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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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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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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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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구조된 건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뒤였다. 그때 그를 구조한 구조대원의 말에 따르면 그는 완전 술에 취해서 정신도 재대로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한다.（실제로 그는 구조 당시의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처음 봤던 건 병원의 흰 천장과 그를 내려다보는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자신이 어디 있는지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다. 어쩌면 난 아직 크루즈선에 있는 게 아닐까. 은연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그가 퇴원을 하고 얼마 뒤, 크루즈선 회사의 관계자가 그를 찾아와 사건의 진상규명을 물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그대로를 말해줬다. 선체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구멍으로 엄청난 양의 물이 빨려 들어가고, 배는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나는 그때 배의 밖으로 튕겨져 나가 있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생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다.
“당신을 재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의 생존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진상규명 담당자는 침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야말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어요.”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선장의 방송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아무런 문제없을 겁니다. 안심하고 여행을 즐기십시오...
“혹시 어떤 경위를 통해 그런 폭발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시나요?” 진상규명 담당자가 절실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는 모른다고 답했다. 안타깝지만, 그는 그런 방면에서는 아는 게 없었다.
진상규명 담당자가 느릿한 발걸음으로 그의 집을 빠져나간 뒤, 그는 한동안 캐롤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녀와 함께 대화를 나눴던 크루즈의 작은 칵테일 바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을 캐롤이라 불러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나를 캐롤이라고 불러줘.” 그녀는 꼬았던 다리를 풀며 말했다. “언제까지고 ‘너’ 나 ‘당신’ 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알겠어, 라고 그는 답했다.
*
아직도 가끔 그때의 꿈을 꾼다. 그곳에서 그는 양 팔을 튜브 밖으로 꺼내놓은 체, 멍하니 바다의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달빛이 은은하게 바다 위를 비추고, 그에 호응하듯 튜브 밑에서 작은 물고기들이 그의 몸을 훓고 지나간다. 그 감각은 꿈이라기엔 너무 사실적이고 아찔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현실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런 게 꿈일리가 없잖아. 머리를 가로지르며 꿈 속에서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은 분명 현실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 일단 맥주캔이 존재하지 않았다. 양 손으로 눈을 비비고 바다 위를 한참이나 들여다봐도 알루미늄 맥주캔은 보이지 않았다. 플라스틱 조각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는 그저 그와 달빛, 달빛을 반사하는 바다, 그리고 잔잔한 파도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는 그 사실에 얼마간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기에 잔잔한 파도에 온전히 자신의 몸을 맡겼다. 어디로 도착하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건 어차피 지평선뿐이다. 어디로 가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북쪽의 지평선이든 남쪽의 지평선이든 마찬가지였다. 어느 곳에서도 그는 여전히 혼자일 테고, 달빛을 반사하는 바다와 잔잔한 파도가 천천히 움직이며 그를 움직일 것이다. 맥주캔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게 수영을 배워두면 좋았잖아." 그녀가 말했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솔직히 후회하고 있어." 그는 정면을 바라보며 답했다.
"정말로?"
"사실은, 아니."
"그럴 줄 알았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녀의 말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도 스스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나저나." 그가 물었다. "넌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난 네 뒤에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앞의 말을 반복했다.
"난 네 뒤에 있어. 더 다른 말이 필요해?"
"아니" 그는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다.
*
그런 꿈을 꾸고 난 뒤면, 그는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했다. 시계는 항상 새벽 두시 사이와 세시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보면 언제나 새까만 새벽의 밤하늘이 보였다. 달이나 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그렇게 얼마간 침대 위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그녀의 왼손이었다.（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늘 그녀의 왼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런 뒤 다른 부분이 순차적으로 그의 머릿속을 채워나갔다. 귀 뒤를 덮는 검은 단발의 머리카락, 짙은 갈색의 눈, 오른쪽이 조금 위로 올라간 입 꼬리, 큰 소리로 주변을 가득 채우던 목소리. 하지만 그녀의 전체적인 얼굴만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부분 부분 조각을 교묘하게 끼워 억지로 얼굴을 완성 해봐도 결국은 전혀 다른 얼굴이 만들어졌다. 짝이 맞지 않는 펴즐을 우격다짐으로 틀에 쑤셔 넣은 것처럼.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밤, 그는 머리를 흔들며 사실을 부정했다. 그럴리가 없잖아.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는 우선 그녀와 함께 나눴던 무인도에서의 밤을 떠올렸다. 그녀와 함께 주고받았던 대화들을 머릿속으로 되감았다. 그녀는 그보다 삼일 먼저 섬에 도착했다. 친구는 죽었지만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녀의 가슴 속의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아마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는 상처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아무리 머릿속으로 되감아도 그녀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고, 그 사실은 그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내 완전히 방전된 머리를 한 손으로 받치고, 천천히 침대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잠을 청했다.
