 안 먹으면 내가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쓰러져버린다면!?“
쓸데없는 말로 이유를 대신하는 모습에 더 질문하기를 포기했다. 홍차를 사는 이유가 저렇다면 오히려 다른 궁금한 부분에 대하여 묻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저희 그래서 ‘홍차’를 사시러 어디로 가는 건가요“
”당연히 이마트지, 바로 앞에 있는데“
소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고는 바로 앞에 이마트로 먼저 들어가버렸다. 우리 고등학교는 전국에서 어느 고등학교와 견주어도 1등이라고 할만한 것이 바로 하나, 이마트가 가장 가까운 고등학교라는 점이다. 전국이 아니라 전 세계를 따져도 우리 학교만큼 가까운 곳은 없으리라, 신호를 2번 정도 건너면 바로 시내 이마트까지 갈 수 있다. 대충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다. 정말 열심히 뛰어간다면 점심시간에 이마트 음식 코너에서 밥도 먹고 나올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소녀를 따라 이마트로 들어갔다. 우리 집도 자주 이용하던 곳이라 내부는 그렇게 어색하진 않다. 어색한 건 오늘 처음 본 여자랑 이마트에 왔다는 점이겠지

교복 차림의 소년 소녀가 오후 4시부터 장을 보고 있다. 홍차를 사러 왔다면서 이 조그마한 소녀는 과일판매대에서 딸기가 맛있어 보인다며 입맛을 다시고 있다. 수업 시간을 쪼개서 온 주제에 이렇게 태평하게 딸기나 키위가 맛있어 보인다며 빈둥거려도 되는지 모르겠다. 딸기 한 상자를 들어 올려 보여주면서 나에게 신 난 듯이 질문했다.
”친구야, 이거 맛있어 보이지, 딸기는 홍차랑 어울릴까?“
”홍차면 딸기보단 제과점으로 가야 하지 않아요?“
”아 그건 맞는데 맛있어보이길래“
머쓱한 지 들고 있던 딸기를 내려놓고는 다시 베이커리 방향으로 향했다. 근데 홍차를 사러 왔다고 해놓고 홍차랑 같이 먹을 간식을 먼저 사러 간다는 점이 좀 그래서 어깨를 톡 두들기셨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어깨를 잡은 것처럼 확 놀란 모습을 하는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뭔데 너“
”끌려온 사람입니다“
”아니 그거 말고 무슨 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홍차 사러 간다면서요, 홍차만 사고 가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냥 같이 먹을 것도 사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홍차 사는 겸 같이 산다는 건가, 뭔가 주객전도의 상황 같지만 대충 이해하기로 했다. 고개를 살짝 젓고 알겠다고 대답한 후 같이 어울려주기로 했다. 제과점에 도착하니 소녀는 유리로 된 진열장 앞에 서서 어떤 케이크를 먹을지 심각한 고민에 빠진 듯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지’ 라 말하며 점원에게 딸기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를 하나 포장했다. 점원이 결제를 위해 카드를 주라 하자 소녀는 후드 주머니를 뒤지더니 갑자기 당황한 표정으로 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혹시 친구야, 돈 좀 있니?“
이건 누가 봐도 돈을 뜯는 말투다. 분명 이건 돈 뜯는 거다. 여기가 만약 이마트 내의 제과점이 아니라 오토바이가 돌아다니는 거리에 편의점 옆 골목이었다면 당장 눈을 깔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한심한 표정에 어린 애 같은 목소리 때문에 말투만 빼면 용돈을 바라는 동생들이랑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카드로 결제했다. 점원도 살짝 당황한 듯 보였지만 결제를 마치고 영수증을 받은 뒤 케이크가 든 봉투를 들고 제과점을 나갔다. 소녀는 미안한 듯 살짝 볼을 긁었다. 어째 선배랑 후배가 바뀐 기분이었다.
”돈은 나중에 계좌이체라도 해서 보내줄게“
”네 그러죠“
대충 끄덕이고 이번에는 이상한 곳으로 안 새도록 내가 먼저 앞장서서 커피와 차 코너로 향했다. 자주 온 만큼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도서관에서 책 제목만 듣고 책을 찾을 정도로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소녀는 어느새 다시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사람들에 따라 마트에서 음식들만 둘러봐도 신 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같았는데 이 사람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 중 하나인가 싶었다.
”친구야, 그건 그렇고 혹시 이름이 뭐야?“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아까 물어봤어야 하는 질문 중 하나가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름도 모른 채, 나이도 모른 채 우리는 지금 이마트 동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색한 기운 없이 하고 있었다는 점에 나는 스스로에 대한 놀라움과 나를 이 상황으로 끌고 온 이 소녀에 대한 놀라움이 교차했다.
”1학년 3반 김정입니다.“
”이름이 김정?“
”성이 김이고 이름이 정이요“
”오 외자 이름이다!“
그렇게 신기하게 느낄만한 이름인가 싶었다. 내 이름은 김정으로 외자 이름이다. 만드신 분 말로는 이름이 신기해야 나중에 사람들이 쉽게 기억해준다면서 외자로 정했다는 데 내가 생각하기엔 차라리 나만을 위한 신기한 뜻을 지닌 한자 이름 같은 걸 지어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미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름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신기해할 건 아니잖아요, 선배 이름은 뭔가요?“
소녀는 또 아까 학교를 탈출할 때 짓던 장난기 가득한 짓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밀이랄까 아니 한번 맞춰보는 건 어때? 추리소설 읽어봤지 그런 거처럼“
”애초에 추리소설이랑 이름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뭐 추리소설 많이 읽어봤으면 기본적인 눈치는 있을 거 같아서“
아무리 추리소설을 읽는다 한들 한낮 독자가 추리소설의 주인공처럼 추리해서 답을 맞힌다는 거는 바보 같은 가정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동글동글한 소녀와 한 대화의 대다수가 어이없었다는 점을 깨달은 나는 그냥 이번에도 어울려보기로 했다.
”어쩔 수 없죠. 뭐 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