당연히 잠은 오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자신이 그녀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고지대의 어느 작은 술집에서였다. 그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반면에 그는 조금 변했다. 살이 조금 붙었고, 키가 2cm정도 더 컸다. 성인이 되어서도 키가 클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지나 신발을 새로 살 필요는 없었다. 2cm의 변화는 겨우 그정도의 변화였다.
먼저 말을 걸어온 건 그녀였다. 그녀는 바켄더와 대화를 나누는 그를 알아보고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왼손에는 가득 차있는 500cc 맥주잔이 들려있었다.
"이런데서 다 만나네."
"그러게." 그는 조금 벙 찐 목소리로 말했다.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어."
"정말로?" 그녀가 물었다.
"정말로. 이번엔 거짓말이 아니야."
"신기하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여전히 변함없는 청명한 웃음소리였다.
"여기는 무슨 일로 왔어?" 그가 물었다.
"그냥, 업무 마치고 온 거야."
"무슨 일을 하는데?"
"들어도 웃지 않을 자신 있어?" 그녀가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스튜어디스. 아랍권 항공사에서 일하고 있어. 기숙사가 여기서 오 분 거리에 있거든. 덕분에 할 일이 없으면 이 술집에 오곤 해."
"음......" 그는 머리를 숙여 그녀가 스튜어디스 일을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손님을 자리까지 안내하고, 자신의 허리까지 오는 카트를 끌며 음식이나 음료를 배달하고,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랜다. 그리고 얼마간의 짐을 비행기의 찬장으로 올린다. 왼손의 손가락이 하나 없는 것 정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문제가 된다고 해도 그녀는 별 생각을 하지 않고 넘어갈 것이다.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왼손을 털어버리면서.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넌 무슨 일을 하고 있어?" 그녀가 물었다.
"글을 쓰고 있어." 그가 답했다.
"신문이나 칼럼 같은?"
"아니, 소설."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아." 그녀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농담하는 거지?"
"놀랍게도 농담이 아니야. 책도 몇 권 냈는걸."
"정말? 제목이 뭐야?"
"가르쳐 줄 수 없어."
"왜?"
"남에게 보여줄만큼 자랑스러운 글 솜시는 아니라서 말이야."
"으음......" 그녀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다 이내 말을 이어갔다. "넌 하나도 달라진 게 없구나."
"난 내가 꽤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넌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 그때 그대로야."
"너도 거의 달라지지 않았어."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어쩌면 우리는 그날 이후로 전혀 성장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녀가 말했다.
"벌써 5년이나 지났는데도 말이야."
"정말 슬픈 일이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아 여러 가지 잡담을 나눴다. 지나온 일들과 앞으로의 미래, 취미, 직장생활, 텔레비전 프로그램, 그리고 지난밤에 꾼 꿈에 대해서. 그는 자신의 꿈에 자주 그녀가 나온다고 말했다.
"연결이 끊긴 부표처럼 외롭게 바다 위를 유영하고 있는 나에게, 네가 말을 걸어줘. 그리고 난 널 보기위해 몸을 돌려." 그는 손톱 끝으로 테이블의 끝을 두드리며 말했다. "하지만 너의 얼굴을 보지는 못해. 그 전에 잠이 깨버리거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으음' 거리며 턱을 괴고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에서 깨어난 뒤, 한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봐. 현실의 공기를 몸속에 집어넣으려고 애쓰면서. 그럼 두뇌는 몽롱한 잠에서 깨어나 현실의 사물들을 인식하고 현실적인 생각을 만들어내지. 하지만 그래도 너의 얼굴만큼은 결국 떠오르지 않아. 두꺼운 기름 종이가 넓은 막을 치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도 용케 알아봤네."
"부분 부분은 기억하거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살짝 웃더니 잠깐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 끝으로 눈 가장자리를 눌렀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조금은.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어째서?"
"사람은 누구나 작은 잘못들을 하고 있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맥주잔의 가장자리를 왼손 끝으로 매만졌다. 그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널 다시 만나 정말 다행이야." 그가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정말로, 농담이 아니야."
"알고 있어." 그녀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그정도는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아."
많이 모자란 이야기지만 잃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보니 모자란 점이 많이 보이지만（또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름 소중하게 간직하던 야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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